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1독서
▥ 사도 바오로의 코린토 2서 말씀 3,15─4,1.3-6
형제 여러분,
오늘날까지도 모세의 율법을 읽을 때마다 이스라엘 자손들의
15 마음에는 너울이 덮여 있습니다.
16 그러나 주님께 돌아서기만 하면 그 너울은 치워집니다.
17 주님은 영이십니다.
그리고 주님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습니다.
18 우리는 모두 너울을 벗은 얼굴로 주님의 영광을 거울로 보듯 어렴풋이 바라보면서, 더욱더 영광스럽게 그분과 같은 모습으로 바뀌어 갑니다.
이는 영이신 주님께서 이루시는 일입니다.
4,1 이렇게 우리는 하느님의 자비를 입어 이 직분을 맡고 있으므로 낙심하지 않습니다.
3 우리의 복음이 가려져 있다 하여도 멸망할 자들에게만 가려져 있을 뿐입니다.
4 그들의 경우, 이 세상의 신이 불신자들의 마음을 어둡게 하여, 하느님의 모상이신 그리스도의 영광을 선포하는 복음의 빛을 보지 못하게 한 것입니다.
5 우리가 선포하는 것은 우리 자신이 아닙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선포하고, 우리 자신은 예수님을 위한 여러분의 종으로 선포합니다.
6 “어둠 속에서 빛이 비추어라.” 하고 이르신 하느님께서 우리 마음을 비추시어,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나타난 하느님의 영광을 알아보는 빛을 주셨습니다.
복음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 5,20ㄴ-26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20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21 ‘살인해서는 안 된다. 살인한 자는 재판에 넘겨진다.’고 옛사람들에게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22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자기 형제에게 성을 내는 자는 누구나 재판에 넘겨질 것이다.
그리고 자기 형제에게 ‘바보!’라고 하는 자는 최고 의회에 넘겨지고, ‘멍청이!’라고 하는 자는 불붙는 지옥에 넘겨질 것이다.
23 그러므로 네가 제단에 예물을 바치려고 하다가, 거기에서 형제가 너에게 원망을 품고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24 예물을 거기 제단 앞에 놓아두고 물러가 먼저 그 형제와 화해하여라.
그런 다음에 돌아와서 예물을 바쳐라.
25 너를 고소한 자와 함께 법정으로 가는 도중에 얼른 타협하여라.
그러지 않으면 고소한 자가 너를 재판관에게 넘기고 재판관은 너를 형리에게 넘겨, 네가 감옥에 갇힐 것이다.
26 내가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네가 마지막 한 닢까지 갚기 전에는 결코 거기에서 나오지 못할 것이다.”
♠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의 묵상글
<"먼저 그 형제와 화해하여라.”>
우리는 여전히 산상 설교를 듣고 있습니다.
어제 복음에 이어서, 예수님께서는 옛 율법을 완성하는 ‘새로운 의로움’을 말씀하십니다.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마태 5,20)
이 말씀은 '나는 하느님과 의로운 관계를 갖고 있는가?', '곧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한 의로움을 지니고 있는가?' 그리고 '그들의 의로움과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그들의 의로움을 능가하는 ‘하느님 백성의 의로움’은 어떤 것인가?'를 들여다보게 합니다.
‘의로움’, 곧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이룸은 산상설교의 핵심 주제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이 설교의 중심인 6장에서 또 다시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마태 6,33)고, 예수님께서는 모든 것에 앞세워 “의로움”을 촉구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의 백성의 “의로움”이 율법 학자나 바리사이의 의로움을 능가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곧 그들의 의로움으로는 한계가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오로도 말합니다.
“하느님 앞에서는 아무도 율법으로 의롭게 되지 못합니다.”
(갈라 3,11)
“율법은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게 되도록,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까지 감시자 노릇을 하였습니다.”
(갈라 3,34)
“율법은 단지 무엇이 죄가 되는지를 알려줄 따름이었습니다.”
(로마 3,20)
그렇다면 대체 율법 학자와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는 의로움은 무엇일까?
(또한 나는 그런 의로움을 행하고 있는가?)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여섯 가지 대당 명제를 통해 제시하시는데, 오늘 복음은 그 첫 번째 ‘의로움’에 대한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살인하지 말라”는 옛 율법의 ‘살인’을 구체적 행동의 결과로 드러난 살인만이 아니라 원리상 살인으로 적용할 수 있는 내면적이고 근본적인 동기까지도 포함시키십니다.
곧 자기 형제에게 ‘성’내고, ‘바보’ ‘멍청이’라고 부르는 것까지도 ‘살인하지 말라’는 내용에 포함시키십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자기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모두 살인자입니다.”(1요한 3,15)라고 말합니다,
물론 모든 ‘성’(화)냄이 살인인 것은 아닙니다.
사랑의 ‘화’냄도 있고, 교정을 위한 ‘성’냄도 있고, 단순한 습관이나 짜증의 ‘성’냄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집회서에서 “많은 이들이 칼날에 쓰러졌지만, 혀 때문에 스러진 이들보다는 적다.”(집회 28,18)고 했듯이, 의도되지 않더라도 “혀”로 인하여 죽는 이들이 생길 수 있다는 사실을 염두 해야 할 일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단지 ‘살인하지 말라’고만 말씀하지 않으시고, 이 율법의 근본정신이 “화해와 사랑”에 있음을 밝히십니다.
“네가 제단에 예물을 바치려고 하다가, 거기에서 형제가 너에게 원망을 품고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거기 제단 앞에 놓아두고 물러가 먼저 그 형제와 화해하여라.”
