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세종은 “때를 따라 교회 예배에 참석 한다... 주일이 되면 혹 교회의 집회에 참석하기도 하고 혹은 전도나 구제하러 나가기도 하고 혹은 혼자 산에 올라 명상하기도 한다.”고 했다. 정경옥의 말대로 이세종은 사경회가 있을 때는 광주교회에 갔으며, 자주 나주 다도면에 있는 방산교회에 나갔다. 그 곳에서 제자 이현필을 만나기도 했다.
이세종은 광주 중앙교회 최흥종의 소개로 저녁 예배 강사로 가기도 했다. 그러나 이세종은 주로 자신이 세우다시피 한 동산교회에 다녔다.
이세종은 이 동산교회에서 3년이나 설교를 했다고 한다. 또한 이세종은 등광리의 자신의 산당에서 주로 가정예배 형식의 예배를 드렸다. 당시 등광리에는 교회가 없었기 때문에 자신의 산당에서 홀로 혹은 제자들과 함께 가정예배 형식의 예배를 드렸다. 이세종이 활동하던 당시 일본의 무교회주의자 우찌무라 간조에게 영향을 받은 화순지방의 안학수와 한국의 젊은 평신도 지도자들, 특히 김교신을 비롯한 여러 무교회주의자들이 활동하던 시기에 이세종은 이들과 같이 평신도로서 성경을 가르치며 독자적인 성경공부 모임을 이끌었지만, 무교회주의를 주장하지 않고 교회에 출석했다는 점은 그 당시 다른 평신도 무교회지도자들과 차이점을 보인다. 그러나 이세종은 당시 기성교회가 행락주의로 흐르고,환난당하면 안 모이고 평안하면 갈아치우는 것과 행위 없음에 대해 비판하기도 했다. 비록 그가 당시의 무교회주의자들과 비교해서는 교회를 긍정적으로 보았지만 기성교회에 대한 태도는 비판적인 성향을 보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