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 고려천리장성은 요동에 있었다.
험준한 산을 막고있는 중국의 장성
우리나라 고려에도 천리장성이 있었다고 배웠습니다. 그런데 그 천리장성의 모습은 흔적조차 본 기억이 없습니다. 듣기로는 석축으로서 높이와 폭을 각각 25자씩의 크기로 하고 압록강 서쪽강구에서 동쪽으로 의주를 거쳐서 함경남도 화주를 거쳐 도련포 해안(맨아래 사진 참조)까지 쌓았다는 말인데 고려초기에 시작하여 대충 1033년에 초벌을 완성하고 그후 완공은 1044년에야 이루었다고 하였으니 기간으로는 약 100여년이 넘게 걸렸군요. 그렇지만 한반도의 국경은 최소한도 압록강과 두만강을 경계로 하는 국경선이 상식인데 장성은 함경북도와 평안북도의 북부를 내버리고 그 안쪽으로 쌓았다는 얘기입니다.집터의 마당에다 다시 담을 친 셈이지요. 아무튼 그렇게 배웠으니 토를 달지말고 잠자코 있으라면 할말은 없지만 명색이 고등교육을 받었다고 하는 백성으로서는 궁금증이 너무나 많은것입니다. 요즘은 국민들에게도 알 권리라는것이 주어져 있습니다. 하기에 이글은 어쩌면 대답해줄 의무가 있는 정부 기관에 질문하는 글이기도 합니다. 아래 글은 고려와 명나라가 국경문제로 실랑이를 하는 내용인데 국경선의 내용이 너무도 엉뚱합니다. 한번 보시지요.명나라 태조가 홍무20년(1387) 고려왕에게 보낸 국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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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자미상 출전[coo2] 노란색 부분은 고구려천리장성 녹색부분은 고려천리장성
광령의 의주에서 갈라져 나간 성의 위치에 려성(驪城)이라고 표기된 중국도(中國圖) 출전:대영도서관소장(향고도)
이 지도에서 중국의 만리장성은 산해관에서 바다로 들어갔습니다.이렇게 바다로 들어갔던 갈석산 부분이 바다로 윤몰되었지요.(수경주 석 참조)
정종 원년(1035) 5월 래원(來遠) 성사절 안서가 흥화(興化)진에 보낸 통첩, 6월 영덕진서 거란 래원성에 보낸 통첩에 고려가 돌성을 쌓아 대로를 막으며 목책을 세워 군사행동을 저지한다고 등의 기록이 보이며 이해 9월 "서북지방 송령(松嶺)이동에 장성을 구축하여 변방 적들의 침입을 방어하는 요충으로 삼다"라는 기록이 있는 바 송령은 요심의 서쪽에 있던 의주,의주(懿州,義州)지역의 장성상에 지금도 송령문이라는 지명이 있고 중국 고금지명사전에서도 이 지역에 송령이 있음을 기록하고 있다.
(壬申) 命戶部咨高麗王, 以?嶺北東西之地舊屬開元, 其土著軍民女直??高麗人等遼東統之. ?嶺之南舊屬高麗, 人民悉聽本國管屬. 疆境旣正, 各安其守, 不得有所侵越.[明太祖實錄卷187 洪武二十年 十二月 壬申]
그렇다면 당시 국경선을 가르는 장성의 위치에 대해서 알아보는것이 순서일듯 합니다. 아시다시피 요동에도 분명히 만리장성과는 형태가 다른 성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성의 주인공들이 누구냐 하는것을 알고 싶은것입니다.행여나 그 성들의 주인이 설마 고려였을까? 듣기로는 고구려도 천리장성을 쌓았다고 하지만 실체를 확인하기가 어렵고 부분 부분만 나타나니 장성이라고 하기가 그렇습니다. 그리고 금(金)장성이라고 하는 부분성들도 몇군데 있긴 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성은 연다라 쌓여진 장설을 말합니다.그렇다면 중국의 축성 역사부터 알아보는것이 상식일듯합니다. 장진근님의 글을 빌려 중국장성의 역사를 알아봅니다.
