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 후반전 60대, 민간 최초 공룡박물관 만들다
[우리동네 사람들-4] 서정호씨의 꿈은 "기쁨 나누는 것"
30대까지는 전반전, 30대 이후는 후반전, 그리고 인생 60이 넘으면 연장전이 아닐까.
서정호, 60 초입에 막 접어든 그는 젊은 선수처럼 자신감을 보이며 이제 후반전이 시작됐을 뿐이라 선언하고는 인생 그라운드에 뛰어들었다. 그는 현역의 옷을 벗었건만 풀죽은 기색을 찾아볼 길이 없다.
그는 작년 12월초에 국장과 순천지사장을 끝으로 30년간 재직했던 여수문화방송사를 퇴직했다. 그는 '내 인생의 전반전 MBC 30년'이라는 제목의 퇴임사에서 재임 기간동안 만났던 강영훈 전 총리, 법정 스님, 정주영 명예회장, 홍문화 박사, 나발도 섬 주민 등 숱한 인사들의 이름을 일일이 되새겨 불렀다.
칼럼니스트 이상헌 씨는 그를 "사람재벌, 지식재벌, 효심재벌, 봉사재벌, 청년재벌"이라고 크게 칭찬한다. 그 중 가장 큰 자산이 사람을 소중히 여기는 것이라고 강조한다. 방송광고업무 책임자였던 그가 뛰어난 영업능력을 발휘할 수 있었던 것은 인연을 소중히 여기는 성실성과 친화력 때문이었다고 주위에서 입을 모은다.
그는 가히 권위(權威)를 모른다 할만하다. 서열이 분명한 언론계의 풍토에서 후배 언론인들은 그를 친형처럼 따른다. 후배들과 함께 포장마차에서 소주를 마시고 탁구를 쳤으며 불같은 토론도 거리낌없이 나누었다. 그래서 그가 떠난 빈자리가 커 보인다고 한 젊은 후배 언론인은 아쉬워한다.
그의 호는 방원(方圓)이다. 모질 때는 서리 같이 모질 줄 알아야 하고, 둥글 때는 한없이 둥글 줄 알아야 한다고 자신을 다져왔다. 그의 모짐은 일을 추진하는 데 있어 원칙과 추진력의 발판이며, 그의 둥글 함은 인생의 깊이와 덕을 쌓는 방향이다. 숱하게 읽은 삼국지에서 깨달은 것은 인간존중의 덕목을 쌓은 유비 등 주인공이 끝내 살아남았다고 그는 말한다.
그는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한 번 맺은 인연을 매우 소중히 여긴다. 명절이나 때가 되면 친정 어머니처럼 '고흥유자주'와 '돌산갓김치' 등 지역 특산물을 지인 들에게 곱게 싸 보낸다. 뿐만 아니라 이메일 편지인 '기쁨편지'를 통해 새소리와 음악, 녹차와 안부편지를 동봉해 보내 세상에 지친 벗들을 위로한다.
그의 에너지는 기쁨 "기쁨은 나누는 것, 욕망은 자신을 해칠 뿐"
소년처럼 날마다 새로워하는 그의 원천은 기쁨이다. 그러나 결코 기쁨을 독차지할 생각이 없다. 자신으로 인해 봉양하는 여든 넷의 아버지가 기쁘고, 30년간을 동거동락(同居同樂) 한 아내가 기쁘고, 딸과 사위가 기쁘고... 그리하여 이 세상 모든 사람과 꽃과 음악이 기쁨으로 활기 넘치길 바란다.
"위 사람(사위 김종주)은 아름다운 여성 서민정(큰딸)양과 결혼하여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남편으로서 보다 행복한 가정을 만들기 위한 노력이 역력히 보이므로 이에 표창장을 수여함"
'사위에게 보내는 표창장'이라는 이름으로 그가 인터넷을 통해 실어 보낸 표창 내용이다. 결혼 삼십 년을 맞아 아내에게 보낸 편지 말미에서는 자신을 '이 세상에서 가장 운이 좋은 사람'이라고 했다. 옥토에 뿌려진 말은 그새 꽃피고, 가시밭에 뿌려진 말은 그새 말라죽는 법. 그는 지극한 기쁨의 말과 글과 행동으로 가족과 주위를 살리는 재능의 소유자이다. 그는 주위로부터 '사랑이 꽃피는 가정의 소유자'라는 애칭을 받았다.
6형제의 장남에게 시집온 아내 정옥인씨는 시아버지의 며느리가 아니라 딸이 됐다. 그의 아내는 시아버지 봉양은 물론 시동생 뒷바라지와 딸 셋에 아들 하나를 키우느라 청춘을 보냈지만 '내 인생 돌려달라'고 항의하지 않는다. 이 험한 파도 속에 아내가 기쁨으로 가정에 헌신할 수 있었던 것은 선장인 그의 지혜로운 항해술 때문이다.
한국 남편들은 아내에게 불친절한 것을 남성의 멋으로 착각해 왔다. 양성평등 시대에 닥쳐 고개 숙인 남편이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은 그런 착오에 의한 반대급부인 것이다. 그는 아내에게 사랑받는 법을 안다. '열심히 일한 당신 떠나라'는 광고 카피처럼 그는 열심히 일에 매진하다 5년에 한번 휴가를 내 아내와 해외여행을 떠나 괴로움은 덜어내고 기쁨을 충전했다.
삶의 기쁨은 일뿐이 아니라 사랑과 즐김이 온전히 섞이는 것이라고 그는 말한다. 주위를 기쁘게 하지 않는 성공은 자신을 죽이는 욕망일 뿐이며, 끝내 실패한 결과를 불러온다고 믿는다. 그가 이런 우스운 일화를 들려주었다.
