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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평윤씨(대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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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자유 게시판 스크랩 진짜 고려천리장성은 요동에 있었다
용연봉강재사랑 추천 0 조회 199 17.10.16 05:31 댓글 1
게시글 본문내용

 

진짜 고려천리장성은 요동에 있었다.

 

험준한 산을 막고있는 중국의 장성

 

우리나라 고려에도 천리장성이 있었다고 배웠습니다. 그런데 그 천리장성의 모습은 흔적조차 본 기억이 없습니다. 듣기로는 석축으로서 높이와 폭을 각각 25자씩의 크기로 하고 압록강 서쪽강구에서 동쪽으로 의주를 거쳐서 함경남도 화주를 거쳐 도련포 해안(맨아래 사진 참조)까지 쌓았다는 말인데 고려초기에 시작하여 대충 1033년에 초벌을 완성하고 그후 완공은 1044년에야 이루었다고 하였으니 기간으로는 약 100여년이 넘게 걸렸군요. 그렇지만 한반도의 국경은 최소한도 압록강과 두만강을 경계로 하는 국경선이 상식인데 장성은 함경북도와 평안북도의 북부를 내버리고 그 안쪽으로 쌓았다는 얘기입니다.집터의 마당에다 다시 담을 친 셈이지요.

아무튼 그렇게 배웠으니 토를 달지말고 잠자코 있으라면 할말은 없지만 명색이 고등교육을 받었다고 하는 백성으로서는 궁금증이 너무나 많은것입니다. 요즘은 국민들에게도 알 권리라는것이 주어져 있습니다. 하기에 이글은 어쩌면 대답해줄 의무가 있는 정부 기관에 질문하는 글이기도 합니다. 아래 글은 고려와 명나라가 국경문제로 실랑이를 하는 내용인데 국경선의 내용이 너무도 엉뚱합니다. 한번 보시지요.명나라 태조가 홍무20년(1387) 고려왕에게 보낸 국서입니다.

 

 크릭하면 확대가능

 

작자미상  출전[coo2] 노란색 부분은 고구려천리장성 녹색부분은 고려천리장성 

 

 

광령의 의주에서 갈라져 나간 성의 위치에 려성(驪城)이라고 표기된 중국도(中國圖) 출전:대영도서관소장(향고도)

 

 이 지도에서 중국의 만리장성은 산해관에서 바다로 들어갔습니다.이렇게 바다로 들어갔던 갈석산 부분이 바다로 윤몰되었지요.(수경주 석 참조)

 

정종 원년(1035) 5월 래원(來遠) 성사절 안서가 흥화(興化)진에 보낸 통첩, 6월 영덕진서 거란 래원성에 보낸 통첩에 고려가 돌성을 쌓아 대로를 막으며 목책을 세워 군사행동을 저지한다고 등의 기록이 보이며 이해 9월 "서북지방 송령(松嶺)이동에 장성을 구축하여 변방 적들의 침입을 방어하는 요충으로 삼다"라는 기록이 있는 바 송령은 요심의 서쪽에 있던 의주,의주(懿州,義州)지역의 장성상에 지금도 송령문이라는 지명이 있고 중국 고금지명사전에서도 이 지역에 송령이 있음을 기록하고 있다.

1018년에 구주대첩(龜州大捷)이 있었다. 그런데 1035년에 송령에 장성을 구축했다고 하였으니 바로 이 '송령' 동쪽의 심주지역에 '구주'가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 아닌가?

원사의 구주 부분에서는 이 자료 이상 더 찾아볼 자료가 없으니 다른 여러 가지 기록에서 구주의 위치를 더 확인하여 강감찬(姜邯贊)의 구주대첩(龜州大捷)이 과연 한반도에서 있었는지 만주지역에서 있었는지 확인해 보아야 한다.

