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전례
해마다 5월의 첫 주일은 우리 사회에 널리 퍼져 있는 ‘죽음의 문화’의 위험성을 깨치고 인간의 존엄과 생명의 참된 가치를 되새기게 하는 ‘생명 주일’이다.
한국 교회는 1995년부터 5월 마지막 주일을 ‘생명의 날’로 지내 오다가, 주교회의 2011년 춘계 정기 총회에서 이를 ‘생명 주일’로 바꾸며 5월의 첫 주일로 옮겼다. 교회가 이 땅에 더욱 적극적으로 ‘생명의 문화’를 이루어 나가자는 데 생명 주일을 지내는 뜻이 있다.
본기도
전능하신 하느님,
이 기쁜 날, 저희가 정성된 마음으로 축제를 지내며
부활하신 주님께 영광을 드리오니
지금 거행하는 이 신비를 언제나 삶으로 드러내게 하소서.
제1독서
<다른 민족들에게도 성령의 선물이 쏟아져 내렸다.>
▥ 사도행전의 말씀입니다.10,25-26.34-35.44-48
25 베드로가 들어서자 코르넬리우스는 그에게 마주 나와
그의 발 앞에 엎드려 절하였다. 26 그러자 베드로가 그를 일으키며,
“일어나십시오. 나도 사람입니다.” 하고 말하였다.
34 베드로가 입을 열어 말하였다. “나는 이제 참으로 깨달았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람을 차별하지 않으시고,
35 어떤 민족에서건 당신을 경외하며 의로운 일을 하는 사람은 다 받아 주십니다.”
44 베드로가 이야기하고 있을 때, 말씀을 듣는 모든 이에게 성령께서 내리셨다.
45 베드로와 함께 왔던 할례 받은 신자들은
다른 민족들에게도 성령의 선물이 쏟아져 내리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46 이 다른 민족 사람들이 신령한 언어로 말하면서
하느님을 찬송하는 것을 들었기 때문이다. 그때에 베드로가 말하였다.
47 “우리처럼 성령을 받은 이 사람들에게 물로 세례를 주는 일을
누가 막을 수 있겠습니까?”
48 그러고 나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라고 그들에게 지시하였다.
그들은 베드로에게 며칠 더 머물러 달라고 청하였다.
제2독서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 요한 1서의 말씀입니다.4,7-10
7 사랑하는 여러분, 서로 사랑합시다. 사랑은 하느님에게서 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이는 모두 하느님에게서 태어났으며 하느님을 압니다.
8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느님을 알지 못합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9 하느님의 사랑은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났습니다.
곧 하느님께서 당신의 외아드님을 세상에 보내시어
우리가 그분을 통하여 살게 해 주셨습니다. 10 그 사랑은 이렇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그분께서 우리를 사랑하시어
당신의 아드님을 우리 죄를 위한 속죄 제물로 보내 주신 것입니다.
복음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15,9-17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9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다.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
10 내가 내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분의 사랑 안에 머무르는 것처럼,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머무를 것이다.
11 내가 너희에게 이 말을 한 이유는,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고 또 너희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는 것이다.
12 이것이 나의 계명이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13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14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을 실천하면 너희는 나의 친구가 된다.
15 나는 너희를 더 이상 종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종은 주인이 하는 일을 모르기 때문이다. 나는 너희를 친구라고 불렀다.
내가 내 아버지에게서 들은 것을 너희에게 모두 알려 주었기 때문이다.
16 너희가 나를 뽑은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뽑아 세웠다.
너희가 가서 열매를 맺어 너희의 그 열매가 언제나 남아 있게 하려는 것이다.
그리하여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청하는 것을
그분께서 너희에게 주시게 하려는 것이다.
17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은 이것이다. 서로 사랑하여라.”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가지가 나무에 붙어있기 위해 꼭 필요한 것 하나는?
