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전례
295년 무렵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에서 태어난 아타나시오 성인은 알렉산데르 대주교를 수행하여 325년 니케아 공의회에 참석하였다. 328년 알렉산데르 대주교의 후계자가 된 뒤, 아리우스파에 맞서 싸우다가 여러 차례 유배를 당하는 등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특히 정통 신앙을 해설하고 옹호하는 책을 많이 남겼으며, 수도 생활의 창시자인 안토니오 성인의 전기를 써서 서방 교회에 수도 생활을 알리기도 하였다.
본기도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하느님,
복된 아타나시오 주교를 보내시어
성자의 신성을 힘껏 변호하게 하셨으니
저희가 그의 가르침과 보호로 기뻐하며
하느님을 더욱 깊이 깨닫고 사랑하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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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
<내 판단으로는, 다른 민족들 가운데에서 하느님께 돌아선 이들에게 어려움을 주지 말아야 합니다.>
▥ 사도행전의 말씀입니다.15,7-21
그 무렵 7 오랜 논란 끝에 베드로가 일어나 사도들과 원로들에게 말하였다.
“형제 여러분,
다른 민족들도 내 입을 통하여 복음의 말씀을 들어 믿게 하시려고
하느님께서 일찍이 여러분 가운데에서 나를 뽑으신 사실을
여러분은 알고 있습니다.
8 사람의 마음을 아시는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하신 것처럼
그들에게도 성령을 주시어 그들을 인정해 주셨습니다.
9 그리고 그들의 믿음으로 그들의 마음을 정화하시어,
우리와 그들 사이에 아무런 차별도 두지 않으셨습니다.
10 그런데 지금 여러분은 왜 우리 조상들도 우리도 다 감당할 수 없던 멍에를
형제들의 목에 씌워 하느님을 시험하는 것입니까?
11 우리는 그들과 마찬가지로
우리도 주 예수님의 은총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믿습니다.”
12 그러자 온 회중이 잠잠해졌다.
그리고 바르나바와 바오로가 하느님께서 자기들을 통하여
다른 민족들 가운데에서 일으키신 표징과 이적들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것을 들었다.
13 그들이 말을 마치자 야고보가 이렇게 말하였다.
“형제 여러분, 내 말을 들어 보십시오.
14 하느님께서 처음에 다른 민족들 가운데에서
당신의 이름을 위한 백성을 모으시려고 어떻게 배려하셨는지,
시몬이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15 이는 예언자들의 말과도 일치하는데,
성경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16 ‘그 뒤에 나는 돌아와 무너진 다윗의 초막을 다시 지으리라.
그곳의 허물어진 것들을 다시 지어 그 초막을 바로 세우리라.
17 그리하여 나머지 다른 사람들도,
내 이름으로 불리는 다른 모든 민족들도 주님을 찾게 되리라.
주님이 이렇게 말하고 이 일들을 실행하니
18 예로부터 알려진 일들이다.’
19 그러므로 내 판단으로는,
다른 민족들 가운데에서 하느님께 돌아선 이들에게 어려움을 주지 말고,
20 다만 그들에게 편지를 보내어,
우상에게 바쳐 더러워진 음식과 불륜과
목 졸라 죽인 짐승의 고기와 피를 멀리하라고 해야 합니다.
21 사실 예로부터 각 고을에는, 안식일마다 회당에서
모세의 율법을 봉독하며 선포하는 이들이 있었습니다.”
복음
<너희 기쁨이 충만하도록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15,9-11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9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다.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
10 내가 내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분의 사랑 안에 머무르는 것처럼,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머무를 것이다.
11 내가 너희에게 이 말을 한 이유는,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고 또 너희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는 것이다.”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내가 신앙생활 잘하고 있는지 알아보는 법
우리가 무언가를 지속하려고 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기쁨입니다. 내가 기쁘면 다른 사람이 아무리 뭐라 해도 그만입니다. 어차피 행복해지자고 사는 인생, 지금의 삶이 기쁘다고 하는데 누가 뭐라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신앙도 그래야 합니다.
신자들을 보면 ‘고해성사’가 어려워서 신앙을 포기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고해성사는 저도 지금까지 어렵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그래도 하는 이유는 그 어려움을 감수할 만한 기쁨이 기다림을 알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는 부활의 희망 없이는 질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신앙생활의 기쁨은 어떻게 찾을 수 있을까요? 오늘 복음에서 그 해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내가 내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분의 사랑 안에 머무르는 것처럼,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머무를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이 말을 한 이유는,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고 또 너희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는 것이다.”라고 하십니다. 기쁨은 결국 주님의 계명에 순종함에 있습니다. 제가 십일조를 내는 것도 주님의 계명에 순종하는 것인데 그 기쁨이 지속되지 않는다면 지금까지 이어올 수 없었을 것입니다.
