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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말씀의 향기♣ No2619
12월2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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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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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 오늘 미사**
https://m.youtube.com/watch?v=dk0q2UuhIz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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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주님 성탄 대축일 전야 미사)
<성탄은 오늘 우리 한 가운데, 오늘 우리가 겪고 있는 슬프고 고통스런 현실 안에서 시작됩니다!>
감당하기 어려운 고통과 시련의 길고 긴 터널을 지나고 있는 우리지만, 올해도 어김없이 성탄은 다가왔습니다.
힘겹게 견뎌내고 있는 전 세계 살레시오 가족들과 교우들을 위해 저희 살레시오회 앙헬 페르난데스 총장님께서 위로와 격려의 메시지를 보내주셨습니다.
“나는 희망이 되게 하는 믿음에 매료되었습니다.”
베트남 공산화 즉시 13년간 감금되셨고, 9년간 독방에서 생활하셨던 베트남의 가경자 구엔 반 투안 프란치스코 하비에르(1928~2002)의 말씀입니다. 추기경님의 간략한 말씀 안에는 힘겨운 한 해를 잘 견뎌낸 우리가 어떤 마음으로 2020년을 마무리해야 하는지에 대한 정답이 들어있습니다.
올 한 해 우리는 엄청난 고통과 상실의 시간을 보냈습니다. 코로나19 바이러스 팬데믹 시대를 살아가면서 가정적, 경제적으로 큰 어려움을 겪어 왔습니다. 그리고 언제까지 계속될지 기약도 없습니다.
이토록 어려운 시기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아기 예수님의 성탄 앞에서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요? 난감하고 곤혹스러움에도 불구하고 성탄의 의미는 오늘 이 시대에 맞춰 계속 재해석되어야 하고 성찰되어야 합니다.
성탄은 하느님께서 우리를 만나로 오시는 은혜로운 대 사건입니다. 오늘 이 순간도 하느님께서는 지속적으로 사람이 되시고, 특별히 오늘 성탄절 날 갓난 아기의 모습으로 우리 각자에게 다가오십니다.
오늘의 어둠이 아무리 짙다할지라도 하느님께서는 항상 당신 백성과 동행하시며 아픔과 상실, 고통의 순간에도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하고 계신다는 가장 강력한 표현이 곧 아기 예수님의 성탄입니다.
때로 고통은 우리를 더 깊은 내면으로 들어가게 만들고, 더 진지한 신앙 여정 속으로 들어가게 합니다. 이토록 혹독한 어려움 속에서도 우리는 현실을 긍정적으로 바라봐야겠습니다. 우리는 결코 혼자가 아님을 잊지 알아야겠습니다.
새해에는 모든 피조물을 훨씬 더 진지하게 받아들여야겠습니다. 지금 이 시간에도 고통 속에 있는 수많은 청소년들의 외침, 6천8백만명의 난민들의 안타까운 처지를 기억해야하겠습니다. 우리는 다른 곳이 아니라 그들 가운데 탄생하시는 아기 예수님을 경배해야겠습니다.
성탄을 맞이하는 우리가 각별히 주의해야 할 점 한 가지가 있습니다. 성탄절 하면 우선 떠오르는 이미지는 어떤 것들입니까? 성탄절의 아름다운 추억입니다. 마음에 드는 성탄 선물, 잘 차려진 성탄 파티, 달콤하고 로맨틱한 성탄 구유와 전례 등등... 성탄과 관련된 아름다운 추억들입니다.
그러나 2천년전 예수님께서 탄생하셨던 베들레헴의 마굿간에는 달콤하고 로맨틱한 분위기는 하나도 없었습니다. 현실은 냉정했습니다. 예수님 탄생의 분위기는 비참하고 서글펐습니다. 예수님 탄생 당시 사회적 상황 역시 암울했습니다.
하느님의 이 세상 육화강생은 태평성대 때가 아니라, 가장 암울하고 어려운 시대, 로마 식민 통치 시대, 가장 불안한 헤로데 왕정 시기에 이루어졌다는 것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하느님께서 인간 세상 안으로 들어오셨던 최초의 모습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로마 황제처럼 강력한 모습으로 오지 않으셨습니다. 지혜로 똘똘 뭉친 현자의 모습으로도 오지 않으셨습니다. 탁월한 능력을 지닌 해결사의 모습도 아니었습니다. 스스로 힘으로는 머리 조차 옆으로 돌릴 수 없는 갓난 아기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하느님 인류 구원의 역사는 바로 오늘 우리 한 가운데, 오늘 우리가 겪고 있는 슬프고 고통스런 현실 안에서 시작됩니다. 아기 예수님의 성탄 역시 이 어려운 시대, 큰 고통을 겪고 있는 우리 각자 안에 이루어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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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우리는 모두 만나는 이들의 미래를 예언한다>
(묵상 동영상)
https://youtu.be/bBytyCrRSl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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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은 즈카르야의 노래입니다. 즈카르야는 입이 풀리자 성령으로 가득 차 ‘예언’을 합니다. 즈카르야는 요한을 바라보며 “아기야, 너는 지극히 높으신 분의 예언자라 불리고 주님을 앞서가 그분의 길을 준비”할 것이라고 예언합니다. 그리고 요한은 아버지의 예언대로 위대한 예언자가 됩니다.
왜 하느님께서는 요한의 아버지보고 요한의 미래를 예언하도록 하셨던 것일까요? 아버지의 예언이 없다면 예언자가 되지 않을까요? 물론 되기야 하겠지만 쉽지는 않을 것입니다. 믿어주는 사람들 안에서 더 쉽게 그렇게 됩니다. 사람은 서로에게 영향을 줍니다. 아버지가 의심하면 아들도 의심하기 쉽습니다.
사람을 변화시키는 가장 큰 힘은 ‘자기 정체성’입니다. 그런데 그 정체성은 바로 자신이 누구냐는 ‘믿음’에 의해 생깁니다. 만약 부모님이 자녀들의 미래를 의심하면 자녀들도 자신들의 미래를 확신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즈카르야가 의심할 때는 입을 다물도록 벙어리가 되게 하였다가 믿음이 생기자 입이 열리도록 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만나 영향을 줄 수 있는 모든 이들에게 그 정체성을 예언하는 예언자들입니다.
뭔가 유치한 구석이 많은 영화 한 편을 소개해 드립니다. ‘허큘리스’(2014)입니다. 헤라클레스는 제우스의 아들로 신적인 힘을 가진 인간이었습니다. 허큘리스는 이 신화적 인물 헤라클레스를 재해석한 영화입니다.
신화에서는 네메안의 사자와 지옥의 개들을 물리친 괴력의 소유자입니다. 하지만 영화에서는 그저 평범한 인물로 나옵니다. 평범하지만 물론 힘은 좀 셉니다. 그가 평범한 인물로 살아가는 이유는 자신이 헤라클레스임을 믿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는 아내와 자식들이 죽임을 당하는 데 아무 힘도 쓰지 못했습니다. 가족도 지키지 못한 사람이 어떻게 헤라클레스일 수 있겠습니까? 그는 그저 돈을 위해서 싸워주는 평범한 용병에 불과합니다.
어느 날 헤라클레스의 소문을 들은 이웃 나라 트라키아 공주가 찾아와 레수스라는 왕국과 전쟁을 벌이는데 도와주면 충분한 보수를 주겠다고 말합니다. 헤라클레스는 돈을 벌기 위해 트라키아 군대들을 훈련하고 전쟁에 나가 트라키아 왕을 위해 싸워줍니다. 하지만 사실 트라키아 왕 코티스는 진짜 왕을 죽이고 남은 반란군들을 제압한 후 자신이 왕이 되려고 헤라클레스를 돈으로 이용한 것입니다.
헤라클레스는 좋은 이들을 자신이 죽게 만들고 악한 사람을 도와준 것에 분하여 그들에게 대항하려 하지만 그들의 덫에 걸려 갇히고 맙니다. 그리고 그와 그의 동료들이 죽음 직전에 처하게 됩니다. 이때 그의 아내와 자녀들이 죽은 이유가 아테네 왕이 그를 시기하였기 때문임을 알게 됩니다. 그가 힘을 쓸 수 없었던 이유는 자기보다 유명해진 아테네 왕이 그의 술잔에 약을 탔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절체절명의 순간 이 모든 사실을 아는 동료는 그에게 소리칩니다.
“넌 누구지? 무고한 사람들에게 등을 돌린 돈 받고 싸워주는 용병? 아니면 그 전설 속의 진짜 영웅이야? 너 자신을 믿어. 네가 누구인지 기억해. 어서 말해. 넌 대체 누구야?”
“나는 헤.라.클.레.스.다!”
그 이후엔 어떻게 되었는지 뻔합니다. 좀 닭살이 돋는 전개가 되는 영화이지만, 이 대목이 마음에 들어 소개한 것입니다.
우리는 누구나 자신이 누구인지 깨닫지 못하며 살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내가 그 믿음에 합당하게 살지 못함을 잘 알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주위에 자신을 믿어주는 사람에 의해 그 믿음을 회복할 수 있습니다. 그들이 나의 예언자가 되는 것입니다.
로버트 기요사키의 『부자 아빠, 가난한 아빠』에도 아버지의 예언이 자녀에게 어떠한 영향을 주는지 잘 보여줍니다. 가난한 아빠가 로버트 기요사키의 친부입니다. 박사학위까지 있지만, 항상 가난했고 자녀에게도 열심히 공부하고 일하지 않으면 가난할 수밖에 없다고 가르쳤습니다. 이것도 하나의 예언입니다. 공무원인 아버지는 아들도 직장인이 되어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기요사키는 그 아버지를 믿지 않았습니다. 다행인지 키요사키는 부자들만 다니는 학교에 다니게 되었고 그들과 그들의 아버지들에게 영향을 받습니다. 믿음으로는 다른 아버지를 선택합니다. 친구의 사업가 아버지였습니다. 그의 친구 아버지는 학위도 없는 사업가였지만 돈에 대해 가르쳐주었습니다. 돈이 돈을 벌게 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절대 월급쟁이가 되지 말라고 했습니다.
기요사키는 상반되는 두 아빠 중 누구의 말을 믿었을까요? 부자 아빠의 말을 믿었습니다. 자신 주위에는 부자 아빠들이 더 많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본인도 엄청난 부자가 됩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도 모르게 누군가에게 예언자가 되고 있습니다. 그 사람에 대한 나의 믿음이 그 사람을 만들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선택은 그 사람이 하겠지만 그래도 그 사람을 그렇게 믿어주는 사람들이 주위에 많다면 그 사람은 그 믿음에서 벗어날 수 없어서 그런 사람이 되고야 맙니다. 어떤 사람은 “당신과 가까운 다섯 사람을 말해보세요. 내가 당신이 누구인지 알려드리겠습니다”라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 주위 사람들의 믿음이 그의 미래를 결정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위 사람에게 무엇이든 될 수 있다고 믿고 말해주지 못할 바에야 즈카르야처럼 벙어리가 되는 편이 낫습니다. 하느님의 뜻은 우리 입을 여셔서 우리가 우리 가까이 있는 사람들에게 “당신은 무엇이든 될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함께하시기 때문입니다”라고 말해줄 수 있는 예언자가 되게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나의 예언자, 내가 만나는 이들의 예언자임을 잊지 맙시다. 나의 모든 말은 누군가에게 예언이 됩니다. 그래서 상대의 정체성에 대해 좋은 예언을 하지 않을 것이면 차라리 침묵하는 편이 낫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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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예수 성탄 대축일 밤 미사)
그리스도께 관한 모든 것은 신비이다. 오늘 우리는 그분이 사람이 되심을 지내고 있다. “사람이 되셨다.”는 것 자체가 우리가 알아들을 수 없는 신비이다. 왜 하느님이신 분이 우리와 같은 사람이 되셨는가 말이다. 성경은 이 사람이 되신 신비를 여러 관점에서 다루고 있지만, 하느님이 사람이 되신 신비는 아무리 설명을 하려 해도 여전히 신비로 남아있다는 것이다.
