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원시 여행] 봉황정과 대곡리 암각화(숨겨진 보석 10선.5). .........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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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대곡리암각화와 봉황정(鳳凰亭).(숨은보석10선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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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원 숨은보석10선에 올라있는 대곡리 암각화!. 오늘은 신계리 마애여래좌상에 이어 숨은보석 10선
중 그 다섯 번째로 남원시 대산면 대곡리 암각화를 찾았다. 본시 인류라는것은 지역 또는 민족에 따
라서 다르지만 사용하는 말과 글들 또한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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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말과 상형문자나 그림등이 있었기 때문에 오늘 과 같은 훌륭한 문명도 이룩해 놨고 앞으로도 계
속 발전해 나갈 것이다. 가족이나 이웃 모든 사람들 과 이야기를 나누며 살았고 문자를 통해 자신들
의 생각이나 뜻을 다른 사람들에게 잘 전달하며 살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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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황대(鳳凰臺)에는 원래 누각이 없는데, 누각을 지었다. 이유는 아래에 있는 마을에 재앙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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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황정(鳳凰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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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시시대 사용하던 언어는 원형대로 전달되지 못했지만 그러나 그 때 남겨놓은 그림이나 문자는 오
랜 세월이 흘렀어도 오늘날 까지도 원형대로 남아있는 곳들이 여기저기 많다.
우리나라에도 원시시대 사람들이 그림이나 글을 바위나 동굴 벽 등에 남겨 놓은 유적들이 여러 곳에
소중한 가치를 갖고 남아 있어 문화적 가치관을 따져 국보나 보물등으로 등급을 나눠 문화재로 지정
보호 관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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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중 전라북도 남원시 대산면 대곡리 마을 앞 작은 동산에 있는 선사시대 암각화는 호남지방 에서는
보기 드문 암각화로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163호로 1998년에 지정한 지방문화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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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마을에서 높은 벼슬에 오를 사람이 태어나면 운다고 하여 명암(鳴岩)바위라고도 불린다. 봉황대 주변에는 탄금(彈琴) 바위와
말바위, 소바위 등이 몰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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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랑자는 네비양의 도움을 받아 도착하여 먼저 암각화 보다는 봉황정(鳳凰亭)을 먼저 올랐다. 무더운
날씨 탓도 있지만 먼저 피곤에 지친 육체를 조금이나마 쉬게 하고 싶었고 또한 목도 말라 시원한 청수
로 목이나 좀 적셔 보고도 싶었다. 자로고 여행이란 여유가 아니던가. 그러나 혼자 다니다 보니 조금
은 더 바쁘게 움직였던게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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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황정(鳳凰亭)은, 대곡리 대실마을로 바위 남쪽 면에 봉황대(鳳凰臺)라는 세 글자가 음각되어 있는
바위밑 사이에 절묘하게도 세워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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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정자의 규모는 전면 3칸 측면 1칸에 팔작지붕 겹처마로 1977년에 지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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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황정(鳳凰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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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떨어진 곳에서 봉황정을 바라보면 과연 봉황이 날라 올 정도의 풍광이 아름다우면서도 매혹적
인 절경을 자랑한다, 동산 전체를 기묘한 바위가 둘러싸고 있으며, 또한 여러 그루 노송이 바위와 조
화를 이루어 수려한 경관을 연출하고 있는데 그 풍경이 마치 한폭의 산수화처럼 너무나도 화려하고
도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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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일까, 옛날 어느 선비가 마을 앞을 지나다가 그 절경이 중국의 봉황대와 같아 시문을 짓고 풍
류를 즐겼다고 해서 그렇게 이름을 지었다고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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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황정(鳳凰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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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는 마을 형국이 풍수지리적으로 날아가는 봉황이 알을 품는다는 비봉포란(飛鳳抱卵)형에서 연유하
기도 한다. 암튼 이 봉황정은 생원 진준(陣儁)이 대 위에 건축 하였다고 전해진다. 1600년대 건립된 건
물을 중수한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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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대곡방은 지금의 대산면 대곡리 대실 마을로 대나무(竹)가 많은 죽곡방에서 유래하였다. 정자의
규모는 전면 3칸 측면 1칸에 팔작지붕 겹처마로 1977년에 지은 것이다. 현재 봉황정 정자에는 편액이
14개가 걸려 있는데 그 중 봉황대기는 숙종 2년(1676)으로 되어 있어 1600년대 건립된 건물을 중수한
것으로 보인다. 현재 봉황대는 마을공동으로 계를 조직하여 공동으로 관리하고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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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황대에 대한 시가 있다. 조선중기의 문인이요 당대 대 철인 김인후(金麟厚)는 이곳 들려 시주를 즐
기며 읊으며 명암(巖鳴), 봉황대(鳳凰臺)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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地久天長物亦靈(지구천장물역령)천지가 장구하니 만물 또한 영험하고
蒼然幾歲度陰晴(창연기세탁암청)고색창연 하니 몇 년 세월 흘렀을까.
