홈스테드 파업 사건
홈스테드는 피츠버그의 남동쪽 끝부분과 마주보고 있으며, 앤드루 카네기의 철강기업체가 성장하면서 발전했다. 현재 먼홀 자치시에 있는 제강소는 1892년 7월 유명한 홈스테드 파업이 발생했던 곳이다.
1881년에 회사에 노동조합이 설립되고, 노동자들은 극렬한 시위로 회사에 대항하자 이런 일련의 사건을 경험한 회사측에서는 회사는 경영진이 아닌 노동자에 의해서 운영된다는 식으로 생각하면서, 노동운동에 대한 반감도 아주 높아 있었다.
1892년 경이면 노동조합에 가입한 노동자 수가 많아지면서 노동조합의 파워도 강해졌다.
이에 두려움을 느낀 회사의 경영자 헨리 클레이 프린(1849-1919)은 비숙련노동자(임금이 싸다)를 대량 고용하였다. 임금을 22%나 삭감했다. (화시에서는 임금 지출을 줄이려 꼼수를 부린 것이다.) 숙련 노동자는 가만히 앉아서 임금이 끾일 뿐더라 자칫하여 회사에서 쫓겨날 판이었다.
기존 노동자가 거세게 반발했다.
파업이 발발하자 헨리 클레이 프린은 핀커톤스 국립탐정소가 고용한 회사 경비대(핑커튼 요원이며, 악명높은 파업 진압대다.)를 출동시켜 시를 장악한 파업자들과 격렬한 싸움을 벌였다. 주의 재향군인도 이 분쟁을 진압하기 위하여 투입되었다. 핑커튼 요원이 바지선을 타고 강을 건넜다. 노동자들은 강에 기름을 붓고 불을 질렀다. 부상자도 많았다. 노동자 부인들은 몽둥이를 들고 나와서 핑커튼 요인을 내리쳤다 칼로 찌르기도 했다. 이 사건은 언론에서 대서특필을 함으로 노동자들이 많은 점수를 잃었다고 한다.
이 과정에 핑커튼 요원이 3명 죽고, 파업 노동자 10명이 사망했다.
노동자가 아니고 아나키스트인 버크만이란 자가 총으로 저격한 사건도 노동자의 정당성을 훼손하는 사건이 되었다. 주지사의 요청으로 주 방위군8000명을 투입하여 노동 저항을 진압함으로, 여기서는 50년 동안 노동저항이 일어나지 않았다.
제강소들은 현재 인근 지역사회에 분산되어 있으며, 제강소용 중기, 연장, 시멘트 블럭, 벽돌 등의 제조업이 시의 경제를 주도하고 있다.
이 사건을 다룬 책을 낸 새린은(홈스테드, 미국 철강도시의 영광과 비극)
“이 사건은 제철산업의 노조를 무릎 꿇게 하였으며, 그후 50년 동안 노조설립을 막고, 전국적으로 고용자의 지위를 강화시켜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