(마태 5,23-24)
이는 용서와 화해, 곧 ‘사랑’이 율법의 정신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기에, 중요한 것은 제단의 예물이 아니라 예물을 바치는 사람의 “의로움” 입니다.
바로 우리 자신이 예물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당신 앞에 나서기에 합당한 자 되기를 바라십니다.
동시에 형제가 얼마나 소중한 존재임을 깨우쳐줍니다.
“형제가 너에게 원망을 품고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마태 5,23)이라는 말은 자신만이 아니라 형제를 위하여 화해와 사랑이 필요함을 말해줍니다.
그래서 ‘너의 예물이 무엇이냐?’ 묻지 않으시고, “네 아우 아벨은 어디 있느냐?”(창세 4,8) 하고 물으십니다.
그러니 우리는 지금 이 성찬례를 거행하기 전에, 혹 불목한 형제가 있는지 살펴보고 ‘얼른’ 화해하고 용서해야 할 일입니다.
이는 우리가 먼저 용서받아야 할 존재임을 깨닫는 일이요, 이미 받은 주님의 사랑을 하염없이 내어주어야 할 존재임을 깨닫는 일입니다.
하오니, 주님!
얼른 화해하게 하소서!
제 자신이 당신께 드리는 참된 예물이 되게 하소서!
시시비비를 따짐이 아니라 화해를 이룸이 의로움이기 때문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먼저 그 형제와 화해하여라.
그런 다음에 돌아와 예물을 바쳐라.”
(마태 5,24)
주님!
먼저 화해하게 하소서.
지체치 말고 기회가 있을 때 먼저 화해하게 하소서!
원망을 품은 이의 아픈 마음을 보게 하시고, 제 불찰을 먼저 살피게 하소서.
시비를 따지기보다, 이기려 하기보다, 화해한 제 자신이 당신께 드리는 참된 예물이 되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의 묵상글
<사랑의 끈인 미움>
어제 율법을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고 주님께서 말씀하셨는데, 오늘은 율법을 어떻게 완성해야 하는지 하나의 예를 들어 가르쳐주십니다.
살인하지 말라는 율법 준수에 만족하지 말고, 성내지도 말고 남에게 바보 멍청이 소리도 말라고 하십니다.
판공 성사를 주다 보면 고백소에 들어와 아무 말 않는 분이 종종 있습니다.
그래서 고백하시라고 하면 고백할 것이 없다고, 다시 말해 죄 없다고 하십니다.
그래서 그러면 왜 고백소에 들어왔냐고 여쭈면 마누라가 하도 보라 해서 들어왔다고 하십니다.
그래서 죄 없는 사람이 어디 있냐고, 누구를 미워하거나 화내거나 한 적도 없냐고 제가 여쭈면 있다고 하십니다.
그러니까 그분은 살인이나 사기와 같이 큰 죄만 죄로 생각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분뿐 아니라 많은 분이 손에 피를 묻혀야지만 죄라 생각하고, 오늘 주님 말씀처럼 성내거나 바보 멍청이라고 하는 것은 죄라 생각지 않습니다.
'감정 폭력'이란 말이 있고 책도 있습니다.
물리적인 폭력이나 성폭력과 비교하여 감정적인 폭력도 폭력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미움이나 분노나 무시나 모욕과 같은 감정적인 폭력이 그 자체로 누구를 죽이지는 않아도 자살로 몰기는 하지요.
꽃으로라도 때리지 말라는 말이 있는데, 꽃으로 때린다고 피 한 방울 흘리게 하지 않지만 거기에 미움과 분노와 모욕이 담겼다면 그것으로 심지어 자살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의 완성은 살인하지 않음은 물론 감정적인 폭력조차도 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실은 이것도 아직 완성이 아닙니다.
이어지는 복음에서 주님께서는 완성의 정도를 높이십니다.
살인하지 않고 미워하지 않는 정도를 넘어 적극적으로 사랑하라고 가르치십니다.
미워하지 않는 것이 완성이 아니라 사랑하는 것이 완성이요, 사랑하는 것도 원수까지 사랑할 때 최고의 완성이라고 가르치시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 사랑은 미워하지 않고 분노하지 않는 소극적인 사랑에 그치기 쉽습니다.
그런데 미워하지 않고 분노하지 않는 것이 우리 사랑의 목적이라면, 최고로 잘해봤자 미워하지 않고 분노하지 않는 것이지 사랑하는 것이 아니며, 미워하지 않고 분노하지 않기 위해 무관심해 버릴 수도 있습니다.
아시다시피 무관심하면 완벽하게 미워하지 않고 분노하지도 않습니다.
그리고 무관심하면 미워하는 고통도 분노하는 고통도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종종 미움과 분노의 고통을 피하려고 무관심에 숨습니다.
사실 미워하는 고통만큼 큰 고통도 없지요.
그래서 우리는 무관심의 유혹을 자주 받는데, 그렇기에 미움이 무관심보다 낫고 더 사랑입니다.
미워하면서까지 사랑의 끈을 놓지 않으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미움은 사랑의 끈이고, 고통을 피하지 않고 두려워하지 않는 사랑의 용기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랑의 끈인 미움을 쉽게 포기하지 말 것이며, 미워할지라도 사랑하겠다고 용기를 낼 것입니다.
미움의 고통이 두려워하여 무관심하지 말고, 미움이 두려워 작은 미움을 큰 미움으로 만들지 말며, 미움을 사랑으로 완성하려는 큰 용기를 우리는 낼 수 있어야겠습니다.
