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기도
전능하시고 자애로우신 하느님,
성자 그리스도의 부활을 경축하는 저희가
참으로 부활의 기쁨을 누리게 하소서.
제1독서
<주 예수님을 믿으시오. 그러면 그대와 그대의 집안이 구원을 받을 것이오.>
▥ 사도행전의 말씀입니다.16,22-34
그 무렵 필리피의 22 군중이 합세하여 바오로와 실라스를 공격하자,
행정관들은 그 두 사람의 옷을 찢어 벗기고 매로 치라고 지시하였다.
23 그렇게 매질을 많이 하게 한 뒤 그들을 감옥에 가두고,
간수에게 단단히 지키라고 명령하였다.
24 이러한 명령을 받은 간수는 그들을 가장 깊은 감방에 가두고
그들의 발에 차꼬를 채웠다.
25 자정 무렵에 바오로와 실라스는 하느님께 찬미가를 부르며 기도하고,
다른 수인들은 거기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26 그런데 갑자기 큰 지진이 일어나 감옥의 기초가 뒤흔들렸다.
그리고 즉시 문들이 모두 열리고 사슬이 다 풀렸다.
27 잠에서 깨어난 간수는 감옥 문들이 열려 있는 것을 보고
칼을 빼어 자결하려고 하였다.
수인들이 달아났으려니 생각하였던 것이다.
28 그때에 바오로가 큰 소리로,
“자신을 해치지 마시오. 우리가 다 여기에 있소.” 하고 말하였다.
29 그러자 간수가 횃불을 달라고 하여 안으로 뛰어 들어가
무서워 떨면서 바오로와 실라스 앞에 엎드렸다.
30 그리고 그들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
“두 분 선생님, 제가 구원을 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고 물었다.
31 그들이 대답하였다. “주 예수님을 믿으시오.
그러면 그대와 그대의 집안이 구원을 받을 것이오.”
32 그리고 간수와 그 집의 모든 사람에게 주님의 말씀을 들려주었다.
33 간수는 그날 밤 그 시간에 그들을 데리고 가서 상처를 씻어 주고,
그 자리에서 그와 온 가족이 세례를 받았다.
34 이어서 그들을 자기 집 안으로 데려다가 음식을 대접하고,
하느님을 믿게 된 것을 온 집안과 더불어 기뻐하였다.
복음
<내가 떠나지 않으면 보호자께서 너희에게 오지 않으신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16,5-11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5 “이제 나는 나를 보내신 분께 간다.
그런데도 ‘어디로 가십니까?’ 하고 묻는 사람이 너희 가운데 아무도 없다.
6 오히려 내가 이 말을 하였기 때문에 너희 마음에 근심이 가득 찼다.
7 그러나 너희에게 진실을 말하는데, 내가 떠나는 것이 너희에게 이롭다.
내가 떠나지 않으면 보호자께서 너희에게 오지 않으신다.
그러나 내가 가면 그분을 너희에게 보내겠다.
8 보호자께서 오시면
죄와 의로움과 심판에 관한 세상의 그릇된 생각을 밝히실 것이다.
9 그들이 죄에 관하여 잘못 생각하는 것은 나를 믿지 않기 때문이고,
10 그들이 의로움에 관하여 잘못 생각하는 것은
내가 아버지께 가고 너희가 더 이상 나를 보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며,
11 그들이 심판에 관하여 잘못 생각하는 것은
이 세상의 우두머리가 이미 심판을 받았기 때문이다.”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예수 승천은 아버지의 역할을 명확히 드러낸다
저는 본당에서 모든 일을 신자들이 알아서 하기를 바라고 큰 방향만 제시합니다. 그러면 신자분들은 매우 어려워합니다. 그동안 일일이 지시만 받아오던 삶에 익숙해져 있던 것입니다. 그래서 불만을 터뜨리기도 합니다. 가장 편하지만, 동시에 가장 힘들기도 하다는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지시해 달라고. 그러면 제가 하는 노력의 효과가 반감됩니다. 저는 예수님께서 교회에 모든 것을 맡기고 하늘로 올라가신 이유가 반드시 있다고 확신합니다.
‘금쪽같은 내 새끼’에 보면 무서운 아버지들이 많이 등장합니다. 무서운 아버지들 밑에 자라는 아이들은 주눅이 들어있습니다. 엄마를 그리워해서인지 아이가 엄마 젖처럼 부드러운 것만 찾아서 소의 등골을 날로 먹는 것은 좋아하지만, 밥은 먹지 못합니다. 혹은 돈은 벌어주지만, 아이들의 삶에 지나치게 간섭하는 아버지도 나옵니다. 아이들은 숨을 못 쉽니다.
왜 아버지가 아이들에게 지나치게 간섭하면 아이들이 엇나갈까요? 아버지의 관심은 엄마의 관심보다 아이들에게 견딜 수 없는 짐이 됩니다. 아이들은 아버지의 돈으로 산다는 것을 압니다. 그러나 그 돈을 버는 이가 직접적으로 아이들에게 말할 때 그 무게는 엄마가 하는 말보다 훨씬 큽니다. 아이들도 엄마가 자신에게 주는 밥이 아버지의 돈으로 차린 것임을 압니다. 그래서 엄마가 잔소리해도 어차피 같은 아버지의 돈으로 사는 사람으로 여기니 감당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아버지가 하는 말은 그 무게가 사뭇 다른 것입니다.