제가 공부에 흥미를 잃게 되었을 때가 있는데 바로 인정받지 못할 때였습니다. 유학 가서 성서 석사 논문을 쓰는데 많은 질책을 하는 지도교수 신부님이 좋게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어차피 인정받지 못하는 것, 여기서 끝내고 더는 공부를 이어서 할 생각이 없었습니다. 모두 저의 잘못인데, 저를 인정해 줄 분에게 순종하지 않고 나의 뜻을 고집했기 때문에 공부라는 것을 이어갈 수 없게 되었던 것입니다. 신부님도 논문 발표 때 낮은 점수를 주어 의욕을 완전히 꺾어주었습니다. 만약 주교님께서 강요하지 않으셨다면 저는 다시 유학을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다시 공부해서는 새로운 지도교수 신부님께 인정받았습니다. 이전에 실패한 것을 생각하며 무조건 순종하기로 했기 때문입니다. ‘나의 논문이 아니라 교수님의 논문을 써 주자’라고 생각하니 모든 것을 그분 뜻대로 썼습니다. 다른 교수님들이 하라는 것도 군말 없이 했습니다. 그러자 그분들은 모두 저에게 좋은 점수를 주었고 저는 자신감이 생겼습니다. 그렇게 한국 와서 여러 책도 자신감 있게 쓸 수 있었습니다. 여기에는 저를 믿어주고 책을 내라고 하신 주교님의 인정도 있었습니다. 이런 기쁨이 모든 어려움을 이겨내게 합니다.
내가 진정 내가 하는 일에서 기쁨을 찾는지는 세 가지 정도로 측정해보면 됩니다. 내가 혹시 남을 부러워하지 않는지 살펴야 합니다. 그러면 지금 가는 길은 문제가 있습니다. 저는 일반 대학교 때 이휘재 씨를 부러워하였습니다. 같은 나이인 저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잘 나갔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전혀 부럽지 않습니다. 그러면 사제로 살아가는 것이 행복하다는 말입니다.
그다음은 내가 하는 일이나 나의 삶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말하는 사람들에게 반응하지 않는 것입니다. 내가 그 사람들의 의견에 흔들린다면 충분히 나의 일에서 행복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저도 한국에 와서 책을 냈을 때 어떤 책에 대해서는 많은 비판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 책을 낸 것이 자랑스러웠습니다. 그래서 전혀 그들의 말에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계속 또 다른 책을 낼 수 있었습니다.
마지막으로는 나의 길을 가려는 사람이 있다면 기쁘다는 것입니다. 며칠 전에 갓 세례받은 청년이 사제가 되고 싶다고 했습니다. 제가 너무 착해 보여서 몇 번 이야기 했더니 마음이 동요된 것 같습니다. 조금 더 생각해 보라고는 했지만, 기뻤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나의 삶을 기뻐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신앙생활을 하면서 기뻐야 합니다. 그래야 어려움들을 이겨내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기쁠 방법은 그분의 말씀에 순종하여 그분께 인정받아 그분 사랑 안에 머무는 길밖에 없습니다. 내가 진정 기쁜 신앙생활을 하는지 앞에 예시된 것들로 나 자신을 되돌아봅시다.
빠다킹신부와 새벽을 열며
본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특히 자기보다 큰 존재를 제대로 안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합니다.
어렸을 때의 일이 생각납니다. 개미집을 향해 과자 부스러기를 지고 개미를 우연히 보게 되었습니다. 이 개미를 도와주고 싶어서, 개미와 개미가 진 과자 부스러기를 함께 개미집 앞으로 이동해 주었습니다. 어떻게 되었을까요? 개미는 자기가 짊어졌던 과자 부스러기에는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고 급하게 도망갑니다. 바로 앞에 자기 집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정반대로만 향합니다. 가는 길을 손으로 막으면서 개미집으로 들어가게 하려고 했지만, 나중에는 제 손을 기어 올라가서 도망갔습니다.
개미가 이런 저를 제대로 봤을까요? 보지 못했을 것입니다. 아마 ‘이게 무슨 일이야?’하면서 도망친 것이 아닐까요?
어린 자녀가 부모에게 아픈 말과 행동을 계속합니다. “엄마, 아빠가 내게 해준 게 뭐 있어?”라면서 습관적으로 말합니다. 그런데 이때는 부모의 마음을 제대로 알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아직 너무 작은 존재이기에 부모의 큰마음을 볼 수 없는 것입니다. 이 어린 자녀가 또 한 아이의 부모가 될 때 비로소 깨닫습니다.
“부모님이 나를 사랑하셨구나.”
우리는 과연 주님을 제대로 볼 수 있을까요? 나의 존재가 너무 작기에 볼 수 없는 것이 당연합니다. 우리가 큰 존재가 되어야 비로소 주님을 알아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자기 존재를 키우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주님 안에 머무르면서 그 안에서 성장하는 것입니다. 가만히 있으면 저절로 성장할 수 없습니다. 성장하기 위해 영양소가 될 수 있는 것들을 먹어야 합니다. 바로 주님의 말씀을 먹으면서 그 말씀을 실천하면서 살 때 우리는 진정으로 성장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성장한 사람만이 그 크신 주님을 제대로 볼 수 있습니다. 그 안에서 큰 기쁨을 누릴 수가 있게 됩니다.
이런 이유로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말씀을 하신 이유를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고 또 너희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는 것이다.”라고 하십니다. 다 우리를 위한 것입니다. 우리가 성장하기를 바라는 주님의 뜻을 잊지 않으면서, 나의 존재가 주님 안에서 성장할 수 있도록 온 힘을 다 기울여야 합니다.
주님 안에서 주님의 말씀을 먹고 자라는 우리는 영적으로 튼튼해집니다. 어떤 순간에서도 흔들리지 않으면서 큰 기쁨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오늘의 명언: 무엇을 견디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어떻게 견디는가 하는 것이다(세네카).
사진설명: 성 아타나시오 주교 학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