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https://www.youtube.com/live/HIWeM0SYAMg?feature=share
압살롬의 죽음을 슬퍼하는 다윗 19:1~4
1 어떤 사람이 요압에게 아뢰되 왕이 압살롬을 위하여 울며 슬퍼하시나이다 하니
2 왕이 그 아들을 위하여 슬퍼한다 함이 그날에 백성들에게 들리매 그날의 승리가 모든 백성에게 슬픔이 된지라
3 그날에 백성들이 싸움에 쫓겨 부끄러워 도망함같이 가만히 성읍으로 들어가니라
4 왕이 그의 얼굴을 가리고 큰 소리로 부르되 내 아들 압살롬아 압살롬아 내 아들아 내 아들아 하니
5 요압이 집에 들어가서 왕께 말씀드리되 왕께서 오늘 왕의 생명과 왕의 자녀의 생명과 처첩과 비빈들의 생명을 구원한 모든 부하들의 얼굴을 부끄럽게 하시니
6 이는 왕께서 미워하는 자는 사랑하시며 사랑하는 자는 미워하시고 오늘 지휘관들과 부하들을 멸시하심을 나타내심이라 오늘 내가 깨달으니 만일 압살롬이 살고 오늘 우리가 다 죽었더면 왕이 마땅히 여기실 뻔하였나이다
7 이제 곧 일어나 나가 왕의 부하들의 마음을 위로하여 말씀하옵소서 내가 여호와를 두고 맹세하옵나니 왕이 만일 나가지 아니하시면 오늘 밤에 한 사람도 왕과 함께 머물지 아니할지라 그리하면 그 화가 왕이 젊었을 때부터 지금까지 당하신 모든 화보다 더욱 심하리이다 하니
8 왕이 일어나 성문에 앉으매 어떤 사람이 모든 백성에게 말하되 왕이 문에 앉아 계신다 하니 모든 백성이 왕 앞으로 나아오니라 이스라엘은 이미 각기 장막으로 도망하였더라
-----------
[오늘의 말씀 요약]
다윗이 압살롬을 위해 슬퍼하니 그날의 승리가 모든 백성에게 슬픔이 됩니다. 요압은 왕의 이런 행동이 왕을 미워하는 자는 사랑하고 왕을 사랑하는 자는 미워하는 것이라며, 부하들 마음을 위로하지 않으면 모두 왕을 떠나리라고 말합니다. 다윗이 성문에 앉으니 백성이 나아옵니다.
-----------------
압살롬의 죽음을 슬퍼하는 다윗 19:1~4
다윗이 압살롬의 죽음을 애도하니 승전의 분위기가 바뀝니다. 전쟁을 승리로 이끌고 귀환을 준비하던 요압과 모든 군사는 다윗이 압살롬으로 인해 슬퍼한다는 소식을 듣습니다. 이에 승리를 기뻐하던 분위기가 왕의 아들의 죽음을 애도하는 분위기로 바뀝니다. 그로 인해 승리를 축하받으며 개선해야 할 군사들이 마치 패잔병처럼 가만히 돌아옵니다. ‘가만히’(3절)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훔쳐 달아나다’라는 뜻으로, 여기서는 군사들이 다윗의 눈치를 보느라 도둑처럼 조용히 돌아오는 모습을 표현합니다. 다윗은 압살롬을 잃은 슬픔에 빠져, 자신을 위해 싸운 군사들과 전쟁을 승리로 이끄신 하나님의 도우심을 잊어버린 것입니다.
● 더 깊은 묵상
다윗의 군사들은 왜 도둑처럼 가만히 성으로 귀환했나요?
내가 옳은 일을 하고도 눈치를 보거나 드러낼 수 없는 경우가 있었다면 언제인가요?