아버지의 가르침과 재정적 도움을 어머니는 자신의 것으로 녹여서 자녀들에게 줍니다. 그러면 자녀들이 그것으로 성장합니다. 반면 어머니의 역할을 배제한 채 아버지가 자녀들에게 직접 관여하면 자녀들은 성장을 멈춥니다. 이 때문에 예수님께서 오늘 복음에서 하늘로 올라가시는 게 더 낫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예수님은 어머니의 역할을 하였습니다. 어머니는 땅에 살며 자녀를 키웁니다.
반면 아버지는 하늘에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자녀들 마음이 평안합니다. 아버지는 밖에서 돈을 벌 때 자녀들에게 평화를 주고 어머니는 땅에서 자녀들과 머물 때 평화를 줍니다. 평화를 빼앗기면 자녀는 자라지 않습니다. 그래서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너희에게 진실을 말하는데, 내가 떠나는 것이 너희에게 이롭다. 내가 떠나지 않으면 보호자께서 너희에게 오지 않으신다. 그러나 내가 가면 그분을 너희에게 보내겠다.”
예수님은 이제 교회라는 어머니에게 우리를 맡기고 하늘로 올라가 아버지의 역할을 하려고 하시는 것입니다.
서양에는 이런 속담이 있다고 합니다.
“아버지가 자녀에게 해 줄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은 사라져주는 것이다.”
히틀러는 무서운 아버지 밑에서 세상에서 가장 포악한 존재가 되었습니다. 몸은 자랐지만, 사랑의 마음은 자라지 못했던 것입니다. 빈센트 반 고흐의 훌륭한 작품들이 나오게 되었을 때는 아버지의 죽음 이후였습니다. 엄한 목사 아버지 밑에서 자란 고흐는 언제나 주눅이 들어있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가 하늘나라로 떠나가자 숨어있던 예술 본능이 깨어났습니다. 자라기 시작한 것입니다.
아버지는 하늘에, 어머니는 땅에 머물며 자녀를 키워야 하는 이 신비를 가정이나 성당에서 적용하지 못하면 우리가 키우려는 자녀의 열매는 낭패를 보게 되어 있습니다. 하늘로 승천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면서 아버지의 역할을 되새겨보면 좋겠습니다.
빠다킹신부와 새벽을 열며
사람들이 책 추천을 해 달라고 해서 요즘 인상 깊게 읽은 책 한 권을 권했습니다. 그런데 책의 두께에 깜짝 놀랍니다. 그리고 이렇게 두꺼운 책은 도저히 읽지 못한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사실 이분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거의 모든 분이 두꺼운 책 읽기를 꺼리십니다. 그래서일까요? 성경책도 두꺼운 책의 분류에 들어가는지 성경을 도저히 못 읽는 책으로 생각하시는 분도 계십니다. 하긴 얼마 전 통계청에서 발표한 2023년 우리나라 평균 독서량은 7.2 권이라고 하더군요. 1년간 단 한 권도 읽지 않은 성인도 50%에 달한다고 하니, 두꺼운 책을 읽기란 두려울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인터넷과 소셜 미디어 시대인지라 긴 문장에 대해서는 난독증이 걸린 것처럼 그냥 지나치고 맙니다. 또한 해시 태그만을 쫓고, 짧은 글과 짧은 영상으로 지식을 대신하고 있습니다. 이런 지식이 진실일 가능성은 줄어듭니다. 진실은 복잡한 경우가 많고, 따라서 복잡하고 길게 설명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이런 설명 자체를 거부하는 요즘입니다. 그래서 가짜 뉴스가 판을 치고, 말도 안 되는 흑백 논리로 서로 적으로 여기는 것이 아닐까요?
하버트 조지 웰시의 ‘눈먼 자들의 나라’에서 눈뜬 청년이 눈먼 부족에게 ‘본다’라는 개념을 설명합니다. 하지만 눈먼 부족은 눈뜬 청년을 조롱하고 배척하지요. 자기들의 생각으로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이런 세상은 아닐까요? 예수님도 사람들의 알지 않으려는 마음 때문에 십자가에 못 박히셨지요. 이처럼 나는 옳고 너는 틀리다는 그 생각이 오히려 큰 잘못으로 나아갈 수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이제 하늘에 다시 오를 시간이 가까워졌습니다. 그래서 “이제 나는 나를 보내신 분께 간다.”라고 하시지요. 이 말씀에 제자들은 모두 근심이 가득 찹니다. 아마 십자가 죽음을 통한 이별의 아픔을 떠올렸는지 모릅니다. 예수님 없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기들의 무능함을 걱정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모든 말씀과 행적은 모두 우리를 위함 때문이었습니다.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떠나는 것이 너희에게 이롭다. 내가 떠나지 않으면 보호자께서 너희에게 오지 않으신다. 그러나 내가 가면 그분을 너희에게 보내겠다.”(요한 16,7)
예수님을 사랑한다는 것이 단순히 “사랑합니다.”라고 고백하는 것에 그쳐서는 안 됩니다. 그보다 어떤 상황에서도 가장 좋은 것을 우리에게 주신다는 믿음을 가지고서 주님의 뜻을 따르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때 주님과 늘 함께할 수 있습니다.
오늘의 명언: 평범할 때 하는 백 번 감사보다, 힘들 때 한 번의 감사가 더 값지다(성 아빌라 데레사).
사진설명: 내가 떠나지 않으면 보호자께서 너희에게 오지 않으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