중국 장성에 대한 이해 가운데 세 나라(燕 · 趙 · 秦)가 흉노와 경계를 접하고 있었다. 그 후 조나라의 장군 이목(李牧)이 건재한 동안은 흉노는 조나라의 변경을 침입하지 못했다. 진나라가 6국을 멸망시키고, 시황제는 몽념(蒙恬)에게 명하여 10만의 군사를 거느리고 북쪽의 흉노를 치도록 했다. 쌓은 것이요, 그 다음 진나라에서 임조(臨?)에서 요동(遼東)에 이르기까지 1만여 리에 달하는 장성을 쌓았던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여기서 또 기억해야 할 것은 동호(東胡)의 정체이다. 이 말에서 영어 퉁그스(Tongus)란 말의 어원이 비롯된 것으로 우리 예맥족으로 보는 것이 대다수 중국학자들의 견해이다. 유명한 사마중달 사마의(司馬懿)의 손자 사마염(司馬炎)이 세운 나라였다.《진서 · 당빈전》에는 선비의 침입에 대비해서 종전에 진(秦)나라가 쌓았던 성을 온성(溫城)에서부터 갈석(碣石)까지 복구했다는 기록이 발견되었다. 중국에는 사전의 왕국이라고 말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벼라별 사전이 다 있다. 그 가운데 《장성사전(長城辭典)》이란 것도 있다. 유주(幽州)에 재직할 때, 북방의 소수민족의 남침을 방지하기 위해 일찌기 옛 경토를 개척하여 천여 리의 땅을 물리치고, 온성(溫城)으로부터 갈석(碣石)까지 산과 계속을 이어 3천여 리에 걸쳐 진장성(秦長城) 요새를 복구하고, 군사를 나누어 주둔을 시켰는데 봉수가 끊임없이 이어져 있었다."라고 하였다. 이 장성에 관해서는 서진 왕조가 단명으로 끝난 왕조일 뿐만 아니라, 전쟁으로 인해 파괴되었으므로 그 유지가 지금까지 남아 있는 것이 없기 때문에 여태껏 의문으로 남아 있다.
어떤 전문가는 이 장성에는 겨우 봉화대(烽火臺) 보장(堡障: 보루)을 죽 이어서 만든 보잘것 없는 공사였을 것으로 여긴다라고 하였으며, 어떤 전문가는 문제의 장성은 지금의 하북성 승덕(承德)에서 요녕성 조양(朝陽) 지역에 이르기까지 위치했으며 진 · 한(秦漢) 시기의 장성의 옛 노선을 따라 증수한 것이라고 하였다. 결국 어떻든간에 진일보한 고증이 필요하다고 하였다 " (임암 주편, 《장성사전(長城辭典)》, 문회출판사, 11쪽) 인용 끝]
<<진서>><당빈전>에서 하북성 승덕에서 요녕성 조양까지 1000여리의 장성을 보수하였다는 기록을 참고하면 위 지도에서 보이는 고려천리장성의 깃점이 시작되는 곳 까지로 볼수 있다. 여기서 부터는 성의 형태가 책성으로 바뀌고 또 고려천리장성은 의주로 부터 시작되었다는 기록을 적용할수 있는것이다.<<명일통지>>는 압록강을 의주강으로 기록한바 있다.<지도:요계관방도 홍대용의 연행도에서>
정종 원년(1035) 5월 래원(來遠) 성사절 안서가 흥화(興化)진에 보낸 통첩, 6월 영덕진서 거란 래원성에 보낸 통첩에 고려가 돌성을 쌓아 대로를 막으며 목책을 세워 군사행동을 저지한다고 등의 기록이 보이며 이해 9월 "서북지방 송령(松嶺)이동에 장성을 구축하여 변방 적들의 침입을 방어하는 요충으로 삼다"라는 기록이 있는 바 송령은 요심의 서쪽에 있던 의주,의주(懿州,義州)지역의 장성상에 지금도 송령문이라는 지명이 있고 중국 고금지명사전에서도 이 지역에 송령이 있음을 기록하고 있다.