----------
다윗을 질책하는 요압 19:5~8
요압은 슬픔에 빠진 다윗을 질책합니다. 그는 압살롬을 죽인 장본인이기에 이 상황이 가장 못마땅했을 것입니다. 반란을 일으킨 압살롬은 죽어 마땅한 인물인데, 아들을 죽였다고 다윗이 자신을 비난하는 것처럼 생각되었을 것입니다. 요압은 다윗의 애도가 왕과 가족의 생명을 구한 모든 군사를 모욕하는 행위요, 오히려 적을 사랑하고 아군은 미워하는 행위라며 직설적으로 맹비난합니다. 그러니 당장 나가 부하들의 마음을 위로하라며, 만일 그러지 않는다면 자신과 군사들은 모두 왕을 떠나겠다고 합니다. 협박하는 듯한 요압의 말에 다윗은 압살롬을 죽인 것에 대한 질책도 못 하고 군사들을 치하하기 위해 나섭니다. 아들을 잃고 또 부하에게 비난받는 다윗의 모습은 참으로 서글픕니다.
● 더 깊은 묵상
요압은 압살롬의 죽음을 슬퍼하는 다윗에게 무엇이라고 항의했나요?
나의 표정이나 태도가 누군가의 비난을 살 수 있다면 어떻게 바꾸어야 할까요?
===========
하나님의 관점 소유하기
얼굴에 수심이 가득한 청년이 목사님을 찾아왔습니다. “저는 살아갈 의욕을 잃었습니다. 사업에 실패해 전 재산을 날렸고 모두가 저를 외면합니다. 죽고 싶습니다.” 청년의 말을 묵묵히 듣던 목사님이 말했습니다. “형제는 모든 것을 잃은 것이 아닙니다. 죄 사함을 잃었나요? 영생을 잃었습니까? 단지 의욕만 잃었을 뿐입니다. 형제에게 믿음이 있다면 죽지 말고 하나님 앞에서 살아 보십시오. 의욕은 신앙 안에서 얼마든지 회복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목사님은 성경의 한 구절을 읽어 주었습니다. “모든 지킬 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잠 4:23).
세상에서 무언가를 잃은 것이 실패가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 나아가 기도하며 우리의 관점을 바꿀 수 있다면, 그것이 소망의 시작입니다. 육체와 마음의 질병 앞에서 절망할 때 하나님께 질병의 문제를 가지고 나아가는 것, 치유의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이 소망의 시작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기도하는 이유입니다.
희망은 삶의 방향을 바꾸는 데서 시작됩니다. 모든 사람이 죽음을 향해 가고 있을 때라도 우리는 소망을 향해 갈 수 있습니다. 우리가 소망을 가질 수 있는 것은 우리의 모든 것을 아시며 세밀하게 섭리하시는 하나님 앞에 우리의 문제를 내어놓고 기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관점을 소유할 때 우리는 가장 큰 절망 속에서도 소망을 봅니다.
PRAY ON 기도의 불을 켜라 / 김병삼_ 두란노
===========
한절묵상:사무엘하 19장 2~3절
공과 사를 구분하는 것은 지도자의 덕목입니다. 전투에서 승리한 다윗 군대는 공로에 따른 보상과 환대를 받아야 했습니다. 그러나 아들 압살롬의 죽음으로 슬퍼하는 다윗으로 인해 마치 패배한 군대처럼 슬며시 돌아옵니다. 다윗은 아버지로서는 울 수 있지만, 왕으로서는 군대의 수고를 치하하고 승리의 기쁨을 나눠야 했습니다. 지도자의 시선이 개인을 넘어 공동체를 향할 때, 지도자의 권위가 존중받고 공동체가 평안을 누립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때때로 고통을 통해 마음에 와닿는다. - 캐럴 메이홀
오늘의 기도
하나님, 깊은 슬픔과 좌절로 헤매고 있을 때 주저앉지 않고 다시 일어나기를 원합니다. 고통의 한가운데서도 믿음의 눈을 들게 하시고, 마땅히 보고 듣고 행해야 할 일을 감당하도록 은혜를 주소서. 저의 경험과 감정에 빠져 타인의 기쁨을 헤아리지 못하는 일이 없게 하소서.
오늘의 찬송(새 337 내 모든 시험 무거운 짐을)
----------
하나님은 당신께서 주신 모든 말씀들과 약속들이 온전히 성취되게 하시고,
그 모든 과정들을 거치면서 우리를 성장시키시고, 성숙시켜 가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나’에게 말씀하신 것을 적용합니다.
