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린 흔히, 조선 매국의 원흉을 이완용이로 고정화 시키고 삽니다만...
이는... 요즘 말하는 꼬리자르기식 수작에 놀아나는 격입니다.
이완용이가 처죽일 친일 매국노임은 두 말할 나위도 없겠지만...
그 윗선은 누구였을지를 우린 따져보지 못한 겁니다.
대한민국의 전신인 대한뎨국을 이어받은 남조선 사학계와 정재계 기득권들은...
친일 매국에 관한 모든 시선을 이완용과 일부 대표대신들에게 집약시키고...백성들의 눈을 고정화 시킨 겁니다.
요즘 말하는...길길태 사건 천안함 사건으로...독도발언 뉴스의 눈 돌기기 수작같은 식이져...
일제가 조선을 병합할 시기...
청구조선의 상국인 타타르청나라는
진정한 대륙조선 재건운동인 태평천국의 난(동학난?)을 탄압한 양이들과 일제에 의해 무너지고...
고종은 다분히 양이들과 일제의 묵인(협조?)으로 황제에 등극합니다.
상식적으로...
내내 명,청의 동쪽 후국을 자처한 조선이...
정작 일제에 다 점령당해가던 싯점에 황제에 등극한다...?...더우기 일제는 이를 묵인한다...?
말이 않 됍니다.
일제와 양이들은...
청나라(타타르 청?...청구조선?) 황제 대신...
말 잘듣는 대륙의 이성계의 혈통 중...젤 만만허고 탐욕스런 대원군(이하응)가를 선택한 걸 겁니다.
키도 난쟁이 똥자루 만해...왜노족의 튀기인 일제인들 모냥도 살려줄 수 있는 대원군 가문...
개중...대원군이 말년에 젤 사랑하던 이재면이...
이재면은...대원군의 장남이면서도...정작 왕으로 간택돼지 못한 잡니다.
그나마 대원군의 자녀중 둘째인 고종이 인물됌이 가장 낳기에 조대비가 간택했다 보입니다.
조대비여...역사가 말한 서태후의 초기 일까 합니다.
김대비,명성황후의 역할까지 이 서태후에게 다 짬뽕 시킨게 근세 청나라 역사왜곡의 중점일까 싶고여...
여하지간...
탐욕스런 대원군(공왕?) 집안의 아들 중 고종황제는...그나마 영민함은 있었습니다.
대부분 그 아내인 명성황후 민씨의 작품이긴 했지만...
당시 다 무너진 청나라(청구조선?)을 이은 대한뎨국이...
약소국으로서 택해야할 이이제이식 외교에 탁월했던 겁니다.
영국 프랑스 미국....
사실상 초기엔 영국&미국의 사냥개역할였다... 구한말에나 주인님들을 물며 독립해 가는 왜노들을 견재키 위해...
서북방의 야인여진오랑케인 타타르 지역에서 신흥강국으로 떠오른 러시아를 끌어 들여...이들을 견재한 전략...
선택의 여지도 없는 ...정확한 묘수라 보입니다.
급박했던 왜노들은...
당시, 며느리(명성황후)와의 정권경쟁에서 밀린 탐욕스런 이하응(대원군)을 이용할 수 밖엔 없었고...
신식군대와의 차별에 불만였던 구식군대를 다독거리며...꾸준히 민황후 제거에 몰두합니다.
갑신정변 이후엔 일제가 만든 조선통치기구인 통리기무아문(청나라와 동일?)의 장을 지 큰아들인 이재면에게 밀어 줍니다.
이하응(대원군)은...기회만 나면...
고종대신 맞아들 이재면이를...
이재면 사훈 그 아들 이준용을 왕으로 만들기위해 동분서주 일제와 뺨을 마주부빈 역사의 흔적이 완연합니다.
이준용이 죽자...
고종의 많은 자식들 중...민황후 계열이 아닌...
