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GM ON / OFF
- 살수대첩 -
(을지)문덕의 군사가 나아가 그들을 사면으로 공격하니, (우문)술 등이 한편으로 싸우며 한편으로는 쫓겨 갔다. [가을 7월]살수에 이르러 군사가 반을 건너자, 문덕의 군사가 나아가 그들의 후군을 공격하여 우둔위장군 신세웅을 죽였다.
『수서(隋書)』 「양제기(煬帝記)」 下
이렇게 되자, 모든 군사들이 한꺼번에 허물어져 걷잡을 수가 없었다. 9군 장졸이 달려서 패주하였는데, 하루낮 밤 사이에 압록수에 이르니 그들은 4백 50리를 간 셈이다. 처음 요수를 건너 올 때 그들은 모두 30만 5천 명이었는데, 요동성에 돌아갔을 때는 다만 2천7백 명뿐이었다.
『수서(隋書)』 「우문술전(宇文述傳)」
우리가 알던대로 수나라 주력군이 전멸당한 사실을 그대로 기록
물론 김부식의 『삼국사기』 「을지문덕전」 도 이 기록을 토대로 쓰여진 거
- 귀주대첩 -
(개태-開泰 : 요 6대 황제인 성종의 연호) 7년(1018년)에 재차 고려(高麗)를 정벌 하였는데, 개경(開京)에 이르러 적(敵)이 분궤(奔潰 : 무너져 달아남)하니, 종병(縱兵 : 병을 마음대로 할 수 있게 풀어줌)하여 부략(俘掠 : 사로잡고 약탈함)하고는 돌아왔다. 다(茶)와 타(陀)의 두 하천(河川)을 건넜는데, 적(敵)이 협사(夾射 : 좌우를 끼고 화살을 쏨)하니, 소배압(蕭排押)이 갑장(甲仗 : 갑옷과 병장기)을 버리고 도주(逃走)하였는데, 좌(坐 : 대질, 심문)하여 면관(免官 : 면직)하였다.
『요사(遼史)』 「소배압열전(蕭排押列傳)」
개태(開泰 : 요 6대 황제 성종의 연호) 7년(1018년) 12월, 이달에 소배압(蕭排押) 등이 다(茶)와 타(陀) 두 하(河)에서 고려(高麗)와 더불어 싸웠는데, 요군(遼軍)이 실리(失利 : 손해를 봄)하여, 천운(天雲)과 우피실(右皮室)의 2군(軍) 중에 몰익(沒溺/물에 빠져 익사함)한 자(者)가 많았으며, 요련장상온(遙輦帳詳穩) 아과달(阿果達)과 객성사(客省使) 작고(酌古) 및 발해상온(渤海詳穩) 고청명(高清明)과 천운군(天雲軍) 상온(詳穩) 해리(海里) 등이 모두 죽었다.
『요사(遼史)』 「성종본기(聖宗本記)」 7
요나라 지휘 편제상의 주요 피해인원들이 기록
이후 패전의 책임으로 소배압이 받은 징계사실도 등장
- 한산대첩 -
7월 7일, 카라시마(거제도) 앞쪽으로 배를 밀어 나아가니 마침 해협 안에 대선(판옥선) 4-5척이 있는 것을 보고 조총을 쏘며 반각 정도 싸움을 걸었다. 대선이 슬금슬금 뒤로 빼는 것을 빈틈을 주지 않고 공격하여서 3리 정도 쫓아갔을 무렵이었다. 대선이 막 해협을 지나 넓은 곳으로 나아갔다. 한번에 키를 돌려 잡고는 큰 배를 양쪽으로 벌려세워 아군의 배를 둘러쌌다. 이는 유인하여 무찌르는 계책임이 분명했다. 아군의 배에서 사상자가 많이 나왔다. 적은 큰 배, 아군은 작은 배이므로 당해내기 힘들어서 원래 온 해협으로 물러나려고 했으나 적의 대선이 밀어붙여 와서는 아군 배에 호로쿠비야(주화, 질려포통 등의 화약탄으로 추측)를 던져넣어 곧 배가 불타올랐다. (와키자카) 야스하루의 가신인 와키자카 사헤에, 와타나베 시치에몬을 시작으로 이름 있는 자 여럿이 전사했다.