1독서에 나오는 “한 아기”는 “임마누엘”(이사 7,14)과 같은 아기이며, 이 아기를 통하여 놀라운 해방과 평화와 정의의 왕국이 세워진다고 한다. 이러한 왕국은 어두움 속에서 애타게 기다리는 사람에게 비쳐오는 “큰 빛”과 같다. 그 “아기”의 탄생은 그 아기가 곧 정의와 평화의 왕국을 세움으로써 해방을 실현하는 사람으로서 “해방”과 밀접히 관련된다. 이 해방은 인간의 전인적인 차원을 온전히 포용하는 근본적인 해방이다. 이 아기에게 수많은 명칭을 준다. “왕권이 그의 어깨에 놓이고, 그의 이름은 놀라운 경륜가, 용맹한 하느님, 영원한 아버지, 평화의 군왕이라 불리리이다.”(이사 9,5) 이 아기는 그 외에도 솔로몬의 지혜, 다윗의 힘과 신앙, 모세와 모든 성조의 훌륭한 덕을 갖추게 될 것이다. 그 아기는 과거의 모든 것의 종합이며 동시에 모든 것을 능가하는 분으로, 성탄의 전례는 그 모든 명칭을 그리스도께 돌려 드리고 있다.
복음: 루카 2,1-14: 오늘 너희를 위하여 구세주가 태어나셨다.
오늘 복음에서 역사적 배경을 설명하고 있는 것은 예수님의 탄생이 역사적 사실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즉 예수께 관한 이야기는 신화나 공상적인 이야기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이제 예수의 탄생으로 역사는 다른 의미를 가지며, 다른 운명을 향해 가게 됨을 말하고자 한다.
“두려워하지 마라. 보라, 나는 온 백성에게 큰 기쁨이 될 소식을 너희에게 전한다. 오늘 너희를 위하여 다윗 고을에서 구원자가 태어나셨으니, 주 그리스도이시다.”(10-11절)라고 천사가 목자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한다. 그리스도라는 분이 목자들이 기쁨과 놀라움으로 경배하게 될 “구유에 누워 있는” 그 보잘것없는 “아기”라고 한다면(16절) 하느님의 구원은 바로 비천함에서 그리고 무능력에서 오는 것이다. 예수님의 탄생은 역사에 다른 의미를 부여하고 새롭게 변화시키며, 영적인 생기를 불어넣어 준다.
이렇게 해서 인간들이 사랑 안에서 이루어지는 “참 행복”을 향해서 나아갈 수 있도록 새로운 구원의 역사가 이루어진다. 이 예수의 새로운 구원역사는 다윗과 연결되고 있다. 요셉과 마리아가 하느님의 신비로운 뜻에 따라 걸음을 재촉해 갔던 베들레헴이 바로 다윗이 태어난 곳이다. 바로 구약성서의 내용이 그리스도 안에 완성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즉 과거의 모든 중대한 사건들이 마침내 베들레헴에서 태어난 보잘것없는 “아기”를 통해 이루어지고 있다.
여기서 천사들의 노래에 담긴 깊은 의미를 알 수 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느님께 영광, 땅에서는 그분 마음에 드는 사람들에게 평화!”(14절) 이제 구원은 이 세상의 모든 사람에게 열렸다. 그 구원을 얻게 되는 사람들은 하느님께서 주시는 선과 사랑을 받아들여 평화를 이루는 모든 사람을 말한다. 여기서 평화는 바로 구원이다. 이 평화를 위해 인간은 올바른 응답과 책임을 다해야 한다. “영광”과 “평화”는 서로 밀접한 관계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영광”은 하느님의 사랑과 구원계획이 그리스도를 통해 완성되기 때문에 지상에서 하느님께로 올라간다. 그리고 “평화”는 그리스도의 선성으로 충만하게 된다. 선성에는 우리가 모두 하느님께서 계시하신 인류에 대한 계획을 받아들일 수만 있다면 그분께서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인간들 사이의 화해도 거기에 포함되어 있다. 화해를 통한 평화를 이루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성탄의 신비는 참으로 위대한 신비이다.
그래서 교황 바오로 6세는 이 성탄의 신비를 “하느님의 침묵 속에서 이루어진 감동적인 신비”라고 정의하였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삶과 역사를 쇄신시키며 변화시킬 힘을 감지할 수 있는 아주 세련된 귀와 그리고 잘 준비된 마음을 갖추도록 해야 한다. 이에 대해 바오로 사도는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가져다주는 하느님의 은총이 나타났습니다. 이 은총이 우리를 교육하여 불경함과 속된 욕망을 버리고 현세에서 신중하고 의롭고 경건하게 살도록 해 줍니다. 복된 희망이 이루어지기를, 우리의 위대하신 하느님이시며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기를 기다리는 우리를 그렇게 살도록 해 줍니다.”(티토 2,11-13절) 라고 한다.
우리가 성탄을 지내면서 깊이 새겨야 할 것은 구세주의 탄생이 ‘하느님께는 영광’이며 ‘땅의 평화’라고 한다면, 우리의 삶을 통하여 우리 가운데 언제나 강생하시어 현존하시는 주님은 구원계획의 실현으로 하느님께 영광이 되며, 우리의 사랑의 삶으로 하나가 된 우리 사이에는 진정한 하느님의 ‘평화’가 있게 될 것이다. 이 평화가 바로 우리가 바라고 있는 구원이 아니겠는가? 성탄의 신비를 잘 묵상하면서 이 ‘성탄의 신비’가 언제나 우리의 삶 속에서 드러날 수 있도록 살아가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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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서울대교구 박기석 사도요한 신부님]
주님 성탄 전날인 12월 24일의 독서와 복음은 대림 시기를 마무리하면서 곧 시작할 새로운 기쁨의 때를 준비하기에 꼭 맞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우선 오늘 독서는 하느님께서 나탄 예언자를 통하여 다윗 임금에게 전하신 약속입니다. “너의 집안과 나라가 네 앞에서 영원히 굳건해지고, 네 왕좌가 영원히 튼튼하게 될 것이다.” 이스라엘의 첫 번째 임금인 사울의 죽음으로 끝맺으며 한 시대가 종결되었음을 보여 주는 사무엘기 상권과 달리 하권에서는 다윗의 왕권에 그 초점을 둡니다. 특별히 오늘 독서인 7장은 다윗에게 영원한 왕권이 약속되고, 이 약속이 다윗의 후손이신 예수 그리스도로 이어지기에 사무엘기의 절정이고, 구약과 신약을 연결하는 역할을 합니다.
약속된 다윗의 후손이신 예수님을 맞이하는 길을 닦으려 앞서 온 세례자 요한의 아버지 즈카르야는 아들의 탄생을 지켜보며 하느님께 찬미를 드립니다. “주 이스라엘의 하느님께서는 찬미받으소서. 그분께서는 당신 백성을 찾아와 속량하시고, 당신 종 다윗 집안에서, 우리를 위하여 힘센 구원자를 일으키셨습니다. …… 그분께서는 우리 조상들에게 자비를 베푸시고, 당신의 거룩한 계약을 기억하셨습니다.”
즈카르야처럼 하느님의 크신 자애를 영원히 노래하고픈 마음이 오늘 화답송 시편에도 담겨 있습니다. “주님의 자애를 영원히 노래하오리다. 나는 내가 뽑은 이와 계약을 맺고, 나의 종 다윗에게 맹세하였노라. ‘영원토록 네 후손을 굳건히 하고, 대대로 이어 갈 네 왕좌를 세우노라.’ 영원토록 그에게 내 자애를 베풀리니, 그와 맺은 내 계약 변함이 없으리라.”
그렇다면 오늘 밤 ‘하느님의 크신 자비로, 높은 곳에서 우리를 찾아오시는 별’은 의심의 여지없이 ‘어둠과 죽음의 그늘에 앉아 있는 이들을 비추심은 물론 우리 발을 평화의 길로 이끌어 주실 것’이 확실합니다. 오늘 하루는 떠오르는 별, 영원한 빛이신 주님을 기다리는 날입니다. “주님, 어서 오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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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탄 대축일 - 전야 미사)
세계 최초로 동력 비행에 성공한 미국의 라이트 형제 이야기입니다. 1903년 12월, 시속 43킬로미터의 강한 맞바람을 받으며 라이트 형제는 12초 동안 37미터를 날았습니다. 첫 비행을 신문에 알리라고 형제는 가족에게 다음과 같이 전합니다. “우리는 실제로 37미터를 날았다. 성탄절에 집에 갈 것이다.” 그런데 그 소식을 접한 지역 신문사 편집장의 반응은 시큰둥하였습니다. “정말 좋겠습니다. 형제가 성탄 때 집에 온다고 하니.” 그는 인류 최초의 비행이라는 특종을 완전히 놓쳤던 것입니다.
이제 성탄 시기가 시작됩니다. 오늘 저녁 많은 이들은 화려한 크리스마스 트리와 갖가지 선물 그리고 지인들과의 저녁 모임으로 성탄의 기쁨을 만끽하겠지요. 그러나 그 분주함 속에서 특종을 몰라본 편집장처럼 정작 깨달아야 할 참된 기쁜 소식을 놓쳐 버릴 수 있습니다. 당신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실 예수님께서 태어나신다는 기쁜 소식을 말입니다.
우리는 이 성탄 전야에 마태오가 전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와 양부 요셉에게 주어진 주님의 탄생 예고를 듣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천사가 알려 준 아기의 이름과 지상 사명에 대한 설명입니다. ‘예수님, 그분께서 당신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시기에’ 예언자의 말씀을 이루실 것이며, 그렇게 하여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심’을 보여 주신다는 것입니다.