의친왕 계열을 드리 밀었던 것이지...의친왕이 반일적 인사느니 뭐니의 주둥이들 짓은...
그 후손들이..대표적 친일파인 이재면과 일제에 어떻게 대접을 받았나 하는 정황도 모르는 등신짓들이라 하겠습니다.
의친왕의 아들이...대원군에 의해 이준용의 양자로 입적한 사실이 그를 단적으로 입증합니다.
흔히 고종의 구한말기 사진이라 나오는 사진들여...
제가 보기엔 상당부분 이재면의 얼굴입니다...고종과 닮았지만...인상도 좀 다르고...수염이 좌측으로 휜 잡니다.
이하응(대원군)은...또, 일제는...
이 이재면과 그 아들 이준용을 왕좌에 갈아 앉히기 위해...부단 노력을 했고...
이를 교묘하게 러시아를 이용해 견재하던 민황후를..급기야 제거하게 됍니다.
을미사변 당 일 날...
민황후 시해의 일본 섬 원숭이 집단들은...
대원군을 가마에 모시고 경복궁(자금성?)을 드리 친 겁니다.
황제의 아비가 앞장섰는데...조선 경비병들이 적극적인 방어를 할 리가 없었던 것이고여...
일제에 의해 만들어진 친 대원군계 조선군대(훈련대)가 대궐문를 교란한 사이 일제 양아치들이 대궐에 난입했고...
민황후가 간강 살해당하던 순간에도 대원군의 사병격인 조선군대(훈련대)가 건청궁 뜰압에서 시위를 했습니다.
지 며느리가 일제 양아치들에게 윤간당하며 토막살해 당하는 순간에...
대원군은 둘째 아들 고종과 대면하여...거례 협작질을 했습니다.
자, ..그저 중신으로서...합방조약에 도장이나 찍은 이완용이가 더 친일파가 돼겠습니까...?
그 조건을 만들기위해...늘상 일제에 도움을 받던 이하응과...그가 내세운 이재면이가 더 친일파겠습니까...?
정확히 말해선...
친일 매국노 이완용의 윗선이...즉, 꼬리가 아닌 머리가 바로 이하응(대원군)과 그 첫아들 이재면 가족였던 겁니다.
한일합방후...
일제가 내린 하사금 액수도 그를 반증합니다.
이완용이의 5배를 이재면이가 받아 처먹었습니다.
오늘 다음 홈에 그 기사가 났군여...보시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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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파, 166억원 가치 '은사금' 일왕에게 받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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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컷뉴스 | 입력 2010.07.14 08:57
[CBS사회부 이재준 기자] 친일파들이 100년전 한일 강제합병 직후 귀족 작위와 함께 최고 166억원에 이르는'은사금'을 일왕에게 받은 것으로 나타났다.
한일 합병에 협조한 대가로 당시 일왕에게 이른바 '은사금'을 받은 친일파와 그 액수가 공개됐다.
최근 공식 조사 활동을 마친
친일반민족행위자재산조사위원회는 일제 강점 직후 '병합의 공로자'로 인정받은 조선 귀족 등이 수만엔씩 은사금을 받은 것으로 조사됐다고 밝혔다.
가장 많은 은사금을 받은 친일파는 당시 병합조약 체결에 참가한 이재면 궁내부 대신으로 83만엔, 현재 가치로 무려 166억원에 이르는 거액을 챙겼다.
또 순종의 장인인 후작 윤택영도 백억원 넘는 은사금을 받았다.
대표적 친일파인 백작
이완용은 30억원, 같은 백작이던 이지용은 20억원을 받았다.
또 작위가 한 단계 낮은 자작 가운데는 송병준과 고영희가 일제로부터 공로를 인정받아 20억원씩을 챙겼다.
왕족 출신으로 후작이 된 이재각 이재완은 33억원가량을 받았고, 조선귀족회 회장이던 박영효는 56억원을 은사금으로 받았다.