須知寂感終無極(수지적감종무극)적막한 느낌도 끝없음을 알았으니
通塞何嘗間有生(통색하상간유생)통하고 막힘을 어찌 생전에 알 것인가.
/河西先生全集卷之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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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자주인이요 김인후의 작품을 모아 편집 발간한 사위 조희문(趙希文 1527 중종 22∼1578 선조 11)
도 시를 읊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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人傑從來在地靈(인걸종래재지령)옛부터 인걸은 땅의 기운이라 했으니
聯翩冠盖照新晴(연편관개조신청)연이은 벼슬길에 맑은 기운 새롭다.
書香相繼應天意(서향상계응천의)학풍을 계승함은 응당 하늘의 뜻으로
努力工夫望後生(노력공부망후생)공부에 힘쓰길 부디 후손에게 바라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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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계(月溪) 조희문은 김인후의 문인이자 맏사위이다. 중종 22년(1527)에 남원에서 태어나서 선조 11
년(1578)까지 살았으니 봉황대는 1500년대 이전에 조성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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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명종 8년(1553)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홍문관수찬·교리 등을 역임하였다. 장흥부사로 있
을 때 명륜당에서 향음주례를 시행하는 등 김인후의 성리학설을 계승하였다. 특히 문장이 뛰어나 당
시 기대승·정철·백광훈·변성온 등과 교유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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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에 당시 남원 부사였던 신재 조림(愼齋 趙琳)과 같이하고 서로 시를 주고 받았다. 次趙府使 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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災慶由人石豈靈(재경유인석기령)재경(災慶)은 인위거늘 어찌 돌이 영험한가
循環倚伏雨還晴(순환의복우환청)화복은 순환하고 비가 오면 다시 갠다.
偶然而得寧妨失(우연이득령방실)우연히 얻은 것은 쉽게 잃는 법이거늘
莫把浮榮費一生(막파부영비일생)뜬구름 잡는데 일생을 허비하지 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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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읽다보니 이~ 대목이 너무나도 마음에 든다. .莫把浮榮費一生(막파부영비일생)이 글귀가 유랑
자는 정말 마음에 들어서 다시한번 강조해 보는 것이다.
괜히 뜬구름 같은 부귀영화를 노력 없이 기다리며 인생을 허비하지 말라고 봉황대의 전설에 일침을
가하고 있다. 조림은 남원 사람으로 용성 향시에 합격하고, 중종 8년(1513) 계유시 문과에 급제하여
사성(司成)을 역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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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황대(鳳凰臺):~옛날에 이 마을을 지나가던 어떤 사람이 이 바위를 보고, 중국 중원(中原)에 있는 봉황대와 똑같이 생겼다고
하여 써놓은 것이라고 한다. 봉황대(鳳凰臺)는 날아가는 봉황이 알을 품고 있는 형국, 즉 비봉포란(飛鳳抱卵)이라 하여 붙은
이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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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황대는 현재 명소로 알려져 있다. 예로부터 봉황대 위에는 집을 짓는 것이 금기시 되어 왔다. 대실 마을의 진산(鎭山)과 좌청룡
우백호 줄기는 봉황의 몸 날개와 같은 형국이고 울바위는 봉화의 알을 닮아 알 위에 집을 지으면 알이 깨질 것을 우려해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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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제 유랑자는 암각화를 확인하기 위해 봉황대에 오르기 위해 위험한 바위틈을 비집고 가파른 경사
길을 오른다. 언제 인지도 모를 때부터 이 자리에서 그때의 사람들은 먼 미래로 흘러갈 자신들의 흔
적을 바위의 그림으로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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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곡리 암각화로 공적인 이름을 가진 이 바위그림에 그때의 사람들은 무엇을 담았는지 지금 까지도 수
수께끼로 남아 있었다. 그리나 현대 과학의 문명들은 이 그림들을 하나하나 해석하기 시작했다. 이 그
림들은 이야기를 하고 있다. 세상의 시작은 어머니로부터이고 그 끝도 어머니라고 했던 원시시대 사
람들의 이야기를 이 암각화는 말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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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계에서 해석한 문양의 해석을 올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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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는 유랑자의 이야기고 아니고 전문가들의 과학적인 풀이에서 비롯된다, 어머니의 자궁에서 잉태
된 생명이 죽음의 몸둥아리를 어머니의 자궁에 되돌려 놓고 싶은 생각이 옹관을 만들게 되었고 그 속
에 들어 편하게 다음 생을 바라며 매장되었던 그 이야기의 줄을 이 암각화는 담고 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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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생명줄 어머니가 아니고는 어찌 이처럼 오래도록 우리 곁에 있을 수 있단 말인가? 이 암각
화의 풀이는 각자가 가진 문화유전자에 달려있지만 유랑자의 문화유전자 풀이는 위에 전문가들이 풀
어놓은 그림 설명도에 동의 하고 싶었다.어짜피 모르니까. ㅎㅎㅎ 결과 적으로는 남원 대곡리 암각화
