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굴사의 바위 굴
백안의 삼거리에서 갓바위 가는 길로 접어들어 조금만 달리면 와촌으로 넘어가는 길이 갈린다. 예비군 훈련장이 있는 곳으로 방향을 잡아서 고개(능선재)를 넘어가면 다시 갓바위의 뒷 편으로 오르는 길이 갈라지는 삼각지가 나온다. 좌회전을 하여 달리면 선본사 쪽으로 하여 갓바위로 가는 길이다. 좌회전 하지 않고 오른 쪽으로 난 좁은 길로 가면 바로 산으로 오르는 오르막 길이다. 청소년 수련원을 지나서 조금 만 더 올라가면 불굴사이다.
절 이름에 굴이 나오는 것은 절의 바로 뒤 편에 원효 대사가 수행을 하였던 굴이 있기 때문이다. 굴은 불교가 전래되기 전에 토속 신앙지였다. 불교가 그 신앙지에 절을 지어서 자신의 신앙지로 삼은 것은 흔한 일이다. 굴불사의 마당에 있는 삼층 석탑이 고려 양식의 절이므로 아마도 불굴사는 고려 때 지었으리라고 본다. 그 전에도 이곳에 있는 굴이 영험이 있다 하여 아래 마을 사람들이 찾아왔으리라 믿는다.
불교의 발상지인 인도에서는 굴을 우주의 자궁이라 부른다. 수도승들이 깊숙한 석실에서 참선을 하고, 우주의 진리를 깨우치려 수련전진을 하였다. 여성의 자궁에서 생명이 태어나듯이 깨달음을 얻었을 때는 새 생명이 태어나는 것으로 비정하였다. 그래서 굴에서 수행하여 깨달음을 얻는 것을 여성의 자궁에서 생명이 태어나는 것으로 비유하였다.
우리나라에서도 굴은 새롭게 태어나는 곳이다. 곰이 굴에서 마늘과 쑥으로 인고의 시간을 보낸 후에 아리따운 여인으로 새롭게 태어났다. 새로운 생명이 태어나는 곳은 신성한 곳이다. 그곳은 수도원도 되고 기도처도 된다. 전설에 의하면 불굴사의 바위굴은 원효대사가 수도한 곳이다. 득도하여 큰 스님으로 새롭게 태어난 곳이다. 불교에서 새롭게 태어난다는 것은 깨달음을 말한다. 해탈을 말한다. 원효대사는 이곳에서 멀지 않는 경산 사람이다. 여기서 수도를 하였다는 것은 사실이리라는 생각이다. 어쨌거나 팔공산에는 바위굴이 여럿 있다. 특히 스님이 득도하였다는 전설이 많다. 말하자면 수도처라는 뜻이다. 그러나 수도처 이전에 기도처였을 것이다. 민간 신앙지였을 것이다. 굴은 여성을 상징함으로 고대의 모신 신앙의 성지에(기도처에) 민중들이 찾아 와서 기도를 올렸을 것이다.
굴과 모신 신앙을 연계시키는 사유를 알아보자. 물체의 형상이 인생사에 깊은 영향을 준다는 것이 유물(類物) 신앙이다. 비슷한 것은 비슷한 것끼리 서로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 유물신앙이고, 감염주술이다. 우리는 ‘양밥’한다고 말한다. 이러한 신앙은 아득한 고대사회에 이미 존재하였다. 고대인들은 자연현상을 설명하는 기본 원리로 생각하였다. 개의 얼굴을 가진 사람은 개의 성격을 닮는다든지, 원숭이 얼굴을 가진 사람은 원숭이처럼 교활하다고 믿었다. 일본을 다녀온 사신이 풍신수길이 원숭이 얼굴상이더라는 보고를 올린 사례도 있다.
원시인은 이런 사고를 가진 사람이므로 미개하다고 생각한다. 유물 신앙은 원시인의 전유물이 아니다. 현대인도 그런 생각을 한다. 관상을 보러 점집을 찾는 것도 같은 원리이다. 최근에는 관상을 주제로 한 영화가 대 인기를 끌기도 하였다. 이러한 사고는 모신신앙에서 성기신앙으로 발달하게 된다. 남자의 성기를 닮은 돌은 남자의 성기처럼 생산을 주관하는 신비한 능력이 있다고 믿었다. 여자의 성기를 닮은 바위나, 바위의 틈 또는 굴은 여성의 자궁처럼 출산의 신비한 능력을 가진다고 믿었다.