은사금 규모는 귀족 작위와 일제에 대한 기여도, 대한제국 황실과의 관계 등에 따라 책정됐다고 위원회는 설명했다.
또 귀족이 아니더라도 20억원을 받은 친일파
이용구를 비롯해 고위 관료나 중추원 상부도 고액의 급료와 수당을 받은 것으로 나타났다.
조사위측은 당시 친일파들이 이러한 금전적 이익 외에도 각종 특혜를 통해 상상하기도 힘든 부를 축적했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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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의 사진의 이재면(흥친왕)사진여...
시중엔 고종의 사진이라 흔히들 요판되던 사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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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 : 흥선대원군 이하응(후에 흥선대원왕으로 추존)
모 : 여흥부대부인 민씨
처 : 이씨(李氏)
1845년 2월 13일 운현궁에서 출생
1912년 11월 3일 운현궁에서 사망
초명은 재면(載冕). 흥친왕으로 봉해지면서 희(熹)로 개명하였다. 자는 무경(武卿)이고 호는 우석(又石)이다. 고종의 형이며, 영선군 준용(永宣君 埈鎔)의 아버지이다.
1863년 사용(司勇)의 직을 맡았다가, 이듬해 정시 문과(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여 규장각시교(규장각시교)와 예문관 검열관(예문관 검열관), 승정원 주서(승정원 주서) 등을 거쳐 1865년 동부승지(동부승지) · 대사성(대사성) · 이조참의(이조참의) · 부제학(부제학) 등을 지냈다.
1866년 도승지, 이듬해에는 직제학, 곧 이어 이조참판으로 승진하였고, 1878년 지경연사(知經筵事)에 올랐으며, 이듬해 종1품에 특서되었다.
1880년 병조판서, 이듬해에는 금위대장, 이어서 판돈녕부사로 사대교린당상(事大交隣堂上)에 올라 이조판서·예조판서를 지냈다.
1882년 6월 임오군란 때 무위대장(武衛大將)으로 사태수습에 힘썼고, 호조판서·선혜청당상(宣惠廳堂上)·지삼군부사(知三軍府事)·훈련대장을 겸하였다.
그 해 12월, 이미 7월에 청나라에 호송되어 톈진(天津) 보정부(保定府)에서 감금생활을 하던 아버지 흥선대원군을 방문하여 위로한 뒤 이듬해 3월에 일시 귀국하였다가 5월에 다시 청나라에 가서 흥선대원군을 봉양하였다.
1885년 4월 귀국하였다가 아버지를 잊지 못하여 세번째로 청나라에 가서 8월 흥선대원군이 환국할 때 이를 배종하였으며, 그뒤 약 10년간 운현궁에서 칩거하였다.
1894년 6월 흥선대원군이 집정하자 통리기무아문(統理機務衙門)의 동문사당상경리사(同文司堂上經理事)가 되었다가 제1차 김홍집내각(金弘集內閣)때 보국숭록대부로서 궁내부대신이 되었다.
1900년 완흥군(完興君)에 책봉된 뒤 1907년 대훈이화장(大勳李花章)·서성장(瑞星章)을 받았고, 10월 육군부장(陸軍副將)이 되었다. 11월 보빙대사(報聘大使)로 일본에 다녀왔고, 1909년 대훈금척대수장(大勳金尺大綬章)을 받았으며, 1910년 흥친왕(興親王)에 봉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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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의 주류를 없애고, 지금의 비주류를 주류로 만들자는 이야기인가요? 어떻게요?
번식을 못하게 하려면 어떻게요? 불임 방법을 총동원하자고요?
유전적으로 왜노들이 어떻게 생겼었는지를 입증하자고요? 기술적 방법은 무엇이죠? 그게 가능한가요?
(부록) 왜노들의 유전적 특징 중...외형적 특징.
