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2일 목요일 성 아타나시오 주교 학자 기념일
<너희 기쁨이 충만하도록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5,9-11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9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다.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
10 내가 내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분의 사랑 안에 머무르는 것처럼,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머무를 것이다.
11 내가 너희에게 이 말을 한 이유는,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고 또 너희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는 것이다.”
희망을 가지십시오.
가끔 세상을 살면서 손해 보는 일을 하고 있거나 밑지는 일에 지금 파묻혀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따지고 보면 성당에 다니고 하느님을 믿고 예수님의 말씀을 따르는 것도 권모술수가 판을 치는 이 세상에서 손해나는 일이고,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많은 어려움을 더 해준다고 생각이 됩니다. 돌고 도는 것이 돈이라 하고 돈을 보면 모두 돌아 버린다고 돈이라는 말도 있지만 세상에 돈으로 안 되는 일이 없는 것 같기도 하고 돈이면 모든 것이 다 해결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우리처럼 돈이 없는 사람들은 돈은 하느님하고 인연이 없는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래서 돈은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뭉쳐져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고 돈이 많은 사람들은 눈덩이를 굴리듯 점점 돈이 더 불어나 크게 뭉쳐지고 가난한 사람은 더 가난해지는 양극화 현상이 가속화 됩니다.
돈이 없으면 누구나 기운이 없어지고, 활력이 갑자기 사라집니다. 나도 돈이 없이 아주 가난하게 살았습니다. 먹을 것을 걱정하면서 살았을 때는 부자가 되는 것이 인생의 목표처럼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먹는 것, 입을 것, 전셋돈에 인생이 다 무너져 버리는 그런 아픔들을 겪으면서 "정말 인생은 이제 끝장이구나!" 하는 생각이 수없이 들었습니다. 이제는 돈을 포기하고 살려니 매사에 자신이 없고, 세상 사람들에게도 떳떳하지 못하고, 돈이 없어 치료를 못하는 이들에게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하면서 "서로 사랑하시오."라고 말만하는 것 같아 자신이 원망스러워 정말 돈이 원수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래서 성당에 다니고, 하느님을 믿는 신앙생활에서 조차 활력이 없어지고 어깨가 움츠러들기도 합니다. 흔히 "꿔다놓은 보리자루"라는 말이 있습니다. 모임에서 한 쪽 귀퉁이에 기를 펴지 못하고 앉아서 말도 못하거나 하려고도 하지 않는 사람을 지칭하는 말입니다. 생각해보니 꿔다놓은 보리자루처럼 산 때가 한두 번이 아닙니다.
요즘에는 사랑도 돈이 있어야 할 수 있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그런데 주님은 돈 없이 사랑하는 방법을 오늘 말씀하십니다. 돈이 아니라 생명으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부모님은 돈으로 사랑하지 않으시고 당신의 생명을 주심으로 사랑하셨습니다. 어머니가 아이를 가졌을 때 뼈를 나누고, 피를 나누고, 영양을 나눕니다. 그래서 출산 후 엄마들은 이가 다 흔들거리거나 온몸이 뚱뚱 부어오르고 영양이 될 만한 것은 전부 아이에게 나눠주고 때론 영양 결핍되어 부어터지기도 합니다.
또한 아버지가 자식을 사랑하는 것은 돈으로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생명을 주는 사랑입니다. 그래서 아버지의 그 사랑을 받은 예수님은 당신의 생명을 우리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생명으로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당신의 전부를 사랑으로 내어놓으셨습니다. 정말 돈이 들어가는 것도 아니고, 조건이 깔린 것도 아니고, 보상을 바라는 것도 아닙니다. 또한 성령을 보내 주셔서 우리에게 견고한 믿음을 더해 주시고자 하십니다. 그래서 돈이 없어서 받게 되는 모든 것을 극복하고 활력이 있고, 용기를 얻어 꿔다놓은 보리자루처럼 살지 말라고 하십니다.