- 작은형제회
♠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의 묵상글
<세상의 의로움을 능가할 수 있기를>
이른 아침 몸을 씻으면서 '육체적인 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마음인데 마음보다 육적인 것에 집착하는구나!' 하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외적인 더러움보다 지저분한 마음을 품고 있는 것이 더 문제입니다.
보이지 않는다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며 탐하고 즐겼던 모든 것에 주님의 자비를 간구합니다.
육적인 것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께서 원하시는 것은 육을 거스르게 마련인데 양다리 걸치기를 할 때가 얼마나 많은지요?
살아가면서 무엇인가 잘해 보려고 하면 남의 단점이 유난히 잘 보이게 됩니다.
‘사람이 왜 저럴까? 이렇게 하면 좋을 텐데…이런 것 하나 제대로 못 하나!’ 하면서 사람을 판단하고 마음에는 화를 쌓기 시작합니다.
이런 것도 성장의 과정이기도 하지만, 늘 나는 잘하는데 남이 따라주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한 단계를 넘어서서 남의 부족함을 채워주는 것을 기쁨으로 여길 수 있으면 좋으련만 오늘도 여전히 탓을 남에게 돌립니다.
그러다 결국은 남이 문제가 아니라 내가 문제 덩어리가 되어 남의 입에 오르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자기 형제에게 성을 내는 자는 재판에 넘겨지고, ‘바보’라고 하는 자, ‘멍청이!’라고 하는 자는 지옥에 넘겨질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일상 안에서 흔히 벌어지는 일에 대해서 이렇게 강하게 말씀하실까?
사소한 것을, 소홀히 하면 결국은 큰일을 저지르고 마는 것입니다.
‘바늘 도둑이 소도둑 된다.’는 옛말도 있습니다.
따라서 먼저 ‘마음을 다스려라.’‘뿌리를 다스려라’는 말씀으로 받아들이면 좋겠습니다.
성을 다스리지 못하면 미움이 생기고 미움이 커지면 더 큰 죄를 범하게 마련입니다.
그러므로 죄악에 떨어지지 않도록 먼저 마음을 단속해야 하겠습니다.
마음속에 분노를 품고 있는 사람은 상대방에게 온갖 해악이 미치길 은연중에 바라기 마련입니다.
심지어는 죽었으면 하고 바라기도 합니다.
그래서 요한의 첫째 편지 3장 15절에서는 “자기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모두 살인자입니다” 하고 말합니다.
따라서 겉으로 드러난 행위도 중요하지만, 마음 안에 싹트고 있는 화에 대해 무엇보다도 두려움을 가져야 합니다.
사실 형제와 이웃 간의 관계가 중요하지만, 주님과의 관계가 올바로 서지 않고는 그 관계를 장담할 수 없습니다.
주님 앞에 흠 없는 나를 가꾸고 주님의 마음으로 빛나는 오늘이기를 바랍니다.
하느님 앞에서 의로운 사람은 사람들 앞에서 의롭습니다.
그리고 사람들 앞에서 의로운 사람은 하느님 앞에서도 의로워야 합니다.
“마음이 똑바로 향해 있으면 행동 또한 바릅니다.
그리고 마음과 행동이 일치할 때 구원의 은혜를 입을 것입니다.”
(성 아우구스티누스)
되새겨 봅시다!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마태5,20)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그리스도인의 의로움이 세상의 의로움을 능가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의로움의 징표는 화해입니다.
하느님과의 화해를 원하시거든 먼저 사람과 화해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내덕동 주교좌 성당
♠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묵상글
<분노가 하고 싶은 말: “너도 날 무시해?”>
넷플릭스 ‘성난 사람들’(BEEF)은 '분노가 왜 생기는 것일까?' 또 '분노는 꼭 나쁜 것일까?' 등을 생각하게 만드는 드라마입니다.
재미교포 대니 조는 모든 일이 잘 안 풀리는 도급업자입니다.
대니 조 자신은 돈도 없고 미래도 보이지 않으며, 부모님은 친척에게 사기를 당해 한국으로 돌아가 일하게 되었고, 하나밖에 없는 동생 폴은 게임과 코인에 빠져 있습니다.
대니는 죽고 싶은 심정입니다.
어느 날 대니가 대형 할인점에서 계속 반품을 반복하다 영수증이 없어 반품이 안 되자 되는 일이 없다며 짜증을 내고 화를 냅니다.
그러던 중 주차장에서 흰색 벤츠와 시비가 붙습니다.
상대 벤츠는 위협을 가하고 도망을 칩니다.
가뜩이나 화가 나 있던 대니는 시비를 건 차에 보복하려 부촌의 정원을 엉망으로 만들며 쫓습니다.
벤츠에 탔던 사람은 중국계 사업가인 에이미입니다.
그녀는 가난하게 자랐지만 부유한 일본계 도예가 남편을 만나 열심히 살고 있습니다.
그녀는 세상 물정을 모르는 남편 대신 평생 일을 하고 온갖 간섭하는 시어머니와 자신보다 돈이 더 많은 갑질하는 이들에게 짓눌려 삽니다.
남편은 아내의 스트레스 사정을 들어주지 않고 그저 긍정적인 태도를 가지라며 아내를 어리석은 사람 취급합니다.
이렇게 스트레스가 최고조에 달했을 때 대니와 주차장에서 시비가 붙은 것입니다.
둘은 티격태격하며 서로를 죽일 듯이 미워합니다.
그런데 결말에는 화가 난 사람만이 화가 난 사람을 이해할 수 있다는 식으로 갑니다.