는 남원사람들의 문화적인 어머니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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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각화는 두 곳에 새겨져있는데 한곳은 풍화작용으로 거의 알아 볼 수 없게 마모가 심하고, 봉황정 용
마루 위 둥근 바위에 기하학적인 문양이 새겨진 암각화는 뚜렷하게 남아있다. 암각화가 새겨진 바위
에 오르기 전 큰 바위 벽에 음각으로 봉황대(鳳凰臺)라 새긴 휘호가 이끼가 파랗게 낀 채 이 산이 봉
황대임을 알리고 있다. 암각화는 둘다 바위의 정남면(正南面)을 바라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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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의 암각은 일명 "패형암각(牌形岩刻)" 또는 "검파형암각 (劍把形岩刻)"이라고 불리는 암각화로서,
전세계에서 한반도에서만 발견되는 문양(紋樣)이라는 학계의 중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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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면장 황의준 공적 기념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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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전국의 암각화중 여기 봉황대의 암각은 그 무늬가 매우 다양하면서 화려한 면모를 보여주고 있
으며, 암각의 크기와 기법상으로는 영일 칠포리와 비슷하다는 평이다. 여하튼 눈 비 바람을 견디며
억겁의 세월을 견디고 있는 남원의 암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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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유랑자가 울산 여행때 가서 보았던 울주군 암각화가 크기와 형태는 다르지만 재미있는것은 우
연의 일치인지는 모르겠지만 지명이 똑같은 '대곡리'에 소재하고 있다는 점이 특이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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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산황공 유주여사경주김씨기적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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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곡마을 봉황대는 현재 명소로 알려져 있다. 하여 예로부터 봉황대 위에는 집을 짓는 것이 금기시 되
어 왔다. 대실 마을의 진산(鎭山)과 좌청룡 우백호 줄기는 봉황의 몸 날개와 같은 형국이고 울바위는
봉화의 알을 닮아 알 위에 집을 지으면 알이 깨질 것을 우려해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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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곡마을에 전해오는 전설이 하나있다. 본시 봉황은 지조와 절개를 지닌 품격 높은 훌륭한 인물을 상
징하였다. 옛부터 대실 마을 사람들은 봉황대 바위가 울면 훌륭한 지인(至人)이 나타난다고 믿어 왔다.
그래서 명암(鳴巖) 또는 울음바위, 울바우라고도 불리는 봉황대는 장차 마을에 큰 경사가 날 때쯤이
면 언제나 먼저 울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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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성지]에 조희문이 쓴 봉황대기에 의하면 울바위가 맨 처음 운 것은 본인 의 과거 급제 때는 물론,
고려 때 판서를 지낸 이동미 와 그 사위이자 조희문의 고조부인 조종례·부친 조림이 문과 급제할 때
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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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뒤 울바위는 셀 수도 없이 많이 울었다곡 한다. 월계 조회문 최씨 문중에서 3대 정려문을 세울 때
에도 울었다. 어느 해인가는 한 달이나 울었는데 그해에만 이 마을에서 진준(생원·진사), 종형 조희
안, 조카 조자윤등 진사급제가 세 명이나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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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뿐이 아니었다. 국권상실(1910)과 국전회복(1914)때도 이 울바위가 예고해 주었다고 한다. 그리고
광복 후 지금까지 백호 남짓한 이 대곡 마을에서만 서울대 법대 출신이 자그만치 4명이나 되고 장관
과 판사 등 굵직한 관직도 여럿 나왔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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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황대는 어쩌면 단단한 바위가 주는 안정감과 깨지기 쉬운 새알에 대한 불안감이 기저에 깔린 한 마
을의 집단의식이 낳은 신앙의 표상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든다. 그러한 의미에서 봉황대는 대곡마을
의 수호신임엔 틀림이 없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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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랑자 여행기 이어보기 클릭
http://cafe.daum.net/b2345/9toB/17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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홈:www.gojb.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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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 남원시 대산면 대곡리 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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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대곡리 제 첫사랑이 살던곳이네요~~ㅎ
아~~ 첫사랑이라...
우리는 사랑을 먹고 산다고들 합니다.
이 유랑자 또한 첫사랑에 목말라하는...ㅋ순정파
괜시리 저의 글 때문에 님의 첫사랑을 소환하게 되었군요
그러나 항상 이지만 첫 사랑은 그리움의 대상이지요?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