"일 중독에 걸린 어느 아빠가 아들과 가족의 성화에 못 이겨 놀이공원에 함께 놀러갔습니다. 이날 저녁에 아들과 아빠의 일기장에는 이런 글이 각각 쓰여졌습니다. 아들은 '오늘은 최고 기쁜 날이었다', 아빠는 '오늘은 최고 괴로운 날이었다'"
그가 들려준 우스운 일화는, 일에 쫓기다 장렬하게 전사하거나 가족에게 왕따 당하는 불행한 가장들에게는 슬픈 이야기로 들릴만 하다.
"인생 후반전 30년 어린이들과 함께 보내겠습니다"
그의 끝없는 기쁨의 원천은 무엇일까? 곰곰이 생각해봤다. 가장 큰 바탕은 풍부한 감성으로 여겨진다. 궁극적으로 인간은 이성이 아닌 감성의 동물이다. 자본의 톱니바퀴에 천연의 감성이 갉아먹히면서 사랑과 기쁨의 감정이 점차 퇴화된 것이다.
그는 헌신적인 수녀의 모습에 "그대 천사여 날개만 없구려"라는 시를, 아내를 향해서는 "그대가 있으니 여기가 천국일세"라는 한 줄의 짧은 시를 썼다. 감동과 기쁨이 넘치는 이는 누구랄 것 없이 시인. 시적인 감성과 기쁨의 열정이 그를 늘 꿈꾸게 했다.
인생 후반전을 선언한 그가 소년처럼 꿈을 꾸더니 급기야 꿈을 실현시켰다. 지난해 겨울, 방송사를 퇴직한 그는 어린이들을 위한 작은 공간을 만들겠다고 조심스런 뜻을 밝혔다. 그가 지난 6개월 동안 폐교된 농촌학교를 페인트칠하고 문짝을 고치면서 기쁨의 땀을 흘리더니 기어코 멋진 박물관 탄생을 앞두고 있다.
'방원(方圓) 공룡박물관'
▲ 공룡박물관 개관을 앞둔 서정호씨.
ⓒ 오마이뉴스 조호진
그는 폐교된 순천 별량남초등학교를 임대해 240평 규모의 공룡박물관을 만들었다. 국내 최초 민간 공룡박물관으로 기록될 이 박물관은 개관기념 기획 전시물로 티라노사우루스 등 25마리 공룡 모형을 전시한다. 이와 함께 어린이들이 타고 노는 공룡 10마리를 1층에 배치해 7월 초순에 개관할 예정이다.
2층 전시실에는 △쥬라기 시대의 공룡알 화석 △백악기 시대의 공룡뼈 화석 △백악기 시대의 공룡 똥 화석 △중국, 멕시코 등지에 떨어진 운석(별똥) △어류화석과 고생대 어룡화석 등 세계 희귀 화석 진품 210점이 진열돼 있다.
이와 함께 세계적인 자연사 전문가인 김동섭 박사가 평생 수집한 공룡자료 1650점, 희귀 화석 600여종 17000점, 실물크기 공룡 뼈 모형 3마리, 공룡 모형 101종 1260마리, 운석 36종 3만여 점을 교체 전시할 예정이다.
개인이 희귀한 공룡 뼈 등 수백 점이 전시된 공룡박물관을 만든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인생 30년 후반전을 어린이들과 함께 보내기로 한 그의 꿈이 결실로 맺을 수 있었던 것은 지난 96년 '쥬라기 대 탐험전'을 순천에 유치하면서 김동섭 박사와 맺은 인연에서 시작됐다.
세계적인 자연사 수집가인 김동섭 박사는 지난 2000년 영주 자연사박물관에 공룡 및 어패류 화석, 운석 등 7백 여 점의 유물(500억 상당)을 기증한 인물. 김 박사가 개인에게 자신의 애장품을 선뜻 내 놓은 것은 처음이다. 세계 120여 개국을 여행하면서 죽을 고비를 여러 차례 넘기며 수집한 소장품을 개인에 내 놓는다는 것은 그만큼 그를 신뢰한다는 징표다.
그가 공룡박물관을 꿈꾸게 된 까닭은 여수와 남해, 하동 등 광양만권 일대에서 공룡 화석 등이 많이 발견된 것과 관련이 있다. 또한 이 지역을 해양관광산업이 융성한 지역으로 발전시켜야 한다는 자신의 오랜 주장과 꿈을 어린 세대들에게 넘겨주어야 한다는 평소 생각 때문이다.
그는 공룡박물관이 자신이 만든 게 아니라 주변의 도움으로 지어졌으니 '모두의 것'이라고 겸손해 한다. 무엇보다 이 작은 도시에 박물관이 생겨 어린이들에게는 꿈을, 지역민 들에게는 문화적 자존심을 세워줄 수 있게 됐으니 매우 고무적인 일이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적지 않은 투자와 운영비의 무게는 그의 몫으로 남을 수밖에 없다. 그는 위험부담이 큰 공룡박물관 개관의 의미를 이렇게 밝혔다.
"주변에서 실패할 확률이 90% 이상이니 하지 말라고 만류했습니다. 하지만 기쁜 것은 내 인생 후반전의 기쁨을 어린이들과 나눌 수 있으니 더 젊어질 것이 틀림없고, 또 욕심 내지 않고 이 일을 계속 한다면 후대에 의미 있게 평가받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공룡박물관은 7월 초순경 개관 예정. 위치는 순천시 별량면 대곡리 742-1번지. 문의는 061-742-4590 / 011-647-45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