두 사람은 크게 다치고 외딴곳에 떨어져 협력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에 놓입니다.
둘은 마치 땅처럼 낮아지고 겸손해집니다.
결국 아무 것도 아닌 존재임을 느낍니다.
둘은 살기 위해 협력할 수밖에 없습니다.
탈진 상태에서 둘은 “내가 누구지?”라고 할 정도로 서로 구분하지 못하는 사이가 됩니다.
내가 상대의 감정을 알아주고 상대가 나의 감정을 알아줌으로써 사랑이 싹트게 된 것입니다.
화는 아직 잃을 것이 남았기 때문에 생기는 것입니다.
이 드라마는 이들의 분노가 언제 생겨난 것인지를 묻습니다.
분명 둘이 주차장에서 마주쳤을 때 생긴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그저 이미 분노에 가득 차 있었는데 그것을 터뜨린 계기가 되었을 뿐입니다.
사람들은 여러 방법으로 분노를 조절하라 말합니다.
그렇지만 정작 왜 분노가 생기는지는 말해주지 않습니다.
분노는 내가 행복해야 할 존재인데 행복하지 않은 것에 대한 감정입니다.
다시 말해 분노 안에는 “내가 누군지 알아?”, “너도 날 무시해?”라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어느 유명한 실험이 있습니다.
원숭이 두 마리에게 오이를 줍니다.
원숭이들은 잘 먹습니다.
그런데 한 원숭이에겐 오이를 주고 다른 원숭이에겐 포도를 줍니다.
원숭이는 오이보다 포도를 열 배는 더 좋아한다고 합니다.
그동안 잘 먹던 원숭이는 분노합니다.
오이를 주는 사람에게 집어던집니다.
이것이 무엇입니까?
“내가 누군지 알아?”, “너도 날 무시해?”
오늘 복음에서 “자기 형제에게 성을 내는 자는 누구나 재판에 넘겨질 것이다.”라고 하십니다.
재판에 넘겨진다는 말은 “살인해서는 안 된다. 살인한 자는 재판에 넘겨진다”라는 말처럼 살인자로 여기겠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이웃에게 화를 내고 살인까지 하게 되는 데는 결국 내면 안에 있는 불만족 때문입니다.
그 불만족은 낮아진 자존감에서 비롯됩니다.
열등감 자체가 화입니다.
자존감은 사랑으로 생깁니다.
소중한 존재임을 믿게 되기 때문입니다.
연세대학교 권수영 교수에게 어떤 자매가 찾아왔습니다.
다섯 살짜리 아이에게 이유 없이 화가 난다는 것입니다.
음식을 차려주면 자꾸 흘린다는 것입니다.
권 교수는 그 자매에게 이유 없는 분노는 없다고 말합니다.
어릴 적 혹시 그와 비슷한 상처가 있는지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그것을 기억해 냈습니다.
어머니는 어린 시절 밥 먹는 시간이 그리 즐겁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우유를 흘렸다가 엄마에게 따귀를 맞고 코피를 흘렸던 기억을 떠올리고는 펑펑 울었습니다.
오늘 복음도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라는 산상설교의 연속 선상에 있습니다.
행복하다면 화가 날 일이 없습니다.
행복하여지려면 그리스도처럼 되라고 하십니다.
나의 정체성이 그리스도라면 화가 날 일이 없습니다.
내가 죽고 그리스도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 믿음만이 우리를 살인의 감정에서 벗어나게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분과 함께 묻혔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옷을 입고 그리스도로 삽니다.
살아도 주님을 위해 살고 죽어도 주님을 위해 죽습니다.
이런 사람에게 “내가 누군지 알아?”, “너도 날 무시해?”라는 분노는 나오지 않습니다.
물 위를 걷는 사람이 모터 보트나 수상 스키를 타는 사람을 보고 화가 날 일은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라는 자존감을 지녔습니다.
내가 죽고 그리스도가 되었다는 믿음만이 진정 우리를 분노에서, 그리고 이웃에게 악한 일을 벌이지 않게 되는 유일한 길임을 잊지 맙시다.
- 수원교구 조원동성당
♠ 송영진 모세 신부님의 묵상글
<위선자가 되지 마라>
신앙생활은 ‘온 마음’을 다 바쳐서 하는 생활입니다.
‘온 마음’을 다 바치면, 저절로 ‘온 삶’을 바치게 됩니다.
위선자들은 겉으로는 잘하는 것으로 보여도 마음은 그렇지 않은 자들입니다.
겉모습만 보면 정말로 신앙생활을 잘하는 것으로 보이긴 합니다.
우리는 그 마음속을 알 수 없으니 위선자인지 아닌지 판단하지 못하지만, 사람의 마음속을 보시는 하느님께서는 그 사람이 위선자라는 것을 아십니다.
진짜 심각한 문제는 내가 위선자인지 아닌지 나 자신도 판단하지 못할 때가 많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늘 겸손하게 양심성찰을 해야 합니다.
누구든지 “나는 잘하고 있다.” 라고 자만하게 되면 바로 위선자가 되어버립니다.
예수님의 말씀에서,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라는 말씀은 “위선자가 되지 마라.” 라는 가르침입니다.
위선자들은 실제로 사람을 죽이지만 않으면 “살인하지 마라.” 라는 계명을 지킨 것으로 생각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분노, 증오, 모욕, 저주 같은 정신적인 살인도 살인이라고 가르치십니다.
마음속에 있는 그런 감정이 살인의 뿌리가 되니까 억제하라는 가르침이 아니라 그런 감정 자체도 살인이라는 가르침입니다.