오늘 제가 이렇게 돈타령을 하는 것은 최근에 우리나라 초등학생들에게 '커서 어떤 사람이 될 것인지를 설문조사'를 했는데 가장 높은 응답은 "앞으로 돈을 많을 많이 버는 사람이 되어서 아주 편하게 살겠다."는 의견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꿈도 없고, 사랑도 없고, 가치관도 없이 변해가는 모습을 보면서 우리 어른들이 그들을 그렇게 키우고 있지 않았는지 반성도 되고 교육자라고 하는 나의 모습이 참으로 비참하게 느껴졌습니다. 물론 전부 그렇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돈으로 살 수 없는 사랑을 주님은 당신 안에 머무르고, 당신의 사랑으로 우리 안에 머무르십니다. 그것은 아버지의 계명을 지키는 것입니다. 계명이라는 말을 들을 때 우리는 계에 더 큰 비중을 둡니다. 계(戒)는 경계하고, 조심하고, 하지 말아야 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고 명(命)은 목숨을 내어 놓고 해야 하는 것, 반드시 해야 하는 것을 말합니다. 계가 소극적인 사랑법이라면 명은 아주 적극적인 사랑법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모든 것을 '하지 말라'에 중점을 두면서부터 소극적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하지 말라는 율법을 깨트리시고 적극적으로 복음을 전하고, 사랑을 심어주시기 위해서 무슨 일이든지 하셨습니다. 적극적인 사랑의 실천(命)을 90%의 비중으로 두고 계시다면, 소극적인 계(戒)의 사랑은 10%에 두시는 듯 하였습니다. 아니 그 이하 일지도 모릅니다.
우리가 예수님 안에 머무른다는 것은 적극적인 사랑의 실천에 온 마음을 다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돈이 없어도, 세상의 권세는 약해도, 가진 것이 없어도 항상 적극적인 사랑 법을 찾아내야 합니다. 그 계명이 "사랑하라"는 것이라면 주님의 명령은 적극적인 사랑의 실천뿐입니다. 그렇게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다보면 주님의 사랑 안에 머무는 것은 당연한 결과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모든 것을 덤으로 주시고자 하십니다. 또한 모든 것을 다 이룰 수 있도록 해주실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행복하고, 우리가 즐겁게 당신께서 주신 생명을 나눌 수 있도록 해 주실 것입니다. 그게 주님이 기쁘신 일이고, 주님은 우리를 기쁘게 하기 위해서 오늘도 십자나무를 오르십니다. 그리고 우리를 기쁘게 하시기 위해서 오늘도 두 팔을 벌리고 대못을 기다리십니다.
<내 판단으로는, 다른 민족들 가운데에서 하느님께 돌아선 이들에게 어려움을 주지 말아야 합니다.>
▥ 사도행전의 말씀입니다. 15,7-21
그 무렵 7 오랜 논란 끝에 베드로가 일어나 사도들과 원로들에게 말하였다.
“형제 여러분, 다른 민족들도 내 입을 통하여 복음의 말씀을 들어 믿게 하시려고
하느님께서 일찍이 여러분 가운데에서 나를 뽑으신 사실을 여러분은 알고 있습니다.
8 사람의 마음을 아시는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하신 것처럼
그들에게도 성령을 주시어 그들을 인정해 주셨습니다.
9 그리고 그들의 믿음으로 그들의 마음을 정화하시어, 우리와 그들 사이에 아무런 차별도 두지 않으셨습니다.
10 그런데 지금 여러분은 왜 우리 조상들도 우리도 다 감당할 수 없던 멍에를
형제들의 목에 씌워 하느님을 시험하는 것입니까?
11 우리는 그들과 마찬가지로 우리도 주 예수님의 은총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믿습니다.”
12 그러자 온 회중이 잠잠해졌다. 그리고 바르나바와 바오로가 하느님께서 자기들을 통하여
다른 민족들 가운데에서 일으키신 표징과 이적들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것을 들었다.
13 그들이 말을 마치자 야고보가 이렇게 말하였다. “형제 여러분, 내 말을 들어 보십시오.
14 하느님께서 처음에 다른 민족들 가운데에서 당신의 이름을 위한 백성을 모으시려고 어떻게 배려하셨는지,
시몬이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15 이는 예언자들의 말과도 일치하는데, 성경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16 ‘그 뒤에 나는 돌아와 무너진 다윗의 초막을 다시 지으리라.
그곳의 허물어진 것들을 다시 지어 그 초막을 바로 세우리라.
17 그리하여 나머지 다른 사람들도, 내 이름으로 불리는 다른 모든 민족들도 주님을 찾게 되리라.
주님이 이렇게 말하고 이 일들을 실행하니
18 예로부터 알려진 일들이다.’
19 그러므로 내 판단으로는, 다른 민족들 가운데에서 하느님께 돌아선 이들에게 어려움을 주지 말고,
20 다만 그들에게 편지를 보내어, 우상에게 바쳐 더러워진 음식과 불륜과
목 졸라 죽인 짐승의 고기와 피를 멀리하라고 해야 합니다.
21 사실 예로부터 각 고을에는, 안식일마다 회당에서 모세의 율법을 봉독하며 선포하는 이들이 있었습니다.”