일단 키가 난쟁이 똥자루다...주의해야 할 것은...현재의 한반도나 중원,위그르인들도 그런 분들이 많으니...키만 작다고 왜노 후손은 아님...
기록화나 구한말기 사진을 보건데...구강구조...즉,주뎅이의 구조가 대체적 으로 돌출형이다...숫가락등의 도구가 과거엔 거의 없었던데 기인한 듯...
왜노들의 유전자 지도를 만들어야 하는데..... 객관적으로 말이죠....
홍선생님의 표현이 아주 재미있네요.... (하하하)
집안 내에서...옷을 잘 않입거나...남녀혼탕을 즐기는 체질...과거 아랫도리를 않 입고 나다니던 관습에 유래한 듯 한데...뭐 가릴것(보호할 것)이 양적(크기적)으로 마땅이 없어 보여서 그런건지...고초가 작다.
(하하하)
메이지 유신기의 정책적 유전자 극복운동인 엄청난 양키들 씨받이의 잔재로...서구인들과의 혼혈형이 아직도 많다...필리핀 식으로...
대륙형의 복음발음이 않돼어...국(國)을 고꾸...등으로 혀 짧게 발음한다...동남아&폴리네시안 인들처럼 아따따따따....
폴리네시아의 영향도 크겠지요.... 남방계의 특징이라고 할까요?
여타 몽골&알타이인종들에 비해...눈알맹이가 돌출형이다...대륙생활이 아닌...수마투라 섬 같은 어둔 숲이나 동굴서식의 결과인듯...대륙에도 숲은 있었을 것이니...개구리 눈이라고 다 왜노들이 아님도 유의해야 함...
훈도시(ふんどし; 褌), 문신(文身)... 이런거는요?
옷을 못 만들고...고려인들에게 하사받거나 약탈한 옷감을...갑옷식으로... 구녕을 뚤고 머리를 집어 넣은후 허리띠만 메는 형식의 전통복이 유행했다...바지는 도저히 못 만들었으니...다 내놓고 딸랑대고 다니며...아직도 그 전통이 유행하나...기저귀는 찬다...일말의 수치심은 생긴듯...
그나마도 없는 애들은...몸에다 문신을 해서 옷을 그린다.
문신(文身)은 바닷물 속에서 일을 하는 종족들이 주로 실시한 것으로 압니다. 그게 "보호 기능"을 한다고 하네요....
종합적으로 보건데...과거의 전통 왜노들로 보이는 자들과 가장 가까운 인종은...현재의 폴리네시안들과...아프리카 피그미종족...특히, 아마존의 야만인들 같다....아마존의 야만인들은 고려가 데려간 노예들인데...양이들의 고려족 학살에서...사람이 아닌 짐승으로 분류돼어 보호됐었지 싶다.
일본어(日本語)에는 "津津浦浦"라는 말을 "坊坊曲曲"이라는 뜻으로 사용하죠.... 바닷가를 빼놓고는 생각할 수 없어요....
왜노(倭奴)들의 특징이 다 정리되었나요? 유전적으로 그걸 규명하려면 "유전자 지도"를 만들어야 하겠네요...
드디어, 구한말의 시대상황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해 내셨습니다.
축하 드립니다.
이론정립이 기쁘기도 하지만, 당시를 되새기자니 무척 슬프네요..~
늘 과분하신 격려 몸둘 바를 못찾겠습니다...서선생님...이론 정립이 다 됀게 아니고...얼핏 눈치를 본 수준이라하겠습니다...방향을 제대로 잡은 건지도 아직 미지수고여...다 완벽히 증명한다면야 노벨상감이겠져...서선생님께 노벨상을 양보해 드릴테니...한 번 도전해 주십시요.