사람이 우울해지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한마디로 말하면 ‘관계’가 안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관계는 왜 안 될까요? 나의 교만을 누군가가 꺾어주지 못해서 그렇습니다. 교만이 있으면 관계에 있어서는 무능력자가 되고 그 때문에 슬퍼질 수밖에 없습니다.
‘금쪽같은 내새끼’에 ‘57세 아빠의 머리 꼭대기에 앉은 초4 아들’ 편에서 아이는 “난 왜 이렇게 나쁘게 태어났을까? 난 왜 태어나서 고통 받을까?”라는 생각을 글로 썼습니다. 자기의 교만이 꺾이지 않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어머니와 아버지의 교만 때문이었습니다. 아들이 아버지에게 손찌검을 하는데도 엄마는 아이를 믿어주고 공감해주려고만 합니다. 아버지는 집에서 혼자가 되지 않기 위해 아이를 훈육하지 못합니다. 하지만 이들은 방송국에 창피함을 무릅쓰고 ‘도움’을 청했습니다. 그러자 아이가 호전됩니다.
엄마는 아이를 키울 때 아빠 없이 자기 힘만으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없습니다. 아빠에게 의존해야 합니다. 아빠도 또 누군가에게 의존합니다. 아이를 정말로 사랑한다면. 이렇게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가 실천 됩니다. 가지가 가지인 줄 알려면 반드시 어떻게 해서든 이 아이, 이 사람을 사랑하고야 말겠다는 사명을 가져야 합니다. 이 때문에 포도나무 비유에서 사랑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 당신께 붙어있는 방법이라고 알려주시는 것입니다.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 내가 내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분의 사랑 안에 머무르는 것처럼,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머무를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이 말을 한 이유는,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고 또 너희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는 것이다. 이것이 나의 계명이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성모 꽃마을 박창환 가밀로 신부의 『하늘 아래 첫 동네: 말기 암 환자 호스피스 사목일기』에서 ‘정을 떼려고’라는 글의 내용입니다.
넉 달 전 초등 5학년 아들, 3학년 딸을 둔 9세 아빠가 간암 치료 불가 판정을 받았습니다. 그는 돈을 아끼기 위해서라도 무료 호스피스 시설인 성모 꽃마을로 들어왔습니다. “아내와 자식들에게 끝까지 남편 노릇, 아빠 노릇 해주지 못하고 가는 것이 제일 가슴이 아픕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사업 실패로 자살 시도까지 했으나 아이들 때문에 다시 살아보기로 하고 열심히 노력했지만, 술 때문에 간이 그렇게 된 것입니다.
어느 날 환자의 여동생으로부터 아내에게 전화가 왔습니다. 오빠가 100만 원을 주며 착한 일 한 번 안 해 봐서 자신보다 더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써 달라고 맡겼다는 것입니다. 아내는 자신을 믿지 못하고 시누이에게 그 돈을 준 것을 서운해 했지만, 자신에게 주었다면 분명 자식을 위해 쓸 수밖에 없었음을 알고 그렇게 한 것을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사실 남편은 자기의 전 재산을 가난한 이들에게 주며 하느님께 자기 아내와 자녀들을 맡긴 것이었습니다. 환자는 이것으로 무언가 큰 숙제를 끝냈다고 느끼고 편안히 눈을 감았습니다.
사랑은 능력입니다. 진정으로 사랑하려고 시도해 본 사람은 자기 능력만으로는 누군가를 온전히 사랑할 수 없음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면 겸손하게 자기가 나무가 아니라 ‘가지’임을 고백하게 됩니다. 그렇게 사랑을 사명으로 삼는 사람은 그리스도께 붙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영화 ‘더 보이’(2019)는 슈퍼맨의 또 다른 버전입니다. 자녀가 없었던 한 부부는 우주에서 떨어진 아이를 자기 아이로 키웁니다. 아이는 자신이 왜 세상에 존재하는지 그 이유를 알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부모는 알려줄 수 없었습니다. 우주에서 떨어진 아이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엄청난 괴력을 발휘하게 되면서 지구를 파괴하는 자가 됩니다. 그 힘을 어디에 써야 할 줄 몰랐기 때문입니다.
