오늘 미사는 요셉 성인을 기리는 축일로 지냅니다. 그런데 앞의 수식어가 길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한국 교회의 공동 수호자’ 그리고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배필’ 그리고 ‘거룩하다는 뜻의 성(聖)’
리지외의 데레사 성녀와 같이 자신의 삶을 표현해 주는 ‘소화(小花)’라는 수식어가 붙든지 아니면 요셉 성인의 고향인 ‘나자렛’이 붙던지 해야 하는데, 자신이 아닌 ‘다른 이의 누구’라는 표현만 가득합니다. 그리고 교회는 그렇게 다른 이의 누군가로 사는 삶이 ‘거룩함’이라고 말해주는 것만 같습니다.
주연(主演)이 아니라 그 주연을 위한 조연(助演)이나 그 밖의 역할을 하는 사람으로 산다는 것이 결코 쉽고 마음 내키는 일은 아닐 것입니다. 그런데 교회는 역설적이게도 그것이 덕행이요 거룩함이라고 말하고 있으니 여간 거북한 게 아닙니다.
‘왜 그런 생각이 내 마음에서 일어났을까?’ 이 물음에 잠시 머물러 보았습니다. 주인공이 되고 으뜸이 되고 최상위의 자리에 있고 싶은 욕망. 그것은 태초에 아담과 하와가 지녔던 그 욕망과 다름이 없습니다. 그 욕망은 하느님의 자리, 하느님의 역할에까지 이르게 됩니다. 그리고 거기서 불순명이 나오고, 핑계와 갈등이 나오고, 부끄러움이 나오고, 마지막으로 죽음이 나왔습니다. 그러한 성향은 그의 후손에게까지도 이어져 결국 형은 동생 아벨을 죽이고, 인간은 하늘까지 닿는 탑을 세우려다가 무너지고 서로 갈라지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그 엄청난 욕망을 하느님을 사랑하는 갈망으로 바꾼다면? 바로 그 모습이 요셉 성인의 삶이 아닐까 싶습니다. 모든 것 위에 하느님을 사랑하고자 하는 갈망! 하느님의 뜻을 받들고 그분이 기뻐하시는 일을 하는 것으로 그 갈망을 채우고자 할 때 그것은 ‘거룩한 의로움’이 됩니다.
지금 우리 내면에서 일고 있는 이기심과 경쟁을 멈추고 남편은 아내를 위한 사람으로, 아내는 남편을 위한 사람으로 사는 것! 같은 방식으로 너에게 작은 도움과 위로, 힘과 용기가 되고자 하는 수고와 뜻이 요셉성인이 이룬 거룩함입니다. 그 거룩함을 우리는 존중, 배려, 협력, 우정이라고 표현하고 그것으로 서로를 완성해줍니다.
하느님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와 함께 계시게 하는 놀라운 일들은 그렇게 오늘날에도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성모 마리아와 같이 홀로 다할 수 없었던 무거운 직무를 맡고 있는 사람도 요셉 성인과 같은 이의 거룩함에 힘입어 그 직무를 수행하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처한 현실을 봅니다. 이기적인 욕망이 만들어 내는 불안, 갈등, 불편들이 이 현실을 채우고 있습니다. 그런 현실은 분명 우리가 바라는 현실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어느 때보다도 우리 가정과 본당, 세상과 교회에 요셉성인과 같은 ‘너를 위한 나’로서 사는 거룩함이 필요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