회당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루어진 구원 역사를 전하는 바오로는 자칫 분주함에 놓칠지 모를 구원의 기쁜 소식에 주의를 기울이며 설레는 마음으로 오늘 밤을 고대하게 합니다. “바오로는 회당에서 일어나 조용히 하라고 손짓한 다음 이렇게 말하였다. ‘이스라엘인 여러분, 그리고 하느님을 경외하는 여러분, 내 말을 들어 보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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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주님 성탄 대축일 밤미사>(2020. 12. 24. 목)(루카 2,1-14)
<그것이 너희를 위한 표징이다.>
“요셉도 갈릴래아 지방 나자렛 고을을 떠나 유다 지방, 베들레헴이라고 불리는 다윗 고을로 올라갔다. 그가 다윗 집안의 자손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자기와 약혼한 마리아와 함께 호적 등록을 하러 갔는데, 마리아는 임신 중이었다. 그들이 거기에 머무르는 동안 마리아는 해산날이 되어, 첫 아들을 낳았다. 그들은 아기를 포대기에 싸서 구유에 뉘었다. 여관에는 그들이 들어갈 자리가 없었던 것이다."(루카 2,4-7)
아기를 구유에 뉘었다는 말은, 외양간에서 출산을 했다는 뜻입니다. 요셉과 마리아가 외양간으로 가야만 했던 것은 여관비가 없었기 때문이 아니라, 여관에 방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여관에 방이 없었다는 것은, 베들레헴에 먼저 도착한 사람들과 베들레헴의 주민들 가운데에는 이제 곧 아기를 낳을 산모를 가엾게 여기고 사랑을 실천한 사람이 하나도 없었음을 나타냅니다. (그 상황에 대해서, 왜 좀 더 일찍 가지 않았느냐고 요셉을 탓할 수는 없습니다. 황제가 칙령을 내렸다는 것을 알고 나서 곧바로 나자렛을 출발했더라도, 마리아가 만삭이었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보다 먼저 베들레헴에 도착하기는 어려웠을 것입니다.) 방을 구하지 못해서 외양간으로 가야만 했던 요셉과 마리아의 상황에서 마태오복음에 있는 다음 말씀이 연상됩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주지 않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주지 않은 것이다."(마태 25,45) 방을 구하려고 애를 쓴 요셉과 마리아는 ‘가장 작은 이들’이었습니다. 요셉과 마리아에게 방을 내주지 않은 베들레헴 사람들과 먼저 와서 여관방을 차지한 사람들은 모두 ‘가장 작은 이의 모습으로 오신 주님’을 외면한 사람들입니다. (호적 등록을 하려고 베들레헴으로 간 사람들은 모두 ‘다윗의 후손들’이었을 것입니다. 여관방을 먼저 차지하고서 그 방을 양보하지 않은 사람들은 요셉과 같은 집안의 사람들이었을 텐데, 같은 집안이라는 것이 아무런 소용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남이야 어찌 되든지 자기 한 몸 편안하면 그만이라는 이기심 앞에서는......)
“그 고장에는 들에 살면서 밤에도 양 떼를 지키는 목자들이 있었다. 그런데 주님의 천사가 다가오고 주님의 영광이 그 목자들의 둘레를 비추었다. 그들은 몹시 두려워하였다."(루카 2,8-9)
베들레헴에 냉정하고 이기적인 사람들만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이 이야기에 나오는 ‘목자들’은 아마도 요셉과 마리아에게 외양간을 빌려 준 사람들이었을 것입니다. 당시 그 지역의 외양간은 가축들이 잠을 자는 우리와 목자들이 잠을 자는 임시 숙소가 함께 있는 동굴 같은 것이었습니다. 마리아는 목자들의 임시 숙소에서 예수님을 낳았을 것입니다. (목자들은 자기들의 숙소를 요셉과 마리아에게 내주고 자기들은 들에서 야영을 했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천사가 목자들에게 나타난 것은 ‘메시아 강생’이라는 기쁜 소식을 전해 주기 위해서입니다. 목자들은 예수님 탄생 후에 그 ‘기쁜 소식’을 첫 번째로 들은 사람들이고, 예수님을 첫 번째로 뵌 사람들입니다. 그 목자들은 “가장 작은 이들에게 사랑을 베풀어 줌으로써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에 주님을 영접한 사람들”입니다.(마태 25,40; 히브 13,2) (그들은 첫 번째로 주님을 영접함으로써 첫 번째로 메시아를 뵙는 은총을 받은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여기서 “그들은 몹시 두려워하였다.”라는 말은, 무서워했다는 뜻이 아니라, 초자연적이고 신비스러운 일에 대해서 경외심을 갖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보라, 나는 온 백성에게 큰 기쁨이 될 소식을 너희에게 전한다. 오늘 너희를 위하여 다윗 고을에서 구원자가 태어나셨으니, 주 그리스도이시다. 너희는 포대기에 싸여 구유에 누워 있는 아기를 보게 될 터인데, 그것이 너희를 위한 표징이다."(루카 1,10-12)
‘온 백성에게’는 사실은 ‘온 인류에게’입니다. “큰 기쁨이 될 소식”은 메시아이신 예수님께서 탄생하셨다는 소식입니다. 그 소식이 온 인류에게 ‘큰 기쁨’이 되는 이유는,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심으로써 온 인류가 구원을 받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큰 기쁨의 진짜 이유는 ‘우리의 구원’이고, 진짜로 기쁜 소식은 우리가 구원을 받게 되었다는 소식입니다. 여기서 “너희를 위하여”는 “온 인류를 구원하기 위하여”입니다. 마르코복음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이렇듯 다윗 스스로 메시아를 주님이라고 말하는데, 어떻게 메시아가 다윗의자손이 되느냐?’ 많은 군중이 예수님의 말씀을 기쁘게 들었다."(마르 12,37) 예수님 말씀의 뜻은, “메시아의 임무는 다윗 왕조의 회복이나, 이스라엘이라는 특정 국가의 독립이 아니다. ‘모든 사람’을 구원하는 것이 메시아의 임무이다.”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님 말씀의 뜻을 알아들었기 때문에 기뻐했습니다. <메시아는(예수님은) 바로 ‘나를’ 구원하려고 오신 분입니다. 그래서 성탄절은 ‘나를’ 위한 날이고, ‘나에게’ 큰 기쁨이 되는 날입니다.>
“너희는 포대기에 싸여 구유에 누워 있는 아기를 보게 될 터인데, 그것이 너희를 위한 표징이다.” 라는 천사의 말은, “아기가 구유에 누워 있는 모습은, 그 아기가 곧 ‘너희를 구원하시는 메시아’ 라는 표시다.”라는 뜻입니다. “아기가 구유에 누워 있는 모습이 왜 메시아의 표징인가?” 바오로 사도의 다음 말을 이 말에 대한 설명으로 삼을 수 있습니다. “...... 하느님께서는 강한 것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이 세상의 약한 것을 선택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있는 것을 무력하게 만드시려고, 이 세상의 비천한 것과 천대받는 것 곧 없는 것을 선택하셨습니다. 그리하여 어떠한 인간도 하느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셨습니다."(1코린 1,27-29) ‘구유에 누워 있는 아기’의 모습은 세\상에서 가장 약하고 가장 낮은 모습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런 모습으로 오신 것은, 이 세상에서 천대받는 ‘가장 약하고 가장 낮은 위치에 있는 사람들’도 모두 구원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그 모습은, 누구든지 구원받기를 바란다면 그렇게 겸손하게 자신을 낮추어야 한다는 가르침이기도 합니다. 가진 것이 많다고, 또 힘이 세다고 잘난 척 하는 사람들은 하느님 앞에서 부끄러움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을 만나려면, 자신을 모두 비우고, 예수님께서 계시는 곳으로 가야 합니다. 그곳은 바로 초라하고 보잘것없는 ‘구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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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2005년부터 2007년까지 캐나다 토론토에 있었습니다. 토론토에 있는 레지스 컬리지에서 이냐시오 영신수련에 대한 강의를 들었습니다. 대학에서 운영하는 사목연수 프로그램도 신청해서 참여했습니다. 40일간의 이냐시오 영신수련 피정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왔습니다. 동네 공원을 산책하면서 하늘 높이 떠가는 비행기를 보곤 했습니다. 지치고 힘들 때면 비행기를 타고 한국으로 가는 생각도 했었습니다. 토론토의 겨울은 상당히 추웠습니다. 그때 이어폰을 통해서 들리던 노래가 생각납니다. ‘California Dreaming'입니다. 경쾌한 멜로디가 좋았고, 노래도 좋았습니다. 가사의 내용은 단순했습니다.
어느 추운 겨울날, 뉴욕에 있었는데 나뭇잎은 갈색이고, 구름은 회색이었다고 합니다. 어느 성당에 들어가 기도하려고 했는데 사제가 추운 것도 좋다고 합니다. 당신들은 아마 여기 머물 거라고 합니다. 그러나 캘리포니아에 있었으면 좋았을 거라고 노래합니다. 만일 그녀에게 말하지 않았다면 캘리포니아로 떠날 수 있었을 거라고 노래합니다. 캘리포니아는 어떤 의미였을까요? 태평양의 바다를 볼 수 있고, 따듯한 날씨가 있고, 아마도 사랑하는 사람들이 사는 곳이 아니었을까요? 제가 당시에 그 노래를 좋아했고, 지금도 좋아하는 것은 제가 살았던 고향, 함께 시간을 보냈던 동창, 힘든 시간 함께 했던 분들에 대한 그리움 때문인가 봅니다. 하지만 저 역시도 이곳 뉴욕에 머물러야 합니다. 제게 주어진 업무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곳 뉴욕에도 마음이 따뜻한 이웃이 있고, 같은 길을 가는 사제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신앙인에게 ‘California Dreaming'은 무엇일까요? 하느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사람이 되시어 2000년 전 베들레헴의 구유에서 태어난 것이라 생각합니다. 우리의 역사는 예수님 탄생 전(Before Christ)와 예수님 탄생(Anno Domini)으로 구분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지난 4주 동안 예수님의 탄생을 기다렸습니다. 현재의 권력에 취해있던 헤로데 왕에게 예수님의 탄생은 새로운 경쟁자였습니다. 그래서 헤로데는 거짓으로 경배하겠다고 동방박사에게 예수님께서 태어나시는 장소를 알려달라고 하였습니다. 율법학자와 사제들에게 예수님의 탄생은 자신들의 기득권을 빼앗을지 모르는 위험인물이었습니다. 베들레헴에서 메시아가 태어날리 없다고 단언합니다. 진리라는 달은 보지 않고, 율법이라는 손가락만 쳐다보고 있었습니다.
주님의 오심을 깨어서 기다리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천사의 말을 듣고 하느님의 뜻에 순명한 요셉과 마리아, 즈카리야아 엘리사벳’이 있었습니다. 평생 기도 중에 주님의 탄생을 기다렸던 ‘시메온과 한나’가 있었습니다. 어린 양들을 돌보던 목동들이 있었습니다. 목동들은 ‘하늘 높은 곳에는 하느님께 영광, 땅 위에서는 마음이 착한 사람들에게 평화’라고 노래하였습니다. 동방박사들은 멀리서 주님의 탄생을 축하하기 위해서 길을 떠났습니다. 그들의 손에는 ‘황금, 유향, 몰약’이 있었습니다. 주님의 탄생이라는 드라마는 주인공이신 예수님을 중심으로 많은 이들이 참여하였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에 순명한 사람, 영적으로 깨어있는 사람, 오랜 시간 성전에서 기도하는 사람, 진리를 위해서 먼 길을 떠나는 사람에게 예수님의 탄생은 ‘California Dreaming'입니다.
2020년 성탄이 곧 다가옵니다. 마리아의 노래와 함께 예수님의 탄생을 기다리는 아름다운 노래가 오늘 복음에서 읽은 ‘즈카리야의 노래’입니다. 매일 아침 성무일도에서 묵상하는 노래입니다. 오늘 하루 이 노래를 마음에 담았으면 좋겠습니다. “주 이스라엘의 하느님께서는 찬미 받으소서. 그분께서는 당신 백성을 찾아와 속량하시고, 당신 종 다윗 집안에서 우리를 위하여 힘센 구원자를 일으키셨습니다. 당신의 거룩한 예언자들의 입을 통하여 예로부터 말씀하신 대로, 우리 원수들에게서, 우리를 미워하는 모든 자의 손에서 우리를 구원하시려는 것입니다. 그분께서는 우리 조상들에게 자비를 베푸시고, 당신의 거룩한 계약을 기억하셨습니다. 이 계약은 우리 조상 아브라함에게 하신 맹세로, 원수들 손에서 구원된 우리가 두려움 없이, 한평생 당신 앞에서 거룩하고 의롭게 당신을 섬기도록 해 주시려는 것입니다. 아기야, 너는 지극히 높으신 분의 예언자라 불리고, 주님을 앞서 가 그분의 길을 준비하리니, 죄를 용서받아 구원됨을 주님의 백성에게 깨우쳐 주려는 것입니다. 우리 하느님의 크신 자비로 높은 곳에서 별이 우리를 찾아오시어, 어둠과 죽음의 그늘에 앉아 있는 이들을 비추시고, 우리 발을 평화의 길로 이끌어 주실 것입니다.”