 

 

(壬申) 命戶部咨高麗王, 以?嶺北東西之地舊屬開元, 其土著軍民女直??高麗人等遼東統之. ?嶺之南舊屬高麗, 人民悉聽本國管屬. 疆境旣正, 各安其守, 不得有所侵越.[明太祖實錄卷187 洪武二十年 十二月 壬申]

(12월26일 임신일) 호부에 명하여 고려왕에게 자문을 보내도록 하였으니, (그 내용에 이르길) “철령의 북쪽과 동서의 땅은 예전에 개원(開元)에 속하였다. 그 토착 군민과 여진, 달단, 고려인 등은 요동이 다스렸었다. 철령의 남쪽은 예전에 고려에 속하였으나, 인민들은 모두 본국(명나라) 관속을 따른다. 강역이 이미 정하여졌으니(疆境旣正), 각자 그 수자리를 안정시켜 침범하여 넘는 바가 없도록 하라.”

*** 위의 글, 명의 실록에서 철령을 중심으로 그 북쪽과 동서는 개원이 관활하던 땅인데 토착 군민과 여진,달단,고려인 등이 살았었다고 하는것은 이곳이 과거에 고려의 영토였다고 볼 수 있는 것이며, 또한 철령의 남쪽도 고려의 구지라고 하였으니 심양, 요양 등이 모두 고려의 영토였다는 기록이 아니겠습니까? 고려는 철령의 동서와 북쪽을 먼저 잃고, 따라서 철령의 이남도 순차적으로 밀려나던 모습을 명사 실록이 기록하고 있다는것이 중요한 사실입니다. [강역이 이미 정하여졌으니 각자 그 수자리를 안정시켜 침범하여 넘는바가 없도록 하라] 이 말은 명이 고려의 영토를 노략질하고 주인을 욱박지르는 강자의 공갈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렇다면 당시 국경선을 가르는 장성의 위치에 대해서 알아보는것이 순서일듯 합니다. 아시다시피 요동에도 분명히 만리장성과는 형태가 다른 성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성의 주인공들이 누구냐 하는것을 알고 싶은것입니다.행여나 그 성들의 주인이 설마 고려였을까? 듣기로는 고구려도 천리장성을 쌓았다고 하지만 실체를 확인하기가 어렵고 부분 부분만 나타나니 장성이라고 하기가 그렇습니다. 그리고 금(金)장성이라고 하는 부분성들도 몇군데 있긴 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성은 연다라 쌓여진 장설을 말합니다.그렇다면 중국의 축성 역사부터 알아보는것이 상식일듯합니다. 장진근님의 글을 빌려 중국장성의 역사를 알아봅니다.

 

중국 장성에 대한 이해

 [진(晉)나라는 서진의 초기 기록만 믿을 수 있고, 영가(永嘉: 회제 이후 재위 307~316, 이후 동진으로 이어짐) 이후에는 믿을 수 없다는 것이 자기들의 주장에 의해 이미 입증된 바 있다.

진 · 한(秦漢)의 장성(長城)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연(燕)나라가 쌓은 장성을 이해해야 한다. 연나라는 우리 고조선과 서쪽으로 이웃하고 있었는데 진(秦)나라에 의해 멸망을 당했다. 연(燕)나라가 쌓은 장성에 관한 기록은 《사기(史記) · 흉노열전(匈奴列傳)》에 기록되어 있으며, 진나라에서 연나라 등에서 쌓은 성을 연결하여 만리장성을 쌓은 기록도 역시 《흉노열전》에 함께 들어 있다.