일점일획도 땅에 떨어지는 법이 없이 모든 언약의 말씀들을 성취시키시고,
이루어 가시는 그분의 인도하심에 묵묵히 순종하며 나아가야 합니다.
매 순간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면서, 우리가 처한 정황과 맥락들 속에서
지혜롭게 판단하고, 그에 맞게 행동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시고, 이루어 가시는 모든 믿음의 여정 속에서 인내하면서
그분의 거룩한 백성다운 모습으로 성장하고, 성숙해져 가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
환란과 고난 속에서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과 공의를 인정하고 순종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다윗은 압살롬의 죽음이 자신의 죄로부터 시작된 것을 깨닫고 더욱더 슬퍼했을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어려움이 오면 하나님의 큰 계획과 뜻을 찾기보다는
슬픔과 절망 속에서 빠져나오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성령의 도움을 의지해야 합니다.
성령께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약속을 붙잡고 소망을 품게 하심으로
우리는 슬픔과 절망을 인내함으로 이겨 날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하루도 어떠한 상황에 처하더라도 하나님을 의지하며 하늘에 소망을 두고
인내하는 여러분들이 되길 소원합니다.
------
다윗은 압살롬의 죽음을 슬퍼하며 오열했습니다 그래서 백성들도 슬픔에 잠겼습니다
"그 날의 승리가 모든 백성에게 슬픔이 된지라 그 날에 백성들이 싸움에 쫓겨 부끄러워 도망함 같이 가만히 성읍으로 들어가니라"(삼하19:1~3)
다윗의 눈물은 혈육의 정 뿐만 아니라, 자신의 죄악의 결과로 아들이 죽었다는 죄책감의 회한의 눈물이었습니다
"딸 내 백성의 파멸로 말미암아 내 눈에는 눈물이 시내처럼 흐르도다"(애3:48)
그러나 언제까지 울고만 있겠습니까?
"네 울음 소리와 네 눈물을 멈추어라"(렘31:16) 전쟁이 끝나면 정치가 시작된다는 말이 있습니다
실제로 요압의 말처럼 정치적 동요가 있었습니다
다윗을 위해 목숨을 걸고 싸웠는데 위로나 칭찬이나 포상은커녕,
초상집 분위기였기 때문입니다
"왕께서 오늘 왕의 생명과 왕의 자녀의 생명과 처첩과 비빈들의 생명을 구원한 모든 부하들의 얼굴을 부끄럽게 하시니 이는 왕께서 미워하는 자는 사랑하시며 사랑하는 자는 미워하시고 오늘 지휘관들과 부하들을 멸시하심을 나타내심이라
오늘 내가 깨달으니 만일 압살롬이 살고 오늘 우리가 다 죽었더면 왕이 마땅히 여기실 뻔하였나이다 이제 곧 일어나 나가 왕의 부하들의 마음을 위로하여 말씀하옵소서
만일 나가지 아니하시면 오늘 밤에 한 사람도 왕과 함께 머물지 아니할지라 그리하면
그 화가 왕이 젊었을 때부터 지금까지 당하신 모든 화보다 더욱 심하리이다"(삼하19:5~7)
그래서 다윗은 마음을 다잡고 성문에 보좌를 베풀고 백성들과 함께 했습니다
다윗이 기도한 것처럼 참으로 우리는 연약합니다
"주께서 나의 날을 한 뼘 길이만큼 되게 하시매 나의 일생이 주 앞에는 없는 것 같사오니 사람은 그가 든든히 서 있는 때에도 진실로 모두가 허사뿐이니이다"(시39:5)
그러므로 우리 하나님 앞에 겸손하기 원합니다
"여호와여 나의 종말과 연한이 언제까지인지 알게 하사 내가 나의 연약함을 알게 하소서“
(시39:4) 그러나 또한 연약함과 눈물을 떨쳐버리고 소망을 주께만 두고 믿음으로 굳게서기 원합니다 "주여 이제 내가 무엇을 바라리요 나의 소망은 주께 있나이다"(시39:7)
---------------
1-4절 : 어떤 사람이 요압에게 아뢰되 왕이 압살롬을 위하여 울며 슬퍼하시나이다 하니 왕이 그 아들을 위하여 슬퍼한다 함이 그 날에 백성들에게 들리매 그 날의 승리가 모든 백성에게 슬픔이 된지라 그 날에 백성들이 싸움에 쫓겨 부끄러워 도망함 같이 가만히 성읍으로 들어가니라 왕이 그의 얼굴을 가리고 큰 소리로 부르되 내 아들 압살롬아 압살롬아 내 아들아 내 아들아 하니
반란은 진압됐고 반란의 주동자 압살롬은 죽었습니다.