우리는 ‘위선이라는 것’에 대해서 좀 더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바오로 사도가 베드로 사도를 위선자라고 비판한 일이 있습니다.
“케파가 안티오키아에 왔을 때 나는 그를 정면으로 반대하였습니다.
그가 단죄 받을 일을 하였기 때문입니다.
야고보가 보낸 사람들이 오기 전에는 다른 민족들과 함께 음식을 먹더니, 그들이 오자 할례 받은 자들을 두려워한 나머지 몸을 사리며 다른 민족들과 거리를 두기 시작하였던 것입니다.
나머지 유다인들도 그와 함께 위선을 저지르고, 바르나바까지도 그들과 함께 위선에 빠졌습니다.
그러나 나는 그들이 복음의 진리에 따라 올바른 길을 걷지 않은 것을 보고, 모든 사람 앞에서 케파에게 말하였습니다.
‘당신은 유다인이면서도 유다인으로 살지 않고 이민족처럼 살면서, 어떻게 이민족들에게는 유다인처럼
살라고 강요할 수가 있다는 말입니까?’”
(갈라 2,11-14)
(‘케파’는 베드로 사도입니다.)
바오로 사도가 베드로 사도에게 한 말은 “당신은 평소에 이방인처럼 살고 있으면서, 유대인들의 관습을 잘 지키는 척 하는가?” 라는 뜻이고, ‘위선자’ 라고 비판하는 말입니다.
아마도 베드로 사도는 불필요한 오해와 갈등을 피하려고 그랬던 것 같은데, 자신도 모르게 위선적인 행동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 일은 누구든지 자신이 의식하지도 못하는 사이에 위선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그러면 베드로 사도를 위선자라고 공개적으로 비판했던 바오로 사도 자신은 “나는 위선자가 아니다.” 라고 했을까?
사실 바오로 사도는 자기도 위선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늘 의식했고, 조심했고, 위선자가 되지 않으려고 애를 썼습니다(로마 7,15-25).
“그러므로 네가 제단에 예물을 바치려고 하다가, 거기에서 형제가 너에게 원망을 품고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거기 제단 앞에 놓아두고 물러가 먼저 그 형제와 화해하여라.
그런 다음에 돌아와서 예물을 바쳐라.”
(마태 5,23-24)
이 말씀은 “형제를 용서하여라.” 라는 가르침이 아니라 “형제에게 용서를 청하여라.” 라는 가르침입니다.
여기서 “형제가 너에게 원망을 품고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이라는 말씀은 마음에 상처를 입어서 화가 나 있는 사람은 ‘내가’ 아니라 ‘그 형제’ 라는 것을 나타내고, 그 상황에서 용서를 청해야 할 사람은 ‘그 형제’가 아니라 ‘바로 나’ 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우리는 형제를(다른 사람을) 용서하는 일만 생각하고, 형제에게서 용서를 받는 것은 생각하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나의 화만 생각하고, 형제의 화는 생각하지 못합니다.
형제가 어떤 ‘미운 짓’을 해서 내가 그를 미워하게 되었다는 것만 생각하고, 나의 ‘미운 짓’ 때문에 형제가 나를 미워하고 있다는 것은 생각하지 못합니다.
왜 항상 ‘나를’ 용서하는 위치에만 두고 있는가?
‘내가’ 형제의 용서를 받아야 할 일이 정말로 하나도 없는가?
예수님께서는 두 사람 사이에 생긴 갈등의 원인이 어느 쪽에 있는지는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즉 누구의 잘못이 더 크냐에 대해서는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용서를 청해서 받고, 그래서 화해하는 일부터 하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원인을 따지고 잘못을 바로잡는 일이 중요하긴 합니다.
그러나 우선 먼저 화해부터 하라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나는 잘못한 것이 없다. 그러니 내가 먼저 가서 용서를 청할 수는 없다. 그 형제가 화가 나 있는 것은 그 사람의 문제일 뿐이다.” 라고 말하는 것은 위선자들의 모습입니다.
위선자가 아닌 사람들은 형제의 잘못을 생각하기 전에 먼저 자신의 잘못을 생각하고, 그래서 먼저 가서 먼저 용서를 청합니다.
이게 말로는 쉬운데, 현실 상황에서는 대단히 어려운 일입니다.
옳고 그름에 대한 판단 문제도 걸려 있고, 명예나 자존심과도 관계가 있고, 때로는 신념과도 관련되기 때문입니다.
어떻든 위선자가 되지 않으려면 “나는 잘못한 것이 하나도 없다.” 라는 생각부터 버려야 합니다.
- 전주교구 금암동성당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화해하여라!” - 사랑의 화해도 은총이자 선택이요 훈련이자 습관이다
- 내 안의 괴물들을 사랑의 인내와 훈련으로 길들이기>
“주님은 나의 빛 나의 구원,
나 누구를 두려워하랴?
주님은 나의 요새, 나 누구를 무서워하랴?
나의 적 나의 원수, 그들은 비틀거리리라.”
(시편 27.1-2)
저에게 하루 중 가장 행복한 시간은 둘입니다.
하나는 하루의 영적전투를 끝내고 오후 8:30분 잠자리에 들 때의 취침시간이요, 하나는 오전 12:30분 기상하여 주님과 함께 주님과 깊이 일치하여 고요한 시간에 강론을 쓰는 시간입니다.
수십년된 습관입니다.
2014년 산티아고 800리 2000km 순례때로 그랬습니다.
강론 쓰는 시간은 주님과 만남의 시간, 기도의 시간, 회개의 시간, 공부의 시간, 치유의 시간이요 어제의 하루와 화해하는 시간입니다.