2만 여 년 전의 유물에는 임신을 한 여인상이 많다. 돌로 만든 석상도 있고, 맘모스의 상아로 만든 여인상도 많다. 유방, 임신한 배, 여성의 성기는 과장하고, 아주 사실적으로 표현하였다. 얼굴이나 팔, 다리는 생략하거나 아주 간략하게 표현하였다. 이 시기의 유물에는 남성상은 찾아보기 힘든다. 여인상도 임신과 관련이 있는 부위만 과장함으로 여인상을 만든 이유가 출산과 관계있음을 말한다. 고대의 인체상은 모두 신상(神像)이라 함으로 구석기 시대에는 여신신앙 즉 모신신앙이 신앙의 주류였음을 말한다. 따라서 풍요와 다산을 기원할 때는 유물신앙에 의하여 여신을 숭상하였다. 세월이 흐르면서 출산의 상징물로 임신한 여인상에서 여성 성기로 바꾸어서 표현하였다. 이 시기는 신석기에서 청동기 시대로 본다.
신라 후기에 이르면 성기신앙은 풍수신앙과 결합하여 묘지 조성 때도 나타난다. 유물신앙과 풍수신앙이 결합하여 묘지를 만들 때 처녀 성기 내지 모성의 형태와 유사하게 하여 시신을 안치한다. 재생을 할 수 있다는 믿음 때문이다. 재생이란 반드시 이 세상에 생명을 얻어서 태어난다는 뜻은 아니다. 나의 후손이 나의 분신으로서 새롭게 태어난다는 의미로 해석한다. 나의 후손이 복락을 누린다는 뜻이다. 그래서 고구려와 백제의 석실분은 연도와 현실을 만들어서 마치 여성의 자궁의 형태로 하였다. 명당으로 치는 좌청룡, 우백호의 풍수 사상도 여성의 성기를 닮았다고 하였다. 그 뿌리는 역시 모신신앙이다.
유목민의 3수 문화에서 9는 이 세상에서 제일 높은 수이다. 0은 9보다 더 위의 수로서 절대수라고 한다. 완전무결함을 뜻한다. 점집이 늘어선 곳에 가면 간혹 **산의 토굴에서 10년 간 도를 닦고 하산한 총각도사라서 아주 용한 점쟁이라는 선전을 한다. 10은 결함이 없는 존재로 새롭게 태어났으므로(토굴은 여성의 자궁이다.) 아주 능력이 있는 점쟁이라는 뜻이다. 우리의 무당은 뿌리를 시베리아에 살고 있는 몽고계이 브라하트 족에 둔다. 바이칼호 부근에 사는 브라하트 족의 샤먼은 굴을 그들의 기도처로 삼고 있다. 불굴사의 석굴도 불교 이전의 기도처임이 틀림 없다. 불교 사찰인데도 아직 토속신앙의 흔적이 강하게 남아 있다.
대구 민학회에서 굴불사를 답사하였다. 그때의 주지 스님은 아주 젊은 분이었다. 답사를 하면서 한담을 나누었다. ‘여기 부임해 온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이 절의 세세한 내력은 아직 모릅니다. 그런데 절의 불자들이 우리 절의 부처님을 암부처라 하데요.’라는 말을 하였다. 나는 호기심이 생겼다. 성기 신앙에는 여성의 상징물이 있는 곳에는 거의 대부분이 남성 상징물이 같이 있거나 이웃하여 있었다. 그래서 주지 스님에게 질문을 하였다. ‘그렇다면 암부처에 상응하는 숫부처도 있을 텐데요.’ 주지 스님은 ‘글쎄요, 갓바위 부처님을 숫부처라 하데요.’라 하였다.
불굴사의 마당에는 정상적인 부처님 도상으로는 어딘가 격식에 맞지 않는 부처님이 한 분 계신다. 고려불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인체의 비례라든지, 수인이라든지 여러 가지에서 어색하게 보인다. 고려시대에 조성한 많은 미륵불이 일반적인 부처님 도상과는 형상이 다르디. 오히려 민불에 가깝다. 민불은 토속 신앙이 불교의 신을 자신의 신으로 받아드린 경우이다. 안동의 제비원 부처님은 민간 신앙지에 조성한 부처님이다. 무가(巫歌)에서 성주신을 노래하는 성주풀이에 제비원이 나오기 때문이다. 암부처는 굴불사 마당에 계시는 부처님을 두고 하는 말인 듯 하였다. 굴 신앙과 암부처는 잘 어울린다. 주변의 여러 요소들을 생각해보면 굴불사는 틀림없이 여신과 관계가 있는 토속 신앙지였으리라. 고려 때 이 터에 사찰을 건립하면서 불교 신앙지가 되었으리라 추론해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