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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백산맥선 지연작전(1950. 7.14~31)
제 1 절 작전개요
1. 개 요
소백산맥 지연전은 7월 14일 이후 국군 2개 군단 5개 사단(수도사, 제1,제2,제6,제8사단)이 소백산맥을 중심으로 방어선을 형성하여 기계화 부대로 증강된 북한군 제2군단 예하 5개 사단(제1,제8,제12,제13,제15사단)과 제1군단 예하 1개 사단(제2사단) 등 6개 사단의 공격을 17일간 방어하여 국군과 유엔군의 낙동강 방어선을 형성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 작전이다.
북한군은 파죽지세로 밀어붙이던 기동력이 저하되자 김일성이 직접 수안보(?)에 나타나 정면 승부만이 아닌 대담하게 산길이나 산등성이를 따라 우회 기동하여 적의 측면과 후방으로부터 타격을 가하라고 강조한다
.
이에 김책은 전선사령부를 수안보로 옮기고 7월 21일부터 총공세를 개시했다. 북한군은 제15사단을 미원-상주 방면에, 제1사단과 제13사단을 문경-함창 방면에, 제8사단과 제12사단을 풍기-안동 방면에 그리고 제1군단의 제2사단을 청주-보은 방면에 투입하여 소백산맥 줄기의 동남부지역에서 국군을 포위 섬멸하고 대구 방향으로 신속히 진출하고자 했다.
북한군의 공격을 맞아 미8군사령관 워커 중장은 영동-함창-안동-영덕선에서 북한군을 저지하되 부득이한 경우 낙동강선으로 철수한다는 개념에 따라 7월 19일 미 제1기병사단이 영동에, 미 제25사단이 상주 정면에, 미 제24사단은 예비로하고, 국군은 수도사단과 제1사단이 고은-미원-화령장-함창 부근에서, 제6사단이 문경-점촌 부근에서, 제8사단이 풍기-안동 부근에서 방어하고, 동해안에는 국군 제3-23연대가 동해안을 따라 남진하는 북한군 제5사단과 제766부대를 저지하는데 주력하고 있었다.
2. 북한군과 국군 상황
가. 북한군 상황
국군이 담당한 소백산맥 지역의 정면에는 북한군 제2군단(중장 김무정) 예하 제1.8.12.13.15사단과 제1군단(중장 김웅) 예하 제2사단이 투입 되었다.
제1사단(소장 최광)은 의용군 병력이 30% 수준에 비무장 병력도 15%로 8,000명 수준이며, 주요 장비로는 76밀리 자주포 12문, 122밀리 곡사포 7문, 76밀리 곡사포 21문, 45밀리 대전차포 43문, 120밀리 박격포 40문, 82밀리 박격포 80문 등이다.
제2사단(소장 최현)은 춘천.이천에서 40% 손실을 입고 의용군으로 보충 10,000명 수준이며, 주요 장비로는 76밀리 자주포 12문, 122밀리 곡사포 26문, 76밀리 곡사포 13문, 45밀리 대전차포 43문, 120밀리 박격포 12문 등이다.
제8사단(소장 오백룡)은 7월 초 강릉에서 제1경비여단을 기간으로 하여 증편된 사단으로 10,000명 수준이다. 주요 122밀리 곡사포 12문, 76밀리 곡사포 21문, 45밀리 대전차포 42문, 82밀리 박격포 36문, 120밀리 박격포 12문 등이다
제12사단((소장 최충국)은 10,000명 수준이다. 주요 장비로는 76밀리 자주포 16문, 122밀리 곡사포 12문, 76밀리 곡사포 24문, 45밀리 대전차포 48문, 37밀리대전차포 12문, 120밀리 박격포 20문 등이다
제13사단(소장 최용진)은 예천지구전투부터 참여하며 11,000명 수준이다.주요 장비로는 122밀리 곡사포 8문, 76밀리 곡사포 30문, 45밀리 대전차포 41문 등이다
제15사단(소장 박성철)은 9,000명 수준이며, 주요 장비로는 122밀리 곡사포 12문, 76밀리 곡사포 8문, 120밀리 박격포 12문, 82밀리 박격포 및 61밀리 박격포 59문, 76밀리 자주포 4문, 45밀리대전차포 24문외에 자동차 15대와 마필 60두를 보유하였다.
나. 국군 상황
소백산맥선 지연작전 상황도(1)
적1사
조령
이화령 국6사
적15사 문경 국6사
적15-50연
적15사(-) 국6사
미원
국1사 적13사
청주 적2사 국6사
고은 수도사 국1사 함창
국2군단/1/6사
보은 수도사(집결 후 안동 이동) 화령장
국17연:25일 상주경유 예천 이동
국1사: 25일 상주경유 함창 이동
소백산맥선 지연작전 상황도(2)
죽령
적12사 국8-21연
풍기
국8-10연
영주 국8사
국8사
적 ? 국8-21연 국8-16연(8사로 예속전환)
옹천 국8사
국8-10연
예천 적8사
국10연 국21연
국16연
적?
연풍 국1연
7.28 급편방어진지 편성
안동 국1군단, 국8사, 수도사
낙동강
낙동강 국21연 국10연
국16연
국수도-1연
7월초 제1군단(김홍일 소장, (수도.제1.제2) 창설에 이어 제2군단(김백일 준장, 7.20부로 유재흥 준장 ,제6.제8)을 7월 12일 함창에서 창설하였다.
수도사단(준장 김석원)은 7월 10일까지 진천 남쪽에서 북한군 제2사단의 공격을 저지한 후에 청주 남쪽 국사봉-매봉선으로 철수하여 제8(이현진 중령). 제1(이희권중령). 제18연대(임충식중령) 순으로 방어진지를 편성하고 제17연대(김희준중령)를 배속 받았다.병력은 6,700명 수준이고 105mm 4문을 보유하였다.
제1사단(백선엽 준장, 7.25일부)은 7월 12일까지 음성-괴산 부근 전투를 종결하고 13일 미원지구로 이동해 제11연대(촤경록대령, 7.14부권동찬중령.7.26부 김동빈중령) .12연대(김점곤 중령.7.26부 박기병대령).13연대(최영희대령)로 병력은 5,600명 수준이고 105mm 4문을 보유하고 북한군 제15사단과 대치중이다.
제6사단(대령 김종오)은 7월 9일 수안보에서 보은으로 이동했다가 10일 문경으로 이동하라는 명령에 7월 12일 제2연대(함병선대령)를 이화령에, 제19연대(민병권대령)를 조령에, 제7연대(임부택대령)를 사단 예비로 6,500명에 공병대대, 제16포병대대(7.17부로 제3포병대대와 교체)가 배속 되어 북한군 제1사단과 대치한다.
제8사단(대령 이성가)은 7월 12일 단양 전투를 종료하고 죽령을 넘어 풍기로 철수한 후5번도로 를 중심으로 제10연대(고근홍중령).제21연대(김용배중령). 제18포병대대(장경석소령), 공병대대를 보유하고 6,000명의 병력으로 북한군 제12사단의 진출을 기다라고 있었다.
제2사단(대령 이한림)은 7월 21부해체되며 제5연대(,김동빈중령.1개 대대 수준)는 7.25일부로 제1사단 11연대에 편입되고, 제16연대(김동수중령)는 제8사단에 편입(7.21일부)되며 제20연대(박기병대령.1개 대대 수준)는 7.26일부로 제1사단 12연대에 편입된다.
제 2 절 미원-함창 전투
1. 전투 개요
미원-함창 전투는 국군 제1군단 예하 수도사단, 제1사단, 제2사단 및 그 배속 부대가 상주 방면으로 남진하는 북한군 제1군단 예하 제2사단과 제2군단 예하 제15사단에 맞서 7월 14일부터 7월 31일까지 미원,고은,화령장,함창 일대에서 치른 방어전투다.
국군 제1군단은 7월 13일 청주-괴산 선에서 철수하여 제1사단이 미원 북방에 수도사단(제17연대 배속)과 제2사단이 고은리와 문의 일대에서 각각 방어준비를 갖추었다.
반면 북한군은 제1군단 예하 제2사단이 청주 점령 후 옥천 방향으로, 제2군단 예하 제15사단이 괴산 점령 후에 상주 방면으로 진출하려 했다.
고은리의 수도사단과 제2사단은 14일부터 북한군 제2사단과 격전을 치렀다. 16일 미군의 금강 방어선이 무너지는 상황이 되자 제1군단은 각각 회인과 보은으로 철수시킨다.
이 무렵 제1사단은 1개 연대가 괴산 방면에서 북한군 제15사단과 거리고개에서 전투를 하고 주력은 미원 일대에 배치 된다. 북한군 제15사단은 여기서 주력부대를 속리산 동쪽으로 산간지역으로 진출시킨다. 이때 문경 부근의 제6사단을 지원하기 위해 제17연대가 보은에서 상주로 이동 중에 화령장에서 적의 대부대 기동을 탐지해, 매복 공격을 시도해 대성공을 거두며 이에 따라 춘양으로 가려던 제1사단을 화령장에 투입한다.
제1사단은 22일 화령장에서 북한군 제15사단과 공방전을 벌이고 25일에 미 제25사단 제24연대에 작전지역을 인계하고 소속이 제2군단으로 변경되어 함창으로 이동하였다. 제1사단은 8월 1일 낙동강 방어선으로 철수할 때까지 제6사단과 협조하여 함창지구 전투를 수행한다.
이에 앞서 7월 20일에 보은에 집결 중이던 수도사단이 전선 조정에 따라 안동으로 이동하였으며, 제2사단이 회인에서 황간으로 철수하였다가 7월 21일 부로 해체되어 제16연대가 제8사단에, 제5연대와 제20연대가 제1사단에 각각 편입 되었다.
2. .전투 경과
가. 미원 전투
(1) 국군 제1사단의 미원지구 전개
국군 제1사단은 7월 12일 03시경, 제11연대의 신기리-가장동선 철수를 계기로 음성지구 전투를 종료하고, 12시경 사령부를 미원에 개설한다.
당시 국군 제1사단은, 제11연대가 괴산에서 철수하여 14일에 추정리-이목리 선에, 제12연대는 7월 15일부로 용곡리 일대에 배치하였다. 제13연대는 양 연대의 철수를 엄호하기 위해 7월 12일 지경리를 경유해 13일 01시경 부흥링 일대에 배치된다.
이 기간에 사단은 제11연대장 최경록 대령과 작전참모 김덕준 소령이 수도사단으로 전출되고, 제11연대 부연대장 권동한 중령이 연대장 직무대리를, 제7사단 작전참모 문형태 중령이 작전참모로 보임되었다.
국군 제1사단이 미원일대에서 방어준비 중일 때에 북한군 제15사단 제50연대가 보은 방향으로 공격을 개시하여, 청안을 거쳐 7월 15일 -2시경 미원리로 향했다.
(2) 거리고개 공방전(거리고개-미원전투, 7.14~7.22)
제1사단은 음성-괴산선에서 7월 12일 03:00에 철수를 개시하여 14일에 부흥리 거리고개 일대에 제13연대에서 철수로를 엄호하는 가운데 11.12연대가 미원으로 들어온다.
북한군 제15사단은 1개 연대로 국군 제1사단을 따라 미원-보은으로 진출하고 사단 주력(제45.48연대)은 괴산-상주 방면으로 진출토록 명령을 부여 받았다.
7월 15일 청안을 점령한 북한군 제15-50연대는 16일 05:00경 부흥리 일대의 국군 제1-13연대를 공격한다. 하지만 국군의 조직적인 방어와 역습으로 한때는 거리고개를 다시 확보하기도 하며 군단의 명령으로 국사봉-517고지선에서 21일까지 임무를 수행하였다.
전날 16일, 거리고개 돌파에 실패한 북한군은 7월 17일 06시경에 전차 3대와 장갑차 12대를 앞세우고 거리고개 좌우측의 426고징돠 588고지를 우회공격 하기 시작했다. 이에 제13연대 제2대대의 제5중대가 북한군 전차와 장갑차를 저지하는데 투입되고, 제2대대(-)와 제1대대가 426고지와 588고지를 고수하였다.
그러나 계속되는 적의 정면 공격으로 제13연대는 진지를 고수하지 못하고, 사단장의 명에 의하여 운암리의 517고지로 철수를 한다. 제12.13연대가 철수를 하자, 18일 추정리의 제11연대를 창리로 철수시켜 국사봉 일대를 점령하였다. 그리고 19일에 접적이 없는 살티재의 제12연대를 10KM동쪽의 계원리로 이동시켜 소로로 침투하는 북한군의 공격에 대비토록 하였다.
7월 19일 아침, 군단에서 장갑차 2대가 도착하여, 사단은 미원으로 보내 대기 중에 북한군 전차 3대가 미원에 출현하여, 아군의 공격으로 1대가 파괴되고 전차병 4명이 사살되었다.
미원지구 전투 상황도('50.7.14~7.22)
적15-50연
부흥리
국13-3대대
426고지 거리고개 588고지
용곡리 425고지 국13-2대대
국13-3대대
국12연 신성리
국13-1대대
쌍이리
미원리 국1사
이목리 미동산
국12연
추정리 운암리 속리천
국13연 7.22 12:00 보은으로 철수 계원리
봉황리 국12연
국사봉 국11연 창리
7.21 20:00보은으로 철수
국12연 대안리
7.21 17:00 보은으로 철수
서지리 국12연
(3) 화령장으로 철수
7월 18일 국군 제1사단이 국사봉-5117고지선에 새로운 방어진지를 편성 후 21일까지 3일간 북한군은 정찰활동만 강화할 뿐 공격을 하지 않았다.
반면 북한군은 여기서 청주방면의 제2사단이 청주-옥천방향으로의 진출을 바꾸어 국군제1사단과 수도사단이 대전 방면으로 전환되지 못하도록 견제하고 제50연대 또한 제15사단 본대의 진출을 보장토록 상주방면으로 전환명령을 받게 된다.
이에 따라 적정이 미미한 가운데 제1사단은 20일 춘양으로 이동하라는 명령을 받고 보은을 거쳐 이동중 다시 화령장으로 이동명령이 수정되었다. 이유는 제17연대가 수도사단으로부터 배속이 해제되어 함창으로 이동 중에 화령장 근처에서 북한군 제15사단(-)의 선두부대를 두 차례공격하여 큰 타격을 입히자 육군은 국군 제2군단의 서측방 위협으로 간주하고 황급히 병력 투입을 지시한 것이며 화령장 일대에서 23일부터 전투를 재개한다.
나. 고은리 부근 전투
(1) 국군 수도사단의 국사봉-태봉선 진지 점령
청주 방면의 국군 수도사단(김석원 준장)은 7월 13일 북한군 제2사단의 공격을 받아 미호천 남안의 주저항선을 포기하고 국사봉(282m)-고은리-성무봉(431m) 선으로 물러났다. 사단의 좌측은 제2사단이 봉무산에 일대에 우측은 제1사단이 미원일대에서 각각 방어 중이었다.
북한군 제2사단은 13일 자정 청주를 점령한 후 14일 아침에 정찰활동을 실시하고, 오후부터 고은리와 부강리 방면으로 병력을 남하시켰다.
고은리부근 전투('50.7.14~16)
청주
적2사
백운동
관봉
평촌리 적?
효촌리
장암리
적? 431고지
적?
고치리 남일초등교 중봉 국18연
282고지 고은리 은행리 수도사
국사봉 국8연 국1연
국17-2대대
국17-3대대
14일부터 적의 공격이 계속 되고 성무봉은 제18연대에서 최초에는 병력을 배치 하지않고 있다 적에게 피탈되고난 후에 역습으로 되찾았다. 또한 국사봉 일대는 제8연대 제2대대(대대장 대위정승화)가 배속된 진주경비대대를 독려하면서 북한군의 공격을 저지하였다.
그러나 지원하는 전폭기가 오폭으로 제18연대는 많은 사상자가 발생하며, 군단은 대평리에서 미 제24사단과 임무 교대한 제17연대 제2대대를 보은에서 고은리 동쪽으로 배치시킨다.
한편 14일에는 전쟁 중에도 많은 인사이동이 진행되었다. 그 가운데 문제가 된, 오근장에서 통합되는 제1연대와 제9연대는 병력이 많았던 제9연대장인 윤춘근 대령이 사단참모가 되고 제1연대장 이희권 중령이 연대장에 보임되자 부대내에 다소간의 알력이 존재하게 되자, 이희권 연대장이 김석원 사단장에게 건의하여 이희권 중령이 군단으로 전출가고 다시 윤춘근 대령이 제1연대장에 보직된다.
(2) 효촌리-장암리 전투
7월 15일 06시부터 북한군 제2사단은 전날에 이어 제1연대와 제8연대 정면에 공격을 개시한다. 이때 보은에서 사단방면으로 이동중인 제17연대 제2대대가 도착하면서 북한군의 혀를 찌르는, 주간 대낮공격이 제17연대에 공격명령이 부여된다.
'50.7.15일 13시에 국군 제17연대는 제1연대와 제8연대를 초월공격, 제2대대(송호림 소령)는 우일선으로 효촌리를 점령하고 제3대대(오익경 소령)은 제8연대를 초월공격 장암리를 점령하라는 공격 명령이 내려졌다.
대낮의 공격으로, 제2대대 6중대가 남일초등학교부근 190고지를 점령하게 되자 북한군은 효촌리 방향으로 철수하게 되고, 제1연대가 이곳으로 진출하여 남일초등학교 일대를 점령한다.
한편, 장암리를 목표로 제17-3대대는 국사봉 동쪽 능선에 전개하여 13시에 공격을 개시하였다. 이 과정에 F-51전투기 2개 편대가 북한군을 공격하는 가운데 제3대대 진지까지 공격하여 대대보급소가 파괴되는 등 큰 피해가 발생하여 용평리까지 진출한 제3대대를 철수시켰다.
(3) 고은리-국사봉 전투
북한군 제2사단은 진천, 청주를 점령하고 대전 공격에 참가하려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국군 수도사단의 강력한 저항에 부딪쳐 7월 13일 오후 늦게 청주를 점령하게 되었다.