주님의 사랑이 가득한 기쁜 성탄이 되시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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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당신께서 내게 오시는 까닭은>
루카 1,67-79 (즈카르야의 노래)
그때에 요한의 아버지 즈카르야는 성령으로 가득 차 이렇게 예언하였다.
“주 이스라엘의 하느님께서는 찬미받으소서. 그분께서는 당신 백성을 찾아와 속량하시고, 당신 종 다윗 집안에서 우리를 위하여 힘센 구원자를 일으키셨습니다. 당신의 거룩한 예언자들의 입을 통하여 예로부터 말씀하신 대로, 우리 원수들에게서, 우리를 미워하는 모든 자의 손에서 우리를 구원하시려는 것입니다. 그분께서는 우리 조상들에게 자비를 베푸시고, 당신의 거룩한 계약을 기억하셨습니다. 이 계약은 우리 조상 아브라함에게 하신 맹세로, 원수들 손에서 구원된 우리가 두려움 없이, 한평생 당신 앞에서 거룩하고 의롭게 당신을 섬기도록 해 주시려는 것입니다.
아기야, 너는 지극히 높으신 분의 예언자라 불리고, 주님을 앞서 가 그분의 길을 준비하리니, 죄를 용서받아 구원됨을 주님의 백성에게 깨우쳐 주려는 것이다. 우리 하느님의 크신 자비로 높은 곳에서 별이 우리를 찾아오시어, 어둠과 죽음의 그늘에 앉아 있는 이들을 비추시고, 우리 발을 평화의 길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
<당신께서 내게 오시는 까닭은>
당신께서 내게 오시는 까닭은
나의 편이 되기 위함이 아니라
당신의 편으로 삼기 위함입니다
함께와 홀로의 갈림길에서
살림과 죽임의 갈림길에서
품음과 내침의 갈림길에서
베풂과 움켜쥠의 갈림길에서
내가 무엇을 선택하든
나의 편이 되기 위함이 아니라
두려움 없이 의연하게
망설임 없이 힘차게
거룩하고 의롭게
당신의 길만을 걷게 함으로써
당신의 편으로 삼기 위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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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방종우 야고보 신부님]
<마치 우리의 모습을 비웃기라도 하듯>
+ 찬미예수님
올해 크리스마스를 맞이하여 약 100통의 카드를 썼습니다. 요즘은 많은 일들을 컴퓨터로 처리하다보니 사실 손글씨를 쓸 일이 별로 없었고 오랫동안 외국에서 유학생활을 했으니 더더욱 그랬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카드를 쓰기로 결심한 이유는 이 어려운 시기, 여러 번 일정이 변동되었음에도 포기하지 않고 오랫동안 첫영성체를 받기 위해 준비하고 있는 아이들과, 활동을 할 수 없음에도 성실히 지난 한해 복음 노트를 써온 복사단 아이들 때문이었습니다.
본당의 아이들을 생각하면 괜히 마음이 아프고 미안합니다. 지금의 상황이 저 때문에 일어난 일은 아니지만 이 세상은 분명 어른들이 만들어 낸 것이기에 성당에 나올 수 없고 정해진 일정에 따라 교육을 받을 수 없는 아이들에게 못내 미안한 마음이 드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하나 손편지를 써서 선생님들과 함께 간식을 포장한 소포가 어제 아이들에게 도착했나봅니다. 어머니들께서는 소포를 받은 아이들의 반응을 사진 혹은 영상으로 찍어서 보내주셨는데, 그 사진과 메시지들을 확인하며 참으로 행복했습니다. 환호하는 아이들의 모습, 카드를 들고 활짝 웃고있는 아이들의 모습에 저는 이미 크리스마스 선물을 받은 것만 같습니다.
누군가로부터 기쁨의 환호를 받는 다는 것이 얼마나 소중하고 감사한 일인지요. 이제 곧 본당 임기가 끝나가기에 할 수 있는 말일 수 있지만, 같은 기회가 주어진다면 1,000장이라도 카드를 쓸 수 있을 것만 같은 기분입니다.
편지와 작은 소포를 받은 아이들의 마음을 헤아려 봅니다. 코로나로 인해 친구들을 만날 수도, 외출을 할 수도 없는 아이들. 두려움과 걱정이 공존하는 이 시대에 하염없이 집에 있어야 하는 아이들에게 예고 없이 찾아온 선물은 한줄기 빛처럼 느껴졌을지 모릅니다.
가족들 외에는 외부의 접촉 없이 있어야 하는 아이들에게 한 사제가 자신을 그리워하고 있다는 직접적인 마음의 표현은 어쩌면 더욱 와 닿았을 것 같기도 합니다. 그 마음이 직접적으로 전해졌기에 아이들은 기쁨의 환호를 보낼 수 있었을 것입니다.
이러한 우리 본당 아이들의 상황은 오늘 복음의 즈카르야의 상황과 정확하게 일치합니다. 오늘 복음말씀에서 세례자 요한의 아버지 즈카르야는 기쁨과 희망에 가득 찬 찬가를 부릅니다.
당시의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느님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가 왕이 되어 자기들에게 나타나기를 아주 오랫동안 바라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오랫동안 예언자들의 역할을 통해 신앙을 성숙시켜 온 그들은 이러한 메시아가 오기 전에 백성들을 준비시킬 선구자가 먼저 올 것 이라 믿고 있었습니다. 직접적으로 말해서, 구약의 위대한 예언자 엘리야가 와서 그 일을 수행 할 것이라고 믿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은 어둡고 로마제국의 핍박은 길어져만 갔으니 지칠 수 밖에 없었습니다. 하느님께로부터 선택받은 민족들이라는 자부심이 있었지만 길어져가는 식민지 백성으로서의 아픔은 나날이 깊어져 갔습니다. 그야말로 두려움과 걱정이 공존하는 시대였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오늘 복음의 즈카르야는 바로 자신의 아들이 선구자의 역할을 수행하리라는 하느님의 계시를 받고 기쁨에 가득 차 노래합니다.
또한 천사에 대한 불신으로 인해 말 못하는 벙어리로 지내던 벌을 면하고, 말을 다시 하게 된 기쁨을 표하며 나이 많은 아내 엘리사벳이 아이를 낳은 기쁨을 표현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장차 예수님을 통하여 이룩하실 하느님의 구원을 내다보며 크나큰 희망에 가득 차 찬미의 노래를 드리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의 즈카르야의 노래의 내용을 살펴보면 뚜렷한 하느님의 이미지가 나오는데 그것은 첫째로, 이스라엘 백성에게 했던 약속을 지키시는 하느님입니다.
여기서 유의할 점은 탈출기의 시절부터 이스라엘은 흥망성쇠의 과정을 거쳤다는 사실입니다. 마치 우리의 인생처럼, 때로는 하느님의 음성을 들으며 식민 생활을 탈출한 기쁜 일도 있었고 그 과정 안에서 힘들고 비극적인 순간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시간이 아닌 하느님의 시간 안에서 결국 약속은 지켜지며 과거의 힘들었던 시절은 극복되고 메시아가 탄생하는 기쁨을 갖게 됩니다. 이 순간, 과거의 힘들었던 시절은 영광을 위한 과정이 되고 그 역사가 됩니다.
결국 우리가 기억해야 하는 것은 하느님은 우리에게 약속을 하시는 분이며 그 약속을 인간의 방식이 아닌 하느님의 방식으로 충실히 지키시는 분이시라는 점입니다.
두 번째는, 하느님의 아들이 억압과 죄악에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오신다는 것입니다. 이는 오늘의 찬가에 나오듯, “어둠과 죽음의 그늘에 앉아 있는 이들을 비추시고 우리 발을 평화의 길로 이끌어 주기” 위한 것입니다.
이처럼 하느님은 결코 우리와 동떨어져 있는 분이 아닙니다. 이 분은 우리의 앞에서 우리를 이끌어 주시는 분, 우리를 격려하시고 도와주시는 분이십니다.
이 모든 일의 최종 목적은 죄의 용서와 인간의 구원입니다. 멀리 계시던 하느님이 이제 우리에게 가까이 오시고, 두려워만 하던 하느님이 아기 예수님을 통해 사랑과 평화를 갖고 오신다는 것입니다.
이제 아기 예수님이 다시 우리에게 오시는 오늘, 지난 1년을 기억해 봅시다.
그 시간은 마치 이스라엘의 역사처럼 대부분이 힘들고 고통스러웠습니다. 간혹 기쁜 일도 있었겠지만 적어도 올해 만큼은 유래 없는 바이러스로 인해 힘겨운 시간이 더욱 기억에 많이 남아있습니다.
그밖에 일상 안에서 마주치는 어려움들에 한숨이 나오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와중에 하느님의 의중을 모두 파악할 수 없으니 번번이 실망스러울 수밖에.
그러나 지난 우리의 모습을 마치 비웃기라도 하듯, 우리와 함께 하시다는 것을 증명해주기 위해 또 다시 아기 예수님이 오십니다. 새로운 사명을 주시고 위로를 주시기 위해 우리 곁에 다가오시는 것입니다.
이를 통해 지금까지의 힘들고 슬펐던 순간은 과거가 되고 우리는 하느님께 나아갈 수 있는 발판을 다시금 소유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을 깨닫게된 즈카리야는 예수님을 다음과 같이 언급합니다.
“우리 하느님의 크신 자비로 높은 곳에서 별이 우리를 찾아오시어, 어둠과 죽음의 그늘에 앉아 있는 이들을 비추시고, 우리 발을 평화의 길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 기쁜 마음으로 다시금 아기 예수님을 품에 모셔야 하겠습니다. 여러 가지 힘겨운 일들이 있고 미사를 드릴 수도 없는 현실이지만 주님께서는 본래 어려운 사람들을 찾아오신 분입니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올해에 어느 때보다 더 작고 여린 모습으로 우리 모두의 마음으로 들어오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확신하게 됩니다.
자, 그러니 서둘러 마음에 작은 구유를 만들고 기쁨과 사랑으로 그 자리를 따뜻하게 데운 뒤 사랑스러운 아기 예수님을 품에 안을 준비를 해야 합니다. 하느님의 아들 아기 예수님을 차가운 바닥에 놓아 둘 수 없습니다.
오늘의 복음을 묵상하며, 우리의 삶 안에서 함께 하셨던 하느님의 모습을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전능하신 하느님은 당신의 모든 약속, 우리의 모든 청원을 당신의 방식으로 들어주시는 분이십니다. 때로는 마주하기 싫은 일들이 우리의 삶 곳곳에 위치하지만, 이 안에는 우리에게 힘을 주시는 하느님의 사랑과 도움이 분명히 담겨져 있습니다.
이를 우리는 은총이라 부르며, 그 결정체인 아기 예수님이 드디어 오늘 밤 우리에게 오십니다. 가장 겸손하고 초라한 모습으로 그러나 가장 아름다운 모습으로 우리의 마음에 들어오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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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경규봉 가브리엘 신부님]
(주님 성탄 대축일 전야 미사)
<메시아를 탄생시킨 다윗의 믿음>
하느님께서 다윗에게 영원한 나라 - 메시아 왕국을 약속하신다. 다윗은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사면의 모든 원수들을 다 물리치고 송백으로 지은 궁전에서 편히 살았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머무심을 상징하는 약속의 궤는 성막 안에 있었기에 신심 깊은 그는 마음 아파했다. 그는 하느님께서 머무르시는 성전을 짓고자 하였다.