축일5월 2일 성 아타나시오 (Athanasius)
신분 : 주교, 교부, 교회학자
활동 지역 : 알렉산드리아(Alexandria)
활동 연도 : 295?-373년
같은 이름 : 아따나시오, 아따나시우스, 아타나시우스
성 아타나시우스(또는 아타나시오)는 아마도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의 그리스도인 가정에서 태어나 잘 교육받은 사람으로 여겨지는데, 특히 성경과 신학 분야에서 뛰어났다. 318년 부제품을 받은 후 자기 고향에서 알렉산데르(Alexander) 주교의 비서가 되었다. 그는 아리우스(Arius) 이단을 단죄했던 325년의 제1차 니케아(Nicaea) 공의회에 알렉산데르 주교를 수행하여 참석하였다. 3년 뒤인 328년 4월 17일 알렉산데르 주교가 사망한 뒤 그는 알렉산드리아의 후임 주교로 선임되었다.
그러나 그는 즉시 이집트 아리우스파의 심한 반발에 직면했는데, 이러한 반발은 지중해 제국 전역으로 무섭게 파급되었고, 아리우스를 지원하던 멜레티우스(Meletius) 이단도 덩달아 기세를 올렸다. 물론 이런 세력 뒤에는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지원이 있었다. 결국 그는 335년 독일 남서부 트리어(Trier)로 첫 번째 유배를 가게 되었다. 337년 5월 22일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사망하고, 콘스탄티누스 2세가 서로마 제국 황제로 즉위하였다. 새 황제는 성 아타나시우스에게 알렉산드리아로 돌아가도록 허락한 뒤 다음 해에 교회 회의를 개최하여 그의 직위를 복권하였다. 그러나 성 아타나시우스는 반대파에 의해 2년 후 재차 추방되었다. 이때 그는 로마(Roma)로 가서 7년 동안 머물러야만 했다.
346년부터 356년까지가 그의 생애에 있어서는 가장 평화로운 황금의 시간이었고 또 그의 주요 저서들도 이때 나왔다. 그러나 아리우스주의자인 황제 콘스탄티우스가 그를 추방키로 하고 군인들을 보냈다. 체포 위험에서 간신히 목숨을 건진 성 아타나시우스는 이집트의 사막 은수자들이 있는 곳으로 들어갔고, 그곳에서 콘스탄티우스 황제가 361년에 죽기까지 자기 교구민들을 지도하였다. 그 이후에도 비록 짧은 기간이지만 두 차례나 유배를 더 당하였고, 366년부터 죽을 때까지는 평화롭게 자기 교구를 다스리며 사목할 수 있었다. 그는 지난날의 모든 갈등과 폭력으로 인하여 피폐한 교회들을 재건하고, 아픈 상처들을 치료하는 데 주력하면서, 저술과 강론을 통해 위대한 사도직을 수행하였다.
성 아타나시우스는 신체적 조건으로 볼 때는 작은 사람이었으나 아주 강인하고 정신력이 뛰어났다. 아리우스 이단을 단죄하고 파문하기로 한 니케아 공의회의 결정을 실행하는 데에는 수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그리스도교의 정통 교리를 따르는 평신도들도 우왕좌왕하였고, 수많은 주교들도 주저하였다. 이런 시대적인 상황 속에서 성 아타나시우스는 성 요한 헨리 뉴먼(Joannes Henry Newman, 10월 9일)의 말대로, “그리스도 교회의 거룩한 진리를 세상에 전해 온 사도들의 후예들 가운데 가장 위대한 도구였다.” 아리우스 이단을 대항하여 저술한 그의 뛰어난 저술과 연설은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
또한 그는 역사적 가치를 지닌 저서들을 많이 남겼는데, “안토니우스의 생애”(Vita Antonii)를 비롯하여 성경 주석, 시편 주해 등을 남겼다. 성 아타나시우스는 대 바실리우스(Basilius, 1월 2일), 성 요한 크리소스토무스(Joannes Chrisostomus, 9월 13일) 그리고 나지안주스(Nazianzus)의 성 그레고리우스(Gregorius, 1월 2일)와 함께 동방 교회의 4대 교부 중 한 사람으로 추앙받고 있다. 유배 중에 저술한 그의 저서들은 다음과 같다. “콘스탄티우스 황제에게 보낸 해명”(Apologia ad Imperatorem Constantium), “수도자들에게 보낸 아리우스주의의 역사”(Historia Arianorum ad Monachos) 등이 있다. 성 아타나시우스가 ‘아타나시우스 신경’(Symbolum Athanasianum)을 직접 기록하지는 않았다.
오늘 축일을 맞은 아타나시오 (Athanasius) 형제들에게 주님의 축복이 가득하시길 기도드립니다.
야고보 아저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