진격속도가 늦어지자 북한군 제2사단은 수대리, 고은리, 성무봉 등 3개 방향으로 동시 공격을 감행하였다. 성무봉 공격은 제18-1대대의 완강한 저항에 부딪쳐 실패하지만, 전차를 동반한 고은리 방면의 공격은 남일초등학교 부근까지 6대의 전차가 접근하지만 곧 출격한 F-51전폭기의 공격으로 1대가 파괴되고 5대는 북쪽으로 도주하였다.
오후에 전열을 정비한 북한군은 다시 190고지 방향으로 전차를 동반하여 공격을 재개 하였다. 제1연대 와 제17연대-2대대는 급편방어 중에 고은 삼거리 동쪽으로 우회시켜 170고지 배후를 공격함으로써 순식간에 지휘체계가 무너져 17시 30분 경에 170고지가 적에게 피탈된다.
이 무렵 사단 좌측의 국사봉(282m)의 제8연대도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었다. 이에 연대장 이현진 중령은 배속된 제17연대 제10중대를 역습부대로 투입하여 북한군이 점령한 방어선 전방의 무명고지를 야간공격을 감행하여 중대 규모의 북한군이 섬멸되었다. 기관총 9정과 소총 67정을 노획하여 연대로 후송하였다. 이 공격은 그동안 북한군이 받아본 적이 없는 국군의 기습작전이었다.
(4) 보은으로의 철수
국군 제1군단장 김홍일 소장은 7월 16일 아침에 북한군이 전 전선에서 공세를 취하자 후속조치를 취했다. 국군은 제1사단이 거리고개에서, 수도사단이 고은리에서, 제2사단이 봉무산에서 각각 북한군 공격을 저지했지만, 금강 남안에서 방어주인 군단 좌측방의 미 제24사단 제19연대가 대평리에서 부한군 제3사단의 도하공격을 저지하지 못하고유성쪽으로 철수함으로서 전선 조정이 불가피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국군 제1군단은 문의의 제2사단을 염티재-547고지 선으로 재배치하고, 수도사단을 보은으로 철수시켜 군단예비로 젖환시키고, 제17연대를 7월 16일 24시부로 제2군단에 배속하게 된다.
수도사단은 16일 19시경부터, 제1연대가 미원 방면으로 철수를 시작하고, 그 뒤를 제18연대가 철수한다. 그러나 적의 강요된 철수로 무질서하게 이루어졌으며, 엄호부대인 제17연대(-)는 분터골 일대에서 북한군을 저지하다 17일 10시경에 보은에 도착하였다.
한편 국사봉의 제8연대는 철수명령을 받지 못하여 17일 04시까지 진지를 고수하다, 늦게 철수명령을 받고 국사봉-작두산(430)-문의-회인을 거쳐 17일 오후에 교암초등학교(보은 서족 3km)에 도착하였다.
7월 14일부터 16일까지의 고은리부근 전투에서, 수도사단은 병력수준이 48%수준으로 낮아졌다. 이는 제1사단의 57%, 제2사단의 55% 보다 낮은 수준이다.
수도사단은 보은에서 2일간 부대정비를 실시한 후 제1연대가 함창으로, 제18연대가 예천으로, 제8연대가 사단사령부가 있는 안동으로 각각 이동한다.
다. 화령장 전투
(1) 국군 제17연대의 화령장 이동과 상달리 전투(국군 제17-1대대 전투)
상달리 전투('50.7.17)
괴산
덕가산 707m
화북서부출장소
밤치 997번도로
아랫늘치 용유리
화북면 내외면
내서면
갈령
적15-48연
산성리
장자동 동관리
봉황산 740m 하달리
적48-1개 대대
국17-3중
송계초등교
국17-1중
상곡리
국17-2중 343M 상달리
상봉리 화령초등교
국17연(-)
7.17일 21:00시 보은 출발, 7.18 02:00~03:00 화령장 도착
화령장은 경북 상주군 화서면에 위치한 작은 마을로 보은과 괴산에서 상주로 연결되는 교통의 중심지다. 북한군 제2군단은 음성-괴산-방면으로 남하한 제15사단으로 상주를 점령코자 하였다.
북한군 제15사단은 제45.제48. 제50연대로 편성되었으며 7월 10일 음성을 점령한 후 제50연대를 청안-미원을 경유해 보은으로 진출시키고, 그 주력은 괴산-상주로 방면으로 남하시켰다. 여기서 북한군은 제50연대에게 덕가산(괴산 동남방 16km)을 경유, 용유리(상주 서북방 22km)로 진격하라고 명령하여, 제50연대는 미원에서 국군 제1사단과 접촉을 피한 채 16일 20시부터 상주방면으로 우회 진출을 기도한다.
이 무렵 육군은 문경의 국군 제6사단의 방어력을 보강하기 위해 국군 제17연대를 제2군단에 배속시켰다. 이 명령에 국군 제17연대는 17일 06시까지 함창에 도착해야 했다.
제17연대 제1대대는 17일 04시에 차량으로 함창으로 출발했다. 차량행렬이 관기리를 지나는데 제1군단 작전참모 김종갑 대령이 뒤쫒아와 "적이 괴산에서 갈령으로 진출했으니 조심히 행군하라"는 주의사항을 전달하였다.
그런데 07시경 화령장을 지날 무렵에 주민 한명이 북한군이 상주쪽으로 내려갔다고 제보한다. 괴산-화령장-상주로 연결되는 977번 도로를 모르고 있던 제1대대는 처음에는 믿으려 하지 않았다. 그러나 제보자가 "엄봉림"이라 밝히고 화서지서에 신고하러 간다고해서 함께 제1대대장이 동행했다. 그 결과 제보자의 제보내용이 맞다는 결론에 도달했으며 , 이미 제1군단과 제2군단의 정보대가 이러한 사싥을 감지하여 상부에 보고까지 되었다.
제1대대장은 지역 청년단장 김기영의 안내로 상곡리로 향하여 정찰중에 상주방면에서 자전거를 타고 오는 북한군 전령 1명을 생포하여, 그 부대가 바로 북한군 제15-48연대 예하병력이라는 것과, 제48연대가 오후에 기동한다는것을 알게 되었다.
따라서 제17연대 제1대대장은 상주로 진출한 적 부대를 추격하지 않고, 적의 휴식예정지에서 매복하여 그들의 주력을 공격하기로 결심하고 연대에 보고하였다.
대대장의 예상대로 16시경 북한군 행군대열이 갈령계곡으로부터 나타나, 16일 삼송리에 도달해 17일 오후 전투행동을 개시한 북한군이 40여대의 우마차에 각종 포와 탄약을 실고 하송리의 송계초등교와 상곡리 일대에서 휴식에 들어갔다.
국군 제1대대는 19시 30분경 북한군의 식사시간대를 이용하여 기습적인 사격으로 적을 와해시키고, 적의 퇴각을 차단하기 위해 2개 중대를 북쪽의 977번(49번?)도로를 차단해 버렸다. 18일 국군 제17연대 주력이 화령장에 도착하고, 제1대대는 잔적소탕을 개시하여 17~18일 양일간에 북한군 250여 명 사살, 30여 명을 생포하였으며 박격포 20문, 대전차포 7문, 소총 1,200여정을 노획하였다.
(2) 국군 제17연대 동관리 전투
7월 18일 10시경 제17연대장은 격전지를 돌아본 후, 북한군의 후속부대가 있을 것으로 판단, 연대 정보주임에게 갈령 부근의 적정을 파악하도록 지시한다. 이에 연대 수색대는 12시 30분 경 자전거를 타고 갈령을 넘어오는 북한군 병사 2명을 생포하여 심문결과, 이들은 북한군 제15사단 소속으로 제48연대장에게 중간보고 독촉장과, 후속하는 제45연대장에게 김천방향 진출을 준비하라는 문서를 확보하였다.
제17연대는 전투준비를 완료하고 적을 기다리는데 적이 나타나질 않았다. 그러다 7월 21일 새벽녁에 제2대대지역에서 총성이 울리고 14시경 소탕작전이 종료되었다. 이 전투에서 제2대대는 북한군 356명을 사살하고 26명을 생포하였으며, 박격포 16문, 대전차포 2문, 기관총 53정, 소총 186정 등을 노획했다. 반면에 대대는 전사 4명, 부상 330명의 피해를 입었다.
전장정리가 끝나갈 무렵 갈령너머로부터 포사격이 시작되어, 제2대대는 북한군의 역습을 시도한 걸로 판단하여 봉황산 주능선의 우측으로 이동하여 진지를 편성한다.
동관리 전투('50.7.18~22)
괴산
덕가산 707m
화북서부출장소
밤치 997번도로
아랫늘치 용유리
화북면 내외면
내서면
갈령
적15-48연
산성리
장자동 동관 적의 행군대열
국17-3대대 국17-7중대 국17-5중대 국17-6중대
국17-2대대
봉황산 740m 하달리
적48-1개 대대
국17-3중
송계초등교
국17-1중
평온리 상곡리
국17-2중 343M 상달리
상봉리 화령초등교
국17연(-)
7.17일 21:00시 보은 출발, 7.18 02:00~03:00 화령장 도착
북한군 제15사단 예하 제45연대가 동관리에서 기습을 받고 큰 타격을 입자, 북한군은 동관리의 국17-2대대 지역에 포사격을 가하더니, 제3대대지역에도 무차별 포사격을 가하였다.
이시각에 국군 제1사단이 화령장에 투입하기 위해 도착하고 있고, 상주지역의 미 제25사단 제24연대의 제2대대대가 21일 20시경 평온리에 투입하게 된다.
북한군 제15사단은, 7월 22일 미명에 도관리 계곡을 포함한 582고지 일대에 포격을 집중하게 된다. 이때 미 제24연대를 지원하는 155밀리 포병중대도 582고지 북방을 향하여 포사격을 개시하여 582-봉황산 일대는 지축이 진동하였으며, 이로인해 국군도 제17연대 부대대장 강은덕 대위를 비롯하여 장교 3명과 사병 16명이 전사하고 20여 명이 부상하였다.
이 과정에서 평온리에서 582고지로 전진하던 미 제24-2대대는 북한군의 포격으로 피해가 속출하자 전쟁공포증에 걸린듯 공용화기와 개인화기를 버리고 무질서하게 철수하였다.
(3) 국군 제1사단의 갈령 부근 전투
갈령부근 전투('50.7.23~25)
내외면
형제봉 850m 내서면 갈동
갈령 871m 673m
적15사
746고지 적?
국12-1대대 산성리
장자동 동관리 국13-3대대
적?
봉황산 740m 하달리
국17연
예의리
국12-1대대 점마 송계초등교 585고지
평온리 국11연
상곡리
국17-2중 343M 상달리
상봉리 화령초등교
국12연 국1사 국13연(-)
봉촌리
(가) 제1사단의 화령장 전개와 하송리 전투
'50.7. 20일에 육본 명으로 춘양으로 이동하기 위해 보은에 집결한 제1사단은 화령장 위기 발생에 따라 목적지를 화령장으로 수정하였다. 7월 22일 07시에 제11연대가 먼저 화령장에 도착하고, 제12연대가 평온리에, 제13연대가 23일 08시까지 화령장 남쪽 2km지점의 봉촌리에 집결한다.
7월 22일 오전 화령장에 도착한 제1사단장 백인엽 대령은 미 제24연대장 화이트 대령으로부터 투입된 부대를 철수시켜 재편성할 계획이니 엄호해 달라는 요청을 받고, 제11연대 1개 대대를 송계초등학교 부근에 배치하고 나머지 병력은 상곡리로 이동시켰다. 이어서 제12연대 선두가 장자동 계곡에 투입되었다. 이리하여 이날 15시경 제11-1대대가 송계초등학교 부근에 제12-1대대가 582고지에 투입된다.
국군 제1사단은 갈령부근의 적을 격퇴하기로 하고 공격준비를 하였다. 제12연대를 좌, 제11연대를 우로 , 제13연대를 예비로 23일 09시에 공격, 묘막리-갈령-갈동 선을 점령하려 했다.
그러나 23일 08시경에 제11연대 지역에 1개 대대 규모의 적이 585고지에 나타나 연대 예비인 제2대대를 투입해 격퇴하였다.
이 과정에 적의 저항이 완강하여 공격부대인 제3대대와 제1대대가 참여하여 공격하고, 미 포병대대의 야포지원까지 받으며 결국 북한군을 585고지에서 밀어내고 , 제3대대는 계획된 진출선인 650고지를 점령하였다.
연대의 좌일선 제11연대 제2대대는 제17연대 제2대대의 지원하에 순조롭게 공격이 진행되다, 746고지 일대에서 지체되고, 우측 대대인 제13연대 3대대는 봉촌리에 집결 후 예의리로 들어가, 23시경 야강공격을 실시하여 530고지를 점령했다.
전날에 이어 24일에도 제11연대는 3개 대대가 04시경부터 공격을 재개하여 , 좌측의 제2대대는 특공대로 수류탄 공격을 감행하여 746고지를 점령한 후 계속공격하여 871고지를 점령한다. 그러나 우측의 제13-3대대가 673고지를 공격중에 적의 저항으로 진출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때 마침 미 제24연대와 진지교대가 있어, 24일 22시경 철수시키게 되었다.
(나) 장자동 전투
7월 22일 17시에 평온리에 도착한 제12연대는 제1대대를 장자동 일대에, 제2대대를 상용리에 집결시켰다. 원래 비무장 인원이많았던 제1대대는 진지 진입시 점마 부근에서 북한군의 포격으로 미군들이 허겁지겁 철수하면서 버리고 간 것들을 수집해서 전투력을 보강하였다.
이 무렵 북한군 제15사단은 개 대대 병력을 510-512고지 선에 배치하였다. 제12연대는 23일 09시에 공격을 개시하여 형제봉을 점령하라는 명령에 따라 공격을 개시하였지만 적의 저항으로 진출이 어렵게 되자, 일부 부대를 동관리로 우회시켜 남과 북에서 최종목교인 형제봉 탈환의 교두보가 될 685고지를 공격하여 점령하고, 계속하여 진출 하려 했으나 적의 완강한 저항에 685고지선에서 멈췄다.
(4) 국군 제1사단과 제17연대의 화령장 철수
국군 제1사단과 제17연대가 화령장 부근에서 북한군 제15사단과 교전을 벌이고 있던 7월 24일, 제1군단에서는 작전지역을 미 제25사단에 인계하고 제1사단은 안동으로 이동하라는 명령이 하달되었다.
그러다 명령이 바뀌어 제1사단은 미 제25사단에 진지를 인계하고 함창으로 이동하라는 명령이 주어졌다. 이는 문경-점촌간을 방어하고 있는 국군 제6사단이 북한군 제1사단의 강력한 압력을 받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에 제1사단은 육본 명에 의거 제2사단의 제5연대와 제20연대를 흡수 통합하여 부대재편을단행하기로 계획하였다. 이 계획에의거 먼저 예비인 제13연대가 25일 아침에 상주로 출발하고, 제11연대가 미군에게 진지를 인계하고 후속하며, 제12연대가 13시에 철수하여 상주로 이동하도록 하였다.
제1사단은 상주에서 제2사단의 제5연대와 제20연대를 흡수 통합하여 병력이 7,600명에 도달했으며, 비무장 병사들에게도 소총이 지급되었다.
한편 봉황산에 포진하여 국군 제1사단을 엄호하던 제17연대는 7월 25일 아침에 진지를 미군에 인계하고 상주를 거쳐 안동으로 이동한다.
이로써 7월 17~25일까지 전개된 화령장 전투는 국군의 대승으로 일단락 되었다. 여기서 북한군 제15사단은 2개 연대가 괴멸되는 참패를 당했다. 이와 더불어 소백산맥의험준한 지형을 뚫고 상주를 점령한 후 대구로 진출하려던 북한군 전선사령부의 계획은 좌절되었다. 이에 북한군은 사단장 박성철 소장을 면직하였으며 이후 낙동강선 전투에서 제대로 전투력을 발휘하지 못하였다.
이 전투에서 국군 제17연대는, 동락리 전투에서 국군 제6사단 제7연대가 전 장병이 1계급 특진했듯이,두번째로 전원 1계급 특지하는 영예를 안았다.
라. 함창 부근 전투
(1) 국군 제1사단의 함창 부근 전개
국군 제1사단은 상주에서 재편성을 마치고, 7월 26일 12시경 함창에 도착하여 국군 제6사단의 전면을 위협하는 북한군의 후방차단 임무를 수행하게 되었다.
상주에서 7월 25일 준장으로 진급한 제1사단장 백선엽 장군은, 제11연대를 금룡리, 제12연대를 막곡리로 이동시켜 공격준비를갖추도록 하고, 제13연대는 검안리에 전개하여 제2군단의 서측방을 방호하게 하였다.
7월 27일 06시에 국군 제1사단은 국군 제6사단의 우측으로 공격하기 위해, 제11연대를 우일선, 제12연대를 좌일선으로 하여 영강 동쪽에서 문경탈환을 목표로 공격하여 제12연대가 오정산(870m)을 거쳐 10시경에 오천리에 이르고, 제11연대가 부운령(692m, 금룡리북쪽 12km)을 거쳐 11시경 외어리(부운령 서쪽 4km)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때부터 적의 집중포격을 받아 진출이 지연되고 있었다.
이 무렵 국군 제6사단은 제1연대를 증원 받아 북한군을 조봉-작약산 선에서 저지하고 있었고, 미 제25사단 예하의 포병들이 점촌-함창간에 포진하여 공군과 함께 국군 제6사단을 화력증원하였다.
이에 북한군 제1사단은 국군 제6사단과 정면대결을 피한 채 석현리(문경 동남방 8km) 일대에서 방어로 전환하고, 대신 제13사단을 함창 서북쪽 농암리 방면으로 우회시켜 아군의 후방을 교란하고자 하였다.
이에 제2군단장 유재흥 준장은 제1사단으로 하여금 문경 공격을 중단하고,함창으로 철수하여 군단 서측방 방어를 명한다. 그러자 제1사단장은 제6사단장과 협의하여, 현재 적과 물려 있는 좌일선 제12연대는 그대로 놔두고(제6사단의 작전통제) 제6사단 제19연대의 1개 대대를 배속받기로 하여 군단의 승인을 받았다.
