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통지표 사랑
"후아ㅡ 후아ㅡ 미안해. 내가 좀 늦었지? 많이 기다렸어?"
뽑은 지 2년밖에 되지 않은 자동차가 갑자기 시동이 걸리지 않는 바람에,
당신과의 약속시간보다 10분이나 늦어 버렸네요.
서두른다고 했는데도 쉽사리 잡히지 않는 택시 때문에,
당신과의 약속시간보다 무려 10분이나 늦어 버렸네요.
아무리 재촉을 해도 안전운전 해야 한다며 느긋하게 운전하던 택시기사 아저씨 때문에,
당신과의 약속시간보다 자그마치 10분이나, 10분씩이나 늦어 버렸네요.
하지만 당신은, 내가 10분씩이나 늦어버린 이유에 대해선 알려고 하지 않죠.
그렇다고 팩 토라지거나 화를 내지도 않아요.
내가 미안해하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당신은 손목시계를 한 번 들여다봅니다.
그리고 내게 보일 듯 말 듯 한 미소를 지어 보이고는,
"배고프다. 우리 뭐 먹을까? 나 오늘은 일식 먹고 싶은데."
나의 팔을 잡고 제일 가까운 일식집으로 쏙 들어가 버리죠.
누가 보면 당신은, 10분 정도 늦는 것에 대해서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사람이라 생각하겠죠.
모르는 사람이 보기엔, 늦게 온 나에게 '왜 늦었어?' '다음부터는 늦지 마.' 라는 말 대신 미소를 지어주는 당신이,
한없이 마음이 넓은 사람으로 보일 수도 있어요.
하지만, 당신을 모르는 사람들이 당신의 애인인 나를 부러운 시선으로 쳐다보는 사이,
나의 점수가 1점 깎였다는 사실을 과연 그 누가 알까요?
모르겠죠. 당연히 모르겠죠.
나의 행동 하나 하나가, 나의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당신에 의해 점수가 매겨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 리가 없겠죠.
졸업은 당신이 하는데 왜 내가 더 아침부터 신경이 쓰일까요?
아침밥도 거른 채 나는 지금 거울 속의 나와 씨름 중입니다.
30분을 매만진 머리가 마음에 들지 않아 다시 감아버렸습니다.
아직도 어떤 옷을 입을지 정하지 못했구요.
날이 날이니만큼 깔끔한 스타일이 낫겠네요.
오늘따라 나는 더욱 더 서두릅니다.
오늘 같은 날 절대 늦으면 안 되죠.
1분이라도 늦었다가는 한꺼번에 10점이나 깎여버릴 지도 몰라요.
나는 학사모를 쓴 당신 모습을 가만히 들여다봅니다.
똑같은 학사모를 쓰고 있는 수많은 졸업생들 중에, 유독 당신의 모습만이 눈에 들어오네요.
그 어느 곳에 어떤 사람들과 함께 있어도 당신은 눈에 띕니다.
당신에게서는 빛이 나니까요.
당신은... 나에게 있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당신이니까요.
"거기 서 봐. 사진 찍어줄게. 어! 학사모 비뚤어졌다. 아니, 조금 왼쪽으로. 조금 더. 오케이~ 자, 찍는다.
하나, 둘, 셋. 김치~!"
나는 당신에게 다가가 당신이 얼마나 예쁘게 나왔는지 보여주었지만...
당신의 시선은 사진기가 아닌, 내 자켓의 단추가 떨어져 나간 긴 실밥에 머물러 있네요.
분명 집에서 나설 땐 단추가 네 개였는데, 지금은 달랑 세 개 뿐이네요.
아마도 당신께 주기 위해 사가지고 온 꽃다발 어딘가에 걸려, 나도 모르는 사이 단추 하나가 떨어졌나 봅니다.
단추가 떨어져 나간 곳의 긴 실밥 하나가 사람을 참 칠칠맞게 보이게 하네요.
당신은 단정한 사람을 좋아하는데...
다른 사람에게는 단추 하나 떨어지는 것 쯤 별 거 아닐 수도 있지만,
나에게는... 당신의 사람이 되고 싶은 나에게는, 돌이킬 수 없는 크나큰 실수입니다.
당신은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그 실밥을 보며 눈살을 찌푸리지도 핀잔을 주지도 않지만,
나에게 보일 듯 말 듯 한 미소를 지어주는 사이 또 다시 나의 점수는 깎여 버렸으니까요.
나는 헤어샵에서 한바탕 실랑이 중입니다.
남들과 부딪히는 게 싫어 웬만해선 맘에 들지 않아도 대충 그러려니 넘어가는 편인데,
좋은 게 좋은 거라고 어지간하면 싫어도 싫은 소리 안 하고 넘어가는 편인데,
오늘은 도저히 그럴 수가 없더라구요.