하느님께서는 그러한 다윗의 믿음을 아셨지만, 다윗이 성전을 짓는 것을 허락하시지 않으셨다. 다윗이 전쟁을 통해 피를 많이 흘려(1역대 22,8) 평화를 상징하는 성전을 건축하기에는 부적합했기 때문이다.
하느님께서는 성전을 건축하여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려는 다윗의 신심 깊은 마음을 반대하시지는 않으셨지만, 아직 그 시기가 이르지 않았던 것이다. 대신 하느님께서는 다윗의 가상한 마음을 보시고 다윗 왕조에 대하여 놀라운 축복을 약속하신다.
하느님께서는 다윗과 그의 후손 이스라엘이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도록 하실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은 과거 주변국가의 잦은 침략에 시달려 이리저리 쫓겨 다니던 신세에서 벗어나(판관 6,2) 완전히 정착하여 다시는 두려움에 떨지 않는 평화스러운 나라가 되리라. 다윗과 그 후손의 나라를 견고하게 세우시리라.
다윗이 죽은 후에도 그의 아들 가운데 후계자로 삼아 영원하고 튼튼한 나라를 세우시리라. 하느님께서 친히 아버지가 되심으로써 비록 다윗 왕국이 죄를 범한다 할지라도 사울의 왕국처럼 버리지 않으시고(15절; 1사무 13,8-14; 15,10-21) 징계하시며 인도하시리라(12,7-15)고 약속하신다.
이는 장차 다윗의 후손으로 이 땅에 임하실 메시아에 대한 예언이다. 신약 시대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루어질 진정한 평화(죄와 죽음에서의 해방)를 예언한 것(루카 2,14; 로마 5,1; 콜로 1,20)으로, 다윗의 후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룩될 나라를 상징한다.(루카 1,31-33; 사도 2,29-31; 13,22-23)
하느님께서 다윗의 후손에게 영원한 왕권을 약속하신 것은 그의 믿음을 어여삐 보셨기 때문이다. 그도 역시 남의 아내를 빼앗고 살인을 주도하는 등 죄를 지은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는 믿음이 있었기에 죄에 빠져 머무르지 않고 하느님께 대한 믿음으로 죄에서 벗어나 회개하였다.
그는 하느님 앞에서 자신의 죄를 인정할 줄 아는 신앙인, 겸손하게 자신이 지은 죄의 대가를 치르는 신앙인이었다. 하느님께서는 그러한 그의 믿음을 보시고 그를 의롭게 여기셨다. 하느님을 생각하고 사모하는 그의 마음을 보시고 그에게 영원한 왕권을 약속하시고, 그의 후손 가운데에서 메시아가 탄생하도록 하셨다.
다윗 한 사람의 깊은 믿음이 그의 후손을 살렸고 왕권을 누리도록 하였다. 다윗의 믿음이 그 후손으로 하여금 하느님과 부자관계를 맺도록 하였다. 한 사람의 믿음으로 그의 후손 가운데 메시아가 탄생하도록 했다. 한 사람의 믿음이 후손 전체에게 커다란 영향을 미치고, 민족과 나라에 영향을 준다. 한 사람의 믿음이 얼마나 중요하며, 소중한 가치를 지니는가! 자신의 믿음을 소중하고 고귀하게 여길 줄 알아야 한다.
사도 바오로는 “인간은 오직 믿음을 통해서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가지게 된다.”(로마 1,17) 하고 말한다. “하느님께서는 믿는 사람이면 누구나 아무런 차별도 없이 당신과 올바른 관계에 놓아주신다.”(로마 3,22) 하고 말한다. 인간은 믿음으로 하느님을 아버지로 모시게 되며,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
그러므로 비록 내가 죄를 지은 죄인일지라도 하느님께 대한 믿음으로 죄에서 벗어나자. 부족하고 허물 많은 죄인일지라도 나의 믿음을 통하여 나의 후손과 내 나라가 하느님께 축복받는다는 점을 생각하고, 자신의 믿음을 소중하고 고귀하게 여기자. 믿음으로 살아가는 신앙인이 됨으로써 후손과 나라에 축복을 주는 삶을 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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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최재현 베드로 신부님]
(주님 성탄 대축일 전야 미사)
오늘 밤은 구세주의 탄생으로 세상이 기뻐할 것이고, 그를 믿는 자에게는 하느님의 큰 축복이 내려오는 평화의 밤이 될 것입니다.
구세주 빨리 오사 어두움을 없이하며 동정 마리아에서 탄생하셨도다. 원조들이 범죄한 후 성조에게 허락하신 메시아를 보내소서. 어지러운 세상에 방황하는 우리들의 간구함을 들으사 보내주옵소서.
대림시기에 주님께서 오시어 우리를 구해주시기를 간절히 청하는 마음으로 불렀던 성가입니다. 첫 사람이 범죄를 저질렀고 모든 사람이 또한 죄를 범함으로써 악의 세력에 물든 세상은 오직 하느님만이 처음 상태로 되돌릴 수 있으십니다.
‘사실 그 한 사람의 범죄로 그 한 사람을 통하여 죽음이 지배하게 되었지만, 은총과 의로움의 선물을 충만히 받은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을 통하여 생명을 누리며 지배할 것입니다.’라는 로마서 5장 17절의 말씀처럼 오늘 오시는 예수님을 통하여 세상은 새롭게 변할 것이며, 더 이상 죄와 죽음이 우리를 지배하지 못할 것임을 믿습니다.
오늘 복음 내용은 아들을 가질 것이라는 천사의 말을 믿지 못한 사제 즈카르야가 말을 못하게 되었다가 요한이 태어나고 난 후 입이 열려 하느님을 찬양하는 노래입니다. 루카 복음에만 나오는 이 찬가는 ‘즈카르야의 노래’ 또는 라틴어 첫 글자를 따서 ‘베네딕투스(Benedictus)’라 부르기도 합니다.
이 노래는 두 부분으로 나뉘는데, 첫째부분은 구원의 시작을 알리는 하느님을 찬미하며 그분께 감사의 노래를 드리는 내용이고, 둘째부분은 예언의 형식으로 되어 있으며, 하느님의 약속이 세례자 요한과 예수님의 공생활 안에서 어떻게 구체적으로 실현될 것인지를 알려줍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민족에게 있어 하느님의 구원 계획은 아주 중요한 주제였는데, 즈카르야의 노래는 그분의 백성이 하느님의 구원 계획에 맞게 응답하도록 그들을 초대하는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이 노래의 처음과 끝은 ‘에피스켑세타이('επισκ'εψεται)’라는 히랍어 말로 연결되는데, 이는 ‘찾아오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인간은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기에 하느님께서 먼저 인간을 향해 또 인간을 위해 내려오셨고 찾아와 주십니다. 이처럼 구원은 하느님 편에서 이루어지고, 당신 백성이 죄에서 해방되어 두려움 없이 당신을 섬기고, 거룩하고 의롭게 되도록 하려는 하느님의 의도를 즈카르야의 노래는 알려주고 있습니다.
또한 하느님은 홀로 일하는 분이 아니시기에 당신의 구원 계획이 한 아이를 통해 준비되기를 바라십니다. 다시 말하면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시는 것을 위해 백성들을 준비시키는 역할을 할 것이라는 것을 즈카르야 노래 후반부에서 알아볼 수 있습니다. 이것이 즈카르야의 노래가 설명하려는 것이지만, 보다 더 근본적인 메시지는 예수님의 메시아적 역할을 분명히 밝히는 데 있습니다.
이 노래는 79절에 ‘평화’라는 말로 끝맺음을 함으로써, 하느님은 예수 안에서 평화의 궁극적인 의미가 이루어지기를 바라고 있음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우리 하느님의 크신 자비로, 높은 곳에서 별이 우리를 찾아오시어, 어둠과 죽음의 그늘에 앉아 있는 이들을 비추시고, 우리 발을 평화의 길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
이처럼 즈카르야의 노래는 당신 백성에 대한 하느님의 자비와 확고한 구원 의지를 증언하고 있으며, 이 증언은 루카 복음서와 사도행전의 중심 주제인 구원의 보편주의와도 직결됩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죄를 용서받아 구원되기를 바라시고 우리를 평화의 길로 이끌어 주고자 하십니다. 그래서 당신 아들을 보내주십니다. 참으로 하느님의 사랑을 깨닫고 하느님의 뜻대로 살아간다면 우리의 삶은 새롭게 변화될 것입니다. 구세주 오심을 믿고 그 믿음을 고백하는 사람에게는 하느님의 큰 축복과 평화가 내려오는 오늘, 새로운 삶으로 초대하시는 예수님을 경배하며 하느님을 찬양하는 아름다운 날이길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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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박상대 마르코 신부님]
<대림시기의 마감>
오늘 복음은 세례자 요한의 탄생사화를 마무리 짓는 즈카르야의 노래를 들려준다. 아홉 달 동안 잠겼던 혀가 풀리면서 성령을 가득히 받아 외치는 즈카르야의 노래는 세례자 요한 탄생사건의 결론이다.
즈카르야의 노래도 마리아에 대한 엘리사벳의 칭송(1,42-45)과 마리아의 노래(1,46-55)와 마찬가지로 성령께서 그의 입에 담아주신 말씀이다. 엘리사벳도 즈카르야도 “성령을 가득히 받아”(41절; 67절) 하느님께 칭송을 외쳤고 찬미의 노래를 불렀다.
마리아의 경우는 지극히 높으신 성령의 힘으로 말미암아(1,35) 예수를 잉태하였으니 이미 주님께서 마리아와 함께 계심을(1,28) 알아야 한다.
성서학자들은 즈카르야의 노래도 마리아의 노래처럼 루카복음서 집필시기 이전에 유대계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널리 퍼져 있었던 감사가, 또는 찬미가로 추정한다.
그 이유는 유대교로부터 소외당하고 버림받았던 가난한 자들이 원수들과 그들을 미워하는 사람들의 박해를 받아 죽음의 암흑과 그 그늘 아래 앉아있던 사람들로 묘사되기 때문이다.
그 가난한 사람들이 메시아 예수의 구원을 체험하고, 또 실제로 구원의 은혜를 받아 이제는 두려움 없이 거룩하고 올바르게 하느님을 섬기며, 평화의 길로 들어선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루카는 이러한 메시아 예수의 구원사적 업적을 세례자 요한의 탄생사건과 연결시키고 있다. ‘아가야’(76절) 하고 시작하는 노래의 후반부는 선구자 요한에 대한 내용이다. 이것은 “이 아기가 장차 어떤 사람이 될까?”(1,66) 하는 사람들의 생각에 대한 루카의 답변으로 볼 수 있다.
이렇게 즈카르야의 노래는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뉘어 있다. 첫 부분(68-75절)은 신실하시고 자비로우신 하느님께 대한 감사와 찬미의 부분이다. 하느님께서는 소외당하고 버림받은 가난한 사람들을 당신 백성으로 삼아 구원해 주셨고, 앞으로도 가난한 사람들은 하느님의 백성이 되어 그분의 구원을 입을 것이다. 구원의 목적은 백성들이 거룩함과 올바름으로 하느님을 섬기는 것이다.