이로써 제1사단은 28일 06시부로 제2군단 서측방 동막리-366고지 간을 담당하게 되었다.
(2) 경들저수지 부근 전투
함창 부근 전투('50. 7.28~29)
어룡산
영강
국6사
작약산 적1사-1개연 유곡리
적? 점촌
428m
국13-3대대
366m 소암리 함창
국12연 국2군단 / 국1사
적13-21연 중촌리
적?
아천리 감바위
경들저수지 국12연
경들 국11연
적? 국사봉 국11연(-)
국11-2대대
7월 26일 15시경 함창에 도착한 제13연대는 제5연대(김동빈 중령)로부터 진지를 인수하였다. 그런데 27일 저녁 무렵에 가은리와 왕릉리 부근의지역 주민들이 몰려와 북한군이 마을에 집결해 있다고 전하였다. 연대 정찰대가 확인결과 장갑차를 동반한 적 1개 연대 규모가 주막동에서 아천리와 동쪽 도로를 따라 함창이나 상주로 이동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였다.
이에 제13연대는 예비로 있던 제3대대를 국사봉으로 추진하여 중소리-동막리 간의 이안천 도하지점을 봉쇄하게 하였다.
북한군은 28일 04시경에 2개 대대규모가 장갑차 4대를 동반하여 아천리의 감바우에 도달하였으며, 이를 제1대대가 기습하여 적은 30여구의 시체를 남기고 흩어졌다.
이들 분산된 병력중에 170여 명이 도로 남쪽 산으로 피신하여 경들마을로 숨어들었다. 이에 제2대대가 소탕작전을 벌여 15명을 생포하였다.
이보다 앞서 제13연대는 사단 명에 의해 이안천 이남의 진지와 국사봉의 제3대대를 제11연대에 인계하고, 366-212고지간에서 북한군을 격퇴시켰는데 이들 중 일부가 428고지를 점거하고 우인접의 제6사단 제2연대(함병선 대령)와의 간격으로 침투를 시도하게 되자 , 제13연대는 366고지의 제1대대를 428고지를 공격 하여 점령케 하고, 212고지의 제2대대를 366고지로 이동시켜 제6사단의 좌측바을 위협하는 북한군의 공격에 대비케 하였다.
북한군은 7월 29일 여명에 760고지(428고지 북서쪽 3km) 방면에서 대대적인 공격을 감행한다. 지금까지 3번 도로상에 중점을 두고 국군 제6사단 정면으로 공격해 오던 북한군 제1사단은 일부 병력을 760고지와 장암리(366고지 서쪽 5km) 쪽으로 우회시켜 북한군 제13사단 제21연대와 더불어 29일 05시에 428고지 서북쪽으로 공격한다.
428고지의 제13연대 제1대대는 7부 능선까지 진출한 북한군에게 대대화력만으로 강력한 저항을 하여, 결국 북한군은 100여 구의 시체만을 남기고 퇴각하였다. 이때 생포된 북한군 병사들은 대부분 점령지인 남한에서 강제 동원한 소년병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당시에 제1대대는 장교 3명과 사병 36명이 부상당했다.
428고지에서 제1대대가 격전을 벌이고 있을 무렵, 366고지의 제2대대도 4대의 장갑차를 앞세운 적 1개 연대 규모와 격전을 벌리게 되는데, 366고지와 경들저수지 구간의 500m 도로를 통과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였다. 제2대대는 북한군 장갑차를 최대한 유인하여 집중사격으로 3대를 파괴하였으며, 길에는 북한군 시체가 뒹굴고 경들 저수지에는 30여 구의 시체가 떠 있었다.
이 전투에서 제2대대는 7명이 포로를 생포하였는데 이들의 소속이 북한군 제1사단이라는 것과, 국군과의 정면충돌을 피하여 우회기동하고 있음을 확인하였다. 그러나 제2대대도 11명이 전사하고, 20여 명이 부상당하여 후송되었다.
한편 제12연대(박기병 대령)가 29일 04시경 경들저수지 동쪽의 212고지 일대로 진출한다. 제12연대는 26일 제2사단의 제20연와 통합(실병력 1개 대대 규모)하여, 한강 북방에서 철수한 후 비로소 3개 대대로 편성하였으며, 28일 20시부로 제6사단에서 배속 해제되어 23시경 소암리에서 부대정비를 하고 이곳에 배치되었다.
(3) 국사봉 전투
사단의 좌일선인 제11연대가 28일 06시경에 국사봉을 점령했을 때에 안개가 자욱한 상태에서 작전 통제된 제13연대 제3대대가 이안천을 도하하여 예주리(국사봉 북쪽 1km)로 침입하려는 북한군과 교전하게 된다.
이에 제11연대장 김동빈 중령은 제19연대 제2대대로 제13연대 제3대대를 지원하도록 하고, 제1대대를 국사봉 북쪽에 제3대대를 그 남쪽에 배치하였다.
제11연대는 7월 26일 제5연대와 통합한 부대로 당시 제5연대장이던 김동빈 중령이 연대장이 되었다. 제5연대는 제2사단 소속으로 진천.청주.문의 지구에서 전투를 치르는 동안에 많은 사상자와 이탈자가 생겨서 함창에 도착했을 대는 2개 중대 규모였다. 제5연대는 문의지구전투 후에 안동으로 이동하였는데 육본 명으로 다시 함창으로 이동하여 제1사단의 지휘통제를 받으라는 명령에 함창으로 진출하였다. 그러나 당시에 제1사단이 화령장전투에서 이동하지 않은 상태였으며, 이에 제2군단장 유재흥 준장이 옥녀봉(가은읍 왕릉리 542m)을 공격하라 명령한다. 그러나 이미 북한군이 조봉-작약산선까지 진출하여, 이동 중에 다시 함창으로 복귀하여 제11연대와 통합된다.
제13연대 제3대대가 국사봉을 점령한 것은 28일 04시경이었다. 그리고 1시간 경과 싯점에 북한군 중대 규모가 이안천변을 도하하여 예주리 방향으로 향하는 것을 발견하여 기습사격(제19연대 제2대대도 가담)하여 무력화시키자, 중소리에서 도하 준비중이던 북한군은 도하를 중지하고 대응사격만 하였다. 날이 밝아 확인결과 북한군은 50여구의 시체만 강변에 남기고 사라졌다.
함창 부근 전투('50. 7.28~29)
작약산 774m
영강
국6사
작약산 적1사-1개연 유곡리
적? 점촌
국13-3대대
428m 소암리 함창
국12연 국2군단 / 국1사
적13-21연 366m 중촌리
이안천 아천리 감바위 이안천
경들저수지 국12연
경들저수지 이안천 국11연
봉중리 지평리
은척산 632m 예주리
(소파우봉) 이안천
적? 국사봉 국11연(-), 7.28 04시 13-3대대 점령
이안천 이안천
하흘리 국11-2대대 중소리 동막리
이안천
이안천
그 후에 제11연대장은 부대를 지평리-동막리 간에 전개시키고, 봉중리-하흘리로 도하하는 적을 식별하여 함창에 있던 제2대대를 투입하여 적을 격퇴하였다.
'50.7.29일에는 지평리 서쪽으로, 경들저수지 북쪽(428-366고지)에서 국군 제12, 제13연대에 패하였던 적의 일부가 식별되었으며, 이에 제11연대장은 적의 패잔병으로 판단하고 즉시 소탕하게 한다. 이에 제2,3대대가 예주리에서 이안천을 도하해 봉중리에서 아침 식사중인 300여 명의 북한군을 추격하게 되는데, 이들은 은척산으로 은거하여 재편성하며 소규모 정찰 활동만 하고 있었다.
(4) 낙동강 방어선으로의 철수
국군 제1사단은 적의 주공 방향이 제1사단 정면으로 지향됨에 따라, 군에서는 항공지원과 대공포판의 보급, 30일에는 신형 105밀리 곡사포 6문이 직접지원하게 된다.
하지만 이 무렵에 사단의 좌우인접 전선이 무너지기 시작하면서, 제8군사령관 워커 중장은 8월 1일을 기하여 현 전선에서 철수하여 낙동강 방어선을 형성하도록 했다.
이에 제1사단은 31일 우인접 제6사단의 철수를 엄호하는 한편, 8월 1일 야음을 이용하여 함창지구를 철수해 8월 3일 낙동강을 도하 완료하였다. 제1사단은 제2군단의 좌익으로서 낙정리-왜관선에 제12, 제11, 제13연대 순으로 전개시키고, 사단 우측의 제6사단, 좌측의 미 제1기병사단과 개전 이후 처음으로 협조된 방어지지를 편성하였다.
3. 전투 결과
'50.7.5일 수도사단, 제1사, 제2사를 예하부대로 하여 창설된 국군 제1군단은 7월 13일 미군의 금강선방어에 연결하여 부강리-국사봉-고은리-미원선에 3개 사단을 투입해 방어진지를 편성하였다. 그러나 동쪽으로는 험준한 소백산맥으로 제2군단의 제6사단과는 연결하지 못했다.
수도사단과 제2사단은 14일부터 북한군과 격전을 벌이며, 16일 아침에 수도사단의 방어선 중심부인 고은리 일대가 돌파되어, 군단은 제2사단을 보은 서쪽 14km지역인 회인에 배치하고 수도사단은 보은으로 철수시킨다. 이 당시에 제1사단은 미원 거리고개 일대에서 북한군 제15사단의 진출을 저지하고 있었다.
북한군 제15사단은 괴산 남방에서 국군 제1사단을 공격하면서 , 일부 병력으로 제2군단의 후방인 상주를 기습 점령하기 위해 속리산 동쪽의 산간도로를 따라 괴산-화령장-상주 방향으로 진출하여, 국군 제6사단의 퇴로를 차단하고 북한군제1사단과 함께 대구를 공격하려 했다.
이에 대해 국군 제17연대와 제1사단이 화령장에서, 7월 17~25일까지 북한군 제15사단의 2개 연대를 괴멸시켜 그들의 작전계획을 무력화 시켰으며, 이로인해 북한군 제15사단장 박성철 소장이 해임된다.
또한 국군 제1사단은 함창지구 좌측방으로 전개하여(우측에는 국군 제6사단) 북한군 제1사단이 국군 제6사단과 함창 북방에서 전투 중 방어로 전환하는 대신 북한군 제13사단을 함창 서북방 농암 방면으로 우회시켜 아군의 후방을 교란하려던 기도를 7월 31일까지 지연시키고, 8월 3일 낙동강을 도하하였다.
제 3 절 문경- 점촌 전투
1. 전투 개요
문경-점촌 전투는 국군 제6사단이 '50.7.14~31일까지 문경.점촌 일대에서 북한군 제1.제13사단과 맞서 축차적인 진지를 점령하면서 지연전을 벌인 전투이다.
수안보에서 북한군을 지연하다가 철수한 제6사단은 금강-소백산맥선 방어계획에 따라소맥산맥의 요충인 이화령과 조령을 포함한 문경 정면을 전담하였다. 제6사단장 김종오 대령은 제2연대를 이화령에, 제19연대를 조령에 배치하였다.
반면에 북한군 제2군단은 제1사단이 문경-점촌-함창 축선으로 진출하고, 배속된 제13사단을 이화령 서측방으로 침투시킬 계획이었다.
7월 14일, 북한군 제1사단이 이화령의 제2연대를 공격한다. 그러나 제2연대는 역습을 감행하여 연풍까지 진출했다 복귀한다. 제19연대는 7월 15일 적의 압력이 조령방면으로 지향되면서 문경쪽으로 밀린다.
이 무렵 북한군 제1사단의 공격을 지원화기 위하여 , 북한군 제13사단이 투입되었다. 북한군은 7월 16일부터 대대적인 공격으로, 국군 제6사단 양측방으로 우회하여 포위 공격을 한다.
이에 제6사단은 문경방어에서 철수, 영강선에서 방어진지를 구축하고 북한군 제1.제13사단과 맞서 7월 25일까지 문경-유곡-점촌으로 이어지는 도로를 중심으로 조봉.오정산 등지에서 전투를 했다.
때마침 국군 제1사단이 함창으로 진출, 국군 제6사단의 돌파위기는 극복된다. 제6사단과 제1사단은 27일부터 반격에 나서 오정산일대를 탈환하고 적의 퇴로를 차단하려 하자, 북한군은 영강 북쪽 고지일대로 철수한다.
북한군 제1사단과 제13사단의 상주 진출을 차단한 국군 제2군단은 7월 31일 육본우로부터 낙동강방어선으로 철수하라는 명령에 따라 낙동강 동안으로 철수하였다.
2. 전투 경과
가. 문경 부근 전투
(1) 국군 제6사단의 이화령-조령 방어진지 편성
이화령 전투 상황도('50.7.14~16)
적1-3연
부봉
국19-2대대 주흘산
적1-2연
조령산 상초리 국19-1대대
이화령
국2-2대대 적? 국2-1대대
국2-3대대
하초리
중봉 진안리 국2연 문경 국16포병대대
국6-7연
적1-2연
이만봉 국7-1대대
옥녀봉 국7-2대대
백화산 남호리
은선 성주봉 국7-1대대
수안보에서 북한군을 지연하던 국군 제6사단은 7월 9일 23시에 보은으로 이동하였다가 10일 11시에 육군으로부터 문경지역을 방어하라는 명령을 받는다. 이 때 국군 제6사단은 제2연대가 충주, 제7연대가 유현, 제19연대가 진천에서 각각 작전을 전개하고 있었다.
명령을 받은 제6사단은 이날(10일) 15시경 문경으로 선행하여 문경초등학교에 사단 지휘소를 마련하고, 7월 12일 05시까지 사단 주력을 문경으로 집결시켰다. 포병은 포대별로 화포 5문씩을 보유하고 각 연대를 직접지원하고 있었고, 공병대대는 각 연대에 배속된 각 중대를 통합하여 괴산-이화령 간의 주요 교량을 파괴시킨다.
이 무렵 제6사단은 병력과 장비는 약 70%수준이고, 징발차량 100여대를 확보하고 있었으며 탄약의 보급도 원활하였다.
한편 북한군 제1사단(최광 소장)은 3개 보병연대(2.3.14연)와 사단포병연대가 편성되어 있었으며, 7월 9일 밤 20시에 충주 동쪽 10km지점의 황강리에 집결하여 문경-함창으로 진격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이에 10일 공격을 개시하여 11일 오전에 소조령에 도달하였다. 다시 산악도로와 다수의 계곡을 통해 우회기동하여 7월 12일 이화령 부근까지 진출하였다. 그리고 이들을 지원하기 이해 제105전차사단 소속의 제109전차연대가 충주로 후속하였으며, 북한 군 제13사단이 은성방면으로 기동중이었다. 북한군 제1사단은 총병력이 약 8,000명이었으나, 이른바 "의용군" 병력이 30%에 이르고 전체 병력의 55%가 비무장이었다. 주요 장비로는 자주포 12문, 122밀리 곡사포 7문과 76밀리 곡사포 21문, 45밀리 대전차포 43문, 120밀리 박격포 40문, 82밀리 박격포 80문 등을 보유하였다.
문경일대에 집결한 국군 제6사단은 7월 12일 00시 01분 부로 창설된 제2군단에 제8사단과 더불어 편입되었다. 제2군단장 김백일 준장의 작전계획은 제6사단과 제8사단을 이화령, 조령, 죽령 일대에 배치해 북한군이 소백산맥을 넘지 못하게 한다는 것이었다.
사단의 좌일선으로 이화령을 점령하기도 된 제2연대가 수안보 남쪽에서 도보 이동으로 7월 12일 21시경 연풍 삼거리를 통과시 행정리 부근에서 수미상의 북한군이 불시에 총격을 가하였다. 이 북한군은 수안보-오가리-적석리로 우회한 북한군 제1사단의 일부였으며, 이들은 일부의 병력으로 제2연대의 행군에 크게 영향을 주지못했다.
결국 제2연대는 7월 13일 02시경에 이화령을 중심으로 급편방어진지를 완료하였다. 제3대대를 681고지에, 제1대대를 이화령 동쪽의 요광리에, 제2대대를 이 보다 북쪽으로 1.7km 떨어진 633고지에 각각 배치하였다.
한편 제19연대는 7월 12일 사단으로부터 갈평리-조령산 간의 지역을 방어하라는 명령에 야간 도보이동으로, 제1대대는 부봉 서쪽 계곡을 넘어 상초리 부근의 제1관문에 이르러 그 서쪽의 459고지와 혜국사 입구에, 제2대대는 제2관문을 점령하였다. 제3대대는 주흘산 동북쪽의 평천리에 도착 즉시 동쪽으로 통하는 갈평리 계곡을 막아 급편진지를 마련하였다.
사단장은 측방 경계를 간화하기 위해 예비인 제7연대장 임부택 대령에게 2개 대대를 차출하여 양측방으로 1개 대대씩 각각 추진 배치토록 하고, 하사관 교육대와 공병, 통신, 등 사령부 직할의 가용병력을 집결시켜 신 예비대를 편성, 문경 동쪽 단산으로 올라가 측후방 경계를 맡도록 하였다. 이에 따라 제7연대는 제3대대를 주흘산 동쪽의 654고자를, 제1대대를 황계산(563m) 서록에 배치하게 된다.
(2) 국군 제2연대의 이화령 공방전
7월 14일 04시 30분경, 안개가 산계곡을 뒤덮고 있는 상황에서 북한군 제1사단의 주공연대인 제2연대가 이화령의 국군 제2연대 정면으로 공격을 개시한다.
점차 날이 밝으면서 짙은 안개가 걷히자, 이화령 고갯길에서 연풍 삼거리에 이르는 도로상에 북한군 전차와 자주포, 병력 등이 가득 메워져 있는 광경이 펼쳐졌다.
그러나 이 시기는 이미 적이 진전에 나타나 진내로 돌입하게 된다. 이에 연대는 중과부족으로, 제2대대는 633고지 후사면으로 밀려나고 제3대대는 방어진지가 일부 돌파되어 진지이탈 사태가 발생한다. 우일선의 제1대대도 격정을 벌이고 있었다.