하지만 아들의 반역과 죽음은 아버지로서는 견디기 힘든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다윗은 그렇게 슬퍼하고만 있어서는 안 되었습니다.
왕의 슬픔은 한 개인의 슬픔을 넘어 온 백성의 슬픔과 좌절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지도자의 영향력입니다.
다윗은 아무리 큰 슬픔을 느끼더라도 더 크고 넓은 안목으로 아들의 죽음을 보고 받아들일 수 있어야 했습니다. 지도자는 개인적인 감정을 표현할 때도 공동체를 책임지는 지도자임을 생각하고 파급력을 고려해야 합니다.
5-8절 : 요압이 집에 들어가서 왕께 말씀 드리되 왕께서 오늘 왕의 생명과 왕의 자녀의 생명과 처첩과 비빈들의 생명을 구원한 모든 부하들의 얼굴을 부끄럽게 하시니 이는 왕께서 미워하는 자는 사랑하시며 사랑하는 자는 미워하시고 오늘 지휘관들과 부하들을 멸시하심을 나타내심이라 오늘 내가 깨달으니 만일 압살롬이 살고 오늘 우리가 다 죽었더면 왕이 마땅히 여기실 뻔하였나이다
목숨을 걸고 반란을 진압한 백성을 돌아보지 않고 아들의 죽음에만 몰두하는 것은 백성의 헌신을 무색하게 하고 승리를 패배처럼 만드는 처사였습니다.
요압은 그 사실을 인식하고 다윗이 아버지로서의 행동을 자제하고
왕으로서 행동할 수 있도록 올바르게 충고했습니다.
발언의 수위가 거의 위협에 가깝다 싶지만 다윗에게 필요한 조언이었습니다.
다윗은 그 조언에 따라 슬픔을 삭이고 왕으로서 백성 앞에 섰습니다.
요압처럼 직언해야 할 위치에 있지는 않습니까?
충고가 뼈아프더라도 다윗처럼 들어야 할 상황은 아닙니까?
--------
오늘 본문의 말씀이다.
어떤 사람이 요압에게 다윗 왕이 압살롬을 위하여 울며 슬퍼한다고 전했다.(1)
왕이 슬퍼한다는 그 소식은 전쟁에서 승리한 백성들에게 슬픔이 되었다.(2)
그날 군사들은 패배한 군사들이 부끄러워 슬며시 들어가듯 성안으로 들어갔다.(3)
전쟁에서의 승리는 힘찬 승전가와 함께 모든 백성의 환영을 받으면서
큰 축제 가운데 개선장군처럼 들어 와야 하는데 오히려 패잔병 처럼
부끄러워하면서 슬그머니 들어 오게 되니 장수로서 기분이 상할 것 같기는 하다.
다윗 왕은 여전히 내 아들 압살롬아 압살롬아 하며 큰 소리로 울었다.(4)
백성들에게나 요압 장군에게 압살롬은 반란군의 수괴에 불과 할지 모르나
다윗에게 압살롬은 사랑하는 자기 아들이다.
비록 자신에게 반기를 들고 패륜아적인 행동을 했다고 해도
십계명 가운데 5계명을 어기고 6계명을 어기고 또 7계명을 어겼다고 해도
아들은 여전히 자기 아들이다.
큰 슬픔과 상실감은 이루말 할 수 없을 것 같다.
다윗은 개인적인 큰 슬픔에 빠져 있는 다윗 왕에게 요압이 요구하는 것은
이제 밖으로 나가 왕의 군사들에게 위로의 말씀을 해 달라고 요청한다.(7)
압살롬에게는 아버지 이지만 백성들에게는 왕이다.
개인적인 사사로운 감정에 깊이 빠져 있기 보다는
백성들의 바람과 필요도 배려해야만 하는 입장에 있는 위치이다.
