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몬의 창가에서 (외 2편)
지관순 나무를 잠가버린 건 내 잘못 가지가 환해지려면 우정이 필요하고 레몬의 신맛에 대해서는 누구나 관대해질 수 있다 레몬의 말투를 우려낸 창틀 무릎선을 눈썹까지 밀어 올린 지붕들 땅딸보 아저씨네 강아지는 아직도 꽃씨를 물어뜯을까 레몬을 반으로 자르면 세계에 불이 켜진다 말하자면 흰 고양이의 춤과 음표를 파고드는 손가락 무혐의를 흔드는 저녁의 지느러미 고백하는 것만으로 창가는 어두워지고 레몬을 모두 꺼버린 나무 아래 너와 내가 서로의 절반이 아닐 확률은 얼마나 될까 잘 부탁해 풀밭 서재에 꽂힌 어느 계절의 안녕들 그러니까 한 번 열리면 닫히지 않는 레몬의 저녁들 부불리나의 침대 오르탕스 부인보다는 부불리나, 그렇게 불러주세요 무슨 나팔 이름 같지만 이것은 내 허리에 감았던 깃발을 기념하는 일 언제 도착할지 모르는 그를 기다리며 새벽바다로 간 침대의 이름이죠 조르바, 아아 나쁜 새끼 이건 앵무새가 그를 부르는 소리 그가 꼭 나빠서 그런 건 아니에요 과부들의 침대가 며칠 결혼할 수 있는 권리가 있듯이 그도 이별하지 않고 떠날 권리가 있죠 사는 게 먼지처럼 느껴지면 함께 낡아 온 침대 귀퉁이를 쓰다듬으며 외쳐요 아가멤논호여 이제 출정이다 바다로 간 침대는 목숨을 걸고 싸우지만 파선되기 직전에야 돌아올 수 있지요 그러나 떠난다는 건 안전을 확인하러 가는 건 아니고 산다는 것 또한 별일 없이 살기 위한 건 아니니까요 달은 밤마다 선인장 같은 내 등을 저울에 올려놓고 조롱했어요 외로움을 계량하는 바늘이 몇 바퀴나 돌았는지 몰라요 창피했지만 이젠 그것도 옛일 죽음의 입김이 나를 휘발시키려 하네요 시간은 더 매달려 있고 싶은 과일을 떨어뜨리고 합의는 없어서 늘 소송에 휘말리지요 소원이 뭐냐구요 그건 별들이 차가운 발을 비추러 왔다가 내 침대에 두 명이 산다는 걸 알고 눈앞이 캄캄해지는 일 조르바, 이 나쁘은 쉿, 육지가 보이네요 조금 있으면 정박하겠군요 다행히 난 파선되지도 않았지요 그러나 이상해요 멀미가 막 시작됐거든요 버찌의 스물여섯 번째 도서관 수요일의 우체부가 버찌를 꺼낸다 푸른 잉크로 쓴 편지봉투 속에서 황소자리와 전갈자리는 어떻게 사랑을 나눌까 어디로든 닿지 않는 새벽 두 시 스물여섯 번이나 빗나간 예측과 성급하게 익어버린 열매가 가야 할 길 이제 눈을 떼도 될까 부풀다 번져버린 것들 밑줄 긋다 짓이겨진 것들 다 써버려 남아 있지 않은 것들 때문에 황홀하다 버찌의 생일날 날아든 키스! 다 읽어버릴 테야 박쥐우산이 서른두 번 뒤집혔다 —시집 『버찌의 스물여섯 번째 도서관』 2024.10 --------------------- 지관순 / 1968년 충남 서산 출생. 2015년 계간 《시산맥》으로 등단. 시집 『버찌의 스물여섯 번째 도서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