묶일 정도까지는 아니지만, 조금 긴 헤어스타일을 좋아하는 당신 때문에 어렵게 어렵게 길러온 머리카락.
짧은 스포츠스타일에서 이만큼 기르는 데까지 시간도 엄청 걸렸죠.
중간 중간에 얼마나 자르고 싶었는지 몰라요.
길러보신 분은 아시겠지만, 기르는 동안 참 지저분하고 손질이 어렵잖아요.
하지만, 긴 헤어스타일을 좋아하는 당신을 위해 꾹 참고 이만큼 길렀죠.
그렇게 애써 이만큼이나 길렀는데...
지금 내 머리카락은 엉망이 되어 있어요.
조금만 다듬어 달라는 얘기를 잘못 알아들었는지...
그 힘들게 길러온 머리카락을, 당신 마음에 들도록 겨우겨우 길러온 머리카락을,
아무 주저 없이 싹뚝 잘라버렸지 뭐예요.
나는 지금, 오른쪽만 댕강 짧아져버린 우스꽝스러운 모습으로 거울 속에 앉아 있는 나를 바라보고 있어요.
허탈해진 마음으로 말이죠.
'조금만 다듬어 달라고 했더니 이렇게 많이 잘라버리면 어떻게 하느냐.' 하면서 화도 내보았지만,
그렇다고 잘려나간 머리카락이 다시 붙지는 않잖아요.
한참을 거울을 들여다보다가 결국엔 짧게 자르기로 했어요.
싹뚝싹뚝. 싹뚝싹뚝...
당신이 좋아하는 그 긴 머리는, 몇 달 동안 고이고이 길러온 그 긴 머리는,
단 30분 만에 다시 짧은 스포츠스타일이 되어 버렸습니다.
나는 모자를 푹 눌러쓰고 당신을 만나러 가요.
생전 쓰지 않던 모자를 쓰고 나온 나를 보고 당신은 모자를 벗어보라고 하겠죠.
그리고는, 훌쩍 짧아져버린 나의 머리카락을 바라보겠죠.
물론 당신은, 짧아진 내 머리카락에 대해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을 거예요.
'왜 잘랐느냐.' '이상하다.' '다시 길러라.' 이런 말 대신,
또 다시 보일 듯 말 듯 한 미소를 내게 지어 보이겠죠.
당신이 좋아하던 긴 머리카락을 싹뚝 잘라버린 오늘.
나는 과연 몇 점이나 깎였을까요?
과연 내게 남아있는 점수는 몇 점이나 될까요?
사람들은 내가 이러면서까지 당신을 만나는 이유를 이해할 수 없을 겁니다.
실은, 나 자신도 이런 내가 이해가 가지 않을 때가 종종 있지요.
당신에게 높은 점수를 얻기 위해 전전긍긍하는 내가 이해가 가지 않을 때가... 물론 있지요.
하지만 나는, 당신에게 가는 마음을 멈출 수가 없습니다.
아무리 멈춰보려고 해도 속도만 점점 빨라집니다.
내 사랑이 점수 매겨지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멈춰지지가 않아요.
더군다나, 당신에 의해 점수가 매겨지고 있는 사랑이 나 말고도 하나 더 있다는 사실조차 나는 알고 있답니다.
그러면서도 멈춰지지 않는 나.
누가 봐도 바보겠죠. 내가 봐도 바보네요.
당신은 한동안 내 사랑과 또 다른 사랑의 점수를 매기면서, 당신이 원하던 사람을 가려내겠죠.
나는 마지막까지 남기 위해서 최선을 다 할 거구요.
대입시험을 한 달 앞둔 수험생처럼.
나는 당신에게 어떤 통지표를 받게 될까요?
당신은 나에게 어떤 점수를 주게 될까요?
'이 학생은 성격이 활달하며 협동심이 강한 학생입니다.'
'이 학생은 재능은 뛰어나나 노력이 부족합니다.'
'이 학생은 적극적이고 교우관계가 원활합니다.'
문득, 초등학교 때 담임선생님이 통지표에 써주시던 학생평가란이 떠오르네요.
'당신은 나에 대한 노력이 부족합니다.'
'당신의 사랑을 이제는 더 이상 받지 않겠습니다.'
'당신과 나의 인연은 여기까지 입니다.'
나는, 이런 글이 적혀 있는 이별통지표를 받지 않기를 간절히 바래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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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맨스 소설 2.
[ 장편 ]
사랑작명소 [02] ...통지표 사랑
은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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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0.21 10: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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