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모르지만, 어쨌든 얼굴까지 착하게 되어 버렸어. 세상에는 불가사의한 일도 있는 것이다. 어쨌든, 나는 사장으로서 열심히 하기로 결정됐어. 그리고 회장의 행복을 위해서도 노력을 다하지 않으면... 내가 하기로 결정했다” 라고 야마구치는 굳은 결심을 하는 것이었다. 이렇게 미타무라상사의 2대 사장이 된 야마구치는, 회장의 협력을 얻어 신뢰받는 대중의 금융을 했다. 회사소유의 재산은 그대로 하고 사람들을 위한 일에 사용하기로 되었다.
부활
그날 저녁 키요시는 게이코에게 처음으로 자신의 비밀을 모두 털어 놓는 것이었다. “게이코 우리 엄마는 중학 3학년 때 돌아가셨지만, 이려화라고 하는 대만 사람이야. 아버지는 미타무라 지로라고 하고 군마현 출신이었어. 나의 호적은 일본인과 중국인의 사이에서 만들어진 혼혈아가 되어. 그 때문에 너의 호적을 올리지 않았다. 너에게 말하면 싫어할 것이라고 생각해서 평생 숨겨왔다. 그러나 지금은 너의 의지에 입적을 맡기고 싶다. 그러나 지금까지 귀신같은 남자로서 무자비한 인간이었기 때문에 매우 고생을 시킨 것을 사죄해. 용서받고 싶어. 게이코, 나는 다시 태어난 것이다.” 게이코는 울고 있다. 키요시도 지난 잘못을 뉘우치며 울고 있다. “당신 지금까지의 일을 잊읍시다. 나는 당신을 믿고 있어요. 인간의 태생따위는 아무래도 괜찮지요. 나는 지금의 당신을 사랑하고 있어요. 앞으로도 당신 열심히 살아갑시다. 힘을 잃지 말고 기운을 내서,,네?, 당신.” 키요시의 팔 안으로 게이코는 뛰어들어 갔다. 지금까지의 혹독했던 슬픈 매일(每日)도, 완전히 맑은 마음으로 진실을 이야기해준 키요시를 가련하게 생각하여, 훌륭하다고도 생각되었기 때문에다. 키요시도, 자신을 속이고 허세를 부리는 생활을 해온 것에서 해방되어, 마음을 괴롭혀 왔던 쓸데없는 생각을 버리고, 이것으로 좋다. 이대로가 좋다고 생각했다. 평화로운 평온의 순간이었다. 비록 호적에 올리지 않았어도, 지금의 키요시와 게이코는 부부의 슬픔과 괴로움에 싸워 이긴 인간이었다. 그리고 2사람은 애정에 싸여서 흐뭇한 가정을 만들어 갔다.
야마구치 사장은 회장의 의지에 의해 지금까지 빌려주었던 채무자를 전화나 편지로 한 사람 한 사람 회사로 불렀다. 그리고 금리를 내려서 일반 종목 이외의 어음, 6분인 어음은 3분으로 종래의 계약서를 파기하고, 신규로 낮은 금리의 증서로 교체하고 있었다. “사장님 어찌된 일입니까? 지금까지의 강인함을 버린다는 것은 무슨 심사인가요?” “회장님의 의지에 따라 모든 분이 안심하고 이용할 수 있도록 고려한 것입니다.” “헤~! 이것은 정말 도움이 됩니다. 고맙습니다.” 라고 항상 단기차입을 해온 시계가게 주인은, 기뻐서 인사를 하는 것이었다. 키요시는 생사의 경계에 있었을 때, 체험한 또 한 사람의 선한 자신이, 자신의 과거 모습을 보고 있었던 때와 똑같은 기분으로, 기뻐해 주는 채무자의 모습에 지금까지 미안했었다, 라고 하는 기분으로 인사를 하고 싱글벙글 웃고 있다.