".....진나라의 소왕(昭王) 때에, 의거의 융왕이 소왕의 어머니인 선태후와 밀통하여 두 아들을 낳았다. 선태후는 의거의 융왕을 감천궁에서 모살하고 드디어 군대를 출동시켜 의거를 쳐서 대다수를 살상했다. 이리하여 진나라는 농서(농서) 북지(北地)  상군(上郡)을 차지하고 장성을 쌓아서 북쪽 오랑캐를 방어했다. 또 조나라의 무령왕(武靈王)은 풍습을 고쳐 호복을 입고, 말을 타고 활을 쏘는 것을 가르쳐 북쪽으로 임호(林胡) · 누번(樓煩)을 무찔러 장성을 쌓고, 음산산맥(陰山山脈) 기슭을 따라서 고궐(高闕: 올더스 지방)에 이르는 사이를 요새지로 만들고 운중(雲中) · 안문(雁門) · 대(代) 등 3군을 두었다.

그후 연나라에 진개(秦開)라고 하는 어진 장군이 있어 흉노에 볼모로 가 있었다. 흉노는 진개를 매우 신임했는데, 진개는 연나라로 귀국하자 곧 동호(東胡)를 습격해서 격파하여 패주시켰다. 동호는 천여 리나 후퇴했다. 형가(荊軻)와 함께 진나라 왕 정(政: 나중의 진시황제)을 죽이려고 갔던 진무양(秦舞陽)은 진개(秦開)의 손자이다. 연(燕)나라도 또 조양(造陽)에서부터 양평(襄平)에 이르기까지 장성을 쌓고, 상곡(上谷) · 어양(漁陽) · 우북평(右北平) · 요서(遼西) · 요동(遼東)의 여러 군을 두어 오랑캐를 막았다.

당시 중국에는 문물과 예제가 잘 갖추어진 나라로는 7개국(齊 · 燕 · 楚 · 韓 · 魏 · 趙 · 秦)이 있었는데, 그

가운데 세 나라(燕 · 趙 · 秦)가 흉노와 경계를 접하고 있었다. 그 후 조나라의 장군 이목(李牧)이 건재한 동안은 흉노는 조나라의 변경을 침입하지 못했다. 진나라가 6국을 멸망시키고, 시황제는 몽념(蒙恬)에게 명하여 10만의 군사를 거느리고 북쪽의 흉노를 치도록 했다.

몽념은 황하의 남쪽 올더스 지방을 모조리 손에 넣고, 황하를 이용하여 요새를 만들고 하류를 따라 44개의 현성(縣城)을 쌓은 다음, 죄를 지어 변방의 수비병으로 와 있는 자들을 옮겨서 수비하게 했고, 구원(九原)으로 부터 운양(雲陽)까지 직통 도로를 열었다. 그리고 산이 험한 지형을 이용해서 경계를 만들고, 계곡을 이용해서 참호를 만들었으며, 보충해야 할 곳은 손을 보아 임조(臨?)를 기점으로 하여 요동(遼東)에 이르기까지 1만여 리에 달하는 장성(長城)을 쌓았다. 또 황하를 북쪽으로 건너가 양산(陽山)과 북가(北假)의 사이에 근거지를 두었다.......(박일봉 편역, 《사기》열전 2,  《흉노열전(匈奴列傳)》,육문사, 1994년, 183~184 참조) 

우리는 위 기록을 통해서 알 수 있는 명백한 사실은 연나라에서는 조양(造陽)에서 양평(襄平)까지 장성을

쌓은 것이요, 그 다음 진나라에서 임조(臨?)에서 요동(遼東)에 이르기까지 1만여 리에 달하는 장성을 쌓았던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여기서 또 기억해야 할 것은 동호(東胡)의 정체이다. 이 말에서 영어 퉁그스(Tongus)란 말의 어원이 비롯된 것으로 우리 예맥족으로 보는 것이 대다수 중국학자들의 견해이다.

* 《진서(晋書) · 당빈전(唐彬傳)》의 장성 관련 기록

 다시 동북아의 주인은 서진으로 대체 되었다. 서진은 잘 알다시피 '사제갈주중달(死諸葛走生仲達)'로

유명한 사마중달 사마의(司馬懿)의 손자 사마염(司馬炎)이 세운 나라였다.《진서 · 당빈전》에는 선비의 침입에 대비해서 종전에 진(秦)나라가 쌓았던 성을 온성(溫城)에서부터 갈석(碣石)까지 복구했다는 기록이 발견되었다. 중국에는 사전의 왕국이라고 말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벼라별 사전이 다 있다. 그 가운데 《장성사전(長城辭典)》이란 것도 있다.