“화해하여라!”
화해도 은총이자 선택이요 훈련이자 습관입니다.
내 안의 괴물을 사랑의 훈련으로 길들이는 것입니다.
바로 오늘 강론의 제목이기도 합니다.
저절로 화해가 아닙니다.
바로 끊임없는 기도와 끊임없는 회개가 전제되는 화해입니다.
참으로 화해의 종류는 다양하여 끝이 없습니다.
어찌보면 삶은 “화해의 여정”일 수 있습니다.
주님과 깊어지는 일치와 더불어 화해요 그에 따르는 순수, 겸손, 자비, 겸손입니다.
넷인 듯 하나 하나이고 바로 예수님이 그 원조가 됩니다.
그러나 순수가 우선입니다.
순수의 힘은 하느님의 힘입니다.
참으로 주님을 닮아갈 때, 순수와 겸손이요 자비와 지혜입니다.
“죽음은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화해하는 것이다.”
이미 타계한 세계 최고의 신화학자 조셉 캠벨의 말입니다.
제가 지금까지 평생 수십년간 애독했던, 또 무수한 영감에 강론에 많이도 인용했던 세권의 책이 있습니다.
조셉 캠벨의 이윤기가 번역한, 위의 지혜의 말씀이 담긴 책 <신화의 힘>이고, 니코스 카잔스키스의 안정효가 번역한 <영혼의 자서전>이며, 여호슈아 헷쉘의 이현주가 번역한 <사람을 찾는 하느님>입니다.
성서와 더불어 평생 보관하여 읽는 책입니다.
특히 수려秀麗한 번역은 원문처럼 느껴질 정도입니다.
어제는 어머님 18주기 기일을 맞이하여 어머님 성묘에 다녀왔습니다.
2005년은 수도원 개원이래 초유의 위기와 혼란을 겪던 해였고, 큰 가닥이 잡히고 정리되자 그해 6월14일 선종하셨습니다.
어머님의 기도의 힘이라 믿습니다.
어머님과 합장된 아버지를 위해서도 기도했고, 인근 묘원에 있는 작은 어머님, 그리고 첫째 요셉 형님 묘소에서도 기도했습니다.
특히 돌아가신 분들과 죽음과 화해한 듯 참 내적인 평화와 고요를 느꼈습니다.
제가 수도원을 찾을 때마다 꼭 방문하는 곳이 수도원 묘지입니다.
안식년 중 만3개월 미국 뉴저지주 뉴튼 수도원에 머물 때도 하루도 거르지 않고 날마다 찾았던 곳이 수도원 묘지입니다.
이 또한 죽음은 물론 하느님과 주변 이웃과 내 자신과 화해하며 영적전의를 새로이 했던 은총의 시간이었습니다.
“죽음을 날마다 눈앞에 환히 두라”는 사부 성 베네딕도의 말씀이 몸과 맘에 밸 때 오늘 지금 여기서 본질적 깊이의 화해의 삶을, 순수와 겸손, 자비와 지혜의 삶을 살게 됩니다.
이와 더불어 떠오르는 제 좌우명이요 묘비명입니다.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자작 고백 좌우명시이자 장차 묘비명이기도 합니다.
“화해하여라!”
바로 오늘 산상설교 3일째 복음 소주제입니다.
우리의 의로움이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여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첫 번째 길이 바로 화해입니다.
살인의 근본 뿌리인, 내 안의 괴물같은 실재인 분노와 멸시의 감정을 다스리고 길들여 화해하라는 말씀입니다.
누구나에게 내재한 괴물들입니다.
가라지가 없는 밀만의 현실은 애당초 불가능합니다.
끊임없는 기도와 회개를 통한 화해와 조화의 삶이 필요합니다.
이래야 화해火海의 태풍은 미풍의 화해和解로 변합니다.
제가 늘 강조하는 것이 미풍을 태풍으로 바꾸지 말고 태풍을 미풍으로 바꾸라는 것입니다.
바로 화해와 절제의 훈련이 이를 가능하게 합니다.
내 안의 괴물을 발본색원 뿌리 뽑을 수는 없습니다.
교황님의 “잡초는 결코 죽지 않는다(Weeds never die)”는 말씀도 이런 진리를 의미합니다.
100% 순수는 없습니다.
조화와 화해의 순수요, 내 안의 괴물을 사랑의 인내와 훈련으로 잘 길들여 갈수록 평화 공존의 순수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형제를 “바보!”, “멍청이!”라고 하는 자들은 내 안의 괴물을 길들이지 않은 자들이나 못한 자들입니다.
화해의 영적훈련이 습관이 전무한 자들입니다.
정말 내 안의 괴물들을 방치할 때 그 인생 괴물이나 폐인이 되기 십중팔구입니다.
예물을 바치려 할 때 원망을 품고 있는 자와 화해하고 예물을 바치라 권고하는 주님이요, 고소한 자와도 신속히 타협, 화해하라는 말씀입니다.
괴물의 유혹에 빠져 미풍을 태풍으로 만들지 말라는 것이며 태풍도 가능한한 미풍으로 바꾸라는 것입니다.
이런 감정과 마음이라면 절대 미사 못합니다.
그래서 예전 원장 재직시 수도 형제들과의 관계가 무례와 불손으로 몹시 불편할 때, 형제가 분명 잘못했는데도 사과가 없을 때 제가 먼저 불러서 사과하고 미사했던 일이 여러번 생각이 납니다.
또 저에게 몹시 심한 패악질을 한 형제가 미사 전 무릎을 꿇고 고백성사후 미사를 드렸던 일도 생각납니다.