왜 남의 기쁨을 볼 수 없었던 것일까? 그것은 키요시의 독선적으로, 남을 믿지않는 어린 자신의 마음의 틀을 만들어 버렸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차별이라고 하는 환경, 가난하다고 하는 환경에 의해 스스로를 차별하고, 스스로의 마음까지 가난하게 하고 말았기 때문에, 작은 자신의 틀 속에서 나올 수 없었던 것이리라. 키요시는 반성했다. 인간은 모두 평등하고, 돈의 많음이나 지위의 높고 낮음, 가문에 의해 차이가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의 자기보존의 사고방식이, 자기를 타인과 대조해서 만들어낸 부조화한 생활의 지혜가 낳은 것이다. 라고 하는 결론에 도달하는 것이었다. 종업원으로부터도 신뢰받지 않은 인생. 집사람으로부터도 믿음을 못받는 자신. 그것은 모두 키요시 자신이 만들어내고 있었던 마음과 행위에 있었다. 키요시는 냉정하게 생각했을 때, 자신이 자신을 무섭게 생각하는 것이었다. 꿈같은 세계, 그러나 현실에서 자신이 체험했던 세계였다. 그 자신이 체험해 왔던 과거의 영상이 현상화되어, 그 행위를 제3자인 또 한 사람의 자신이 보고 있다. 그때 현상화되어 있는 자신은, 그곳에서는 또 한사람의 마음의 자신과의 반대방향으로 움직여버린다. 그것은 왜일까? 키요시는 그 수수께끼를 풀지 않으면 안되었다. 선(善)의 마음과 악(惡)의 마음. 그것은 누구에게나 동거하고 있는 것일까. 노한 마음, 어리석음, 만족하는 것을 잊어버린 욕망. 이것들의 원인이 자기보존의 악의 마음의 온상이 아닐까 하고 키요시는 생각하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노한 마음은 자신에게 사정이 나쁜 경우, 타인으로부터 험담을 듣거나 제3자를 통해서 듣거나, 자신이 불이익한 입장에 놓였을 때에 생기기 때문이다. 그러한 노여움의 원인을, 제3자의 입장에 서서 추궁하면 반드시 해명될 것이다. 키요시는 제3자의 입장으로서, 지나간 자신의 드라마를 보았을 때처럼, 스스로 노여움의 씨앗을 잔뜩 뿌리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노여움은 타인에게 상처를 줄 뿐만 아니라, 자신의 마음속에도 큰 상처를 입게 되기 때문이다. 외부의 힘이 반작용을 만드는 것처럼... 어리석음도 마찬가지다. 자기보존으로부터 생겨난다. 그것은 마음속에서 완전 연소할 수 없기 때문에, 항상 연기가 자욱하고, 남에게 자신을 잘 보이고 싶다는 표현이 어리석음을 만든다. 자신을 속이고 있는 것이 될 것이다. 불평을 할 원인을 만들지 않는 것이다. 타인으로부터 받은 것의 부족분을 불평한다면, 그 자리에서 자기를 둘러대지 않고, 확실하게 자기에게 거짓이 없는 표현을 했다면, 어리석음의 씨앗을 뿌리지않고도 끝나는 것이다. 욕망도 마찬가지다. 자기본위로 타인의 것을 생각하지 않은 때부터 욕망의 씨앗이 뿌려져 버린다. 욕망에는 끝이 없는 것이다. 거기에는 만족할 줄 알고 스스로의 마음에 제동을 거는 외에는 방법이 없을 것이다. 거기에는 하루하루를 힘껏 산다. 올바른 일을 통해서... 살게 해주고 있는 대자연의 자비에 감사하는 마음이, 보은이라고 하는 행위에 연결되었을 때, 감사의 마음이 결실을 맺는다. 일방통행의 감사만으로는 감사의 의미도 퇴색되고 말 것이다. 노여운 마음속에도, 진심으로 상대의 행복을 생각한 경우는 진심으로 노여운 것이 없을 것이다. 자애는 상대를 바르게 인도하기 위한 질책과 격려에 있고, 스스로의 마음속에 미움도 없고, 일체의 걸림도 만들지 않는 것이다. 키요시는 올바른 마음의 본연의 자세, 손님이 기뻐하는 모습을 보면서, 여러 가지로 인생의 의의를 생각하고 있었다. 지금 심경은 평화로, 마음속은 편안하게 있다. 초조했던 매일을 왜 보냈던가, 자신이 자신에게 질려버렸다. 원인불명인 채로 쓰러져 10일 가까운 입원 생활로 인생관을 바꿔버린 키요시는, 이 입원은, 신으로부터 은혜라고 감사하며, 그리고 앞으로 그 감사에 보답하는 행위를 실천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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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거룩하신 부처님께 귀의 합니다
거룩하신 가르침에 귀의 합니다
거룩하신 스님들께 귀의 합니다
어서오세요
환영합니다.
원공법계 제 중생
자타일시 성불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