제2연대장은 짙은 안개로 전방상황을 잘 파악하지 못하고, 통신두절에 각 대대의 상황을 알지 못했다. 그러다 안개가 걷히면서 전방상황을 파악하고, 연대장이 직접 고갯마루에 나가 철수하는 병력을 독려하여 633고지를 탈환하라고 명령하고 진두지휘하게 된다.
제1대대가 역습을 감행하고, 철수 병력이 동참하면서 전세가 역전되었다. 더구나 제2대대가 아직 진전에서 버티고 있는 상황이라 거꾸로 북한군의 퇴로를 차단하는 길목이 되었다.
제2연대는 무질서하게 퇴각하는 북한군을 공격하여 진지를 회복하고, 연풍삼거리까지 진격하여 제1대대가 점령하게 되었다. 그리고 사단의 명령으로 다시 이화령으로 복귀했다. 이 전투에서 장갑차 3대를 비롯해 트럭 10대, 포로 7명을 생포하였다. 여대도 100여 명의 사상자가 발생한다.
같은 시간대에 제19연대 지역은 적의 수상한 동태가 식별되지 않고 있어, 진지 공사를 계속하였다. 사단은 북한군 제1사단이 문경을 목표로 할 경우에 이화령 서쪽의 주진리 계곡에 대한 보완책이 필요하다고 판단, 제7연대 제2대대를 백화산(1062m)으로 이동시켜, 주진리 -시루봉을 넘어 분지리로 통하는 사단의 서측방을 방어하게 하였다.
그러나 이미 북한군 제13사단의 주력이 은밀하게 은성방면으로 진출하고 있었으며 국군 제6사단은 이러한 사실을 전혀 알지 못했다. 그러다 제7연대 제2대대가 북한군이 이만봉에 출현했다는 보고를 받고서야 서측방에 위협이 가중되고 있음을 알게 된다.
(3) 조령 방어진지 붕괴
조령 전투 상황도('50. 7.15~16)
적1-3연
적
부봉
국19-3대
평천리
국19-2대 증봉
주흘산 국19-3대
적 적
조령산 상초리 국19-2대 팔령리
국19-3대 국7-3대
이화령 국2연 하초리 국19연, 1대대 적
적
문경
적
이만봉
희양산 996 백화산 국7-2대 남호리 국6사 집결 후
구왕봉 오천리 방면으로 철수
성주봉
봉암사 원북리
7월 15일 06시 30분경에 조령 제2관문을 지키고 있던 제2대대장 김용기 소령으로부터 진내에서 백병전이 벌어졌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북한군 제1사단 제13연대의 1개 대대가 원풍쪽에서 조령산 북쪽 능선을 넘고, 그 주력이 소조령(수안보 동남쪽 5km)에서 부봉(915m) 계곡으로 우회해 국군 제19-2대대를 공격한 것이다.
국군 제19-2대대는 대대장이 머리에 관통상을 입고 08시경 진지가 무너져 지휘체제가 마비되었다. 북한군 선두는 벌써 제2관문을 돌파하여 상초리의 제1관문으로 진출 중이었다.
국군 제19-2대대는 철수 명령에 대대 교육장교가 병력을 수습하여 주흘산 서쪽 기슭을 따라 철수하기 시작하며, 제19연대의 진내사격 요청으로 제16포병대대가 진내포사격으로 적의 진출을둔화시킨다. 하지만 일부 아군도 10여 명의 피해를 입었다.
북한군은 제2관문 점령에 이어 제1관문도 11시경 점령하게 된다. 제1대대는 대대장 최병묵 소령과 제3중대장 김택수 중위가 전사하는 등 백병전속에서 하초리로 철수해야 했다. 사단의 동측방 평천리 일대의 제19-3대대는 팔령산(654m)에 위치하고 있었지만 연대 주력과는 4km나 떨어져 있었다.
한편 사단의 서측방 이화령의 제2연대는 우인접 제19연대가 문경으로 밀리면서 양측방이 노출되었지만 이화령을 고수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화령과 조령에 대한 북한군의 압력이 점차 가중되고 설상가상으로 서측방에 새로운 적이 출현하게 됨에 따라 에비대를 보유하지 못한 상황에서 제7연대 제2대대가 백화산에, 제1대대가 성주산에 배치된다.
7월 15일 17시경에 제7-2대대가 평전치로 침투하는 적을 발견하여 격멸하게 된다. 하지만 이 무렵 북한군 제13사단 주력이 제7연대 진지 서쪽 6km 지점의 원북리(구왕봉 남쪽 마을)로 집결하고 있었다.
(4) 문경방어선 붕괴
북한군 제1사단은 7월 16일 06시를 기해 총공격을 개시하였다. 특히 북한군은 국군 제19연대 제3대대가 있는 갈평리 계곡으로 우회하여 국군의 퇴로를 차단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이화령의 제2연대 지역은 별 접촉이 없다가 양 측방이 무너짐에 따라 고립상태에 빠져들게 된다. 결국 오후 2시경 제2연대에게도 철수명령이 내려지고, 이르 감지한 북한군은 포사격을 강화하였다.
서측방 제7연대 제2대대는 북한군 주력이 갈미봉 동쪽 능선으로 우회하여 황계산을 넘게 됨으로서 더 이상 진지를 지탱할 수가 없어서 옥녀봉으로 철수하여 성주산의 제1대대와 협조된 방어진지를 편성하도록 하였다.
하지만 이미 북한군은 평전치-백화산을 지나 성주산 쪽의 제1대대와 교전 중이고, 대대규모의 적은 황겟6ㅏㄴ을 넘어 문경 남쪽의 잣발산 쪽으로 쇄도하여 옥녀봉 북쪽의 방어대책이 시급하였다. 20시 30분 경에 제19연대엥 배속되었던 제3대대가 복귀하여 옥녀봉 북쪽 능선에 급편방어진지를 구축하게 하였다.
같은 시간에 제16포병은 문경역 북쪽 과수원부근에서 화력지원을 하다가 16시경 적의 박격포탄이 제2포대 지역에 떨어져 18명의 사상자가 발생한다. 이는 폭염에 포대원들이 상의와 철모를 벗고 포사격을 하고 있다 발생하였으며, 포병은 신현리(남호리 남쪽 3.5KM)로 철수하게 된다.
사단 공병대대는 제2연대가 철수한 후에 진안교를 폭파한데 이어 아리랑고개에 대전차호를 구측하였다. 또한 갈평리에서 문경으로 들어오는 향교다리를 폭파하게 된다. 공병은 이 일대 소야교, 영강의 철교, 진남교 등에 대한 폭파준비도 하게 된다.
한편 문경 정면의 방어진지가 돌파될 무렵인 7월 16일 15시경에 미 제25사단 제35연대의 특수임무부대(제2대대 F중대, 제79전차 A중대 1개 소대, 제90포병대대 A포대)가 국군 제6사단을 지원하기 위해 남호리로 북상하였다.
그러나 F중대가 남호리에 도착하였을 때는 국군 제6사단이 문경 이남으로 철수 중에 있었으며, 이에 F중대는 봉명산에 급편진지를 편성하고, 155밀리 야포는 서쪽 도로변에 포진시켰다. 전차소대는 다시 진남교 아래로 내려가 불정리에 대기 중에, 이날 밤 포병과 전차는 점촌으로 철수하고 F 중대는 철수명령을 받지 못해 계속 봉명산에 대기하다 북한군의 기습공격을 받고 제19-3대대와 오정산으로 철수하게 된다. 이 과정에 F중대 10여 명이 조령천을 건너다가 익사하는 사태가 발생하였다.
나. 점촌 북방의 영강 전투
(1) 국군 제6사단의 영강 방어선 형성
이화령과 조령에서 물러난 국군 제6사단은 7월 16일 21시에 개최된 작전회의에서 문경을 고수하기로 한다. 그러나 군단에서는 인접부대의 상황을 고려할 때 적중에 고립될 수도 있다는 판단하에 제6사단의 계획을 유보시키고, 7월 17일 01시경 영강으로 철수하여 신진지를 편성하라고 명령하였다.
이 때 국군 제6사단은 북한군 제1사단과 제13사단으로부터 강한 압력을 받고 있었다. 북한군 제1사단은 문경에서 3번도로를 따라 유곡쪽으로, 그리고 서측방의 북한군 제13사단은 상괴리에서 은성쪽으로 각각 쇄도하고 있었다.
이에 국군 제6사단은 17일 05시경에 철수를 완료하여, 제2연대가 어룡산-378고지에, 제7연대가 옥녀봉-413고지에, 제19연대(-)가 628고지-오정산에, 제16포병대대는 유곡리에 각각 진지를 편성하였다. 재19연대 제3대대와 미군 f중대는 철수명려이 전달되지 않아 그곳에서 하루를 더 머물다 17일 오후에 오정산으로 철수하였다.
여기서 제16포병대대는 육군본부의 105밀리 신평포(m-2) 교체계획에 따라 제3포병대대와 임무를 교대하고 대구로 떠났다.
이 무렵 북한군은 영강을 돌파하려는 기도하에, 제1사단이 3번 도로를 따라 신현리 일대에, 제13사단이 문경 서쪽의 험준한 산악지대를 이용하여 은성방면으로 남하, 상괴리 일대에 집결하고 있었다.
영강 부근 전투 상황도('50.7.17~22)
적1사
오천리
신현리 국19-2대대
적 적 국19-1대대
오정산
413고지 적
옥녀봉 국7-1대대 어룡산
국7-3대대 424고지 국2-1.2.3대대
387고지 국7-3대대 작천리
국7-2대대 불정리
유곡리 국6사
324고지 갈미봉 조봉 국19-3대대
국1연
수애리
이안천 함창 국2군단
(2) 옥녀봉-413고지-424고지 전투
7월 19일 06시경, 북한군은 국군 제2연대와 제7연대의 공간지대를 따라 413고지와 어룡산의 2개 방향으로 공격을 개시하였다.
413고지 일대의 제7연대 지역은 2시간 가량 격전을 치르며 방어진지가 무너지기 시작하면서 영강 도하를 저지하기 위해 연대 예비로 작천리에 예비로 집결중이던 제2대대를 갈미봉으로 이동시켰다.
한편 424고지일대의 제2연대는 적의 공격을 격퇴하였으며, 봉명산에서 철수한 제19-3대대를 제2연대에 배속하여 조봉에 배치했다.
413고지를 점령한 북한군은 14시경에 제7연대 제3대대의 옥녀봉을 공격하였으며, 3시간의 동안의 격전에서 북한군 공격을 막아냈다. 그러나 적이 재차 공격을 감행하고, 제3대대는 40여 명의 사상자가 발생한다. 제7연대는 제1대대를 투입하여 세차례의 역습을 감행하였지만 북한군의 화망에 걸려 많은 피해를 입게 된다. 여기에 유엔공군의 F-80전폭기 1개 편대가 출격하여 폭격중에 제10중대 진지에서 일대혼란이 야기 된다.
결국 제7연대는 20일 17시경 387-324-갈미봉에 급편방어진지를 편성하며, 이 무렵 북한군도 옥녀봉을 탈취한 후 재편성에 들어간 듯 하였다.
(3) 387고지-어룡산-진남교 공방전
북한군은 7월 21일 02시부터 387고지와 어룡산에 공격을 개시한다. 387고지를 점령하려 2개대대 규모로 6시간 동안에 반복 공격을 실시한다.
제3대대가 북한군과 격전을 벌이고 있는 동안에 농암리 부근에 위치한 제7연대 지휘소에 뜻밖의 사태가 벌어졌다. 이곳은 전방으로부터 7KM나 떨어져 있는데 이날 03시경 200여 명의 북한군이 기습공격을 가하였다. 이들은 화령장에서 남하한 북한군 제15사단 제48연대의 선두부대로써 함창에 이르는 진출로를 탐색하다 제7연대 본부와 조우하게 된 것이다.
제7연대는 이에 대전차포 중대가 이들을 물리치지만, 서측 경계를 위해 경찰 병력 200명을 문암리(농암 동남쪽 6KM)로 급파하고 대전차포 중대를 상율리에 배치한다.
제7연대가 격전을 벌이는 동안 제2연대 지역은 03시경에 2개 대대규모가 어룡산 서측방으로 기습공격을 가해왔다. 이에 제3포병대대의 화력지원에 힘입어 북한군의 공격을 영강부근으로 북한군을 밀어냈다. 이들은 다시 05시경 어룡산을 포위공격했다. 결국 제2-3대대는 백병전을 벌였으나 20여 명의 사상지를 내고 583고지 부근으로 밀려난다. 이어 북한군이 조봉을 공격하지만 제19-3대대가 진지를 고수한다.
조봉에서 제7-3대대가 적을 물리치자, 제2연대장은 어룡산을 탈환하기로 결심하고 제3대대로 07시경 공격을 감행한다. 12시경에 유엔공군 F-80전폭기의 지원으로 13시경에 어룡산을 탈환하였다.
한편 북한군 제1사단의 주공이 지향된 3번 도로상에는 7월 21일 06시경 연대규모의 적이 전차 4대를 앞세우고 진남교부근으로 영강도하를 시도하여, 그 일부가 문경탄광부근까지 접근하였다.
사단 방어의 중앙이 돌파될 위기에 처하자 사단장 김종오 대령은 군단과 미 제25사단장에게 직접 화력지원을 요청, F-80전폭기 1개 편대가 출격하여 진남교와 석현리 문경탄광 일대에 폭격과 미 제79전차대대 A중대 소속의 전차 3대와 점촌 양지마을에 포진한 제90야포대대 A포대가 제2연대를 화력지원하여 11시 30분경 북한군을 물리친다.
이 무렵 영강 동북쪽 628고지-오정산간에 진지를 점령하고 있던 제19연대는 7월 21일 07시경 오천리 게곡과 신현리 계곡으로 침투한 북한군의 공격을 3시간 만에 물리쳤다. 이후 이지역은 주력이 고전하게 되자 더 이상 재공격을 하지ㅐ않고 뒤로 물러났다.
이날 7월 21일, 수도사단 윤춘근 중령이 지휘하는 제1연대가 청주 고은리에서 방어임무를 하다 동부전선으로 이동 중에 7월 19일 제2군단에 배속되어 16시경 함창에 도착하였다.
(4) 어룡산-오정산 방어진지 피탈
7월 22일, 이른 새벽에 비 내리는 가운데 북한군 제1사단이 어룡산과 오정산을 탈취하기 위해 2개 방향으로 공격을 개시한다. 이에 제2연대 제3대대는 예상치 못한 공격을 받고 어룡산을 상실하고 583고지로 물러났다.
이어 북한군은 그 여세로 제19연대 제3대대가 방어중인 조봉으로 쇄도하지만 10시경에 북한군을 격퇴하여 조봉을 고수하였다.
어룡산과 조봉에서 격전이 벌어지고 있는 가운데 제6사단 제7연대 제3대대는 가은의 옥녀봉을 탈환하기 위해 05시경 기습공격을 감행하여 07시경 일단 탈환하였으며, 이어서 북한군의 역습이 감행되는 가운데 혈전이 계속되는데 결국 13시경 연대는 철수명령을 내린다. 이 전투에는 대전에서 편성된 학도의용군 제1진 180명이 7월 21일 오후 점촌에 도착하여 그 일부가 참가하였다.
한편 신현리 계곡에서 오정산 서측바으로 침투한 북한군 1개 대대 병력은 제19연대 제2대대의 좌일선인 제6중대를 집중공격하여, 백병전으로 혈투를 벌이던 제6중대는 결국 진지르 ㄹ포기하고 견탄리 쪽으로 분산 철수하게 된다. 당시 제19연대는 1개 대대를 제2연대에 배속시켰기 때문에 에비가 없어 역습을 감행하지 못하다 09시경에 사단에서 지원된 공병 제3중대와 에하의 제1대대 제2중대로 역습을 감행하여 4시간의 공방전 끝에 제6중대 진지를 탈환하여 628-오정산 간의 진지를 다시 연결하였다.
제7연대는 이날(22일) 사단의 명으로 제1연대와 진지를 교대하고 20시에 함창으로 이동한다. 이로써 제7연대는 옥녀봉과 387고지에서 4일간의 격전을 끝내고 사단의 에비가 되었다.
제7연대의 진지를 인수한 제1연대는 324-갈미봉에, 제2. 제1대대 순으로 배치하고 제3대대를 사단의 예비로 점촌에 집결 대기 시켰다. 그리고 492-760고지 일대에 새로운 경계진지를 마련한다. 이로써 제6사단은 영강 북쪽의 옥녀봉과 387고지를 포기하고 영강 남쪽의 진지를 서남쪽으로 더욱 연장하여 진지를 편성하게 되었다.
다. 전선 정비와 유곡리 부근 전투
(1) 조봉 피탈과 국군 제6사단의 전전정비
유곡리 부근 전투 상황도
적1사 국11연
오정산
국12연
석현
은성
진남교
옥녀봉
적13사 어룡산 국12연-1대
적1개연 적1개대대
적1개대대
조봉 국1개대대(2연)
국2연 유곡리 적1개대대
국19연
국7연/적1개대대
국2연 국1연 국19-2대
관악산 국7연 점촌 국6사
함창 국2군단/국1사
문경에서 점촌으로 이어진 3번도로는 기계화부대가 기동할 수 있는 유일한 도로였다. 이에 북한군은 보전협동으로 3번 도로를 장악하고자 하였으며, 반대로 국군과 미군은 제6사단 제2연대와 미 제79전차대대 A중대로 하여금 북한군의 공격을 막고자 한다.
7월 23일 05시경, 북한군 제1사단은 전차 7대를 동원하여 진남교까지 진출한 후 영강을 도하, 국군 제6사단의 중앙을 돌파하려 2개 방향에서 공격을 재개하였다.
