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설탕 (외 3편)
이성렬 그 성채의 설계자는 바벨탑을 염두에 두지는 않은 듯하여, 천국을 향해 층층이 쌓아올리는 공법 대신, 허공에 중심을 띄우고 사방으로 방을 무한히 복제해 나갔다. 모든 색상을 반사하여 눈부시게 빛나는 성곽의 입구는 보이지 않으며, 순백으로 탈색된 자에게만 열린다. 회색 심장을 가진 고독한 소설가가 성채 주변을 맴돌다가 절망한 적이 있다. 스스로 성을 떠난 주민은 한 명도 없었는데, 그것은 다디단 벽 때문. 아름다운 여름날, 외벽에는 물방울이 맺히는데, 눈을 가린 꽃의 요정들이 발코니로 삼아 소야곡을 부르기도 한다. 어디에도 거울이 없어, 만년에 비극적인 사상을 품은 화가는 조소하는 자화상을 순전히 상상으로 그렸다. 미로 깊숙한 곳, 안개의 방은 간혹 누군가의 통곡의 벽이 되는데, 그 내력을 기록하는 일은 금지되어 불순한 호흡을 멈추는 울트라스위트 가스실에서 누군가 내지른 비명은 즉시 소음으로 처리되었다.
서재를 빠져나온 철학자가 방황한 후, 생각하는 자세의 미라로 백 년 만에 복도에서 발견되기도 하는 그곳, 일생동안 말없이 망원경을 들여다본 천문대장은 Sagittarius B2*에서 고당분의 벽돌들을 감지했는데, 머지않아 그 성운에 주민이 출현할 것임을 예측한 후 다시 입을 닫았다. *Sagittarius B2 성운에서 당糖 분자가 발견됨(Astrophysical Journal, 2008.9.20) 자정의 이물감 1 지렁이 껍질을 두들기는 빗줄기의 북소리 개미지옥에 빠지는 애벌레의 아드레날린과 접시 위 브로콜리의 굵은 기관지가 허파꽈리 뭉치를 향해 결연히 갈라지는 순간의, 돌이킬 수 없는 패혈과 같은 2 폭주 기관차 위의 스프린터가 질주한다 폭우 속에 검붉은 눈빛을 뿜으며, 불의 고함을 사방으로 뿌리며, 그러나 이내 종점에 이르러 진자처럼 순순히 방향을 바꾸어, 기진하는 순간 까지 권태가 이를 때까지 3 어떤 밤에는 역마차 크기의 지구를 껴안은 채 외계에 떠 있는 꿈을 꾼다 백억 광년 저 너머에서 날아온 운석들이 나의 헐벗은 등에 곤두박질할 때마다 관자놀이를 흐르는 강줄기에 푸른 소름이 돋는다 허공을 부유하며 자전하는 꼬마 행성으로부터 떨어지지 않으려 차디찬 바다와 협곡 사이를 기어가다가 깨어나 4 때로는 겨울 안개의 희미한 불빛에서 시간의 정맥류를 기록할 상형문자가 드러난다 그것은 어류의 아가미를 닮았다 흐릿한 윤곽의 아코디언 연주자가 주름치마 위 질긴 신경섬유의 빛줄기들을 엮어내며 목숨의 붉은 덧문을 열고 닫는다 5 곁눈질하는 초상화에서 툭, 툭, 번식해 나온 가면들이 죽은 달빛을 밀어내며 자정의 유령들로 빽빽한 대기에 움집을 짓는다 발밑에 묻힌 시간의 피라미드 꼭지에 찔려 누군가 물 아래로 마른 탯줄을 내던지고 있다 그리고…곤한 불빛들을 이끌며 우리는 이 거리와 소리들을 지나 전진한다 십이월의 그믐달과 무너진 이끼숲을 향하여 K市 체류기 ― 꽃잎 카덴차