허실삼아 거기에 나와 있는 진(晉) 관련 장성 기록을 찾아보았다. 서진장성(西晉長城)이란 제목 아래 다음과 같이 기술되어 있었다.

"서진 왕조에서 쌓은 장성이다. 《진서 · 당빈전》의 기록에 의하면 "진무제 태강 2년(281), 당빈(唐彬)이

 유주(幽州)에 재직할 때, 북방의 소수민족의 남침을 방지하기 위해 일찌기 옛 경토를 개척하여 천여 리의 땅을 물리치고, 온성(溫城)으로부터 갈석(碣石)까지 산과 계속을 이어 3천여 리에 걸쳐 진장성(秦長城) 요새를 복구하고, 군사를 나누어 주둔을 시켰는데 봉수가 끊임없이 이어져 있었다."라고 하였다. 이 장성에 관해서는 서진 왕조가 단명으로 끝난 왕조일 뿐만 아니라, 전쟁으로 인해 파괴되었으므로 그 유지가 지금까지 남아 있는 것이 없기 때문에 여태껏 의문으로 남아 있다.

 

어떤 전문가는 이 장성에는 겨우 봉화대(烽火臺) 보장(堡障: 보루)을 죽 이어서 만든 보잘것 없는 공사였을 것으로 여긴다라고 하였으며, 어떤 전문가는 문제의 장성은 지금의 하북성 승덕(承德)에서 요녕성 조양(朝陽) 지역에 이르기까지 위치했으며 진 · 한(秦漢) 시기의 장성의 옛 노선을 따라 증수한 것이라고 하였다. 결국 어떻든간에 진일보한 고증이 필요하다고 하였다 " (임암 주편, 《장성사전(長城辭典)》, 문회출판사, 11쪽) 인용 끝]   


 

 

<<진서>><당빈전>에서 하북성 승덕에서 요녕성 조양까지 1000여리의 장성을 보수하였다는 기록을 참고하면 위 지도에서 보이는 고려천리장성의 깃점이 시작되는 곳 까지로 볼수 있다. 여기서 부터는 성의 형태가 책성으로 바뀌고 또 고려천리장성은 의주로 부터 시작되었다는 기록을 적용할수 있는것이다.<<명일통지>>는 압록강을 의주강으로 기록한바 있다.<지도:요계관방도 홍대용의 연행도에서>

 

 정종 원년(1035) 5월 래원(來遠) 성사절 안서가 흥화(興化)진에 보낸 통첩, 6월 영덕진서 거란 래원성에 보낸 통첩에 고려가 돌성을 쌓아 대로를 막으며 목책을 세워 군사행동을 저지한다고 등의 기록이 보이며 이해 9월 "서북지방 송령(松嶺)이동에 장성을 구축하여 변방 적들의 침입을 방어하는 요충으로 삼다"라는 기록이 있는 바 송령은 요심의 서쪽에 있던 의주,의주(懿州,義州)지역의 장성상에 지금도 송령문이라는 지명이 있고 중국 고금지명사전에서도 이 지역에 송령이 있음을 기록하고 있다.

