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목월 생가
살랑거리는 봄바람을 타고 철쭉과 라일락이 뿜어내는 향기가 넘실거리는 시인의 생가. 붉은 철쭉과 연보라 라일락이 봄을 아름답게 수놓나 했더니 정자 좌우로 조성된 텃밭에선 짙푸른 청보리가 옛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청보리는 투박한 시인의 성정을 닮은 것 같기도 했다. 생가를 복원하면서 시인의 지난 날 삶을 보여주기 위해 애쓴 흔적이 여러 군데 눈에 띈다. 별채로 된 디딜방앗간과 울타리 밑 장독대, 방안에 걸린 시인의 인물사진과 부엌 아궁이에 걸린 무쇠 솥 그리고 댓돌 위에 놓인 고무신은 어린 날의 고향집을 생각나게도 했다. 생가의 마당과 울타리 밑엔 <나그네>와 <산이 날 에워싸고> <선도산하> <얼룩송아지> <윤사월> <청노루> 같은 시인을 대표하는 작품들이 내걸렸다. 박목월이 태어나 살았던 생가는 1980년대에 헐리면서 그 자리에 다른 집이 지어졌으나 2014년 6월 다시 복원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고 한다.
박목월은 “우리 고장에서는 오빠를 오라베라고 했다. 그 무뚝뚝하고 왁살스러운 악센트로 오라베라 부르면 나는 앞이 칵 막히도록 좋았다”라며 자신의 고장말로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그려냈다. 조지훈 박두진과 함께 청록파 시인이라 불리며 한국을 대표하는 시인이 된 박목월은 경주 건천읍 모량리에서 태어나 20대 대부분을 경주에서 보내면서 문학 활동을 벌였다. 그런 연유로 그의 문학작품 속엔 경상도와 경주가 깊숙하게 배어 있다. <향수>의 시인 정지용이 “북에는 소월, 남에는 목월이 있다”고 할 정도로 한국 서정시를 대표하는 박목월은 1978년 63세로 세상을 떠났다. 청와대의 부름을 받아 영부인 육영수 여사에게도 시를 가르친 시인이었다.
박목월의 또 다른 글 <보랏빛 소묘>에서 “나는 어려서 여름풀이 우거진 능가에서 숨바꼭질을 하거나 혹은 앓을 때 열에 얼뜬 눈으로 황폐한 경주의 하늘 위에 높다랗게 떠있는 달을 무엇에 홀린 듯 바라보곤 했었다. 때로는 그 달에 비단보다 가늘고 부드러운 한 오리의 구름이 걸리기도 했다. 그러나 그 구름은 달의 아름다움을 가리는 것이 아니다. 그런 구름에 가린 달 모습을 무엇이라 표현하랴. 흔히 수심을 띤 여인네 얼굴의 아름다움을 말하나 그 달 모습은 요염하며 청초하고 수줍음을 타듯 감추며 나타나고 눈을 가리며 눈여겨보는 그 신비로움 또한 달을 가린 구름도 환하게 밝으며 어둡고 은은하게 푸르며 또한 하얗게 밝고……. 그 한가락 구름에 가린 달 모습이 내가 성장할수록 또한 갖는 감정에 눈을 떠서 그 감정을 겪을수록 마음 깊이 잠기는 것을 느꼈다.”
어쩌다 문단에 발을 디디는 바람에 문학단체 멤버들과 불국사 앞 동리목월문학관을 몇 차례나 찾을 수 있었다. 그곳 문학관에서 경주가 낳은 박목월 시인을 만날 때마다 그의 생가를 찾고 싶은 마음이 짠했다. 하지만 뜻을 이루기 쉽지 않았던 것은 생가가 경주시내에서 건천 쪽으로 떨어져 있었던 것. 세계문화유산도시 경주 지도를 펼치면 왕궁이었던 월성과 왕릉이 중앙을 차지하고 동서로 불국사와 목월 생가가 각각 뚝 떨어져 있다. 생가 위로는 경부고속도로 밑으로는 경부고속전철이 거의 붙다시피 지나고 동해선 고속철도도 두 교통망과 직각으로 교차하는 걸 볼 수 있다. 생가는 이처럼 ‘고속’으로 교통의 요지가 되었지만 이용할 수 없으니 그림의 떡이 아닐 수 없었다.
문학기행은 늘 단체로 움직여 개별행동이 어려웠던 데다 교통편마저 열악하다보니 미룬 게 어느새 십년 세월이 후딱 흐르고 말았다. 그동안 수차례 문학관을 찾은 계절이 모두 봄이었듯 시인의 생가도 봄이면 좋을 것 같았다. 문학관에서는 시인의 연보는 물론 향토색 짙은 시인의 작품들도 만날 수 있었고 시인을 회고하거나 예찬하는 김후란 유안진 등 중견 시인들의 글도 접할 수 있었다. 김후란의 <목월 시인>은 "지상에는 아름다운 나무가 있고/ 저 하늘엔 그윽한 달이 있다/ 가슴으로 시를 낳는 시인은/ 밤새워 사각사각 연필을 깎으며/ 나무와 달을 품고 살았다/ 언제나 그 모습 결곡한 삶/ 먼 눈길로 세상 속에 서있다"
유안진의 <시의 고향 목월리>는 "한 백년 나그네길/ 사랑도 술 익듯이 익어가는 마을 있어/ 발목이 빠지도록 달빛 쌓이는 마을이 있어/ 불현듯 찾고 싶은 강나루 길을 돌아/ 초록빛 물결치는 밀밭향기 거느리고/ 시선이 사는 마을 그곳은 목월리/ 밤이거나 낮이거나/ 달뜨는 하늘 아래/ 바람 부는 사시사철/ 가뿐 숨결 쓸어주는/ 크고 부드러운 손의 목월/ 우리 시의 큰 스승님 박목월의 목월리에/ 서정시의 고향다이 목월 시인이 계시옵니다/" 이밖에도 문학관엔 박목월이 직접 가르친 후학들이 스승을 그리워하며 쓴 수많은 작품이 걸렸고 그 하나하나마다 사람 냄새가 물씬했다.