흥친왕 이희(이재면)은 친일파인 것이 분명합니다. 애초에 완흥군에서 흥친왕으로 책봉된 것 자체가 흥친왕을 황족대표로 삼아 한일병탄조약을 동의하게 만들고자 했던 일본의 계략이었습니다. 한일병탄이 발표된 것이 1910년 8월 29일입니다. 이재면이 흥친왕으로 봉작된 것이 바로 그 직전인 8월 15일이었습니다. 항간에는 일본통감부에서 한일병탄조약에 동의하는 황족대표로 의친왕 이강을 세우려 하였으나, 의친왕이 이를 완강히 거부함으로, 어쩔 수 없이 이재면을 세웠고, 황족대표의 지위가 적어도 '친왕'급은 되야 했기 때문에, 이재면을 흥친왕으로 봉작했다 합니다.
[출처=우리황실사랑회, http://cafe.daum.net/1392royal]
이에 부응한 흥친왕은 소위 '한일합병조약' 어전회의에 황족대표로 참석하여, 소위 '합방'을 동의하였고, 이에 대한 공로로 일본의 '공(公)'작위와 함께 은사공채금 83만원을 일본에게 수령받았고, 일본측이 내려준 [한국병합기념장]이라는 훈장까지 서훈받았습니다. 당시 매국노 이완용이 받은 은사금이 3만원이었던 것에 비하면 흥친왕이 83만원을 받았다니, 소위 '한일합방'에 끼친 흥친왕의 공로(?)는 이완용과도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였다고 판단됩니다. 또한 흥친왕은 병합을 찬성하는 '대한평화협회'라는 친일단체의 총재로 취임하기도 합니다. 죄상이 이와 같으니, 친일인명사전에 수록된 것으로 보입니다.
[출처=우리황실사랑회]
[출처=http://cafe.daum.net/1392royal/5KO7/1488?docid=57CR|5KO7|1488|20100308223832&q=%C0%CC%C0%E7%B8%E9(%C8%EF%C4%A3%BF%D5)&srchid=CCB57CR|5KO7|1488|20100308223832]
더 조사해보니까.... CBS 노컷뉴스(www.nocutnews.co.kr)가 늦게 보도한 것이군요...
한국평화협회(韓國平和協會)는 대한제국 말기인 1910년에 조직된 단체이다. 일진회의 한일 병합 청원을 찬성하며 결성된 국민협성회의 추진단체 성격이었다. 대한평화회 또는 대한평화협회라고도 불렀다.
한국평화협회를 발기한 심일택은 국민협성회 회원이었다. 관광차 일본에 갔다가 일본평화협회의 회장을 만나 대한제국에도 평화협회를 설립할 것을 논의했다. 명목상의 목적은 한일 양국의 친선으로 세계 평화를 도모한다는 것이었으나, 실제로는 일본의 병합 찬성론자들과 미리 손잡고 병합 후의 권력 분배를 대비한 단체였다.
총재로는 고종의 형인 이재면을 선출하고 취지서는 회장에 추선된 남정철이 작성했다.
[출처=다음 백과사전]
은사금 액수는 작위와 공로, 대한제국 황실과의 관계 등을 고려해 결정됐고 작위가 높을수록 액수가 커졌다.
이들이 받은 은사금은 불과 10여년 만에 모두 바닥났다. 무절제한 소비와 유흥 탓이었다. 1920년대 들어 귀족들의 파산이 줄을 이었고 민영휘의 아들인 남작 민형식은 가난을 이기지 못해 아들 6형제가 모두 강·절도를 저질렀다.
윤택영은 온 집안이 차압을 당하고 가재도구가 경매에 붙여지는 등 수모를 겪다 1920년 중국으로 도망쳐 그곳에서 사망했다.
[출처=http://news.naver.com/main/hotissue/read.nhn?mid=hot&sid1=100&gid=523808&cid=307136&iid=3972991&oid=032&aid=0002074359&ptype=011]
최두환 선생님의 격려 답글을 몇 일 전에 얼핏 보았기에...시간날때 신중하게 하례들일까 했었는데...은둔해 버리셔서 섭섭합니다...ㅡ. .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