 

*고려의 통나무국경선* 


간도 땅의 옛 귀속을 두고 벌어진 논란의 소용돌이 속에 한국 땅으로 그려진 18~19세기 유럽지도 69점이 수집돼 그중 몇 점이 공개되었다. 지금은 압록강과 두만강을 국경선으로 삼고 있지만 이 지도들에는 200여리 안으로 그 국경선이 북상하고 있다. 고구려 유적이 집중돼 있는 지안(集安)이나 부여(夫餘) 예(濊) 맥(貊) 읍루(?婁) 발해(渤海) 등 고대 유지를 비롯, 조선족 자치지역인 간도는 이 북상된 국경선 안에 들어있는 한국영토로 돼 있다. 이 유럽의 지도들이 어디다 근거를 두고 국경선을 북상시켰을까. 장장 2000여리나 연해 있던 책성(柵城) 자리를 지도에 고스란히 옮겨놓은 것이다. 책(柵)이란 토담 위에 통나무를 엮어 담장이나 성을 삼는다는 뜻글자로, 이 책성이 한·중 국경선인데 학문적으로나 역사적으로 이의를 제기할 여지가 없다. 청국행정법 병법란에 보면 공무(公務)로 책성의 통행문인 변문(邊門)을 나갈 때는 병부(兵部)가 발행하는 군부(軍符) 없이 나들 수 없다 했으니 책성이 국경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변문의 별칭이 시래문(矢來門)으로 화살이 날아든다는 뜻이니, 책성은 외적의 방어용이 아니라 사람의 내왕을 억제하고 국경을 나타내는 표지물에 불과함을 알 수 있다.

청나라 강희제(康熙帝) 때 편찬한 ‘고금도서집성(古今圖書集成)’ 직방전(職方典)에 실린 상세한 지방지도에 보면 책성은 신의주 대안인 단둥(丹東)에서 약 200리 북쪽에 있는 봉황성 변문에서 시작, 보도된 유럽 지도들처럼 압록강 두만강 유역에서 등거리로 동북쪽으로 뻗어 위원보(威遠堡) 변문에서 몽골 국경과 마주치고, 간도는 책성 남쪽 밖으로 그려져 있다. 책성이 국경인 증거로 부여 읍루 예맥 발해 등 고대한국 옛 유적들이 이 속에 있고, 고려문(高麗門) 고려위(高麗衛) 등 지명을 비롯, 17대를 집단 거주한 문가보(文哥堡)를 포함한 한국 역관촌들이 산재해 있을 뿐 아니라, 한국인이 농사를 지었던 답동(畓洞)이 있고 고려국(高麗菊) 고려압(高麗鴨) 등 한국생물이 자라고 있음을 보았다. 그 더욱 압록강의 크고 작은 모든 섬들은 그것이 북쪽 강가에 붙었더라도 모두 한국 영토로 돼 있다는 것이 강이 국경이 아니었음을 증명해 준다. 대중국문제에 약세인 당국자들에게 외치고 싶은 책성이다. 이규태 코너] 통나무 국경선<6510>
kyoutaelee@chosun.com
입력 : 2004.10.21 19:16 40' / 수정 : 2004.10.21 19:17 48'

 크릭하시면 확대됩니다.

위의 지도가 얼마나 도움이 될지는 알수 없지만 대략 비슷한 시대의 지도이기때문에 위치를 비교하자는 뜻으로 올려 본것입니다. 색칠한 부분은 설명과 관계가 없습니다. 거란시대의 지명은 명시대와는 약간 차이가 있습니다. 예를 들면, 요양=동경 심양=심주 개원=개주 함평=함주 등...


 

***아래 소개하는 기록은 명나라가 요동에 있던 고려의 영토를 침약하여 밀어내고 자기들의 군사근거지를 설치하던 생생한 기록들입니다.


/新校本明史/志/卷四十一 志第十七 地理二/山東/遼東都指揮使司

鐵嶺衛 洪武二十一年(1388)三月以古鐵嶺城置.二十六年四月遷於古?州之地,?今治也.西有遼河,南有汎河,又南有小?河,俱流入於遼河.又南有懿路城,洪武二十九年置懿路千戶所於此.又范河城在衛南,亦曰汎河城,正統四年置汎河千戶所於此.東南有奉集縣,?古鐵嶺城也,接高麗界,洪武初置縣,尋廢.又有咸平府,元直?遼東行省.至正二年正月降?縣.洪武初廢.南距都司二百四十里.
-------------

