먹향 그윽한 선비의 방, 문방(文房)
선비
선비(중세 한국어: 션비)는 조선 사회에서 학문을 닦는 사람을 예스럽게 이르는 말이다. 특히 유교적 이념을 적극 수용하여 사회에 적절히 구현함으로써 선행을 배푸는 인격체를 가리키는데 ‘어질고 학식과 인품이 있는 사람'을 말한다.
선인들은 선비의 인격적 조건으로 생명에 대한 욕심도 초월할 만큼의 무소유의 덕을 요구했다. 공자가 이에 대해 말하기를 “뜻 있는 사(士)와 어진 사람은 살기 위하여 어진 덕을 해치지 않고 목숨을 버려서라도 어진 덕을 이룬다.”고 하였다. 논어에서는 “사(士)가 위태로움을 당해서는 생명을 바치고, 이익을 얻게 될 때에는 의로움을 생각한다.”(견위수명 견리사의)라고 강조했다. 맹자는 “일정한 생업이 없어도 변하지 않는 마음을 갖는 것은 사(士)만이 할 수 있다.”고 하여 사(士)의 인격적 조건으로 지조를 꼽았다.
선비
어휘 발생 배경
선비'라는 어휘는 기록상으로 《용비어천가》(1447, 80장, 82장)에 ‘션ᄇᆡ’의 형태로 처음 나타난다. 즉, 이 어휘는 세종 집권시기(1418~1450)에 처음으로 기록상으로 나타났다. 다만 그 궁극적인 어원에 대해서는 한자어로 추정하는 사람도 있으나 불분명한 점이 많다.
세종은 집권기간 동안 집현전(集賢殿)을 설치하여 학문을 적극 장려하고, 의례제도를 유교적으로 개편시켜 조선을 유교사회로 만들어간 인물이다. 이렇게 자신의 여러 유교적 정책들을 더 적극적으로 추진하고 현실화시키는 과정에서 그는 학문에 밝고, 유교적 이념을 적극적으로 실천하는 인재를 강렬히 원하게 된다.
그의 이러한 정치적인 이유로 인해서, 당시 '학문적으로 뛰어나고 도덕적으로 어진 인물'을 지칭하는 선비를 《용비어천가》를 통해 자신이 원하는 의미로 재정의하여 사회적으로 반포한 것이다.
물론, 세종의 《용비어천가》를 통해서만 선비의 의미가 전적으로 재정의된 것은 아니다. 태종 이방원이 선비의 전형적인 표본, 정몽주를 사회적으로 추모하기 시작하면서 선비의 정의가 점점 변화하기 시작했고, 지방에서는 정몽주를 따랐던 선비일파, 온건개혁파가 지방에서 사림파를 형성하여 세력을 넓히기 시작하면서 태종의 정몽주 추모를 적극 뒷받침했던 점만을 본다면, 세종 이전에도 이미 선비에 대한 정의는 점차적으로 변화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후 세종이 적극적으로 조선을 유교화시키며 유교적인 인재들을 강렬히 열망하고, 이들을 적극 등용하면서 선비의 의미가 유교적으로 크게 개편된 것이다. 이와 더불어서 선비가 《용비어천가》를 통해서 최초로 기록상으로 등장했기 때문에, 정치적ᆞ사회적인 방면에서 선비는 거의 전적으로 세종이 의도하는 유교적인 의미가 된 것이다.
이를 통해 세종은 앞으로의 조선의 인재들에게 자신이 재정의한 선비를 이상향으로 삼도록 하게 하였고, 추구하도록 하였다.
당시 세종집권시기의 초기에는 태종의 강력한 왕권강화정책으로 인해, 무를 갖춘 인재보다 문을 갖춘 인재가 상대적으로 더 등한시되는 경향이 남아있었는데, 세종은 이를 해소시키기위해 문을 갖춘 인재들을 더 장려하는 정책들을 추진하였다. 하지만, 정치적으로 이를 해소하기엔 한계가 있다는 것을 직감했는지, 당시 통용되고있던 어휘들의 일부를 자신이 의도한 대로 적절하게 재정의하여 반포함으로써, 사회적으로 재통용시켜서 사회적으로도 이를 해소하려는 모습을 보였다. 세종의 이러한 노력의 과정에서, 선비라는 어휘가 위와 같은 정의로 쓰여왔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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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향 그윽한 선비의 방, 문방(文房)
문방은 선비들이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며 벗들과 담소를 나누었던 학문을 위한 방이다.
선비들의 기품과 멋이 담긴 곳으로 화려함과 사치스러움을 피했다.
서재의 이름이 적힌 현판을 단 문방에는 서책과 문방구 · 이를 놓아 두는 가구가 있다.
서책은 지식을 배우는 교재이자 학문의 소산이다.
문방구 중에 기본적인 것은 종이 · 붓 · 먹 · 벼루로서 문방사우(文房四友)라고 부른다.
그 밖에도 선비와 관련된 각종 용구와 완상품(玩賞品) 등도 있다.
선비들의 마음을 헤아려 수집한 기증자들의 이야기를 만나본다.
차사(此士) / 조선 19세기 말
현판을 만들기 위해 대자(大字)로 쓴 편액서(扁額書)이다.
「차사(此士)」는 「참된 선비」라는 뜻을 담고 있다.
굵고 힘차게 빠른 속도로 쓴 글자 속에서 호쾌한 선비의 기상이 드러나는 듯하다.
이 글씨는 흥선대원군 이하응(1820~1898)이 썼다고 전하는데,
왼쪽 아래에 대원군장(大院君章)과 석파(石坡) 인장이 찍혀 있다.
장자 / 조선
전국 시대의 사상가 장자(기원전 369~285)의 저서이다. 내펀과 외편 · 잡편을 포함하여 모두 33편이다.
내편은 장자가 저술한 것으로, 외편과 잡편은 후학이 저술한 것으로 추측된다.
이 책은 소요유부터 전체 내용을 필사한 것이다.
「소요유」란 속세를 초월하여 어떤 구속도 받지 않는 절대적으로 자유로운 인간의 생활을 의미한다.
내용을 보면 우주 본체와 사물의 근원 · 물화현상 등을 기상천외한 비유과 우화로 설명하였고
현실 세계의 약삭빠른 사리에 밝은 사람을 경멸하기도 하였다.
천노금강경(川老金剛經) / 고려 1387년
1161년 송나라 천노가 금강경을 해설하고 운문 형식의 칭송하는 글을 붙인 책이다.
금강경은 반야심경과 더불어 우리나라에서 가장 널리 유통되고 독송되었던 불교 경전이다.
책 말미에 이색(1328~1396)이 적은 글에 의하면
이 판본은 고려 우왕 13년(1387)에 진원군 유구와 진천군 강인부가 왕비에게 간청하였으며
송나라 판본을 원본으로 삼았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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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 3. 6
국립중앙박물관 기증관 재개관 전시에서...
장자.
천노금강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