그곳의 집들은 꽃잎벽돌로 지어졌다 거대한 꽃잎하늘 아래를 날아다니는 새들은 꽃잎날개를 쉬지 않고 펄럭여 푸른빛을 만들어냈고 온몸을 꽃잎피부로 뒤덮은 고래들은 부단히 헤엄치며 넘실거리는 꽃잎파도를 제작했다 그곳의 꽃잎고막은 소리의 진위에 무감하여, 멜로디 없는 무도곡이 시민의 걸음을 지도했다 바람은 꽃잎창문들을 흔들지 않도록 발굽을 들고 다녔으며 흐린 날에는 꽃잎구름이 명랑한 꽃잎빗방울들을 뿌렸다 겨울이 찾아오지 않는 그 마을의 여인들은 한가한 꽃잎벽난로를 닦거나 재생되지 않는 꽃잎손톱을 정성스레 다듬었다 일생에 한 개씩만 허용되는 꽃잎그릇을 아끼려 최소한의 음식을 조리하였다 꽃잎침대에서 몸을 뒤척이는 것은 금지되어 사람들은 죽은 듯 잠을 잤고 꽃잎무덤에 묻힌 죽은 자들은 대성당의 꽃잎종루에서 흘러내리는 자애로운 종소리에 감사하여 밤낮없이 기도하였다
마을을 가로지르는 강의 상류에서는 연어들이 꽃잎지느러미를 끊임없이 움직이며 물을 내려보내어 유유히 떠다니는 꽃잎돛단배 위 현자들은 백지의 꽃잎책을 읽으며 꽃잎술잔을 기울였다 모든 길은 꽃잎블록으로 포장되었다 마차들의 바퀴에 차도가 손상되면 나귀의 등에 얹은 꽃잎안장을 벗겨서 즉시 보수했는데 그 아래 붉은 상처를 보인 짐승은 꽃잎밧줄로 도살되었다 그곳의 율법은 매우 관대하였다, 다만 지난 생을 후회하는 망자는 꽃잎수의를 벗긴 채 이웃 겨울나라로 추방되었고 새로운 희망을 품는 자는 검은 꽃잎수레에 실려, 죽지 않는 뿌리 아래 썩지 않는 거름으로 던져졌으며 누군가 눈물을 흘리면 꽃잎각막이 툭, 떨어져나가 영원히 시력을 잃게 되곤 했다
펭귄에 대한 부당한 처우에 관하여 펭귄이 제대로 대접받은 적은 없다. 껌 종이 모델로 사용됐을 뿐, 일찍이 나는 펭귄과 친하기 위해 길에 흩어진 쿨민트 껌종이를 모으며 하왕십리에서 장충동까지 순례한 적이 있다. 다리 짧은 야구선수의 별명으로 펭귄이 조롱받는 것에 분개하기도 했다. 어느 영화에서는 지구를 파괴하려는 악당의 부하로 등장했다. 그 감독은 돌대가리다 누가 뒤뚱거리는 새를 수하에 둘 것인가. 멸종위기로 주목받고 있으나 누구도 펭귄과 얘기한 적은 없다. 보수주의자들은 진화의 막다른 골목으로 간주하지만 펭귄은 좀체 과묵하다, 날개를 버린 이유에 관해서. 물론, 펭귄은 펭귄으로 태어나고 싶은 건 아니다 빙산의 면밀한 체온에서 생겨났을 뿐. 외로운 날, 나는 쿨한 추억을 찾아 서점에 간다. 니체의 책 표지, 타원의 감옥에 갇힌 채 더 이상 귀찮게 찾지 말라는 듯 담담한 표정으로 서 있는 새를 만나러. ―시•산문집 『자정의 이물감』 2024.10 ---------------------- 이성렬 / 1955년 서울 출생. 2002년 계간 《서정시학》으로 등단. 시집 『여행지에서 얻은 몇 개의 단서』 『비밀요원』 『밀회』, 산문집 『겹눈』 등. 경희대 화학과 교수 역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