철령위  홍무21년(1388)3월 옛철령성설치.26년4월옛 언주땅으로 옮김. 직 현재치소로. 서쪽으로 요하,남쪽으로 범하,또 남쪽으로 소청하,이들 물들은 모두 요하로 들어간다. 또 남쪽에 있는 의로성은 홍무29년 설치하였는데 의로천호소자리다. 또 범하성은 위의 남쪽에 있고, 역시 범하성이라한다. 정통4년 범하천호소를 이곳에 두었다. 동남쪽에 봉집현이 있는데 즉 옛 철령성이다.고려계와 접한다. 홍무초에 현을 설치했다 폐하였다.또 함평부가 있고, 원직속의 요동행성이 있다.지정2년정월 항복하여 현을 만들었다 홍무초에 폐하였다.남쪽으로 도사는 240리 떨어져있다.

[鐵嶺?. 箏司城北二百四十里. 古有鐵嶺城, 在[金]?治, 東西五百里接?麗
界. 洪武二十一年置?於彼. 二十六年, 徙今治, ?遼金時?州故地也.[明一統志卷二十五]

1461년(명, 명종 16)에 완성된(요동지보다 한 세기가 빠르지요) 위 명일통지의 문장은 요동지의 문장과 거의 같습니다. 요양을 (요동)도사성이라 표기하고 동남5백리를, 동서5백리라 잘못 표기한 것을 제외하면 같지요. 그런데 중대한 차이가 있습니다. 요동지의 [今] 대신 [金]이 쓰여져 있습니다. 해석하면 ‘옛 철령성은 금위(金衛) 치소에 있다’입니다.

이 ‘위(衛)’라는 것은 명나라 시기의 군사조직 명칭입니다. 따라서 ‘금위(金衛)’는 명대의 ‘금주위(金州衛)’를 가리키는 것이 거의 확실해보입니다. 예컨대

金復海蓋四?, 本不置於同時(洪武七年置金州?, 九年置海州蓋州二?, 十四年置復州?).[遼紀?]

처럼 요양성을 중심으로 그 인근에 대표적인 네 개의 위들이 있었는데, 금주위는 그 중의 하나였습니다. 그런데 이 금주위도 옛 치소(舊金州)가 있고, 후대의 치소가 있어 장소가 달랐습니다. 만,]

 

 책성이 요동의 중심지를 한바퀴 돌아 동쪽 바닷가까지 도착한 종점입니다. 이 책성에서 봉황성과 흥경동쪽으로 여진족을 막기 위해서 성을 구축할 나라는 고려밖에는 없습니다. 명나라는 조선을 한반도로 밀어내고 기왕에 있던 성을 보수하여 사용하였던 흔적들이 있습니다.

 

이 지도에는 한반도 의주에서 시작되었다는 고려천리장성을 볼수 없습니다. 이 지도는 조선에서 작성한 군사지도입니다.

 

[국내통설] 고려의 천리장성

고려 덕종 때인 1033년부터 평장사(平章事) 유소(柳韶)가 여진의 침입을 막기 위하여 쌓은 장성이다. 고려는 개국 초기부터 북평의 거란·여진족의 침입에 대비하여 장성을 쌓으려 하였는데, 이 계획이 실행되기는 1033년(덕종 2)부터였다. 이때 고려요나라의 세 차례 침입을 모두 막아낸 뒤 요나라와 화친하게 된다. 고려 조정은 요나라의 재침과 여진족의 침략을 막을 목적으로 축성하게 된다.