반면 진짜 ‘슈퍼맨’은 자기 아버지가 이 지구를 지키라는 사명으로 자기를 지구에 보냈음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지구를 지키기 위해 아버지가 준 힘과 지식을 배웁니다. 그렇게 지구인들에게 사랑 받는 존재가 됩니다.
구약의 요나 예언자는 니네베 사람들을 회개 시키라는 하느님의 명령에서 도망칩니다. 그 결과 큰 물고기 배 속에 갇히고 맙니다.
빛에서 도망치면 어둠 뿐입니다. 사랑의 계명으로 나아가지 않으면 저절로 지옥으로 갑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가지인 줄 모르고 나무인 줄 착각하기 때문입니다. 이 때문에 예수님께서 우리가 당신께 붙어있게 하시기 위해 서로 사랑하라는 단 하나의 계명을 주신 것입니다. 자신이 사랑하기 위해 태어났음을 아는 사람은 그리스도께 붙어있지 않을 수 없습니다.
빠다킹신부와 새벽을 열며
요즘에 스마트폰을 이용하면 거의 모든 정보를 얻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안에 재미있는 것도 참 많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 스마트폰을 손에서 놓지 않습니다. 사실 미사 때에도 스마트폰에 열중하는 사람을 보곤 합니다. 어떤 청소년의 경우 미사 내내 스마트폰에서 눈을 떼지 않더군요. 본당 로비에 앉아 열심히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리고 있는 청소년에게 “만약 스마트폰이 없으면 어떻겠니?”라고 물었습니다. 이 물음에 잠시의 망설임도 없이 이렇게 대답합니다.
“절대 안 돼요.”
캠프에 가서 스마트폰을 반납해야 한다면 캠프 자체를 가지 않겠다고도 이야기합니다. 스마트폰이 그리 대단한 것 같지 않은데 여기에 목숨 걸듯이 하는 모습에서 걱정도 됩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는 이런 모습에 대해 내면을 향하기보다는 다른 방향이나 외부에 관심을 두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내면은 전혀 보지 않고 외부에만 관심을 두는 모습에서 참 행복을 찾기란 어렵습니다.
주님의 말씀은 모두 내면을 향하고 있습니다. 사랑, 평화, 믿음, 희망…. 모두 내면을 향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내면이 튼튼해질 때 행복의 삶을 살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세상은 계속해서 보이지 않는 내면보다는 보이는 외적인 것이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외적으로 화려하고 풍요로워야 행복한 것처럼 말합니다. 커다란 착각입니다. 외적인 것에 대한 만족은 끝이 없기 때문입니다. 돈이 어느 정도 있으면 충분하다고 말하지만, 그 충분한 액수에 도달하면 더 갚고 싶어 합니다. 스마트폰도 한 시간만 하면 충분할 것 같지만, 한 시간이 지나면 그 시간이 너무 짧다고 말합니다.
내면을 풍요롭게 할 수 있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바로 주님의 말씀에 그 해답이 있습니다. 오늘 복음 말씀도 우리를 풍요롭게 하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이 얼마나 중요하면,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은 이것이다. 서로 사랑하여라.”라고 명령을 내리십니다. 이 사랑은 겉으로 보기에는 실천하기 힘들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물론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말씀은 큰 위로와 힘을 얻습니다. 하지만 단순히 사랑받는 것에서 멈추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사랑하여라.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요한 15,12)
우리의 내면을 더 풍요롭게 만들어 주는 사랑. 그 사랑은 받는 것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역시 사랑해야만 합니다. 말로만 사랑한다는 것은 의미 없습니다. 목숨을 내놓을 정도로 행동하는 사랑을 통해 진짜 사랑을 실천할 수 있고, 내 내면을 더 풍요롭게 만들 것입니다.
오늘의 명언: 나는 내 운명의 주인이고 내 영혼의 선장이다(윌리엄 어니스트 헨리).
사진설명: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