둘째 부분(76-79절)은 직접적으로 구원을 준비하는 선구자 세례자 요한에 관한 내용이다. 그는 구약의 마지막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의 특사요 예언자”(말라 3,1)로 먼저 와서 메시아 주님의 길을 닦는다. 그는 죄를 용서받는 세례를 외칠 것이며, 백성들을 준비시켜 구원받는 길로 인도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구원의 모든 것은 ‘하느님의 자비로우심’ 덕분이다. 이로써 ‘하느님은 자비로우시다’는 뜻을 가진 요한의 이름이 다시금 강조된다. 이는 즉, 하느님의 구원이 요한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직접 하늘의 태양처럼 죽음의 그늘 어둠 속에 있는 백성을 비추시어 빛이 되시는 자비를 베푸신다는 것이다. 이 빛이 백성의 앞을 비추어 그 발걸음을 평화의 길로 이끌어 주신다는 것이다.
오늘 즈카르야의 노래로서 우리는 예수님의 ‘이미 오심’과 ‘다시 오심’을 준비하는 4주간의 대림시기를 마감한다. 세상의 종말과 최후의 심판을 묵상하는 ‘다시 오심’의 분위기로 시작된 대림시기는 지난 12월 17일부터 ‘이미 오심’에 대한 준비로 그 절정을 이루었다.
우리는 마태오복음과 루카복음의 전사(前史)를 통하여 이 준비가 놀라움과 기쁨으로 충만하였음을 보았다. 인류의 성조들로부터 즈카르야와 엘리사벳과 세례자 요한, 그리고 마리아와 요셉을 통하여 펼치시는 하느님의 놀라우신 인류구원계획은 이렇게 준비되었던 것이다. 그 계획은 바로 하느님 스스로의 ‘사람이 되심’이다.
이제 그 성취가 우리의 눈앞에 놓여있다. 오늘 밤 우리는 그 성취를 우리의 눈으로 보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 성취가 인간의 눈에는 만연(漫然) 불가능하게 보일지도 모른다. 오직 성령 하느님께 자신을 여는 자만이 그 성취를 보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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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번 아웃(Burn Out)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사전적 의미는 ‘어떤 활동이 끝난 후 심신이 지친 상태. 과도한 훈련에 의하거나 경기가 원하는대로 풀리지 않아 쌓인 스트레스를 해결하지 못하여 심리적, 생리적으로 지친 상태’라고 정의합니다. 즉, 힘도 의욕도 없는 무기력한 상태가 지속되는 것을 말합니다.
삶 안에서 ‘완전히 지쳤다’라고 말하는 사람이 요즘 특히 많은 것 같습니다. 그들 스스로가 ‘나는 지금 번 아웃 상태인가 봐’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습관적으로 내뱉는 사람이 더 많은 것은 아닐까요? “피곤해”라는 말을 초등학생들도 하는 것을 보면 말입니다.
그리고 이런 말만 내뱉다 보니 실제로 무기력해지는 피곤함을 느끼는 것입니다. 피곤함은 자신을 잃게 만들고, 더 나아가 인생이 잘 풀리지 않습니다. 피곤함이 잠을 잔다고 해결될까요? 실제로 피곤함을 느끼는 사람은 많이 잡니다. 그러나 자도 자도 피곤하다고 말하지요. 육체적인 피곤함을 해결하더라도 정신적 피곤함을 해결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피곤한 상태에서도 반드시 하셨던 모습이 있습니다. 늘 홀로이 외딴곳에 가셔서 기도하셨습니다. 영적 피곤함이 사라지면 육체적 피곤함도 이겨낼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과 함께 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피곤하고 지친 사람들은 주님께 대한 모든 것을 뒤로 미룹니다. 믿음까지 사라지게 됩니다. 삶에 대한 믿음도 사라져서 모든 열정도 없어집니다. 따라서 습관적이라도 나쁜 말, 부정적인 말을 해서는 안 됩니다. 그보다 좋은 말, 긍정적인 말을 할 때 믿음도 커지게 됩니다.
세례자 요한의 아버지인 즈카르야는 요한의 잉태 소식을 듣고는 의심을 하고 부정적인 생각을 가졌습니다. 그 결과는 그의 입을 아예 닫아버리시지요. 그리고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였을 때 비로소 혀가 풀려 말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바로 이때 바쳤던 노래가,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즈카르야의 노래입니다.
이 노래는 과거에 하느님께서 행하신 놀라운 구원 행위와 그 행위를 요한과 예수가 어떻게 완성할 것인지 서술함으로써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을 모두 망라합니다. 그리고 이 노래의 핵심은 하느님께서 아브라함과 맺으신 계약과 약속을 기억하시며, 따라서 이스라엘은 하느님의 약속을 믿어도 된다는 것입니다.
즉, 하느님은 당신 백성을 찾아오시어 그들을 모든 육적, 영적 원수들로부터 구해 주시리라는 당신의 약속에 충실하신 분이라는 것입니다. 의심과 부정의 말이 아니라, 하느님께 대한 찬미와 찬양의 노래가 바로 우리의 입에서 나와야 하는 이유를 깨닫게 됩니다. 이런 말과 행동을 갖출 때, 오늘 밤 이 땅에 강생하시는 아기 예수님을 기쁘게 맞이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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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킬 박사와 하이드>
‘지킬 박사와 하이드’라는 로버트 스티븐슨의 소설입니다. 워낙 인상적인 소설이기에, 1931년에 처음 영화로 만들어진 이후 계속해서 영화, 뮤지컬로 등장했습니다. 친절하고 인정 많은 헨리 지킬 박사는 인간에게 선과 악의 두 가지 본능이 있는데 이를 화학약품을 이용해서 분리하는 데 성공합니다.
지킬 박사는 무서운 범죄를 저지르는 하이드를 조절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하지만 결국 하이드를 통제할 수 없게 됩니다. 인간에 대해 너무나도 정확하게 묘사한 소설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우리는 스스로를 충분히 통제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자신의 어두운 면을 드러낼 때, 우리 안의 가장 선한 면은 완전히 가려지고 맙니다. 독재자를 떠올려 보십시오. 처음에는 모두 훌륭한 의도로 시작합니다. 선이라 생각하는 일을 실행하기 위해 어쩔 수 없다고 말이지요. 그러면서 이 모든 것을 해결하고 나면 훌훌 털고 그 자리에서 벗어나겠다고 합니다.
그러나 결과는 이렇게 되지 않았습니다. 독재자로 인간의 포악성을 드러내곤 했습니다. 선한 면은 완전히 가려지고 포악한 악만 남는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악을 통제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늘 악을 피하고 선을 행하는 데 모든 노력을 쏟아부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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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2020년 청주교구장 장봉훈 가브리엘 주교 성탄 담화문)
<“구세주 오늘 나셨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1. 오늘은 예수 성탄 대축일입니다. 구세주 그리스도 오늘 탄생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성탄을 축하드리며 성탄의 기쁨과 평화가 신자여러분과 여러분의 모두의 가정에 가득하시기를 기원합니다.
2. 예수님의 성탄은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극진한 사랑이 명백히 드러난 날입니다. 인류 역사에, 하느님과 인간의 역사인 구원 역사에 잊을 수 없는 위대한 사랑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것은 이천여년 전 오늘 하느님께서 당신의 사랑하는 외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주신 예수님의 탄생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의 탄생은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크신 사랑을 알리는 종소리가 하늘로부터 이 땅에 울려 퍼진 날입니다. 예수님의 성탄은 하느님께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그 사랑을 알리는 종소리가 천하 만방에 우렁차게 울려 퍼진 날입니다.
요한복음 3장 16절은 이 사실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 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습니다.”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극진한 사랑의 선포인 예수님의 성탄은 우리 모두에게 사랑의 삶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성탄은 사랑의 삶으로의 초대요 촉구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무관심이 만연한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무관심의 세계화’로 눈물을 잃어버린 황폐화된 인류와 신자들을 위해 하느님께 용서와 자비를 청하며 가난한 이웃에 대한 관심을 촉구하셨습니다.
이웃에 대한 무관심에서 깨어나 관심과 나눔의 실천을 간곡히 호소하셨습니다. 인도의 거대한 도시 콜카타에서 빈민들을 위해 한 생애를 오롯이 바친 인도의 마더 데레사 수녀님은 이런 말씀을 남겼습니다.
“사람은 빵을 배고파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배고파합니다. 사람은 옷 한 벌이 없어 헐벗은 것이 아니라 사람다운 대우를 받지 못해 헐벗은 사람이 됩니다.”
이 시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헐벗고 굶주린 사람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가장 가까운 곳에 있다는 사실입니다. 바로 우리 가정에, 우리 곁에 있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의 성탄은 우리 마음에 사랑의 등불을 밝히는 날입니다. 예수님의 성탄은 우리 가정에 꺼진 사랑의 등불을 당기는날입니다. 특히 우리 주변에는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의 확산으로 어느 해 성탄보다 고통과 절망 중에 있는 분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금년 성탄이 이웃에 대한 무관심과 냉대를 떨쳐내고 관심과 나눔을 실천하는 뜻 깊은 날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3. 예수님의 성탄은 구세주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신 참으로 기쁜 날입니다. 인류의 조상 아담과 하와가 창조된 이래 지구상에는 하늘의 별수만큼, 바닷가에 모래알만큼 헤아릴 수 없는 무수한 아기가 태어났습니다.
이 무수한 아기들 중 오늘 유다 지방 예루살렘 근교 작은 고을 베들레헴에서 한 아기가 태어났습니다. 이천여년 전 오늘 베들레헴의 누추한 마구간에 탄생한 아기 예수님은 단지 인류의 빛을 남긴 위대한 스승 중 특별히 추앙받는 사대성인 중 한분이 결코 아닙니다.
오늘 탄생한 아기 예수님은 인류역사에 그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모든 사람을 까마득히 능가하는 하느님께서 약속하신 메시아이십니다. 인류를 죄와 죽음에서 구원하러 오신 구세주 그리스도이십니다.
루카복음 2장 11절은 이 사실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늘밤 너희의 구세주께서 다윗의 고을에 나셨다. 그분은 바로 주님이신 그리스도이시다.”(공동번역) 예수님이 탄생하신 밤 하늘에서 천사가 목자들에게 나타나 하신 말씀입니다.
성경의 핵심은 하느님의 약속입니다. 성경을 일관하는 중심선은 세상을 구원할 메시아 다른 말로 그리스도에 대한 약속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원조 아담이 낙원에서 범죄한 후 메시아를 약속하셨습니다. 하느님의 백성인 이스라엘 민족은 수천 년 동안 하느님께서 약속하신 메시아 그리스도를 기다렸습니다. 예수님이 탄생하신 밤 천사가 목자들에게 전한 기쁜 소식은 다윗고을 베들레헴에 한 아기가 태어나셨는데, 그 아기가 바로 수천 년 기다려온 그리스도라는 놀라운 소식입니다.
구세주 그리스도 탄생의 선포인 예수님의 성탄은 우리 모두에게 기쁨의 삶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탄생은 기쁨의 삶으로의 초대요 촉구입니다. 이 세상에는 수많은 고통이 있습니다.
고통에는 육체적 고통이 있습니다. 고통에는 마음의 고통이 있습니다. 고통에는 정신적 고통이 있습니다.