요압의 충고를 들은 다윗은
일어나 성문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8)
왕이 성문에 앉았다는 의미는 왕이 공적인 업무에 복귀했다는 말이다.
어떻게 이런 큰 슬픔과 상심을 딛고 빨리 일어 날 수 있는가?
자기 자신의 본분을 빨리 다시 찾는 것이다.
자기 본연의 임무로 빨라 돌아가는 것이다.
슬픔에서 일어나 다시 사명을 붙잡는 일이다.
이것이 슬픔과 상심을 딛고 빨리 회복되는 길이다.
-----------
지혜로운 리더십은 어떤 삶입니까?
개인의 감정보다 공동체의 유익을 우선시해야 합니다(1~4절).
왕이 목놓아 울면서 압살롬의 죽음을 애도하고 있다는 소문이 백성들의 귀에 들리자 그날의 승리가 슬픔으로 바뀌었습니다(2절). 왕은 두 손으로 여전히 얼굴을 가린 채로 큰소리로 ‘내 아들 압살롬아, 내 아들아, 내 아들 압살롬아!’하고 울부짖었습니다(4절). 왕의 개인적인 슬픔으로 인하여 당당한 승리의 기쁨이 패배의 수치로 바뀌어 버린 것입니다.
이러한 지도자의 모습과 태도는 공동체의 깊은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사실을 교훈 삼아야 합니다. 한 나라의 왕으로서 나라가 혼란스러워진 것을 반성하며, 승리의 소식으로 백성들을 위로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개인적인 슬픔에 빠져 백성들을 돌아보지 않았습니다. 그로 인하여 백성들을 죄인처럼 만들어 버린 것입니다.
공동체의 리더십은 평범한 사람이 느끼는 마음의 기쁨과 슬픔을 억제함으로써 냉정한 이성으로 공동체를 다스려야 합니다.
참된 지도자가 없으면 백성이 망하고 백성의 지도자가 잘못 인도하면 그 인도를 받는 자들이 파멸에 이르게 된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개인의 감정보다는 공동체의 유익을 우선시하여 공동체를 살리는 리더십을 발휘하여야 하겠습니다.
개인의 상황보다 공동체의 안위를 우선시해야 합니다(5~8절).
다윗이 목놓아 울며 압살롬의 죽음을 슬퍼하고 있다는 소문이 요압에게 전해지자 그는 왕에게 찾아가 항의를 했습니다.
모든 부하들이 목숨을 걸고 왕과 왕의 가문을 위해 싸웠는데, 왕은 반역한 무리는 사랑하고 충성을 바친 부하들은 미워하니 왕의 행위가 합당하지 않다는 것(5~7절)입니다.
심지어는 지금 밖으로 나가지 않으시면 오늘 밤에 한 사람도 왕 곁에 남아 있지 않을 것이고, 젊은 시절부터 지금까지 당한 그 모든 환난보다도 더 무서운 환난을 당할 것(7절b)이라고 말합니다.
요압은 상당히 냉철한 사람으로 왕을 협박하여서라도 왕실의 체통을 살리고 나라의 질서를 회복하고자 하였습니다. 이에 다윗은 요압의 충고를 받아들여 일어나 성문으로 나와 앉았습니다. 이는 곧 왕의 직무를 수행한다는 것을 말해줍니다(8절).
다윗은 요압의 적절한 협박성 충고로 인하여 백성들 앞에 나아감으로써 왕으로서의 위치를 지킬 수 있었습니다.
또한 슬픔의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성문에 나와 앉음으로써 공동체의 흩어진 민심을 수습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교만하고 무지한 자는 싸움만 일으키지만, 슬기로운 사람은 충고를 받아들입니다(잠 13:10). 때에 맞는 적절한 충고와 그것을 지혜롭게 받아들이는 자는 큰 유익을 얻게 됩니다.
그러므로 개인의 감정의 문제와 상황을 초월하여 한 공동체의 지도자로서
하나님의 뜻에 순응하고, 공동체의 안위를 우선시하여
공동체를 살리는 리더십을 발휘하여야 하겠습니다.