*고려의 통나무국경선* 간도 땅의 옛 귀속을 두고 벌어진 논란의 소용돌이 속에 한국 땅으로 그려진 18~19세기 유럽지도 69점이 수집돼 그중 몇 점이 공개되었다. 지금은 압록강과 두만강을 국경선으로 삼고 있지만 이 지도들에는 200여리 안으로 그 국경선이 북상하고 있다. 고구려 유적이 집중돼 있는 지안(集安)이나 부여(夫餘) 예(濊) 맥(貊) 읍루(?婁) 발해(渤海) 등 고대 유지를 비롯, 조선족 자치지역인 간도는 이 북상된 국경선 안에 들어있는 한국영토로 돼 있다. 이 유럽의 지도들이 어디다 근거를 두고 국경선을 북상시켰을까. 장장 2000여리나 연해 있던 책성(柵城) 자리를 지도에 고스란히 옮겨놓은 것이다. 책(柵)이란 토담 위에 통나무를 엮어 담장이나 성을 삼는다는 뜻글자로, 이 책성이 한·중 국경선인데 학문적으로나 역사적으로 이의를 제기할 여지가 없다. 청국행정법 병법란에 보면 공무(公務)로 책성의 통행문인 변문(邊門)을 나갈 때는 병부(兵部)가 발행하는 군부(軍符) 없이 나들 수 없다 했으니 책성이 국경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변문의 별칭이 시래문(矢來門)으로 화살이 날아든다는 뜻이니, 책성은 외적의 방어용이 아니라 사람의 내왕을 억제하고 국경을 나타내는 표지물에 불과함을 알 수 있다.
청나라 강희제(康熙帝) 때 편찬한 ‘고금도서집성(古今圖書集成)’ 직방전(職方典)에 실린 상세한 지방지도에 보면 책성은 신의주 대안인 단둥(丹東)에서 약 200리 북쪽에 있는 봉황성 변문에서 시작, 보도된 유럽 지도들처럼 압록강 두만강 유역에서 등거리로 동북쪽으로 뻗어 위원보(威遠堡) 변문에서 몽골 국경과 마주치고, 간도는 책성 남쪽 밖으로 그려져 있다. 책성이 국경인 증거로 부여 읍루 예맥 발해 등 고대한국 옛 유적들이 이 속에 있고, 고려문(高麗門) 고려위(高麗衛) 등 지명을 비롯, 17대를 집단 거주한 문가보(文哥堡)를 포함한 한국 역관촌들이 산재해 있을 뿐 아니라, 한국인이 농사를 지었던 답동(畓洞)이 있고 고려국(高麗菊) 고려압(高麗鴨) 등 한국생물이 자라고 있음을 보았다. 그 더욱 압록강의 크고 작은 모든 섬들은 그것이 북쪽 강가에 붙었더라도 모두 한국 영토로 돼 있다는 것이 강이 국경이 아니었음을 증명해 준다. 대중국문제에 약세인 당국자들에게 외치고 싶은 책성이다. 이규태 코너] 통나무 국경선<6510> 크릭하시면 확대됩니다.
책성이 요동의 중심지를 한바퀴 돌아 동쪽 바닷가까지 도착한 종점입니다. 이 책성에서 봉황성과 흥경동쪽으로 여진족을 막기 위해서 성을 구축할 나라는 고려밖에는 없습니다. 명나라는 조선을 한반도로 밀어내고 기왕에 있던 성을 보수하여 사용하였던 흔적들이 있습니다.
이 지도에는 한반도 의주에서 시작되었다는 고려천리장성을 볼수 없습니다. 이 지도는 조선에서 작성한 군사지도입니다.
[국내통설] 고려의 천리장성 고려 덕종 때인 1033년부터 평장사(平章事) 유소(柳韶)가 여진의 침입을 막기 위하여 쌓은 장성이다. 고려는 개국 초기부터 북평의 거란·여진족의 침입에 대비하여 장성을 쌓으려 하였는데, 이 계획이 실행되기는 1033년(덕종 2)부터였다. 이때 고려가 요나라의 세 차례 침입을 모두 막아낸 뒤 요나라와 화친하게 된다. 고려 조정은 요나라의 재침과 여진족의 침략을 막을 목적으로 축성하게 된다.