이런 경우는 한없이 고맙고 감동스럽고 제 자신도 회개하게 됩니다.
어제 수도원에 돌아와 보니 책임감 강한 착한 수련 수사가 새 책 <성 베네딕도 수도규칙>을 구입하여 제 방 편지함에 꽂아 놓았기에 감사인사 전했습니다.
1991년 초판본을 32년간 사용하다 받은 2017년 7쇄의 새책입니다.
앞으로도 새 책과 더불어 32년 동안 공부하고 가르쳤기에 색도 바래고 많이 낡았지만 역사가 배어있기에 과거와 화해하는 마음으로 계속 영구보존할 생각입니다.
이 화해하는 마음 모두는 은총과 훈련의 노력을 통해 내 안의 괴물들을 사랑의 인내와 훈련으로 잘 길들여 갈 때 가능합니다.
바로 이런 이들이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여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 하늘 나라를 사는 이들입니다.
바로 이에 결정적 도움을 주는 분이 성령입니다.
바로 바오로 사도의 말씀이 큰 위로와 격려가 됩니다.
우리를 위로하고 용기를 주며 우리에게 공감하는 위로자 성령님입니다.
회개를 통해 무지의 너울을 치워주심으로 괴물들을 무력하게 하는 성령의 은총입니다.
“주님께 돌아서기만 하면 그 너울은 치워집니다.
주님은 영이십니다.
주님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너울을 벗은 얼굴로 주님의 영광을 거울로 보듯 어렴풋이 바라보면서, 더욱더 영광스럽게 그분과 같은 모습으로 바뀌어 갑니다.
이는 영이신 주님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점차 성령의 성화은총으로 주님을 닮아가면서 잠재한 괴물들이 길들여지는 것이요, 마성魔性이나 악성惡性도 정화되고 성화되는 것이니 바로 성령의 은총이요, 이 거룩한 미사은총입니다.
바오로 사도가 바로 이의 모범입니다.
화해의 달인이요 순수와 겸손, 자비와 지혜의 모범입니다.
다음 바오로의 고백이 참 통쾌합니다.
그대로 제 고백으로 삼고 싶습니다.
“우리가 선포하는 것은 우리 자신이 아닙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선포하고, 우리 자신은 예수님을 위한 여러분의 종으로 선포합니다.
‘어둠 속에서 빛이 비추어라.’ 하고 이르신 하느님께서 우리 마음을 비추시어,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나타난 하느님의 영광을 알아보는 빛을 주셨습니다.”
그대로 이 거룩한 미사은총입니다.
완전히 자기 안의 괴물들을 무력하게 한, 괴물들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워진 주님의 종, 모든 이들의 종이 된 화해의 달인, 자기 절제의 달인 바오로입니다.
새삼 우리의 영성은 주님과 이웃을 섬기는 종과 섬김의 영성임을 깨닫습니다.
그리스도의 얼굴에 나타난 하느님의 영광을 알아보는 은총의 빛이 우리 무지의 어둠을 몰아내며 괴물들을 길들여 순종하게 하며 자발적 기쁨으로 종과 섬김의 영성을 살게 합니다.
바로 여기에 결정적 도움이 되는 날마다의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입니다.
“자비와 진실이 서로 만나고,
정의와 평화가 입맞추리라.
진실이 땅에서 돋아나고,
정의가 하늘에서 굽어보리라.”
(시편 85,11-12)
아멘.
- 성 베네딕도회 요셉 수도원
♠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의 묵상글
오늘은 6월 15일입니다.
23년 전 남한의 김대중 대통령과 북한의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평양에서 ‘남북 정상회담’ 후 ‘공동선언’을 선포한 날입니다.
저는 당시 접경지역인 ‘적성’ 성당의 본당신부로 있었습니다.
공동선언 발표 이후 남과 북은 ‘해빙기’를 가졌습니다.
남한의 예술인들이 북한에서 공연하였고, 북한의 예술인들이 남한에서 공연하였습니다.
올림픽에서는 선수들이 ‘한반도기’를 들고 공동으로 입장하기도 하였습니다.
금강산 관광, 개성공단은 남북공동선언의 열매였습니다.
남과 북의 화해와 협력의 공로를 인정받아 김대중 대통령은 ‘노벨평화상’을 받았습니다.
4년 전에는 미국의 트럼프 대통령과 북한의 김정은 국방위원장의 만남이 ‘하노이’에서 있었습니다.
아쉽게도 북한과 미국의 만남은 ‘공동선언’이 없이 결열 되었지만, 북한과 미국의 ‘공동선언’이 있었다면 새로운 시대를 살고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북한에 미국의 대사관이 입주하고, 미국에 북한의 대사관이 입주하였다면 좋았을 거라 생각합니다.
북한이 핵무기를 전부 폐기하고, 미국이 대북 경제제재를 해제하였으면 좋았을 거라 생각합니다.
예전의 기억입니다.
왼쪽 손목이 부어서 잘 가는 침술원엘 갔습니다.
원장님은 부은 손목을 치료하지 않으시고 오른손에 침을 놓으셨습니다.
신기한 것은 반대편에 침을 놓는데도 왼쪽 손목이 편해지는 것입니다.
원장님은 얼음찜질하거나, 감자를 썰어서 손목에 붙여 놓으라고 하셨습니다.
지금 부은 손목에 침을 놓으면 오히려 더 부을 수 있다고 합니다.
왼쪽 손목은 시간이 지나 부은 것이 가라앉으면 침을 놓는 것이 좋다고 하십니다.