요즈음 우리 사회는 지난 2월부터 본격화된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 확산의 누적으로 극심한 고통과 불안 속에 기쁨과 활력을 잃어버렸습니다. ‘코로나블루’라는 신조어가 생겨날 정도로 수많은 사람이 우울증과 무기력증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항상 기뻐해야 합니다. 어떤 처지에서든지 늘 기뻐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 모두는 예수님을 구세주 그리스도로 믿고 세례를 받아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고 구원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 나에게 옷을 입혀주셨고, 의로움의 겉옷을 둘러주셨기 때문입니다.(이사 61,10 참조)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세상에서 가장 큰 기쁨은 내가 구원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내가 하느님의 자녀로 거듭났고 의로운 사람으로 인정받았다는 것입니다. 구원받은 기쁨, 구원의 감격은 이 세상의 수많은 고통을 이겨내는 힘입니다. 해가 뜨면 아침안개는 사라집니다. 구원의 기쁨이 충만한 사람은 세상의 고통과 걱정이 아침안개처럼 사라집니다. 봄눈 녹듯이 그렇게 사라집니다.
4. 예수님의 성탄은 구세주 그리스도의 탄생을 알리는 종소리가 온 누리에 울려 퍼진 날입니다. 예수님의 성탄은 구원을 알리는 종소리가 천하 만방에 울려 퍼진 날입니다. 예수님이 탄생하신 밤 천사가 목자들에게 전해준 “구세주 그리스도 오늘 나셨다”는 이 말씀이 우리 모두의 마음을 기쁨으로 채워주시고 변화시켜 주시기를 기원합니다.
성탄을 다시 한 번 축하드리며 신자여러분과 여러분의 가정에 성탄의 기쁨과 사랑의 불빛이 가득하시기를 기원합니다.
2020년 12월 25일
예수 성탄 대축일에
청주교구장 장봉훈 가브리엘 주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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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하느님 중심의 삶>
-회개와 겸손, 감사와 평화-
어제 세례자 요한의 출생에 이어, 주님 성탄절 바로 전날인 12월24일 오늘 복음은 즈카르야의 노래입니다. 마리아의 노래처럼 즈카르야의 노래 역시 아나뷤의 찬가, 가난한 이들의 노래입니다. 성서의 빈자의 영성이 잘 드러나는 역시 초대교회 가난한 신자들이 즈키르야의 입을 빌어 노래했던 즈카르야 찬가입니다. 아침 성무일도 끝무렵에 부르는 즈카르야 노래를 통해 우리 교회 역시 아나뷤의 후예들임을 입증합니다.
참 재미있는 것이 즈카르야가 대 침묵피정같은 분위기에서 벙어리로 지내다가 입이 열리고 혀가 풀려 말을 하기 시작하면서 성령으로 가득차 찬가를 불렀다는 것입니다. 그대로 즈카르야가 회개를 통해 하느님 중심의 삶으로 돌아 왔다는 표지입니다. 보십시오. 완전히 즈카르야 찬가는 하느님 중심의 삶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온통 찬가 문장의 주어는 하느님이고 동사는 하느님이 하신 행위입니다.
회개의 표현이 하느님 중심의 겸손한 삶입니다. 하느님께서 주도적으로 행하신 구원 역사에 대한 찬미와 감사의 고백입니다. 바로 이런 끊임없는 찬미와 감사의 기도와 삶이 우리의 회개를 촉발하며 하느님 중심의 삶으로 이끌어 줍니다. 복잡하고 혼란스러운 삶을 하느님 중심의 단순하고 진실하고 투명한 삶으로 이끌어 줍니다.
하느님을 믿는다 하면서도 얼마나 많이 하느님을 까맣게 잊고 내 중심의 삶을 살아가는 우리들인지요. 하느님 중심의 삶을 잊을 때 혼란과 방황이요 세상 우상들의 노예가 되기 십중팔구입니다.
“주 이스라엘의 하느님께서는 찬미 받으소서,”로 시작되는 참으로 아름다운 즈키르야 찬미가입니다. “내 영혼이 주를 찬송하며, 나를 구원하신 하느님께 내 마음 기뻐뛰노나니”로 시작되는 아름다운 마리아의 찬가와 쌍벽을 이루는 즈카르야의 찬가입니다.
오늘 복음의 즈카르야의 예언 찬가와 제1독서의 나탄의 예언 신탁이 참 좋은 대조를 이룹니다. 나탄은 신탁의 예언을 통해 다윗의 회개를 촉구합니다. 하느님께 성전을 지어 바치고 싶다는 다윗에게 하느님은 나탄을 통해 다윗을 위해 행하신 당신의 구원 업적을 열거하며 하느님 중심에의 삶으로 다윗의 주의를 환기시킵니다. 보십시오, 나탄의 예언 문장 역시 온통 주어는 하느님이고 동사는 하느님이 행하신 일입니다. 나탄의 예언은 먼 훗날에 있을 다윗의 자손 구원자 예수님의 도래까지 은연중 알려줍니다. 그대로 가톨릭 교회를 통해 영원한 현재 진행형으로 이뤄지고 있는 예언입니다.
“나는 그의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나의 아들이 될 것이다. 너의 집안과 나라가 네 앞에서 영원히 굳건해지고, 네 왕좌가 영원히 튼튼하게 될 것이다.”
바로 성경의 이런 렉시오 디비나 방법을 통해 우리 삶의 성서를 렉시오 디비나하는 방법을 배우게 됩니다. 내 중심의 삶에서 하느님 중심의 삶으로 내 삶을 렉시오 디비나 해보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내 삶의 문장을 하느님을 주어로 하여 내 삶 전부를 렉시오 디비나 해보는 것입니다.
요셉 수도원에 살기 까지 각자 삶의 궤적을 잘 들여다 볼 때 결코 우연이 아닌 ‘신의 한 수’와도 같은 하느님 섭리의 발자취를 발견할 것입니다. 때로 풍요로운 영적 삶을 위해 이렇게 하느님의 넓고 깊은 시야로 세상을, 사회를, 공동체를, 내 삶을 렉시오 디비나 하며 하느님의 뜻을, 삶의 의미를 찾아 보는 것이 필요합니다.
하느님 중심의 찬미의 삶은 끊임없는 회개를 촉발하고 회개와 더불어 겸손을, 감사와 더불어 평화를 가져다 줍니다. 즈카르야의 성령 가득한 찬가를 통해 계시되는 세례자 요한의 신원이요 예수님의 신원입니다. 참 고마운 은총의 선물입니다.
고맙게도 우리 수도승의 신원은 물론 믿는 이들의 신원도 뚜렷하게 계시됩니다. 바로 ‘한평생 주님 앞에서, 거룩하고 의롭게 주님을 섬기는 삶’이 우리 믿는 모든 이들의 신원이라는 것입니다. 시편 화답송도 이와 일맥상통합니다.
“주님의 자애를 영원히 노래하오리다. 제 입은 당신의 진실을 대대로 전하오리다. 제가 아뢰나이다. ‘주님은 자애를 영원히 세우시고, 진실을 하늘에 굳히셨나이다.’”
새삼 성서의 가난한 사람들인 아나뷤들은 찬미의 사람들임을 깨닫게 되고 찬미와 감사의 기도와 삶으로 한평생 주님을 섬기는 우리 수도승들은 진정 아나뷤의 후예들임을 확인하게 됩니다. 오늘 즈카르야 찬가를 통해 은혜로이 계시되는 세례자 요한과 예수님의 분명한 신원입니다.
“아기야, 너는 지극히 높으신 분의 예언자로 불리고, 주님을 앞서 가 그분의 길을 준비하리니, 죄를 용서받아 구원됨을, 주님의 백성에게 깨우쳐 주려는 것이다.”
바로 세례자 요한의 신원이자 사명입니다. 즈카르야의 렉시오 디비나의 풍요한 결실은 예수님의 신원과 사명에서도 잘 드러납니다.
“우리 하느님의 크신 자비로, 높은 곳에서 별이 우리를 찾아오시어, 어둠과 죽음의 그늘에 앉아 있는 이들을 비추시고, 우리 발을, 평화의 길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
즈키르야의 예언 그대로 어둠과 죽음의 그늘에 앉아 있는 우리를 비추시고, 우리 발을 평화의 길로 이끌어 주시는 예수님이십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에 참석한 당신의 가난한 아나뷤인 우리들을 당신 사랑과 생명으로 가득 채워 주시고 평화의 길로 이끌어 주십니다. 알렐루야 복음 환호송 기도가 우리의 심정을 그대로 잘 드러냅니다.
“떠오르는 별, 영원한 빛, 정의의 태양이신 주님, 어서 오소서. 어둠 속 죽음의 그늘에 앉아 있는 이들을 비추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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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알타반의 말씀 사랑♡
(주님 성탄 대축일 밤 미사)
오늘 미사의 말씀은 하늘을 쪼개고 내려오신 구원자를 우리에게 보여 주십니다.
"어둠 속을 걷던 백성이 큰 빛을 봅니다. 암흑의 땅에 사는 이들에게 빛이 비칩니다."(이사 9,1)
먼저 제1독서에서 예언자는 주님께서 오시는 의미를 알려 줍니다. 오신 분은 "빛"이십니다. 인류는 죄와 악과 약함이라는 어둠에 짓눌려 살아왔지요. 이스라엘 백성은 그런 인류를 대변합니다. 우리 역시 그 안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암흑과 같은 어둠 속에 빛이 새어듭니다. 어쩌면 어둠은 실체라기보다 빛의 부재일 것이니, 빛은 아무리 작아도 어둠을 밀어냅니다. 빛이 있는 한 어둠은 힘을 쓰지 못합니다.
제2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그 빛의 목적을 설명합니다.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가져다주는 하느님의 은총이 나타났습니다."(티토 2,11)
그 빛은 하느님의 은총입니다. 하느님의 은총은 당신 백성을 구원으로 이끄는 무상의 선물이지요. 먼 옛날 성조에게 약속하신 계약과 축복이 성자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구원과 이어집니다.
복음은 주님의 성탄 이야기를 다룹니다.
"여관에는 그들이 들어갈 자리가 없었던 것이다."(루카 2,7)
"들에 살면서 밤에도 양 떼를 지키는 목자들"(루카 2,8)
"포대기에 싸여 구유에 누워 있는 아기"(루카 2,12)
오늘의 복음이 제게 건네신 이 세 구절이 한 단어로 읽힙니다. 바로 "가난"이라는 말씀입니다.
임신한 여인이 자기를 받아 줄 안정적이고 정갈한 방 한 칸 구할 수 없는 여행 중에 몸을 푼다는 것은 참 난감한 일입니다. 당사자인 여성뿐 아니라 동행하는 보호자에게도 당혹스럽기 짝이 없는 일이지요. 오로지 타인의 호의에 기대어 산모와 아기의 생명을 내맡겨야 합니다. 온전히 주님께 의탁하는 가난의 상황입니다.
밤에도 양 떼를 지키며 들에서 지낸다는 건 목자들이 늘 위험에 노출된 불안정하고 험한 일을 하는 가난한 존재들임을 가리킵니다. 광야에는 목자와 양들 뿐만 아니라 거친 날씨와 맹수와 도둑까지 공존하니까요. 그들에게는 맡겨진 양들의 안위가 우아한 교양이나 청결, 율법의 준수보다 앞설 것입니다.
갓 태어난 연약한 아기가 짐승의 여물 통 안에 눕혀집니다. 부모가 여행 중이었고, 해산할 방도 제대로 구하지 못했으니 어쩔 수 없었겠지요. 그나마 한데가 아니라 마구간이라도 구했으니 다행이다 싶은 상황이었을까요. 아기로 오신 주님은 이렇듯 가장 가난한 현실 안으로 들어오십니다.