천리장성의 규모는 매우 컸던 것으로서 서쪽의 압록강 어귀로부터 동쪽으로 의주 근처인 위원(威遠)·흥화(興化)·정주(靜州)·영해(寧海)·정융(定戎)을 비롯한 오늘날의 평안남북도인 운주(雲州 : 운산)·안수(安水 : 개천)·청색(淸塞 : 희주)·영원(寧遠)·맹주(孟州 : 효산)·삭주(朔州) 등 성(城)을 거쳐 영흥 지방인 요덕(耀德)·정변(靜邊)·화주(和州) 성에 이르러 정평 해안인 도련포(함경남도 정평군의 광호(廣湖). 광포(廣浦)라고도 부른다.)까지 뻗어, 길이가 천여 리(里), 높이와 폭이 각각 25자(尺)의 석축이었다.
이는 한국 역사상 가장 큰 규모의 성으로서 여기에 동원된 인원은 막대하였다. 이 천리장성은 1033년경 단기간에 이루어진 것은 아니고, 덕종 이전에 대대로 북방에 쌓은 여러 성책을 연결하고 보축(補築)한 것으로, 그 완성 시기는 1044년(정종(靖宗) 10)경의 일이었다. 그렇지만 덕종 때 유소(柳韶)가 축조(築造)의 대부분을 끝마쳐 장성의 윤곽이 형성된 것만은 사실이다.
유소는 그 공으로 1034년(덕종 3) 3월에 추충척경공신(推忠拓境功臣)의 호를 받았다. 이 장성의 축조는 거란에게 큰 충격을 주어 항의를 받았으나, 고려에선 이에 적의가 없음을 밝힌 일도 있었다. 이 장성은 그 뒤에도 오랫동안 고려의 북방 방어선으로 이용되었으며, 그 유적은 지금도 의주(義州) 등 여러 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이와같은 《고려사》내용은 세종대 이후 일부가 왜곡된것으로 조선왕조실록에서 밝혀졌다.그내용중에는 일부 지명도 있지만 성의 길이가 수천리에 달한다는 내용과 성의 끝에서 끝까지 가려면 약 3개월이 걸린다는 내용이 누락된것이다.이러한 가짜 고려장성은 조선 세종때까지도 없었기에 만약 의주에서 경원까지 성을 쌓는다면 북방의 국경이 안전할것이라는 우의정의 건의를 볼 수 있다.
지명에서 창주. 연주. 덕주. 맹주는 산동반도에서 화주는 요동에서 정주는 중산에서 용주.철주.통주.곽주.귀주.삭주는 요동에서 옮겨왔습니다.
통설에 의한 고려천리장성의 지도입니다. 출전[엔싸이버 백과] 이 지도에 보이는 장성의 위치가 언제까지 국경노릇을 하였는지 아니면 몇년동안이나 하였는지 대답을 듣기를 원합니다.
보시다시피 한반도의 북쪽 국경선은 압록강의 넓은부분만을 조금 띄어두고 거의 100프로를 여진과 경계로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콧구멍같은 틈바구니도 지키지를 못하고 거란군이 고려땅으로 수시로 넘어왔다고 하니 이게 수긍이 가는 얘기입니까? 더구나 손바닥같은 좁은 지역에 강동육주라는 고을을 두고 성을 쌓았다고 하면서 그곳들은 마치 거란군의 노리터가 되었다는 말이지요. 고려군이 그렇게도 약했던 군대이었던가요. 중국의 자치통감은 고려를 건국한 왕건당시를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扶餘城卽 唐高麗之扶餘城也. 時高麗王王建有國 限混同江而守之 混同江之西不能有也 故扶餘城 屬渤海國 混同江卽鴨綠水> <부여성은 즉 당나라때 고려의 부여성이다. 고려왕 왕건이 나라를 이르켰을때 혼동강을 경계로하여 지켰으나 혼동강의 서쪽은 진출하지 못하였다.옛 부여성은 발해국에 속했고, 혼동강은 즉 압록수다.> ***이때 발해의 부여성이란 개원 서쪽의 황용부에 있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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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品 石 齋 원문보기 글쓴이: 구산(九山)
첫댓글 완전히 역사 공부를 하게 되는것 같네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