 

천리장성의 규모는 매우 컸던 것으로서 서쪽의 압록강 어귀로부터 동쪽으로 의주 근처인 위원(威遠)·흥화(興化)·정주(靜州)·영해(寧海)·정융(定戎)을 비롯한 오늘날의 평안남북도인 운주(雲州 : 운산)·안수(安水 : 개천)·청색(淸塞 : 희주)·영원(寧遠)·맹주(孟州 : 효산)·삭주(朔州) 등 성(城)을 거쳐 영흥 지방인 요덕(耀德)·정변(靜邊)·화주(和州) 성에 이르러 정평 해안인 도련포(함경남도 정평군의 광호(廣湖). 광포(廣浦)라고도 부른다.)까지 뻗어, 길이가 천여 리(里), 높이와 폭이 각각 25자(尺)의 석축이었다.

 

이는 한국 역사상 가장 큰 규모의 성으로서 여기에 동원된 인원은 막대하였다. 이 천리장성은 1033년경 단기간에 이루어진 것은 아니고, 덕종 이전에 대대로 북방에 쌓은 여러 성책을 연결하고 보축(補築)한 것으로, 그 완성 시기는 1044년(정종(靖宗) 10)경의 일이었다. 그렇지만 덕종 때 유소(柳韶)가 축조(築造)의 대부분을 끝마쳐 장성의 윤곽이 형성된 것만은 사실이다.

 

유소는 그 공으로 1034년(덕종 3) 3월에 추충척경공신(推忠拓境功臣)의 호를 받았다. 이 장성의 축조는 거란에게 큰 충격을 주어 항의를 받았으나, 고려에선 이에 적의가 없음을 밝힌 일도 있었다. 이 장성은 그 뒤에도 오랫동안 고려의 북방 방어선으로 이용되었으며, 그 유적은 지금도 의주(義州) 등 여러 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이와같은 《고려사》내용은 세종대 이후 일부가 왜곡된것으로 조선왕조실록에서 밝혀졌다.그내용중에는 일부 지명도 있지만 성의 길이가 수천리에 달한다는 내용과 성의 끝에서 끝까지 가려면 약 3개월이 걸린다는 내용이 누락된것이다.이러한 가짜 고려장성은 조선 세종때까지도 없었기에 만약 의주에서 경원까지 성을 쌓는다면 북방의 국경이 안전할것이라는 우의정의 건의를 볼 수 있다.


 

 

 지명에서 창주. 연주. 덕주. 맹주는 산동반도에서 화주는 요동에서 정주는 중산에서 용주.철주.통주.곽주.귀주.삭주는 요동에서 옮겨왔습니다.

 

통설에 의한 고려천리장성의 지도입니다. 출전[엔싸이버 백과] 이 지도에 보이는 장성의 위치가 언제까지 국경노릇을 하였는지 아니면 몇년동안이나 하였는지 대답을 듣기를 원합니다.

 

보시다시피 한반도의 북쪽 국경선은 압록강의 넓은부분만을 조금 띄어두고 거의 100프로를 여진과 경계로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콧구멍같은 틈바구니도 지키지를 못하고 거란군이 고려땅으로 수시로 넘어왔다고 하니 이게 수긍이 가는 얘기입니까? 더구나 손바닥같은 좁은 지역에 강동육주라는 고을을 두고 성을 쌓았다고 하면서 그곳들은 마치 거란군의 노리터가 되었다는 말이지요. 고려군이 그렇게도 약했던 군대이었던가요. 중국의 자치통감은 고려를 건국한 왕건당시를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扶餘城卽 唐高麗之扶餘城也. 時高麗王王建有國 限混同江而守之 混同江之西不能有也 故扶餘城 屬渤海國 混同江卽鴨綠水>

<부여성은 즉 당나라때 고려의 부여성이다. 고려왕 왕건이 나라를 이르켰을때 혼동강을 경계로하여 지켰으나 혼동강의 서쪽은 진출하지 못하였다.옛 부여성은 발해국에 속했고, 혼동강은 즉 압록수다.>

***이때 발해의 부여성이란 개원 서쪽의 황용부에 있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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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17.10.16 15:42

    첫댓글 완전히 역사 공부를 하게 되는것 같네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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