주님은 가장 가난하고 비천한 이들도 서슴없이 다가갈 수 있는 곳에 당신을 놓으셨습니다. "빛"이 지금 삶의 무게에 짓눌려 울고 있는 이들 안으로 들어오신 것입니다. "하느님의 은총"이 죄와 약함으로 삐걱대는 인간의 실존에서 우리를 일으켜 세우려 오신 것이지요.
우리의 가난이 그분을 알아봅니다 그리고 그분의 가난이 우리를 환대하지요. 인류의 대다수가 재물과 권력을 욕망하고 탐하는 현세를 살아가는데, 그중에서 삶의 밑바닥에 더 가깝다는 건, 주님의 현존과 가장 가까운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는 뜻도 됩니다. 주님은 탄생부터 마지막 죽음의 자리까지 삶의 끝자리를 마다하지 않으셨으니까요. '여기가 끝인가 보다.' 싶어도 정신을 차리고 보면 주님께서 우리보다 더 아래, 더 끝에 계십니다.
성탄은 가난을 예찬하는 서곡입니다. 그 안에 하느님의 사랑에 찬 비움이 담겼기 때문이지요. 이렇듯 가난은 주님의 탄생을 통해 존엄성을 얻습니다. 훗날 고통마저도 주님의 죽음으로 존엄성을 얻게 되듯이 말입니다.
우리에게 오신 빛을 알아보고, 하느님의 은총이신 분께 주저없이 달려갈 수 있는 우리의 부족함과 비천함에 오히려 감사합시다. 주님은 바로 이 가난을 구원하러, 가장 가난한 이 되어 오셨고 그렇게 죽으셨습니다.
오늘 밤 우리는 각자의 집, 가정 교회 안에서 비대면으로 미사에 참례하며 아기 예수님을 맞이할 겁니다. 내외적 어둠의 현실 안에서 얼마나 간절히 주님을 기다려왔는지요! 오늘만큼은, 주님께 더 가까이 가라고 우리에게 지워진 약하고 허술한 가난의 실체와 상처와 훈장들을 토닥토닥 다독여주면 좋겠습니다. 우리의 가난에 주님의 빛이 더해지면, 주님과 더 뜨겁게 사랑하고 일치하는 선물이 된답니다.
사랑하는 벗님! 가난으로 오시는 주님을 소박하고 진실된 마음으로 맞이하시는 여러분 모두를 축복합니다. 주님의 성탄을 축하드립니다. 주님 은총 가득한 축제 되시길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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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대교구 김홍언 요한보스코 신부님]
♡김홍언 신부님의 영성의 샘물♡
♥자기 안에 그리스도를 모시지 않는 영혼은 비참하다.(성마타리우스 주교)
사람이 살고 있는 집은 집을 사용하기에 더 허물어지고 낡아질 텐데 그렇지 않고,반대로 사람이 살지 않는 빈집이 더 쉽게 낡아지고 허물어질까요? 사람의 좋은 기운이 집을 버티어 주지 못하기 때문일까요? 아니면 낡은 곳을 고치며 관리를 잘하기 때문일까요?
♣우리 신앙생활도 마찬가지 원리일 것 같군요.
우리의 삶이 총체적으로 무너지지 않도록 늘 추스르고 균형을 잡아야 하고 영육 간의 상처와 질병을 검진하여 잘 관리하여야 합니다. 육적인 것과 물질적인 것에만 집중하여 마음과 영혼을 소홀히 하면 마음과 영혼이 병들어 육신도 치유되기 힘든 암적인 병이 들기 쉽습니다. 그런데 모든 생명의 주관자이시며 우리를 위해 당신 자신을 비우시고 사람으로 육화하시어, 우리를 위해 죄와 죽음에서 속죄하시기 위해 희생 제물이 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 안에 모심으로써 폐가처럼 버려진 우리 자신이 세례를 받아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계시기에, 이제는 빈집처럼 쓰러져가는 폐가가 아니라 성령의 궁전이 됩니다. 이 얼마나 영광스럽고 복된 일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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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그리스도의 향기가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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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양주분회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 <복음 환호송>은 이렇게 노래합니다.
“더오르는 별, 영원한 빛, 정의의 태양이신 주님, 어서 오소서. 어둠 속 죽음의 그늘 아래 앉아있는 이들을 비추소서.”
즈카르야의 노래에서 따온 이 구절은 바로 이 시대의 희망이요, 바로 우리의 기도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오늘날도 여전히 어둠과 질곡이 판을 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둠이 짙기에 우리는 빛을 더더욱 기다립니다.
오늘 <독서>에서는 다윗 가문에 영원한 왕좌가 약속되고, <복음>에서는 요한의 아버지 즈카르야가 성령으로 가득 차 노래합니다. 우리가 매일 <아침기도> 때 드리고 있는 이 찬가(Benedictus, 찬미받으소서)는 두 부분으로 되어 있습니다.
<전반부>(1,68-75)는 하느님께 드리는 찬양의 노래로 선조들과 예언자들에게 약속하시고 예언한 구원을, 아기 예수님을 통해 실현하심을 찬미합니다. 곧 하느님께서 자비를 베푸셨음을 노래합니다. 특히 여기에서는 구원받은 인간이 하느님을 섬기는 데 지녀야 할 두 가지 덕목을 ‘거룩함’과 ‘의로움을’으로 노래합니다.
“우리가 두려움 없이 한평생 당신 앞에서 거룩하고 의롭게 당신을 섬기도록 해주시려는 것입니다.”(루카 1,75)
<후반부>(1,76-79)는 어제 <복음>의 “이 아이가 대체 무엇일 될 것인가?”(루카 1,66)에 대한 답변으로 태어날 아기, 곧 세례자 요한이 장차 어떤 일을 할 것인가를 노래입니다. 여기에서는 “지극히 높으신 분”은 하느님을, ‘지극히 높으신 분의 아들’은 예수님을, 그리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예언자“로 세례자 요한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곧 세례자 요한을 구약에 예언된 메시아의 선구자로 말하고 있습니다. 이 노래의 ‘끝부분’은 이렇게 노래합니다.
“우리 하느님의 크신 자비로 높은 곳에서 별이 우리를 찾아오시어, 어둠과 죽음의 그늘에 앉아있는 이들을 비추시고 우리 발을 평화의 길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1,78-79)
여기서 “크신 자비”라는 말의 직역은 ‘자비의 내장으로’ 입니다. 곧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의 마음을 가리킵니다. 그렇습니다. 그 크고 깊으심에서 그리스도 오시어, 어둠과 죽음에 앉아있는 이들, 곧 이방인들을 비추고 평화로 이끌 것입니다. 결국, 빛이 오면, 어둠은 물러날 것입니다. 아무리 어둠이 기승을 부려도 어둠이 짙으면 새벽이 멀지 않듯, 빛은 막을 수도 거부할 수도 없는 힘으로 오십니다.
그렇습니다. 이미 타오르는 빛이 우리의 발길을 밝히고 있습니다. 구세주께서 이 어두운 이 세상에 곧 오시어, 참 빛을 밝히실 것입니다. 어둠 속 우리를 당신 빛 속, 평화의 길로 인도할 것입니다. 오늘 밤 우리는 그 빛을 맞이할 것입니다. 그러니 오늘은 등불을 밝혀들고 참 빛을 맞이할 태세를 갖추어야 할 때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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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말씀에서 샘솟은 기도-
“우리 하느님의 크신 자비로
높은 곳에서 별이 되어 우리를 찾아오시어~”(루카 1,78)
주님!
제 안에 오신 빛, 자비시여. 저를 비추소서.
당신 마음으로 저를 채우소서. 제가 자비로워지겠나이다.
당신 얼굴로 저를 비추소서. 제가 평화로워지겠나이다.
제 안에 오신 별, 빛이시여. 밝히소서. 제가 환해지리이다.
그 크고 깊으심으로 저를 어루만지소서. 제가 새로워지겠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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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아기의 아버지 즈카르야는 성령으로 가득 차 이렇게 예언하였다."(루카1,67)
<즈카르야의 노래!>
예수님에 앞서 태어난 선구자 세례자 요한의 아버지인 즈카르야가 성령으로 가득 차 노래합니다.
즈카르야는 이 노래에서 하느님께 찬미를 드리면서, 세례자 요한이 장차 예수님의 오심을 준비하고,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죄를 용서받아 구원받는다는 사실을 주님의 백성에게 알려주는 역할을 하게 될 것이라고 선언합니다.
정부에서 발표한 연말연시 코로나 19 특별 방역 강화조치에 따라서 오늘부터 1월3일(주님공현대축일)까지 비대면 미사를 드리게 된 성당들이 많을 것입니다. 마산교구도 비대면 미사 지침이 발표되어서, 이곳 영산성당도 내일부터 1월3일까지 비대면 미사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12월25일 주님성탄대축일 낮미사 때 하려던 세례식(5명)도 앞당겨서 12월23일 저녁 7시에 했습니다.
주님 성탄을 앞두고 비대면 미사가 거행되는 이 현실을 두고 많은 사람들이 말합니다.
"안타깝다!"
"슬프다!"
"마음 아프다!"
그렇습니다. 주님성탄을 코앞에 두고 비대면 미사로 거행되는 이 현실이 인간적으로는 그렇게 느껴집니다.
하지만 주님성탄의 참의미는 그런 현실 때문에, 그런 현실을 위해서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어 오신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안타까운 모습, 우리의 슬픈 모습, 우리의 마음이 아픈 모습 때문에 주님께서 탄생하십니다. 그 표지가 바로 가장 누추한 곳, 가장 낮은 곳의 표지인 '말구유간'이며, 또 하나의 결정적 표지가 바로 '십자가'입니다.
주님께서는 그렇게 탄생하십니다. 주님께서는 가장 가난한 자의 모습, 가장 낮은 자의 모습으로 탄생하십니다. 주님께서는 그렇게 우리를 위해 대신해 죽으시려고 탄생하십니다.
그러니 오시는 주님을 너무 화려한 모습으로 꾸미거나 포장하지 말고, 조용한 성탄, 사랑하는 가족과 함께하는 성탄, 그래서 그 어느 때보다도 성탄의 참의미를 느낄 수 있는 그런 성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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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bg19AvuCnxA&feature=youtu.b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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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높은 곳에서 별이 우리를 찾아오셨다."(루카 1, 78)
가장 가까이
임박한
성탄이 있다.
눈빛과
별빛 사이에
우리들이 있다.
마침내
별이 되는
사람이 있다.
멀게만
느껴지는
별이
우리들 곁으로
오신다.
어두울수록
별은
빛난다.
어두운 밤길을
어루만지며
길을 터주신다.
별빛같은
사랑은
하나밖에 없는
사람이 되게 한다.
별빛처럼
사랑처럼
오늘이 다시
빛난다.
언젠가는
오실 별이
가장 힘겨운
삶의 자리에
오신다.
잠든 우리의
삶을 깨운다.
기다림은
별이 된다.
우리를
만나러
오신다.
사랑이 없다면
별은 더 이상
빛나는 별이
아닐 것이다.
사랑의 탄생이
있기에 오늘이
가장 좋은 날이다.
하느님과
사람이
하나가 된다.
하느님의
탄생으로
사람이
누군지를
알게 된다.
우리를 찾아오신
별은 간절히
바라는 우리의
기쁜 소식이다.
별이 오신
이유가
사랑이기에
사랑으로
밝히고
사랑으로 다시
빛나게 한다.
코로나의
어둠을 밝히는
빛나는 별이
오늘 오셨다.
성탄의 별을
진실로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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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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