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문 (외 2편)
채호기
어떤 문장은 출입구 없이
창문만 있는 좁은 방.
그 창문에서 그대가 내다보는 것을
오후의 햇빛이 지켜보았지.
그녀가 문장을 읽을 때
그대는 유리창에 어른거리네.
창문을 통해 그녀를 바라보는
그대는 사라지는 그녀의 현기증.
어떤 문장은 창문만 있는
실내가 없는 반지.
아무도 보지 않아도 그대는
그녀의 손가락에 매달리지.
창문을 봉해버린 집,
더 이상 그녀가 읽지 않아도
그대는 보이지 않게 홀로 검은
출입구 없는 침묵의 돌.
질 수밖에 없는 레슬링
흔적일 뿐인 글자에서 그는 흘러나온다.
사실, 그가 흘러나온 게 아니라, 처음에
얼룩이 번진다, 심장 덩어리의 붉은 얼룩?
절단면이 뭉툭한 푸줏간의 선홍색 고깃자루?
노란 알전구와 빛의 원추형 입방체? 그 이전의
무엇, 알 수 없는, 그녀를 붙잡는 번짐, 얼룩,
흔들림, 진동…… 이게 다 우연일까? 그녀는
스위치가 있다는 것도, 작동한다는 것도, 켤 줄도
알고 있다. 스위치를 올리면 글자에서 무언가
흘러나오리란 것도 예상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녀 생각에, 글자에서 그가 흘러나온 것은
아무래도 우연이다. 그가 그녀 생각 속의 그와
너무나 달라 그를 알아볼 수 없었고 오물거리는
글자들이 그녀를 사로잡았지만, 그것들―찢어질
듯 팽팽히 잡아당긴 살빛 껍질, 팔 다리 머리
몸통을 마구 구긴 살덩이, 내장이 뒤엉킨 쥐어짠
감정걸레, 축축한 그림자를 늘어뜨린 축 늘어진
불알—속에서 그녀가 알아볼 수 있는 것은
아무래도 우연이 아니다. 그것들에 미세하게
그녀의 흔적이 들어 있다. 그녀 생각 속에,
검게 지운 흔적처럼 지우고 뭉갠, 그의 감정과
행동 들이 그의 기괴함의 정체. 매일 밤
그녀가 치르는 악몽은 그녀가 질 수밖에 없는
그와의 레슬링, 빠져나갈 수 없는 링 안에서
그녀는 붉은 살덩이에 짓눌리고, 일그러진
불안에 사지가 졸린다. 매번 그녀의 사타구니에서
그를 알아보고 화들짝 놀라는 그녀 생각의
짓뭉갠 검은 얼룩에서 그는 재빨리 흘러나와
글자의 검은 흔적 틈새로 얼른 숨어든다. 마치
그다음에 그녀가 읽을 글자들이 그것이란 걸
미리 알고 있기나 한 것처럼.
모자
모자라는 단어가 있다.
단어에서 그녀가, 물컹, 생겼다.
모자 쓴 그녀가 저기 산길을 간다.
책 속에 모자가 그녀를 가리킨다.
따라잡을 수 없다. 그녀가 앞서 간다.
발밑에 뾰족한 돌이 발바닥을 지그시 누른다.
그녀의 허리 밑 허벅지 위에 두 개의 돌
지금 그녀를 보고 있는 이 시간처럼 단단하다.
돌이란 단어를 들추면 그녀가 도둑게처럼 달아난다.
돌을 밟으면 몸속에 그녀의 말이 울려
터질 듯 팽팽해지며 그득해진다.
그녀의 목소리, 녹색의 새로 피어나는 잎
그늘 밑을 걸어간다. 그녀의 그늘에 젖어
처음 생긴 그녀를 알고 싶다.
가쁜 호흡이 그녀에게 말한다.
말없이 땀이 솟고 손안에 잡혀 두근거리는
새처럼 심장이 그녀의 등에 닿는다.
돌아본다. 보라색 엉겅퀴꽃이
회녹색 줄기 위에서 차분하다.
그녀가 말한다. 공동묘지 사이
한 무리 금잔화 위로 바람이 지나간다.
가볍게 손을 흔드는 노란색들
노랑이란 단어가 동공을 물들인다.
노란 현기증이 몸에서 빠져나와
산 위를 활공한다.
공기를 저어 나아가는 노란 해
그녀의 금빛 얼굴이 물 위에 뜨고
앞서가는 그녀의 뒷모습 위에
재빠르게 노을의 커튼이 떨어진다.
이름을 알 수 없는 열매를
부리에 머금어본다.
돌이 그녀를 누르고 있다.
흘러가는 그 문장 위에서.
—시집『레슬링 질 수밖에 없는』(2014)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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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호기 / 1957년 대구 출생. 1988년《창작과비평》여름호로 등단. 시집『지독한 사랑』『슬픈 게이』『밤의 공중전화』『수련』『손가락이 뜨겁다』『레슬링 질 수밖에 없는』. 현재 서울예술대학 문예창작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