------------
그 아들의 죽음이 자기 죄에서 기인한 것임을 깨달았기에 다윗은 더욱 슬픔을 가눌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또한, 자신의 죄과로 인해 운명 공동체인 이스라엘에 분열과 싸움이 있었다는 명백한 사실로 인해, 비록 그 싸움에서 승리했다 해서 단순히 기뻐할 수만은 없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한 나라의 국정을 책임지고 있는 그가 어느 때까지 슬픔과 비탄에 잠겨 있을 수만은 없는 일이었습니다. 더구나 압살롬에 대한 그의 지나칠 정도의 애착은 그를 위해 생명을 바칠 각오로 전쟁에 임한 병사들을 민망케 하기에 충분했습니다.
다윗은 슬픔도 속으로 삭여야 하는 자리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압살롬을 아낀 다윗은 잠시 왕의 본분을 잊고 방성대곡하고 있습니다. 다윗은 자신의 죄와 연결되어 압살롬이 죽게 된 것을 가슴 아파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더구나 장성한 아들입니다. 반역한 아들이지만 많은 기대를 했었던 아들입니다. 그러나 자신을 위해 생명을 걸고 싸운 사람들을 위해서 그 아픔을 내색하지 말아야 했습니다. 그런 면에서 요압의 충고는 적절한 면이 있습니다. 다만 다윗을 이렇게 슬픔에 빠지게 한 장본인이라는 점 때문에 마음이 편치 않은 것입니다.
요압 거의 협박에 가까운 말입니다. 이게 힘을 가진 자의 태도입니다. 오만불손한 요압의 이런 태도는 왕을 무시하고 있습니다. 분명히 요압의 말은 맞는 말입니다. 그러나 수위가 지나쳐 보입니다. 어쨌든 다윗의 태도로 인해 백성들의 마음이 상한 것은 사실이었습니다. 다윗은 마음을 추스르고 성문에 앉아 공무를 시작했습니다.
--------
하나님 아버지, 사랑과 공의를 그 육체 안에서 온전히 이루시고
우리를 향해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로 초청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보는 하나님의 자녀로 오늘도 감사와 영광을 올려드립니다.
세상 세력으로부터의 구원을 주사 이김을 주신 하나님 아버지
한량없는 은혜의 깊음을 깨닫기 원하여 오늘도 말씀 속에서 주의 구원의 은총을 찾아봅니다.
주께서 주신 이김이 개인적으로 혈육의 정에 치우쳐 큰 상실과 좌절로 다윗 왕국에 베푸신 하나님의 자비에 무관심하는 우를 범하는 다윗을 기록한 말씀을 묵상 중 입니다.
하나님의 자비를 생각해 봅니다.
어떤 사건에서 대의를 망각하고 혈육의 사사로운 정에 치우치는 연약한 모습은 우리들의 모습이고 나의 모습이 아닌지요
하나님의 자비하심이 내게 임하게 된 것은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십자가에 내어주사 화목제물을 삼으심입니다.
삽자가에서 독생자의 부르짖음에 외면하신 아버지의 마음을 혈육을 가진 인생들이 얼마나 알 수 있을런지요.
우리는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사람들의 인생 발자취를 통해 성령의 도우심으로 인생길에서 어떤 사건을 통해 하나님의 자비를 깨닫습니다.
하나님의 자비로우심으로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은혜를 감사찬송합니다.
어떤 사건을 당할지라도
배후에 계신 하나님의 자비의 강물이 흐르고 있음을 깨닫고 감사를 드리옵니다.
혈육의 정으로 보면 가슴 아픈 일도 있고 그 일로 인해 좌절과 상실의 깊은 절망 속에 있을 때도 있었지만, 삶 속에서 당하는 사건의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하나님의 자비를 굳게 믿고 사사로운 정에 치우치지 않기를 간구합니다.
모든 인생의 문제들을 통찰하시고 그 필요에 넘치도록 공급하시며
부족함 없는 지혜를 부어주시는 여호와 하나님께 온전히 의지하며
주님을 따라 우리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지고 걸어가는 거룩한 제자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오늘도 이김을 주시는 대의를 망각하지 않고 올바른 사고로 주의 법에 순종하는 하루가 되게 하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