영강 남안에 배치된 국군 제2연대의 대전차포중대와 미군 T-24전차 3대, 그리고 미군 155밀리 야포까지 합세하여 집중포격을 가했지만 북한군 전차는 아랑곳 하지않고 문경탄광 방면으로 기동하였다. 북한군 전차에 대적할 수 없었던 미군 T-24전차 3대는 유곡으로 철수하고 뒤이어 대전차포중대마저 분산됨에 따라 북한군이 국군 제2연대 제1대대 진전으로 밀려들었다.
북한군 전차 4대가 와불정(탄광촌 남쪽 1KM)을 통과한 후 07시경 보병 2개 대대가 제2연대 제1대대 진지와 583고지의 제3대대진지를 위협하는 가운데 제2연대에 배속되어 조봉을 사수하던 제19-3대대가 23일 05시경부터 백병전을 벌이며 진지를 지키다 09시경에 피탈당하며 은점재-651고지 선으로 물러났다. 이로써 제19연대의 전지역을 내려다 볼 수 있는 불정리 계곡은 북한군이 장악하여 제6사단의 새로운 위기가 찾아온다.
조봉의 피탈로 제2연대의 퇴로가 차단될 위기에 처하자, 사단은 제2연대를 유곡리로 철수시키고, 함창에서 정비중인 제7연대로 점촌 북방으로 이동시켜 제2연대의 철수를 엄호하고 북한군의 공격을 저지토록하였다. 이때가 23일 10시경으로 제7연대는 예비로 전환된지 14시간만에 사단 공병대대와 미 전차중대의 지원을 받으며 3번도로 축선상의 북한군과 정면으로 맞서게 된다.
이 무렵 원동부근까지 진출한 북한군은 유엔공군의 폭격으로 더 이상 진출하지 못하고 어룡산-불정산(378고지)선에서 재편성에 들어간다. 사단은 제7연대가 제2연대 진지를 인수하고, 제2연대는 조봉 남쪽 651고지로 이동하여 제19-3대대의 진지를 인수하여 조봉탈환을 위한 반격준비에 차수하였다. 제19-3대대는 이날, 23일 24시부로 배속이 해제되어 원대로 복귀한다.
이와 같이 사단의 중앙이 돌파되어 제2연대가 후방으로 3KM 물러나게되자, 좌일선인 제1연대와 우일선인 제19연대도 각각 492고지-760와 신기리-우지리 선으로 물러났다.
(2) 국군 제6사단의 반격과 북한군의 역공격
국군 제6사단은 7월 24일 06시를 기해, 제2연대가 조봉을, 제7연대가 불정산을 탈환하기 위한 공격을 개시하였다. 제2연대는 조봉에 배치된 북한군과 7시간의 일진일퇴 격전에서 13시경 탈환하게 되며 북한군 300여 명을 사살하고 각종 소화기 128정 등을 획득하고 반면 70여 명의 인원 손실을 보았다. 조봉을 초월하여 어룡산 공격에 나섰던 예비인 제2대대는 2시간가량 격전에서 결국 조봉 남쪽으로 철수하게 된다. 야간에 적의 역습이 개시되면서 조봉일대는 완전히 탈환되지 못하고 상호 대치상태가 된다.
한편 불정산 공격에 나선 제7연대는 중간목표인 414고지를 제3대대가 탈환했으나 583고지를 공격하는 제1대대는 적진을 돌파하지 못했다.
이 무렵 원골에서 남하한 북한군의 공격으로 우측의 제19연대가 밀리게 되면서 제7연대의 퇴로가 차단딜 위기에 처하게 되자, 사단은 제7연대의 불정산 공격을 중지하고 원위치로 복귀시켰다.
한편 제19연대는 12시경 F-80 전폭기 2개 편대의 항공지원으로 위기를 모면하고 고지를 사수하였다.그 후 제19연대는 제1연대에 진지를 인계하고 사단의 동측방 방어를 위해 영강 차안에 병력을 배치하여 틀모산-신기리-227고지-우지리를 연해 방어진지를 구축하였다.
제6사단은 유곡리 정면으로 북한군의 공격이 강화되자 3번도로상에 병력을 집중 배치하여 북한군과 정면대결을 벌이기로 결심하고 제1연대 제2대대/3대대를 유곡리 정면으로 추진시켜 진지편성을 완료한다.
제1연대(-)가 358-267고지로 이동할 무렵 좌인접인 제7연대가 651-358고지 서측방에 새로운 진지를 점령하고 제19연대가 틀모산 북쪽 능선까지 진지를 연장함으로써 유곡리 정면에 3개 연대가 배치되어 남하하는 북한군 제1사단과 대치하게 된다.
(3) 국군 제6사단의 전선 재조정과 국군 제1사단의 증원
7월 25일 북한군 제2군단(군단장 김무정 소장)은 제13사단까지 동쪽으로 이동시켜 국군 제6사단 정면을집중공격하게 된다. 전날에 아어 조봉과 3번도로 축선에서 쌍방간에 공방전이 게속되었다.
02시경, 북한군의 기습공격으로 조봉의 제2연대 제1.3대대는 진지를 상실하고 은점재부근으로 철수하게 된다. 그러나 다시 05시경 포병의 지원화에 제2대대가 역습으로 조봉을 재탈환하였다.
이 때 3번 도로 상에서는 제19연대 대전차 특공조가 원골-유곡리 쪽으로 남하하던 북한군 전차 4대를 틀모산 시슭에서 매복 공격해 파괴하였다. 때마침 항공지원과 57밀리 대전차포중대의 지원사격으로 북한군 전차 4대를 격파하였다.
유엔공군과 제19연대 대전차특공대의 기습공격으로 원골쪽으로 물러선 북한군은 다시 3번도로를 따라267고지 방향으로 공격해 왔다. 267고지의 제1연대는 진지를 고수하지 못하고 유곡리 남쪽의 장승백이 부근으로 철수하게 되었다.
이로써 제6사단은 조봉을 탈환하고 북한군 전차를 파괴하는 등 전과를 올렸지만 7월 26일, 3번도로를 확보하기 위해 제7연대와 제19연대를 각각 수창봉(487고지)과 227고지 일대로 이동시켜 제1연대 진지와 연결시켰다.
한편 제6사단이 영강선의 주저항선인 수창봉-227고지선으로 물러나 대치 중이던 7월 26일 16시에 국군 제1사단(사단장 백선엽 준장)이 함창에 도착하였다. 이에 국군 제6사단은 방어정면이 9KM로 축소되었으며, 제1사단은 제5연대를 배속받아 함창 서북쪽의 이안면 일대를 담당하게 되었다. 국군 제1사단은 이날 해질 무렵에 제5연대를 제13연대와 교대시켜, 함창 서북쪽의 212-366고지선을 점령하였다.
라. 낙동강 방어선으로 철수
제2군단장 유재흥 준장은 군단의 전투력이 증강되자, 7월 26일 야간에 함창으로 집결한 제1사단으로 영강 동측방으로 우회하여 북한군 제1사단의 전투력을 와해하고 이를 포위하기 위한 공격을 하게 하였다.
국군 제1사단은 제11연대와 제12연대로 함창-점촌을거쳐 영강 동쪽의 금룡리와 막곡리에 각각 추진 배치한 후 26일 06시를 기해 일제히 반격을 개시하였다. 제12연대 제3대대가 오정산을, 제2대대가 견탄리의 628고지를 탈환하였다. 그리고 금룡리에서 약진한 제11연대는 부운령을 탈환하였다.
오정산-부운령까지 진출한 국군제1사단은 북한군의 역습에 대비하여 부운령의 제11연대를 함창으로 복귀시켰다. 북한군 제13사단의 제21연대가 함창 서북쪽으로 우회하여 국군 제1사단 제13연대 정면으로 진출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정산의 제12연대는 계속하여 오정산을 확보함과 아울러 제6사단 정면의 적을 배후에서 공격하게 하였다.
국군 제1사단과 더불어 제6사단도 27일 07시부터 반격에 나서, 제2연대가 조봉을, 제7연대가 358고지를 제1연대가 267고지를 각각 탈환하였고, 제19연대도 신기리까지 진출하였다. 그 후에 제1연대는 배속이 해제되어 27일 20시 40분에 함창으로 집결하여 안동에 위치한 수도사단으로 복귀하게 된다. 제19연대는 제1연대 지역을 인수하게 되었^다.
국군 제6사단은 7월 28일에 어룡산과 414고지를 탈환하기 위해 반격을 개시하지만 북한군의 강력한 저항에 부딪혀 어룡산 탈환에는 실패한다.
이 무렵 북한군 제2군단은 제1사단이 문경-점촌-함창 축선 진출이 실패하지 국군 제6사단과 정면대결을 피한 채 석현(문경 동남방 8km)에서 방어로 전환되고, 대신 제13사단이 함창 서북쪽으로 투입되어 상주방면으로 진출하게 하였다.
국군 제6사단은 7월 31일 오후에 미8군사령부로 부터 용기동으로 집결하라는 철수명령을 수령하고 18시에 지휘부가, 23시에 제2연대와 포병대대가, 24시에 제7연대, 그리고 8월 1일 02시 30분 경에 제19연대가 용기동으로 철수하게 되면 이때 병력은 5,727명으로 초기에 비해 1/3가량이 줄어들었다.
3. 전투 결과
국군 제6사단은 7월 17일 01시를 기해 영강선으로 철수를 개시하여 급편진지를 구축한 채로 북한군 제1.13사단과 8일동안 격전을 치렀다. 7월 26일 유곡리를 상실하여 중대고비를 맞지만 국군 제1사단의 증원으로 위기를 모면하여, 제6사단은 함창 동북쪽의 조봉-358-267-신기리-227고지 선을 , 국군 제1사단은 함창 서북쪽의 국사봉-212-366고지 선을 점ㅂ령하여 함창-상주 방면으로 진출하려는 북한군 제1.13사단의 공격에 대비하였다.
제6사단은 7월 14일부터 31일까지의 사이에 풍기-점촌 전투에서 약 1,000명에 이르는 전투손실을 입었으며, 북한군은 병력의 40%, 자주포 및 차량의 50% 등 막대한 피해를 입게 되었다.
결국 제6사단은 북한군 제2군단의 함창-상주-대구 축선으로 진출하려는 것을 저지함으로써 북한군의 남침계획에 큰 차질을 빚게 하였으며, 반면에 국군은 중동부전선의 제1,2군단의 재편성으ㅡㄹ 단행하고, 낙동강방어선으로 철수해 공세 이전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데 크게 기여한다.
제 4절 유해발굴 위한 탐사 및 탐문 결과
1. 거리고개-미원 전투
제1사단은 음성-괴산선에서 7월 12일 03:00에 철수를 개시하여 14일에 부흥리 거리고개 일대에 제13연대에서 철수로를 엄호하는 가운데 11.12연대가 미원으로 들어온다.
북한군 제15사단은 1개 연대로 국군 제1사단을 따라 미원-보은으로 진출하고 사단 주력(제45.48연대)은 괴산-상주 방면으로 진출토록 명령을 부여 받았다.
7월 15일 청안을 점령한 북한군 제15-50연대는 16일 05:00경 부흥리 일대의 국군 제1-13연대를 공격한다. 하지만 국군의 조직적인 방어와 역습으로 한때는 거리고개를 다시 확보하기도 하며 군단의 명령으로 국사봉-517고지선에서 21일까지 임무를 수행하였다.
반면 북한군은 여기서 청주방면의 제2사단이 청주-옥천방향으로의 진출을 바꾸어 국군제1사단과 수도사단이 대전 방면으로 전환되지 못하도록 견제하고 제50연대 또한 제15사단 본대의 진출을 보장토록 상주방면으로 전한명려을 받게 된다.
이에 따라 적정이 미미한 가운데 제1사단은 20일 춘양으로 이동하라는 명령을 받고 보은을 거쳐 이동중 다시 화령장으로 이동명령이 수정되었다. 이유는 수도사단으로부터 배속이 해제되어 함창으로 이동 중에 화령장 근처에서 북한군 제15사단(-)의 선두부대를 두 차례공격하여 큰 타격을 입히자 육군은 국군 제2군단의 서측방 위협으로 간주하고 황급히 병력 투입을 지시한 것이며 화령장 일대에서 23일부터 전투를 재개한다.
가. "거리고개의 먹구렁이와 발목 묶는 쇠고랑"
나는 ''99년 9월부터 '3년 5월까지 육본에 근무하다 '03년 5월에 증평지역에 있는 제67동원사단에 포병연대장으로 내려와 근무를 했다. 사실 이 기간에 나는 충북지역과 경북 북부지역, 그리거 충남지역 동쪽에 있는 웬만한 격전지를 탐사할 수 있는 여건이 주어졌다.
어떤 숫자의 강박관념없이 자유인처럼 현장에 가서 만나본 지역주민의 제보, 그리고 전투지역에 남아 있는 정보는 그 후 내가 다시 육본에 '05년 12월에 복귀하여 발굴업무를 하는데 많은 도움을 주었다.
이곳 거리고개는 부흥리에서 올라서는 고개다. 국군 제1사단 제13-2대대가 점령을 하여 뺏겼다가 다시 역습으로 되찾기도 한 곳인데 참전용사님이신 황대형 어르신이 부대로 찾아와 안보강연을 하신 후에 이곳에 함께 동참하였다.
이곳에서 전투를 하신 황선배의 이야기로는 부흥리에 81mm 박격포 4문을 놓고 왔다가 다시 역습을 하여 들고 왔다는 이야기를 하며 4월의 어느날 우린 거리고개에서 북쪽으로 426고지를 향해 올라간다. 이날따라 밖에 날씨가 확풀려 따가운 봄빛이 내리쬐이고 있는데 참나무들이 서서히 움이 트기 시작하였다. 고개에 차를 대고 올라서는데 어르신도 감회가 새로우신지 잘도 오르신다.
길이 이미 초목으로 우거져 제대로 있을리 없지만 지도를 들고 고지를 향해 오르는 사람은 나와 용사님, 그리고 보좌하는 정보장교 정대위 뿐이다.
나는 산악탐사에 항상 선두에 서서 가는 것이 일상이라 이날도 앞에서 걷고 얼마를 가는데 주변에 참나무들이 빼곡하다.
"뭐야, 스톱. 엎드려!"
나의 긴장된 목소리에 나무들마저 떨고 있는 순간이다. 아니 내 머리 위에 있는 참나무에서 뭐가 툭 떨어졌는데 나는 불발탄인줄 알고 소리친 것이다. 통상 전쟁터 나무가지에 박격포탄이 걸려 있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어온 터이다. 그러고서 가만히 보니 뭐가 움직인다. 뱀이다.
엄청 기럭지가 긴 뱀이 나 때문에 놀라서 멍청하게 움크리고 있다가 정신이 드는 모양이다. 이곳의 나무에 올라있다 아무도 나타나지않는 산중에 사람을 보니 놀라서 떨어진 것이다.
"뱀아 우린 너하고 아무런 이해관계가 없다. 갈 곳으로 빨리 가고 우리를 보호해 줘라" 나는 '00년부터 전쟁터에 있는 뱀은 영혼이 있는 것이라 믿어 절대로 죽이지 않았다. 지금도 그렇다. 황선배님이 내 뒤에서 지켜보다 앞으로 나서며 미신이라지만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며 전쟁중에 펜티를 갈아입지않는 것이나 수염을 깍지않고, 여자의 속옷을 입고 간다는 등의 이야기를 해 주셨다. 얼마를 걸어 더 깊이 들어가니 드디어 전쟁 흔적이 남아 있다. 그런데 미원방향으로 파낸 엄청 큰 호에 아직 그 당시의 유품이 있어 만져보니 쇠고랑이다. 북한군이 병력을 배치하고 도망치지 못하도록 발목을 묶어놓은 것이다. 실탄을 다 소모할 때까지 붙어있어야 한다.
이곳은 아군이 역습으로 탈취한 곳이니 상황을 그려보면 북한군은 죽었다고 봐야 한다. 황 선배님 이야기가 이곳을 점령한 후에 부흥리로 박격포를 회수하러 특공대를 조직하여 들어갔는데 북한군이 어떻게 된 것인지 경계도 서지 않고 집에서 먹을 것을 먹고 있는데 대부분 어린 학생이었다 한다. 그래서 적 1개분대를 사살하고 다시 박격포를 가지고 이곳 426고지로 돌아 왔다고한다.
나."청천면 송면 6.25 전쟁 참전 전우회의 요구 : 용사를 발굴하라!"
국방장관에게 6.25참전 전우회에서 국방부로 청원서가 날라들었다. 유족도 없는 용가가 청천에 매장되어 있다고 발굴하여 현충원에 모셔달라는 내용이었다.
나는 그 근원을 찾아 청천면에 가서 전우회를 찾았다. 괴산군 출신 김종호란 분이 유력인사인데 새건물을 한동 지어주었다 한다. 그래서 쉽게 찾아가 용사님들을 만나 사연을 들었다. 사실 내용은 지역 청방대를 함께 하는 분이 지방빨갱이의 기습으로 전사했다. 그런데 함께 작전하던 사람들이 당시에 여기저기서 피난온 여럿이 함께해서 이름을 기억 못하고 있다. 당연히 이 지방 사람이 아닌 분이였다. 안내하는 곳을 가보니 아니 바로 전우회관 뒷편에 3구가 나란히 잘 모셔져 있다. 그래서 물었다.
"언제부터 여기에 안장되어 있었습니까?"
"처음부터 이곳에 있었고 원래는 길이 저만치 있었는데 넓혀져서 바로 주변이 된겁니다."
"그렇다면 매년 이곳에서 추모행사도 했을 것인데 지금 옮겨버리면 누가 추모행사를 해 드립니까? 여기 분들은 유족관계를 확인하지 못하기 때문에 정식 안장이 안됩니다. 무연고 유해가 되는 겁니다."
"아니 국방부에 전사자 명단에 있을 거 아닙니까?"
"명단은 13만 여명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분들은 지금 아무도 이름을 모르잖아요. 그럼 어떻게 유족을 찾아가요?"
"발굴하면 그렇다고 유해가 있으리라는 보장도 없습니다. 50년이 넘어서 모두 분해되어 자연으로 승화될 수도 있거든요. 하지만 이대로 있으면 영구히 이고장에서 싸운 용사로 추모의 대상이 되는데 파버리면 그 위상이 무너집니다." 그리고 용사님들은 나의 말에 동의하고 나를 칭찬해 주셨다.