문학관이 아니더라도 살고 있는 아파트단지에서 만나는 <사월의 노래>가 시인 생가를 찾아보라고 부채질했는지도 모른다. <사월의 노래>는 아파트를 지을 때 건설사가 설치했기에 큰돈을 들인만큼 중후한 멋이 느껴진다. 아파트단지 출입구 정중앙 삼거리 외벽에 높지 않게 붙어있어 벌써 십 수년째 접하다보니 나도 모르게 노래를 따라 흥얼거리게 되었다. 진한 스테인드글라스에 예술작품으로 하얀 목련꽃을 배치한 후 <사월의 노래>를 그 아래 깔끔하게 담았다. 흠숭하는 시인의 작품을 그것도 아침저녁으로 가까이서 만날 수 있다는 건 여간 고마운 일이 아니다.
<사월의 노래>가 가곡으로 태어난 건 한국동란이 끝나갈 무렵인 1953년이었고 김순애가 작곡했다. 김순애는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작곡가로「네 잎 클로버」「그대 있음에」 등의 가곡과 기악곡, 오페라『직녀, 직녀여!』등을 작곡했다.「사월의 노래」는 김순애가 6·25피란에서 갓 돌아와「학생계」잡지가 창간을 기념하여 청탁해서 작곡했다고 전한다. "목련꽃 그늘 아래서 베르테르의 편질 읽노라/ 구름 꽃 피는 언덕에서 피리를 부노라/ 아 멀리 떠나와 이름 없는 항구에서 배를 타노라// 목련꽃 그늘 아래서 긴 사연의 편질 쓰노라/ 클로버 피는 언덕에서 휘파람 부노라/ 아 멀리 떠나와 깊은 산골 나무 아래서 별을 보노라// (후렴) 돌아온 사월은 생명의 등불을 밝혀 든다/ 빛나는 꿈의 계절아 눈물 어린 무지개 계절아/"
박목월 시인을 추억하는 또 다른 인사의 사연이다. "유튜브로 보내온 <이별의 노래>를 오랜만에 만났다. 이 노래를 들을 때마다 생각나는 사람이 시인 박목월이다. 박목월은 박두진 조지훈과 함께 청록파 시인이다. 세 사람 중에서도 박목월이 더 친숙하게 다가오는 것은 박두진은 ‘기독교’를 노래했고 조지훈은 ‘민족’을 얘기했으나 박목월은 ‘향토색 짙은 자연'을 삶의 가치로 삼아 청록파 본연의 색깔에 충실했다. 하지만 그보다 군더더기 없는 간결한 시로 평가받는 <나그네>와 <윤사월>을 아직도 나는 기억하고 있는데다 그가 작사한 우리 가곡 <사월의 노래>와 <이별의 노래>를 한 번씩 즐겨 흥얼거리기 때문이다.
<이별의 노래>에 대한 시인의 에피소드를 알고 난 뒤부터 더욱 친근감을 가졌는지도 모른다. 6.25동란 와중에 중년이었던 박목월은 제자인 여대생과 사랑에 빠져 어느 날 홀연히 자취를 감춘다. 가족과 국문학과 교수라는 명예도 버리고 빈손으로 사라졌던 것이다. 그의 아내는 두 사람이 제주도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는 찾아 나선다. 둘의 궁색한 모습을 본 아내는 힘들지 않느냐며 돈봉투와 겨울옷을 내밀고 서울로 올라온다. 둘은 그 자비심에 감동하고 가슴이 아파 사랑을 끝내고 헤어지기로 한 후 제주를 떠나기 전 날 밤 목월이 시를 지어 사랑하는 여인에게 이별의 선물로 주었다.
영국의 낭만파 시인 바이런은 “시인이 되려면 사랑에 빠져야 한다”고 했는데 목월의 그때 그 시가 바로 <이별의 노래>이다. "기러기 울어 예는 하늘 구 만리/ 바람이 싸늘 불어 가을은 깊었네/ 아~ 아~ 너도 가고 나도 가야지// 한낮이 끝나면 밤이 오듯이/ 우리의 사랑도 저물었네/ 아~ 아~ 너도 가고 나도 가야지// 산촌에 눈이 쌓인 어느 날 밤에/ 촛불을 밝혀두고 홀로 울리라/ 아~ 아~ 너도 가고 나도 가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