상황이 이렇게 되니 야스하루는 노 수가 많은 쾌속선으로 갈아탔다. 기동이 자유로우며 선체가 무사하다고는 하나 갑옷에 화살을 맞는 등 구사일생의 위기에 빠졌다. 적선이 쫓아오며 계속 불화살을 쏘아대니 야스하루의 고속선은 마침내 김해로 철수했다. 적의 손아귀에서 간신히 살아남은 부하 200여 명은 육지에서 50정(약 5.5km) 떨어진 작은 섬에 잠시 배를 대고 상륙했는데, 대선이 쫓아와 아군 배를 불살라버렸다. 마나베 사마노조라는 자는 당일 그 배의 선장이었는데, 그 배가 불타버린 이상 목숨을 건져봐야 별 수가 없고, 군중에서 다시 아군을 마주할 면목이 없다고 생각하여 할복해 죽고 말았다.
카라시마의 작은 섬에 올라와 있던 나카츠카사(와키자카 야스하루의 관명)와 그 가신들은 13일간 솔잎과 미역을 먹으며 불탄 배의 널빤지로 뗏목을 만들어 육지로 올라가려 하였다. 대선이 물러나는 틈을 잘 보고 있었는데, 카라시마 밖에 일본의 병선이 몰려오고 있다는 것을 듣고 (판옥선이)갑자기 물러났다. 그 틈에 5-6명씩 뗏목에 타고 그 섬으로부터 육지로 오던 중 대선이 다시 키를 돌려 와 바닷가에서 (아군)10여 명을 사살했다. 남은 자는 200여명 남짓이었다. 겨우 호랑이 아가리를 벗어나 목숨을 건져 김해로 돌아왔다.
『와키자카기(脇坂記)』
당시 일본 수군측 지휘관들의 피해 유형들을 발견
굴욕적으로 생을 연명한 와키자카 야스하루의 기록도 발견
- 명량해전 -
당신(누굴 말하는 건지는 모르겠음)께서 (일본의)본진으로 돌아가실 때, 그 조금 전에 제포(薺浦-경상우수영)에 가셨습니다. '수영(해남에 위치했던 전라 우수영을 말하는 듯)' 이라는 곳에 조선 대장선 13척이 있었습니다. 큰 강의 여울목에서 바닷물의 간만이 빠른 해역인데, 약간 바닷물의 흐름이 약해진 구역에 13척의 배가 있었습니다. 그것을 보고 꼭 쳐부숴야겠다고 수군(舟手)들과 상의하여 싸우게 된 것입니다. 큰 배로는 지금의 좁은 해역을 배를 저어나갈 수 없으므로 모두 세키부네(關船)를 마련한 후에 싸움을 시작했던 것입니다.
먼저 싸움을 시작한 수군들은 적선을 만나, 많은 사람들이 부상당했습니다. 그중에서 '쿠루시마 이즈모노카미(来嶋出雲守 - 구루지마 미치후사 來島出雲)' 님은 전사하셨습니다. 그 밖에도 수군들이 잡혀갔습니다. 부하(가로 家老 - 다이묘의 중신)들도 과반수는 잡혀가거나 전사하든가 했습니다. 그곳에서 '모리민부타이후(毛利民部大輔 - 모리 다카마사 毛利高政)' 님이 세키부네를 타고 적선을 공격했습니다. 적선으로 뛰어들어가기 위해 십자 모양의 낫을 걸었습니다만, 적선으로부터 활과 총탄이 격렬하게 퍼부었므로 배를 떠나 바다로 들어가 위험하게 되었는데('전투중에 정신없이 바다에 빠져버렸는데' 를 좋게 변명해준 거),
'도도 손하치로(藤堂孫八郎)' 와 '도도 다카요시(藤堂勘解由)' 두 사람의 배가 다가와서 적선들을 밀어제친 후 구해드렸습니다. 아침 8시부터 저녁 6시까지 싸웠습니다. 항구의 모습이나 적선에 대해 많이 알고 있었으므로, 바람의 방향도 잘 판단하여서 그 좁은 해역을 벗어나 돛을 끌어 당겨 달렸습니다. 그 때문에 적도 어쩔 수 없이 추격할 수 없었습니다. '이츠미 님(和泉樣 - 도도 다카토라 藤堂高虎)' 도 팔 두 곳을 부상당했습니다.
『고산공실록(高山公実録)』
전선과 병력의 손실 뿐만이 아닌, 주요 지휘관들의 피해 상황도 상세히 기록
보고서는 올려야 해서 대략 어떻게든 이겼다고 자위하는데, 실상은 대판 깨졌다는 내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