2. 고은리-국사봉 전투
청주 방면의 국군 수도사단(김석원 준장)은 7월 13일 북한군 제2사단의 공격을 받아 미호천 남안의 주저항선을 포기하고 국사봉(282m)-고은리-성무봉(431m) 선으로 물러났다.
사단의 좌측은 제2사단이 봉무산에 일대에 우측은 제1사단이 미원일대에서 각각 방어 중이었다.
14일부터 적의 공격이 게속 되고 성무봉은 제18연대에서 최초에는 병력을 배치 하지않고 있다 적에게 피탈되고난 후에 역습으로 되찾았다. 또한 국사봉 일대는 제8연대 제2대대(대대장 대위정승화)가 배속된 진주경비대대를 독려하면서 북한군의 공격을 저지하였다.
그러나 지원하는 전폭기가 오폭으로 제18연대는 많은 사상자가 발생하며 군단은 대평리에서 미 제24사단과 임무 교대한 제17연대 제2대대를 보은에서 고은리 동쪽으로 배치시킨다.
북한군은 어쩐일인지 공격을 감행하지않고 시간을 아군에게 줌으로써 국군은 제17연대(김희준 중령)2,3대대를 공격부대로 장암리-효촌리 선을 공격하여 탈환하기도 하며 7월 16일부터 전차를 동반하여 공격해 옴으로써 16일 야간부터 철수를 개시하여 보은으로 철수하게 된다.
이와같이 철수하게된 결정적 요인은 바로 좌측의 국군 제2사단이 봉무산에서 물러나고 그 좌측 미 제24사단이 대평리에서 물러나 유성쪽으로 철수하게 되어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보은에 도착한 수도사단 전투력은 48%수준인데 제1사단이 57%, 제2사단이 55%이었으며 여기서 이틀간 정비후에 제1연대가 함창으로, 제18연대가 예천으로, 제8연대와 사단사령부가 안동으로 이동한다.
가."전쟁터에서 생긴 알력"
7월 11일 오근장에서 제1연대와 제9연대의 통합이 이루어 진다. 병력은 제9연대가 많은 데 지휘관이 제1연대장(이희권 중령)이 연대장이 되다 보니 제1연대가 되었다. 하지만 이로인해 서로 알력이 발생하여 지원이나 정보교환에 많은 문제점이 발생한바 사단장의 건의로 다시 윤춘근 대령이 제1연대장으로 부임하고 이희권 중령은 군단사령부로 전출된다.
나."청원 문의면 구룡리의 150여구 유해의 실체?"
전 국회의원이며 집권당의 사무총장까지 하신 신경식님이 어느날 동작동 사무실로 날 찾아오셨다. 현충원에 오시는 길에 제보를 하나 하러 오셨다 한다. 고향이 충북 청원 문의이신데 이곳에 6.25전쟁 당시에 많은 전사자가 동네 산에 있었다고 한다. 그러시면서 가리킨 곳이 문의 봉화봉 일대고 일부 지역은 대청호에 수몰 되었다 한다.
사실 이곳은 바로 북쪽이 국사봉-시루봉 사이에서 수도사단이 북한군 제2사단의 공격을 지연시킨 곳으로 유명한데 지금도 고은리 야산에 가면 흔적이 남아 있고 유해도 10여구를 발굴 하였던 곳이다. 관련 사실을 알려드리니 한번 가보라 하시며 본인이 집필한 책을 한권 주셨다.
"이 과장님 헨드폰으로 현장을 보여주세요?"
그런데 신의원님이 찾아오시기 전에 어느 분이 국군의 유해가 150여구가 묻혀 있다고 엄청난 제보전화를 주셨다. 직장에 다니고 있어 함께 현장을 가기는 곤란하다며 구룡리에 가서 현장을 보여주면 헨드폰 영상을 보면서 안내 하겠다 한다.
그래서 우리는 이곳으로 달려가 산덕리 구룡리 괴곡리의 마을 주민들을 만나 혹시나 전쟁 당시에 국군의 유해가 묻혀진 곳이 없는지 탐문했지만 없다고 한다.
전쟁은 했느냐는 질문에 이곳이 아니라 회인의 국사봉에서 피반령에 이르는 산이 내륙으로 공비들의 루트였다며 군인은 별로 본 적이 없다고 한다. 공동묘지가 어디에 있느냐고 물어서 공동 묘지를 찾았다. 그런데 가만히 보니 푯말이 붙여진 묘들이 많았다. 이 곳을 영상으로 보여주며 현장 확인결과 맞다고 한다.
푯말의 형태가 꽤나 오래 되어 보이지만 6.25전쟁 때의 것은 아니였고 묘의 형태는 거의 봉분이 무너져 내려 아쉬움이 더했다. 비록 누구의 묘라할지라도 인간의 한계를 느끼게 한다. 이 묘들이 어떻게 푯말이 세워져 있고 이곳에 오게 되었는지 아는 사람이 없었다. 충북지역 어디에선가 무연고 묘들이 발굴 되어 왔을 것이라는 막연한 추측만 할 뿐이다.
도저히 국군의 가매장 묘라고 하기에는 무리가 따라 우린 발굴을 실시하지 않기로 했다.
다. "청주시 상당구 내덕동에 나온 유해?, 5.18광주 민주화 운동 당시에 침투한 북한군의 유해?"
그런데 얼마전 5.18광주 민주화 운동에서 숨져간 분들의 유해와 미확인 보도자료이지만 북한군 특수부대가 들어와 죽어갔고 그들의 유해가 충북 어딘가로 옮겨져 묻혀다가 뭐 어떻게 되었다는 뜬구름 잡는 이야기가 있었다.
나에게 누군가 전화가 왔다. 과거에 충북지역 상당구 내덕동에서 발굴된 유해에 대한 내용이였다. 이곳은 내가 직접 조사를 실시하고 발굴도 일부분 통제하여 보았기에 아는대로 답변했다. 해당 지역은 현재 청주 대성고등학교 인근인데 과거 학교의 강당 신축공사시 유해 10여구가 나왔고 '07년 11월 24일 공사중에 허벅지뼈와 박클, 군화밑창 등이 나와 시립묘지에 가매장 했다는 것이다.
지역주민의 이야기를 들으니 이곳이 과거 청주상고 뒷편으로 '50.8~9월 경에 이곳에 인민군 병원이 있었다며 인민군이 많이 매장 되었을거라고 한다. 그래서 우린 다음에 2월 말에 다시 들어가 주변을 탐사하여 유해 2구를 수습하고 끝냈는데 이것이 어떻게 광주민주화 운동의 북한군 특작부대와 연결이 되는지 의문이 갔다. 하기야 여기서 문경새재가 그리 멀지는 않다.
라. "국사봉 아래 마을에서 멱살 잡히어 죽다 살다." "나쁜 놈들 왜 이제서 와?"
청주 남일면 면대장님이 나보다 한참 선배되는데 한번은 오라해서 갔더니 챠트를 만들어 이곳 국사봉 전투를 소개하며 유해발굴을 해야 한다고 한다. 내가 발굴사업을 통제하면서 이렇게 열심히 그리고 확실하게 준비한 예비군 중대장은 처음이다. 동네 사람들 인터뷰도 미리 다 해서 자료를 내게 내밀으신다.
나는 하나하나 챙겨보면서 가능성이 많은 곳부터 가보기로 하고 효촌리 공군사관학교 울탈리부터 살폈다. 개인호가 원혀이 보존된 채로 길게 연결된다. 다음은 매봉과 시루봉으로 향했다. 이곳도 개인호가 수없이 연결되고 당시 모습 그대로였다.
다음은 무심천을 건너 국사봉 밑의 화당리로 갔다. 마침 논에 모내기를 하고 있고 동네 입구는 도로보수 공사로 차에서 내려 걸어들어가야 했다. 어르신 몇명이 당산나무 밑에 앉아 계서 인사를 올리고, 이미 면대장이 사전에 돌았기 때문에 내가 온 이유는 다들 알고 계시는 눈치다.
"예비군 중대장, 저기 마을 입구 큰 당산나무 있잖아 그 밑에 장교가 죽어서 묻혔고 권총도 있어?"
"혹시 그후에 길을 포장하거나 넓히면서 훼손되지 않았을까요?"
"아냐 있어. 한번 파봐요."
우린 지탐기를 대고 확인하여본 결과 금속성 물질이 탐지되어 뿌리옆을 몇삽 굴토하여 탄피를 찾았다. 그러나 그걸 찾아놓고 나니 아무런 탐지가 안된다. 여기저기 시굴을 몇군데 더 해보고 있는데 모내기하던 사람들이 새참시간이 되어 논둑에 자리를 잡고 몇명이 우리에게 온다.
"너이놈새끼, 잘왔다?"
아니 나이가 꽤나 되신 어르신이 갑작스레 내 멱살을 쥐고 얼굴이 상기되어 금방이라도 한바탕 하실 모양이다. 나는 어리둥절할 시간도 없이 호흡이 막혀 죽을 지경이였다. 얼마나 힘이 많은신지 내 두 손으로 그걸 뿌리칠 수가 없었다. 말문도 안나왔다.
"어르~시~ㄴ 놓고 마~ㄹ 하세요?"
옆에 있는 어른들이 2~3명 달라붙어 겨우 말려놓았다. 어르신이 옛날에 씨름선수였나보다. 무척 당혹스런 우리는 현장을 빠져나가야했다. 면대장이 무척 미안해 한다.
그런데 어르신이 씩씩거리던 호흡을 가다듬더니 나보고 오라 한다. 머뭇거렸더니 한 동네분이 괞찮다며 화해하라 한다. 가만히 보니 어르신이 다리 한쪽이 정상이 아니다. 장애인인데 6.25전쟁 피해를 입은거라며 나를 불러 당산나무밑에 앉혔다.
"여보, 당신을 욕보인거 아냐. 억울하고 분통한데 늦게라도 찾아와 고마워서 그런거야?"
"네 무슨 일이 있습니까?"
알고보니 어르신은 군대도 못갔다. 국사봉밑에 살았는데 포탄이 터져 다리를 잃었다. 겨우 어떻게 출혈이 낭자했는데도 야전병원에서 치료를 받아 살아났다. 국사봉에서 전투한 정승화 대위가 본인 집에 있었다 한다. 나중에 참모총장이 되어 찾아와서 만나기도 했다고 한다.
하지만 본인이 다친 것은 다친 것이고 국군이 지금 공사 비행장 활주로 부근이나 BOQ부근에 수없이 널려 있는데 누가 수습을 안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북한군은 시체를 모두 거둬갔다.
"나라 위해 싸웠는데 국군이 올라간 이후에도 누가 찾지를 안해. 그래서 우리가 묻었어."
"그래서 분통이 나는거야. 동네 개들이 물고 난리치고 여우나 늑대들이 대낮에도 나타나 뜯어먹고 있질않나 빨갱이 놈들은 모두 도망치고 없고 경찰은 와서는 남 일처럼 치우라고만 하고 가!"
어르신 말이 모두 맞다. 창피하기도 하고 그만큼 먹고살기 힘드니 유해는 두번째 문제였을 것이다. 그러니 죄송하다고 말씀을 드리니 당신이 죄송할거야 없지라며 전쟁이 끝나고 현역 군인이 이곳에 온 것은 내가 처음이란다.
"이리 오슈?" 논둑에 앉아 있는 분들이 우릴 부른다. 목발 하나를 짚고 어르신이 앞장서서논둑으로 갔다. 이양기로 하면 빠를텐데 줄을 띄어 모심기를 한다.
"자 한잔 하슈?"
"저는 근무시시간이라 못합니다."
"이걸 마셔야 매장 장소를 알려주겠소. 그리고 하늘의 용사님 영혼이 반겨주고 용서할거요."
이곳으로 공군사관학교가 들어서며 터파기 공사에 얼마나 많은 유해들이 사라졌는지 모른다고 한다. 비행기 활주로 공사간에도 많은 전투 유품이 솓아져 나왔지만 누구 한명 수습하는 일이 없었다는 이야기다. 아니 전쟁이 끝나고 현역 군인이 내가 처음으로 마을에 나타났다는 말에 정말 놀랐다.
이곳은 제8연대와 제17-3대대가 주로 전투를 하는데 8연대가 전쟁전 대대장 월북사건이 났던 부대다. 여기에 연결시키는 것은 무리지만 별별 생각이 다 들었다. 더군다나 육군참모총장까지 배출한 부대인데 전후에 동료유해를 찾는 노력이 없었다니 믿기 어려웠다. 물론 다른 부대들도 사실 제대로된 발굴은 안했고 살아난 전우들이 동료를 찾으러 다니곤 했다.
국사봉을 오르는데 능선에 검은 물체가 움직인다. 살모사다. 나는 묵념을 하고 사라지도록 기다렸다. 그 영혼이 국군인지 적군인지는 모르지만 나는 군인의 영혼이라 믿고 싶었다. 이곳 일대에서 지금까지 10여구의 유해를 발굴했다.
마. "이중령 이리 와 보세요. 피아를 어떻게 구분해요?"
'01년도 1월에 나는 우리가 발굴하고 있는 현장 모습을 사진으로 담아 세상에 알리는 전시회를 기획하였다. 애환이 넘치는 사진 100여장과 당시의 유품을 전시하는 것인데 계룡대 본청 동서남북 문앞에서 1주일씨 전시하였고 국방부로 올라와 전쟁기념관에서 기획전시와 국방부 본관에서도 전시를 하였다.
본청에서 전시할 당시는 전 국가보훈처장을 하셨던 박장군이 정보본부장으로재직하면서 찾아주셨고 그외에 일부 함참 간부급 등이 이 사진을 지켜보았다.
"장관 왔어요?"
우리가 전시하고 있는 본관 1층의 신문지 배달 장소에 많은 사람들이 통과한다. 그런데 나는 아무런 의식없이 오는 분들께 현장 모습을 전해주려 동분서주 하는데 바로 그곳의 사무실에 있는 선임자 한분이 조용히 나를 부른다. 장관이나 차관 또는 합참의장 등 높은 분들이 왔는냐고 묻는다. 그래서 아무 생각없이 정보본부장하고 인사복지실장만 왔다 갔다고 하자 "그러면 그렇지 XXX들"이라며 누구 덕에 장관하고 별달고 있는데 이 숭고한 자리에 와보지도 않느냐고 혀를 끌끌차신다. 깜작 놀란 나를 보고 "당신만 고생하고 있어요. 높은 분들이 관심을 가져줘야 일을 하지 어떻게 발굴하고 있는데 찾아와서 보고 격려를 해 주어야하지 않느냐고 되묻는다.
어느 날에 재향군인회에서 연락이 왔다. 롯데월드 옆에 있는 회관에 와서 전시회를 1주간 해달라는 것이다. 그래서 우린 다시 짐을 싸들고 그 곳에 가 전시회를 하는데 이 곳은 예비역분들이 많아서 그런지 관심이 많았다. 어느 분은 사진을 보다가 분개하여 이렇게 놔두고 "정부는 뭐하고 있었느냐"고 큰소리를 내는 분도 있다.
그런데 누가 와서 나를 좀 보자고 한다. 누구냐고 물었더니 와보면 안다고 하며 사람들이 없는 구석진 곳으로 나를 안내한다. 가서 보니 어디서 많이 본 사람이다. 그 수행비서가 "육군 참모총장이신 정승화 대장"이라 한다
정승화 참모총장님과의 만남
5공 청문회 와 재판과정(12.12사태와 관련)에서 많이 보았던 얼굴이다. 경례를 올리고 찾아주셔서 감사하다고 했더니 오히려 내 손을 꼭 쥐어주시며 "당신이 지금은 애국자요"하며 칭찬을 해 주신다. 그러시면서 발굴 과정을 물어보시더니 질문을 하셨다.
피아판단을 어떻게 하느냐는 것이다. 그래서 나오는 유품과 전사 사실, 지역주민 증언내용 등을 종합하여 한다고 하니 참 잘하고 있다고 하시며 참고하고 한가지 사항을 알려 주었다.
"나는 청주 국사봉에서 대위 달고 대대장을 했어요. 그런데 병력이 한 200명도 안돼. 중대장이야. 그런데 병사들 옷이 없어. 전쟁이 나고 한 달이 다 되어가는데 옷 한번 갈아입지 못했어요."
"그러시면 당시에는 군장이 없었습니까?"
"있기야 있었지. 그런데 한강을 도하하면서 죄다 버리고 몸만 겨우 살아 남았는데 베낭이 없어. 처음 입고 있던 군복을 그대로 입고 전투하는데 비는 또 얼마나 내리는지 흙탕물에 뒤범벅이 되어 사람이 아니라 황토 흙덩이야. 어떤 병사는 군복마저 없어서 민간인 복을 입고 있기도 하고, 학교 교복을 입고도 전투했어요. 발굴 하면서 전투복은 안나오지요?"
"네, 옷종류는 전부 썩어서 나오는 경우가 현재까지는 없습니다."
"그래서 하는 말인데 우리가 국사봉에서 전투하는데 저놈들이 어디서 획득했는지 옷을 잘입고 있어요. 한번은 우리가 공격하여 저 놈들을 물리쳤는데 죽은 놈들 옷을 베껴서 우리 병사들이 입었어요. 그러니 공산군 옷 입었다고 무조건 공산군은 아니라는 것을 알려주려 불렀어요."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정말 한 5분여의 대화에 한번도 나를 무시하는 발언은 없었다. 반말이 없이 아주 겸손하게 조용조용 말씀하시는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바. "보은 회인에 남겨진 한!"
나는 제67사단 포병연대장 시절에 보은 회인을 찾았다. 참전용사님 황대형어른과 함께 한번은 왔고 한 두번은 우리 인원들과 전투지역 탐사차 왔었다.