저는 원장님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우리의 감정도 비슷하다고 생각하였습니다.
화가 나 있을 때는 잠시 멈추는 것이 좋았습니다.
화가 나서 결정하는 것들 때문에 때로 일을 그르치기도 했습니다.
화가 나 있는 상대방에게 좋은 이야기를 해도 결과는 신통치 않을 때가 있었습니다.
화가 난 감정을 추스르면서 시간을 가지고 생각하면 좋은 방법이 떠오를 때가 많았습니다.
화가 난 상대방도 시간을 가지고 기다리면 오히려 미안하다고 말할 때가 있었습니다.
옳고 그름을 가리는 것도 필요하겠지만 상대방의 화가 가라앉을 때까지 기다려주는 것도 현명한 방법 같습니다.
우리는 그런 모습을 요한복음 8장에서 볼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죄를 지은 여인을 예수님께 데려왔습니다.
손에는 돌이 있었습니다.
그런 죄를 지은 사람은 율법에 따르면 돌로 쳐서 벌하게 되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떨고 있는 여인을 보셨습니다.
감정에 휩싸여 눈에는 핏발이 서 있는 사람들을 보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리에 앉아서 글을 쓰셨습니다.
글을 쓰면 마음이 정리되기 때문입니다.
벌을 주어야 한다는 분노를 가졌던 사람들의 마음도 조금씩 누그러졌습니다.
떨고 있던 여인도 자신의 잘못을 돌아보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돌을 들고 있는 사람들에게 이야기하십니다.
‘여러분 중에 죄가 없는 사람이 저 여인에게 돌을 던지시오.’
그리고 여인에게도 이야기하십니다.
‘나도 그대의 죄를 묻지 않겠습니다. 그러니 다시는 죄를 짓지 마십시오.’
우리는 내비게이션, 인공위성, 기상관측 기구를 통해서 원하는 곳을 쉽게 갈 수 있고, 1주일 혹은 한 달가량의 날씨도 예측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지혜롭다 할 수 없습니다.
정말 지혜로운 것은 사람의 마음을 아는 것입니다.
사람의 마음은 내비게이션으로 찾아갈 수 없습니다.
사람의 마음은 인공위성으로 예측하기도 어렵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율법 학자와 바리사이파처럼 겉모습만 하느님을 따라서는 안 된다고 하십니다.
신앙인은 세상 사람들보다 더 치열하게 살아야 하고, 세상 사람들보다 더 나누며, 사랑하며 살아야 합니다.
참된 지혜는 며칠 앞의 날씨를 예측하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하느님의 뜻을 아는 것입니다.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 미주가톨릭평화신문 사장
♠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의 묵상글
올해부터 본당신부로 살면서 더 바쁘게 사는 것 같습니다.
우선 성당을 벗어나기가 쉽지 않습니다.
본당신부의 유일한 휴일이라고 하는 월요일에도 사제관에 앉아 하루 종일 글을 쓰고 있습니다.
또 초보 본당신부로 해야 할 것이 너무 많습니다.
워낙 능력과 재주가 없다 보니, 시간을 쪼개고 써야 간신히 조금 본당신부답게 사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살면서 힘이 빠질 때가 종종 있습니다.
왜 그럴까 싶었습니다.
그런데 성경을 읽다가 길을 떠나시는 예수님을 묵상하면서 그 이유를 조금이나마 깨닫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한곳에 머무르시지 않고 늘 길을 떠났습니다.
그 떠난 길에서 기적이 이루어졌고, 그 자리에서 기적이 선포됩니다.
저의 모습을 깊이 반성할 수 있었습니다.
한곳에만 머물러만 있던 저의 모습을 말이지요.
한곳에만 머물러 있으면, 새로움을 얻기가 힘듭니다.
만나는 사람만 만나게 되고, 편하고 친한 사람만 만나며, 자기에 도움 되는 사람만 부르게 됩니다.
익숙한 것만을 찾고 편하고 쉬운 것을 향해서만 나아가려고 합니다.
새로움이 자리잡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과 길을 떠나지 않는 모습입니다.
예수님과 함께하지 않으니 힘이 빠져서 늘 피곤함만 느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계속해서 떠나셨다는 것은 늘 새로운 시작을 하셨다는 것입니다.
새로움을 간직해야 말과 행동에 힘이 생기게 됨을 당신 삶으로 직접 보여 주신 것이지요.
그렇다면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편하고 쉬운 것, 익숙하고 하고 싶은 것만 찾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곳으로 끊임없이 걸어갈 수 있는 용기가 필요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마태 5,20)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은 정말로 열심히 살았습니다.
‘의로움’ 그 자체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그 자리에 그냥 머물러 있었기 때문입니다.
고인 물은 썩는다고 하지요.
그들은 새로움을 완전히 잃어버린 상태에서 율법의 세부 조항 자체를 하느님을 받아들이면서, 율법의 근본정신인 사랑을 완전히 잊어버렸습니다.
의롭게 사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 전혀 의롭지 않은 삶을 살게 됩니다.
주님께서 보여 주신 새로움은 앞서 말씀드렸듯이, 길을 떠나는 것이었습니다.
편하고 쉬운 것, 익숙하고 하고 싶은 것만 해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어떤 형제와도 화해하고 타협할 수 있어야 했습니다.
이 새로움이 우리를 구원의 길로 확실하게 인도해 줍니다.
그래서 저는 지금 사제연수에 참석하면서 새로움을 얻고 있습니다.
행복한 시간입니다.
- 인천가톨릭대학교 성김대건성당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