이곳은 제1사단 병력이 재반격으로 북진 간에 이 곳에 들려 하룻밤을 묶다가 공비들에게 기습을 당해 1개 소대가 전멸한 곳이다. 먼저 용곡리 우레실에 들어가 그 당시부터 살아계신다는 어르신을 만났다. 이야기는 국군은 못봤어도 공비들은 수두룩하 보았다 한다. 바로 국사봉이 아지트로 많은 인원이 공공연하게 줄지어 산능성이를 타고 이동해 다녔다고 한다. 주로 경찰이 낮에만 들어와 있다 오후가 되면 어디로 빠져나가버리고 그놈들이 판을 치고 살았다 한다.
"그러면 이 일대에는 군인이 죽어서 묻힌 곳은 없겠습니다.?"
"그건 잘 모릅니다. 내가 10살이 되어 전쟁인데 그전에도 빨갱이들이 이 곳에 있었어요. 그런데 어느날 전쟁이라는데 저놈들이 몇명을 포승 줄로 묶어서 끌고 다니는 것을 보았는데 저기 산중턱 우리밭 언저리에 한명은 죽어서 묻혀 있어요."
"군인이니 경찰인지 혹시 아시나요?"
"그건 확실히 몰라요. 부상당한 인원이 죽으니까 그 곳에 대충 묻어서 나중에 보니 뼈기 노출되어 있었어요. 그래서 아버지가 다시 좋게 묻어주었지요."
"혹시 이 곳 어딘가에 많이 죽어 있다는 소문을 못들으셨나요?"
"아 패잔병에게 1개 소대가 죽었다는 곳이 있는데 지금 그 집이 월남전에 참가한 해병대출신이 살고 있어요" 우리는 어르신을 모시고 그 집으로 향했다.
"작전에 실패한 용사는 용서할 수 있어도 경계에 실패한 용사는 용서할 수 없다."
이곳 회인 전투는 '50. 9.29~30어간에 보은 지구를 탈환하는 국군 제1사단 제15연대가 패잔병들에게 당한 뼈아픈 패배로 무려 1개 소대 병력이 전원 전사하는 비극이 발생한다.
제15-1대대가 지휘소를 회인에 설치하고 3중대는 오봉산(서쪽에 봉우리가 다섯이라 하여 붙여짐)에서 내려와 죽암리-회인에 이르는 도로 상에 초소를 배치하고 부락에서 숙영하였다.
"정지, 누구야?"
쫄병 김이병이 수하를 한다. 고참 김병장은 마을에 내려가 주모앞에 엎드렸다. 야밤에 패잔병 무리들이 이동간에 마을에 국군이 잠들고 있다는 정보를 획득하여(지역 프락치의 연락?) 당당하게 걸어서 들어왔다.
김이병은 김병장을 불렀으나 이미 한잔술에 주모 품에 안긴 김병장이 그 애타는 목소리를 들을리 없었다. 패잔병이 초소에 와 태연하게 신병의 총을 내리고 입에 자갈을 물린 후에 병력이 어디에 잠들고 있는지 확인하여 수류탄을 까고 총을 난사했다.
오늘 나는 그집에 간다. 소주 한병을 사서 들었다. 늪실부근인데 마침 월남전 참전 해병대 용사님이 계시다. 요양중이란다. 이런 사실을 아느냐고 물으니 알고 있다 한다. 누가 살지않아 페허가 된 집을 본인이 수리해서 살고 있다고 한다.
"혹시 그 당시에 유해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바로 저 앞 밭에 묻혀 있다가 그 다음 해에 병력이 와서 발굴해서 화장까지 해서 갔어요."
기막힌 사연은 또 이어진다.
사. "새말에 가면 한동네에 제삿날이 같은 집이 10집이 넘어요."
우리는 다시 그 곳으로 이동해서 이장님을 찾았다. 하지만 말을 안하신다. 동네분들에게 물어봐야 한다고 한다. 아니 우리가 무슨 프락치도 아니고 경찰도 아니고 유해발굴하는 발굴단이라해도 못믿겠다는 눈치다.
그동안 얼마나 고초를 당했으면 그럴까하는 마음이 아프다. 결국 회인 파출소에서 순경이 한명 나타나서야 신뢰가 해결 되었다.
"들어온 군인이 가담한 지역주민 모두를 죽여버렸습니다."
청원-상주간 고속도로 공사가 진행중인데 우리는 그 교각 밑으로 이동했다.
"이곳에 한 15명은 묻혔지요."
사연은 이렇다. 이 동네에 육군 중위출신 군인이 한명 있었고 장가를 들어 그 집에는 색시와 부모님 등 여럿이 살고 있는데 북한군이 진입하고 나서 빨갱이들이 이 식구들을 잡아다 다 죽였다 한다. 여인은 자기들 몸종으로 데리고 다니기도 하면서 결국은 국군이 올라온다는 소문이 도는데 그 색시마저 죽여 버리고 말았다 한다.
마침 해당 군인이 제1사단 소속으로 이곳에 들어와 색시를 찾고 부모님을 찾으니 다 죽은 뒤였다. 한맺힌 장교는 이 일대에 부역을 했다고 손가락이 가리키는 모든 사람을 다 잡아 저 교각이 있는(그당시는 개천가)곳에다 다 쏴 죽여 버리고 일부는 도망치다가 여기저기 죽었는데 정말 온동네가 피바다였다고 한다.
"돌아버린 장교님 세월을 용서하소서. 죽어간 넋들이여 하늘날에서는 편가르기 마소서!"
아."제11연대 3대대장 이중령과 부대대장, 운전병을 찾아라?"
직접 대대장을 묻었다는 참전용사님이 전화를 했다.
회인에서 처절한 희생과 보복의 핏발이 하늘을 찌르고 있던 같은 시기에 미원으로 진출한 제1-11연대 제3대대 또한 북으로 이동하는 패잔병과 조우하여 차량으로 움직이던 대대장 이중령, 부대대장 이궁하 대위, 운전병이 전사했다.
기습을 받다보니 유해처리는 곤란하고 바로 이동 명령이 떨어져 출동해야 했다. 그래서 용사님이 직접 산모퉁이 소나무 밑에 가매장하고 떠났다. 그러나 어쩌다 보니 잊어지고 말았는데 방송에서 유해발굴 한다는 것을 보고서 전화를 주신 것이다.
하지만 괴산-미원-청주.대전을 연하는 19번도로가 단차로에서 4차로로 확장 되어 현장은 사라지고 말았다. 물론 우리의 판단은 이 용사님이 지금('10)전화를 하지만 아마 대대장이란 직책을 고려시 제1사단에서 발굴하여 현충원에 안장할 수도 있다는 의견을 개진하였다. 그래서 혹시라도 현충원을 찾게 되시면 저분들과 확인하여 전화를 다시주시라 했는데 그 뒤로 소식이 없다.
3. 화령장 전투(제17연대)
화령장은 경북 상주군 화서면에 위치한 곳으로 보은과 괴산에서 상주로 연결되는 교통의 요지다. 북한군 제2군단 제15사단은 7월 10일 음성을 점령한 후 제50연대를 청안-미원을 경유해 보은으로 진출시키고, 그 주력(제45.48연대)은 괴산-상주 방면으로 남하시켰다.
하지만 문경에서 국군 제6사단의 분전과 유엔 공군기의 폭격으로 포병으로 진출이 느려져 제1사단을 따라 진출하던 적15-50연대를 미원에서 접촉을 피하고 16일 야간에 상주방향으로 진출을 기도한다. 그러자 육본은 수도사단에 배속 되었던 제17연대를 함창으로 보내 제2군단의 예비로 사용토록 하였다.
그러나 화령장을 지날때 지역주민의 제보로 이미 북한군 일부가 상주로 들어갔다는 사실을 파악하고 지역청년단장 등과 상곡리 일대로 대대장이 진출중 자전거를 타고 오는 북한군 전령을 생포하여 심문결과 이들이 적 제15-48연대라는 것과 곧 본대가 금곡리에서 휴식할 예정이라는 것을 확인하여 이동중인 부대를 이곳 일대에 매복하기로 한다.
드디어 17일 오후에 적 부대들이 모여들고 저녁을 먹기 위해 휴식을 하고 일부는 냇가에서 목욕을 하는 등 어수선한 틈을 이용하여 기습적인 사격으로 각종 포와 탄약을 실고 가던 우마차의 소들과 말들이 날뛰어 아비규환이 되었다. 적 250여 명을 사살하고 소총 1,200정을 노획한다.
같은 시각에 연대는 미 제25사단 제24연대와, 포병등 예하부대들이 상주방면에 투입되었음을 알고 먼저 지나간 부대를 추격하려던 계획을 취소하고 다시 후속하는 부대를 격멸하기로 하고 부대를 49번 도로를 따라 동관리 일대 서쪽 산기슭에 매복하게 된다.
드디어 7월 20일경 앞선 부대들의 상황을 모르는 적 제15-45연대가 이 골짜기로 모여들어 집중적인 사격을 받고 356명이 사살되고 26명의 포로 획득과 기관총 53종, 소총 186정을 노획하였다. 이 전투에서 아군은 전사 4명, 부상 30명의 피해를 입었다.
그러나 이어진 북한군의 공격으로 쌍방간(북한군:미군)에 무차별적 포병사격이 가해져 제17연대는 장교 3명과 사병 16명이 전사하고 20여 명이 부상하게 되며 미군은 북한군의 침투공격에 속수무책으로 전쟁 공포증에 걸려 공용화기 등을 버리고 후퇴해 버렸다.
가. "보이지 않는 시체-적군 유해를 발굴해 달라?"
전사에 나오는 내용을 다 믿고 안믿고는 나름의 문제다. 나는 유해발굴 책임자로써 모든 전사는 가치가 있다. 하지만 그 가치란 바로 점검을 통해서 진실여부가 결정되게 된다. 이미 충주의 동락전투에서 이 부대들은 많은 피해를 입었다. 적어도 기록 그렇다.
그러나 북한군이기에 그 유해를 확인하는 과정은 진실성에 의문점을 갖게 했다. 그 많은 시체가 어디로 갔다는 것인지 현장에서 발굴을 직접 해봤던 나는 동네분들의 진술이 일관 되지 않고 있음을 보았다.
그런데 이곳 전투도 비록 아군이 몇명 전사하지는 안했지만 나름 북한군의 유해는 많이 묻혀 있으리라 보았는데 우린 동관리에서 그것도 뼈조각 일부인 1구의 유해를 발굴하는데 그쳤다.
하지만 한번의 발굴이 아닌 여러번의 발굴이 이루어져야 했다. 상주가 고향이신 6.25전쟁 참전 전우회 회장 박희모 장군(갑종출신)이 연락이 와 찾아가 만났더니 화령장의 유해를 발굴해 달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미 몇번의 노력끝에 발굴할 곳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는 나는 실효성이 없다고 말씀드렸으나 선뜻 받아들이질 않으셨다.
세월이 흘러 얼마가 지나 다시 발굴단으로 직접 찾아와 화령초교(폐교)자리에 역사관을 만들려고 한다며 북한군 유해를 발굴하여 보관하겠다는 취지의 이야기를 하신다. 하지만 없는 것을 발굴하라니 참 난감했다. 이분은 내가 야전에 서 만난 첫번째 사단장님이고 안보국장인 박대령은 나의 첫번째 대대장님인데 입장이 난처했다.
그래서 다시 동관리, 상곡리로 내려가 지역주민을 만나 그 당시를 추적해 갔다. 갈령에서 내려서면 첫번째 주유소가 나오는데 그래도 그분이 가장 신뢰할만한 정보를 소유하고 있다고 본다. 함께 한나절을 의견을 교환한 결과 북한군 시신이 주로 강가에 널려 있었는데 사실 다 장마시기에 훼손되었다는 것이 중론이다.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많은 시체가 이곳에 없었고 대부분 긁어모아서 한곳에 매장하게 되는데 그곳이 지금 길을 넓히고 있는데 그 밑으로 들어가 발굴이 곤란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하지만 과연 전사에 나오는 내용처럼 500여 명이 죽었는지는 의문점이 남았다.
지역 주민의 신고정신으로 북한군을 격멸은 했지만 북한군이 주둔하는 시기에 이곳에 있던 유력인사나 군인,경찰, 공무원의 가족들이 모두 붙잡혀 가고 일부는 프락치들이 인민재판을 통하여 죽이기도한 공포의 3개월이 있었다고 한다.
나. "견훤의 숨터인 청계사"
이곳에 가면 삼국시대 상주 지방에 있던 지방 부족장인 아자개와 견훤의 전설이 살아 있다. 살곡리에서 청계사로 들어가면 그 절 입구에 천연장벽인 엄청 큰 바위더미가 나타난다. 이곳에 올라 망을 보면 누가 들어오는지 훤하게 보인다. 그래서 들어가 스님을 만나고 전쟁관련 비화는 없는지 물었으나 그런 이야기는 모른다고 한다.
그러시면서 견훤이 어린시절 때를 기다리며 은거했다는 바위를 알려주어 그곳에 들어가 보니 정말 기이하게 생긴 견훤의 발가락이란다. 이곳에 은거하면 누가 찾아들기 어려워 보인다. 그렇다면 화령장-동관리 전투간 기습을 받은 북한군이 동쪽 산으로 피신하면 당시에 길 동쪽편에 병력이 배치되지 않했으니 얼마든지 소개하여 살아 남을 곳이였다.
다. "동관음에 1개소대가 묻혔다."
나는 6.25전쟁 참전전우회 회장님의 화령장-동관리 북한군 유해를 발굴해 달라는 요청을 들어주지 못해, 과거 나의 직속 상관이란 점에서 마음이 편치는 않았다.
그런데 어느날 전우회에서 연락이 왔다. 갈령 밑에 국군 제1사단이 1개소대가 묻혀 있다는 것이다. 설마 하면서도 참전용사님 증언이라니 조사를 나가야 한다. 갈령에 도착하여 탐사반 1개팀을 형제봉으로 올려 보내고 1개반을 청계사 뒤로 올려 보냈다.
"국군 제1사단의 갈령 전투('50. 22~25)
국군 제1사단은 보은에서 '50. 7월 20일 춘양으로 이동하게 되어 있었다. 하지만 제17연대의 화령장 전투, 긴급히 22일 화령장으로 진출하여 미 제25-24연대장으로부터 철수하는 부대를 엄호해달라는 부탁을 받고 제11연대에서 1개 대대를 미군 포병대대를 엄호토록 하고 제12연대를 동관리로 제11연대(-)를 송계초등학교와 585고지 일대에, 제13연대는 화령장에 위치하되 1개 대대를 585고지 전방으로 진출시켰다. 제17연대는 봉황산에 위치하여 배후로 들어오는 북한군을 격퇴하도록 하였다.
비무장 인원들이 많았던 제12-1대대는 장자동-형제봉으로 공격을 하게 되며 먼저 들어와 있던 미군들이 북한군의 포격에 혼비백산하여 버리고간 무기가 산더미같이 있어 이걸 가지고 전원 무장을 했다 한다.
그러나 북한군의 강력한 저항으로 형제봉은 점령하지 못하고 7월 24일 미 제25사단에 진지를 인계하고 안동으로 이동하고 봉황산의 제17연대는 예천으로 이동하라는 명령을 받게 된다.
"1개소대가 묻혔다는 관음동 산 언저리에 묵은 밭이 있다." 어떤 정황인지는 모르지만 제12연대 1대대가 공격을 한 것은 사실이니 우린 탐지기를 들고 하룻동안 그 일대를 탐지해야 했다.
하지만 관음동이나 맞은편의 585고지 일대도 우리는 전투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밭언저리에 볼록하게 올라온 곳이 아니냐는 질문에 혹시나 하는 생각에 내가 직접 삽을 들고 우리 모두가 굴토 했으나 밭을 개간하면서 밀어논 흙일 뿐이다.
"화령장에서는 우리 전투다운 전투가 없었어요. 오히려 경들못 전방고지에서 많이 상했지"
나는 황대형 선배님께 이곳 전투를 물었다. 제13연대 기관총 사수였던 용사님은 지금까지 내가 만난 용사님중에 기억력이 최고다.
제17연대가 전공을 세워 모두 1계급 특진을 했고 우리는 들어갔다가 미군이 와서 상주서북방으로 이동해 들어갔지 큰 전투는 없었다고 한다.
"나는 제1사단의 전투 기록은 너무 완벽하게 이루어졌다고 본다. 하지만 그건 기록이 사후에 그렇게 되었다고 감히 말하고 싶다."
라. "예의리 무명고지에 남아 있는 미군 전투화"
49번도로-24번도로-997도로를 이용해 상주에 갈 수 있다는 루트를 따라가다 예의골에서 한 어르신을 만났다. 연세가 있어 보이는데 괭이를 들고 밭에서 일을 하시고 계시다.
"어르신 좀 쉬셨다 하세요?"
"뭐하러 다니는 분들인가요?"
벌써 미군들은 전쟁중에도 왔고 우리가 가지전에도 한번 다녀갔다고 한다. 이곳은 메 제25사단 제24연대가 일시적 점령하여 전투하고 포병들은 무차별적 포탄을 퍼부었던 곳이다. 하지만 병력 구성원들이 얼굴이 까만 인원이 많았고 대부분 어려서 사실 전투력 발휘는 아니였다.
하지만 이 어른의 이야기는 국군이 먼저 높은 고지(585m)에 올랐고 경찰도 왔다 갔다고 한다. 미군은 그 후에 왔다가 이 산에서 육박전까지 하다 밀려서 내려가고는 오지않았다는 설명이다. 전쟁의 실체는 살아남은 자가 기록에 남겨야 이루어지는 평가이기에 그 가능성만 우린 판단하고 지역 일대를 모두 탐사하게 된다. 남쪽 서원리쪽에서 임도를 따라 올라서면 쉽게 오른다는 안내를 받았다. 어르신은 국민학교 3학년때 전쟁이라고 한다. 허나 이 동넨 전쟁도 몰랐다는 이야기다.
우린 고지에 올랐다. 하지만 개인호나 교통호는 보이질 않는다. 소문대로 미군은 포탄과 비행기로 싸우고 북한군은 하늘에서 쏟아지는 불폭탄(네이팜탄)에 놀라서 엄폐된 곳을 찾기에 바빴다. 많은 인원이 죽어가고 미군은 걸어서 산을 올랐다. 그러나 후방으로 침투한 적이 포병부대를 기습해 포탄사격이 멈추자 다시 역습으로 고지를 빼앗아 버리고 미군은 줄행랑을 치고 말았다. 산은 완전히 불에 타버려 개미들이 걸어가는 모습도 아래서 볼 수 있게 되어 버렸다. 동네 아이들이 올라서고 어른들이 올라서고 탄피와 포탄 신주를 구해 돈으로 바꾸고 엿으로 바꾸고 한때는 수입도 괜찮았다고 한다.
우리는 포탄이 떨어진 탄흔이 군데군데 있음을 확인하고 한 탄흔을 굴토하였다. 탐지기 소리가 요란해서다. 그런데 파고 보니 미군전투화가 나왔다. 전투화 끈을 매는 코다리에 철이 있어 요란했던 것이다. 혹시나 미군 유해를 발굴하나 싶었던 기대감이 사라졌다.
마. "낙서리에 탱크를 올라탄 미군 탱크"
산에서 내려온 우리는 낙서리로 향했다. 노인정에 들러 찾아온 목적을 이야기 하고 서원리에서 들었다며 미군탱크 사연을 물었다.
"그걸 이제와서 뭐하러 조사해요?"
"우리를 살려준 미군인데 혹시 유해라도 어딘기에 있다면 발굴해서 본국으로 보내드리려고요."
"양키 놈들은 소풍온 기분이야. 저기 다리있잖아요. 거기다 놓고 나와서 냇가에 가 목욕해"
"그해 여름이 유난히 더웠다고 하던데~"
"덥기만 해, 비도 억수같이 자주 내렸어요."
"혹시 어르신이 탱크를 보셨나요?"
"논둑에 떨어진 것은 보았지. 그런데 먼저 지나간 탱크가 내려오다 다시 북한군이 공격했는지는 몰라도 그 탱크 위로 올라탔서."
"그럼 타고 있던 미군은 어떻게 되었어요?"
"북한군이 데리고 갔지. 그 다음은 몰라요. 미군은 무기며 차량이며 놓고 도망가 버려"
"이곳에서 예의리 높은 산에 포병이 사격을 했다고 하던데?"
"바로 밑에 동네 평지리에 깔려 있었지. 그런데 북한군이 벌써 주변 산속으로 밤에 들어왔어요."
"남장동 빼골에 유해가 있소"
평지리에 가서 미군 포병이야기를 들었다. 하지만 이 자리에서 죽어나간 미군은 못보았다 한다. 미군이 들어오고 얼마안되어 북한군이 동네에 나타났는데 북한군이지도 몰랐다고 한다. 일부는 총도 없고 군복도 아닌 교복을 입고 있는 인원도 있고 밥을 굶었다고 해서 밥도 해서 주었다고 한다. 불쌍하니까.
나중에 소문을 들으니 북한군이고 미군부대를 침투한 후에 다시 상주로 갔다 한다. 우린 이야기를 따라 25번 도로상 능암리-남장동으로 갔다. 집집마다 들려서 탐문을 해 보았다. 남장동에서 남장사에 오르는 길에 개천이 있는데 이곳에도 미군 포병이 있었고 군인들이 죽어서 개울에 버렸고 빗물에 떠내려 갔다고 한다.
북천은 동쪽으로 흘러서 낙성동에서 동천과 만나 병성천이 되어 낙동강으로 흐른다. 이곳에 높은 산이 노음산(725m)이 있고 신라시대 고찰인 북장사, 남장사란 절이 있는데 전쟁과는 임진왜란시 악연이 있고 6.25전쟁과는 악연이 없다한다. 북장사 괘불탱화는 우리가 소문으로 알고 있는 파랑새의 전설이 깃든 불화란다.(그림을 그리던 스님이 파랑새이고 보지 말라 했는데 문틈으로 보아 완성되기 전에 날아갔다는 설)
남장동 일대는 감나무가 천지다. 곶감이 여기저기 매달려 상주곶감의 발상지같다. 그러나 북천에 유해가 버려졌다면 이곳 어딘가에 유해가 있으리라 믿어지는데 누군가 빼골에 있다며 손수 안내를 자청해서 우린 그곳에서 시굴을 해보았으나 아무것도 나오지 않는다. 길이 확장 되어도 강쪽으로 되어 별로 변함이 없는데 왜 없을까?
"지역 주민 누군가 약하러 밤에 몰래 파갔다"
한참을 발굴하고 있는데 자전거를 타고 가는 어른 한분이 다가섰다.
"뭘 찾아요?"
"6.25전쟁 때에 군인이 묻혀 있다고 해서 파고 있어요."
"묻힌 곳이 거기가 아니고 우리집 옆인데 전쟁끝나면서 사람들이 파갔어요. 약한다고 파갔는데."
허무했다. 나라위해 싸우다 죽었는데 병들은 사람 살린다고 파가서 어떻게 했는지 참 아니다. 이렇게 용사드님들은 죽어서도 희생이다.
4. 함창 부근 전투('50. 7. 28~29)
갈령부근에서 내려온 제1사단은 상주를 거쳐 7월 26일 오전에 함창에 도착하여 국군 제6사단의 전면을 위협하는 북한군의 후방차단 임무를 수행하게 된다.
이에 따라 제1사단은 제13연대는 군단의 서측방을 방어를 위해 경들못 밑의 국사봉 일대로 전개 시키고 제11,12연대는 3번/34번도로 우측방에서 공격을 개시히여 오정산(810m)을 넘어 오천리가지 한때 진출하지만 제6사단 정면의 적이 우회하여 901번도로 영강 북안에서 농암-어룡산 부근으로 공격해 옴에 따라 명에 의거 부대를 제11연대를 국사봉 일원, 제12연대를 경들못 일원, 제13연대를 32번도로 경들못 위 366-428고지로 재배치 한다.
또한 이곳에서 부대 통합이 이루어지는데 제11연대는 제2사단의 제5연대와, 제12연대는 제20연대를 통합하며 제16연대는 안동의 제8사단에 편입된다.
이 당시에 국군 제6사단은 제3번 도로를 중심으로 작약산-조봉 정면에서 북한군의 공격을 저지하고 있었다.
'50.7. 28일 04:00에 경들못 서측방 아천리에서 적의 공격을 시작으로 북한군 제1사단 1개 연대및 제13사단의 공격이 시작되어 전투가 개시되며 이미 북한군은 그동안 많은 전투로 피로증이 겹치고 병력이 아군의 포병과 비행기 폭격으로 손실되어 남한에서 학도병을 강제 징용하여 전장에 내보내는 처지가 되었다.
가. "경들못에 내 전우들이 들어가 전사했어요."
제13연대 소속인 황대형 용사님이 '05년도 어느날 증평에 우리 연대에 오셨다. 국사봉과 경들못 위 428고지에서 전투를 했다고 한다. 국사봉에서는 그리 많은 피해는 없었지만 경들못 위에서 전투중에 한밤중에 적이 기습공격하여 밀리는데 그만 저수지속으로 수없이 들어 갔다고 한다.
우린 아천리 감바위부터 양범리서낭당 고개까지 탐문을 하는 가운데 바로 감바위 시골버스 타는 곳의 가계 주인장이 당시에 제13연대에 소속되어 노무자로 전투를 한 용사라는 것을 알았다.
"감바위 고추밭에 나타난 검은 그림자"
당시에 이 32번도로 상에는 시신이 깔려 있었다 한다. 국군이 아니라 북한군이 주로 죽어 치우지않고 널려있는데 북한군이 총도 없고 군복도 안입고 포로를 잡았더니 15살도 안된 학생이 있다고 한다. 가게주인은 제13연대를 따라 다부동까지 갔으며 북진간에 집으로 돌아와 전쟁 후에 군대를 다시 갔다가 왔다고 한다.
"그럼 지금 참전용사님이 아니겠네요?"
"그건 몇 년 전에 보훈청에 관련 사실을 인후보증으로 최영희 장군(당시에 연대장인데 집에서 잠을 잤다고 한다)이 확인서를 써주어 참전용사증을 받았어요."
황대형 용사님이 물었다."여기 경들저주지 물이 다 빠진 적이 있는지요?"
"여기에 북한군도 수없이 죽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는데 물을 완전히 빼서 확인한 적은 없어요.내가 군에 갔다온 기간('54~'56)은 몰라도 계속 살았으니 알고 있습니다."
"우리 밭에 몇구 묻어있는 시신이 있긴 한데 적군인지 아군인지는 몰라요"
"아니 이곳이 집이고 노무자로 참여했다면서 모르신다니?"
"시체가 여기저기 뒹굴고 있는데 홀딱 옷을 벳겨가 버려서 아버지가 불쌍하다고 묻었다고 해요."
"아버지는 피난을 가지않으셨나봐요?"
"못갔지요. 여기서 살아남은 것만 해도 천운이에요"
우리는 밭언저리에 볼록한 지역을 파기 시작했다. 나를 따라온 정보장교 정대위가 의리도 있고 국가관도 좋고 전남 광주출신 학사 장교인데 열심이다. 하지만 아무것도 안보은데 갑작스레 바로 옆 풀섶에 무언가 지나간다. 내가 가장 먼저 확인하여 작업을 중단시키고 지켜보니 검은 독사다.
"또 뱀이야" 나는 묵념을 하고 기초굴토를 중지시켰다. 이곳은 나중에 내가 육본에 들어가 집중 발굴했지만 유해는 없었다
나. "뭉우리 고개, 안용리 금광굴에 묻혀 있는 민간인 유해?"
지역주민이 두곡리 뭉우리 고개, 은척 무릉리에 유해 묻힌 곳이 있다하여 현장 조사를 실시했다. 뭉우리 고개에는 고개 북쪽편 밭에 시신이 묻혔다고 하는데 탐문결과 민간인 피해지역으로 판명되어 아쉬웠다. 무릉리지역은 인민재판에서 죽은 시신을 묻어놓은 곳이고 나중에 유족이 발굴해 갔다고 한다.
탐문 도중에 연세가 무척이나 많으신 분이 안용리에 금광굴이 있고 아군이 그 속에서 휴식을 취하다 전원 전사하여 수십구가 있다고 한다. 직접 보신거냐는 질문에는 가보지는 안했고 소문이 그렇다고 한다. 단 1%의 가능성만 있어도 찾아가는 것이 우리의 의무다. 그래서 열심히 안용리로 향했다. 안용리에는 광산이 많았다.
다. "우리 형님이 이곳에 묻혀 있소"
'00년도 6월에 나는 본인의 형님이 수창봉에 묻혀 계시다며 발굴을 요구한 민원인을 대동하고 이곳에 온 적이 있다. 형제가 함께 군에 들어와 한명은 돌아가라하여 형이 동생보고 집에 가라하여 돌아왔는데 영원히 돌아오지 않았다는 것이다. 민원인은 대전에서 조그만 회사의 사장인데 그동안 몇번에 걸쳐 함께 전투했던 동네 형과 형님을 찾으려 수창봉에 올랐다 한다.
"수많은 유족들이 시신을 찾으러 삽/괭이 들고 올라서다"
민원의 이야기는 그당시 전쟁때는 군인들이 지역별로 함께 갔다고 한다. 대전이 적에게 피탈당하고 부산으로 피난중이던 형제는 어느 학교 운동장에서 간단한 교육을 받고 함께 문경으로 들어와 제6사단 제19연대가 되었다 한다.
민원인이 이안에서 점심을 샀다. 안용저수지 우측으로 들어서 흑연광산이라는 곳을 지나 수창봉에 올라서니 산 전체가 개인호다.
"형제들이 와서 개인호를 무려 한달이상 머물며 이 일대를 다 파보았소"
능선이 5km는 족히 되는데 9부능선아니면 바로 능선 정상에 정멀 엄청난 개인호가 깔려 있다고 하는 표현이 맞다. 아니 도대체 몇명이 점령했기에 이렇게 많은 숫자가 있는지 놀라는 순간도 잠시 함께한 민원이 하는 말이 형제를 찾으려는 유가족들이 와서 거의 한달이상 호마다 다 파보았다 한다. 기막힌 이야기다. 얼마나 아팠을까. 모두가 대를 잇는다며 형이 돌아가고 동생이 전장터에 남는 것인데 동생을 내보내 살게한 형님을 찾는 동생의 인간적 미안함이 얼마나 클까! 그후에 우리는 이곳을 샅샅이 재발굴하였지만 수천개의 호에서 단 1구의 유해만을 찾았다.
"그건 빨갱이들이요"
그런데 오늘 또다시 그 걸었던 길을 따라 광산굴을 찾아간다. 이안에서 차량으로 한 10분을 달려 저수지둑으로 갔다. 가는 도중에 선동이라는 곳에서 논에서 일하는 한 어른을 만나게 되어 우리의 목적을 알려주니 깜짝 놀라시며 아니라고 한다. "여기서 죽은 군인은 모두 찾아 갔어요. 그 광산굴이란 곳은 지금 폐쇠되어 있는데 북진하면서 빨갱이들을 붙잡아다가 경찰이 죽인겁니다."라고 말씀하신다. 그래서 우리는 가는 길을 돌렸다. 편안히 계시라고 간절한 묵념은 올렸다. 전쟁이 죄인이다.
라. "상주대학교 자리, 공검 지평리에 국군이 많이 전사하여 묻혔다."
여기저기 소문을 들은 이야기가 쏟아져 나왔다. 그러나 10에 하나가 살아남고 9는 훼손이나 확인불가 경우가 많다. 상주대학교는 지금 경북대학교 상주켐퍼스로 바뀌었으며 그 정문자리일대라 하는데 이곳은 3번도로를 따라 내려 가면서 계속 전투가 이루어지는 과정에 발생한 가매장지역일수도 있다. 그러나 학교부지 조성간에 이미 다 훼손되어 현장 보존이 어렵고 그 뒷산들은 개인호 등 전투 흔적이 그리많이 남아 있지않았다.
공검 지평리는 경들못 바로 밑에 동네로 이안천이 굽어흐르고 있는데 국사봉일대 탐사간 많은 개인호를 발견하고 탐지를 했으며 발굴 작전도 했지만 유해는 찾지 못했다. 이유는 많은 분들 이야기가 시신을 강물에 떠내려보내버리거나 강바닥에 묻었다 한다.
마. "공검 중소리에 적군 20구, 아군 1구를 묻었다"
한 제보자가 전화를 했다. 본인이 직접 참여했다며 가보면 동네사람들이 다 안다고 한다. 그래서 나는 어느날에 차를 몰아 중서리로 갔다. 중서리는 국사봉 서쪽 마을로 이안천 북안이다.
우리의 임무는 국군 전사자 발굴이지 북한군은 아니다. 물론 지금까지 발굴된 13,000여 명의 발굴유해중에 적군이 1,500여명은 된다. 하지만 알고 발굴하는 것이 아니라 발굴하다가 나오는 유해중 유품이나 지역 주민제보 등을 기초로 피아판단을 하는 것이다. 일단은 현장을 조사하러 조사팀을 보냈다. 이미 국사봉일대는 두번에 걸쳐 탐사가 이루어졌다.
"홍수시 강물에 다 떠내려 갔다."
이럴경우에 우리는 난감한 경우가 많다. 지역주민을 만나 진술을 들어보았다. 북한군이 강을 건너려 이 동네에 많이 들어왔다고 한다. 또한 어느날에는 강건너 국사봉지역에서 병력이 강을 넘어 들어오기도 한다. 묻혀진 유해는 주로 강변인데 그동안 수차례 홍수로 강변이 다 휩쓸려 나가고 강둑이 다시 만들어져서 찾기는 힘들다고 한다.
전사에도 보면은 제13연대 제3대대가 연대 예비에서 이곳 국사봉을 28일 새벽에 점령하고, 여기에 제6-19-제2대대가 합세하여 이안천으 도하하여 공격하는 북한군 제1사단 예하부대를 격멸했으며 강변에 50여 구의 시체가 흩어져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바. "우리 동네에 야전병원이 있는데 아군 3구를 주민들이 묻었다"
함창에서 점심을 먹는다. 하름한 식당에 들러 한식으로 점심을 먹기로 하고 손을 씻으려니 수돗가가 없다. 주방에 들어가 닦아야 했다.
주방장이 가게 아저씨다. 우리 복장을 보고 좋은 일 한다며 칭찬을 해준다. 나와같은 나이 55세다. "우리 동네에 전쟁 때에 야전병원이 있던 자리가 있는데 옛날 어른들이 그곳에 국군이 묻혀 있다고 하던데요."
"혹시 그곳이 어딘지 모르시나요?"
"오동리에 가셔셔 노인정에 들르면 알 것입니다. 옛날 병원 자지를."
우린 숨차게 밥을 먹고 바로 그곳에 가서 이장님을 찾아 6.25전쟁을 격으신 어른을 찾았다. 뭣때문에 그러느냐며 묻던 이장은우리의 이야기를 듣고 즈 장소는 본인도 안다고 하여 함께 갔다.
이곳 일대는 많은 부대들이 거쳐가면서 지휘소가 위치하던 곳이라고 한다. 이렇게 해서 현장을 찾았고 몇명의 어르신들이 나와서 확인해 주셨다. 그리고 우린 '09년도에 이곳에서 1구의 유해를발굴했다. 그러면 3명이라 했는데 어떻게 된 것인가에 의문이 들어 주변을 더 넓게 확장하여 발굴해 보았지만 없다.
저멀리서 어느 분이 걸어오신다. "여봐요 거기 유해 사람들이 약한다고 파갔어!"
제1사단은 3번도로상에 지향되던 적의 공격이 제1사단으로 지향되는 싯점에 좌우 인접 전선이 무너져 전선을 남쪽으로 이동해야만 했다.
이에따라 미 제8군사령관의 명으로 8월 1일 낙동강 방어선으로 철수하기 위해 우인접 제6사단의 철수를 엄호하고 이어서 제12연대의 도하지점인 낙동리를 확보토록 하고 8월 3일까지 철수를 하여 우측은 제6사단과 좌측은 개전이래 최초로 미 제1기병사단과 협조된 방어진지를 편성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