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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4월 18일 부활 제3주일
제1독서 : 사도 3,13-15.17-19
제2독서 : 1요한 2,1-5ㄱ
복 음 : 루카 24,35-48
그 무렵 예수님의 제자들은
35 길에서 겪은 일과 빵을 떼실 때에 그분을 알아보게 된 일을 이야기해 주었다.
36 그들이 이러한 이야기를 하고 있을 때 예수님께서 그들 가운데에 서시어,
“평화가 너희와 함께!” 하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37 그들은 너무나 무섭고 두려워 유령을 보는 줄로 생각하였다.
38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왜 놀라느냐? 어찌하여 너희 마음에 여러 가지 의혹이 이느냐?
39 내 손과 내 발을 보아라. 바로 나다. 나를 만져 보아라.
유령은 살과 뼈가 없지만, 나는 너희도 보다시피 살과 뼈가 있다.”
40 이렇게 말씀하시고 나서 그들에게 손과 발을 보여 주셨다.
41 그들은 너무 기쁜 나머지 아직도 믿지 못하고 놀라워하는데,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여기에 먹을 것이 좀 있느냐?” 하고 물으셨다.
42 그들이 구운 물고기 한 토막을 드리자,
43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받아 그들 앞에서 잡수셨다.
44 그리고 그들에게 이르셨다. “내가 전에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말한 것처럼,
나에 관하여 모세의 율법과 예언서와 시편에 기록된 모든 것이 다 이루어져야 한다.”
45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마음을 여시어 성경을 깨닫게 해 주셨다.
46 이어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성경에 기록된 대로,
그리스도는 고난을 겪고 사흘 만에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야 한다.
47 그리고 예루살렘에서부터 시작하여,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가 그의 이름으로 모든 민족들에게 선포되어야 한다.
48 너희는 이 일의 증인이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제 방에는 운동기구들이 많습니다.
헬스장 가는 것도 일이라는 생각에 혼자 할 수 있는 바벨이나 덤벨
그리고 그 밖의 운동기구들을 사들이다 보니 꽤 많아졌습니다.
사실 허리 다친 적이 있어서 운동을 평소에 하지 않으면 통증이 옵니다.
그래서 일상생활을 잘하기 위해 억지로라도 운동하고 있습니다.
며칠 전, 새벽에 평소처럼 운동하다가 느낀 것이 하나 있습니다.
한 가지 운동을 하고 잠깐 쉬는 시간이 있습니다. 저의 경우 30~60초 정도 쉽니다.
그런데 힘든 운동을 마치고 하는 이 쉬는 시간은 꿀맛이면서 너무 짧게 느껴지고,
가벼운 운동을 마친 뒤에 하는 쉬는 시간은 오히려 길게만 느껴진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도 그렇지 않을까요?
고통과 시련이라는 힘든 시간은 너무 길게만 느껴질 것입니다.
잠시의 즐거운 시간은 짧게 느껴지면서 고통과 시련의 크기가 너무 커 보입니다.
그러나 이를 통해 더 활기찬 우리의 삶을 만들게 됩니다.
또 한 가지는 운동을 오랫동안 쉬다가 하면 너무 힘들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매일 운동하면 적당히 힘들면서도 몸이 상쾌해집니다.
고통과 시련이 적당한 삶의 무게가 되기 위해서는 피해서는 안 됩니다.
매일 마주하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평화가 너희와 함께!”라고 말씀하시면서 나타나십니다.
십자가 죽음이라는 고통의 순간 뒤에 제자들은 어둠의 시간을 보내게 됩니다.
이때 제자들에게 필요한 것은 평화였습니다.
고통과 시련에만 머물러서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상태가 아닌,
평화를 가지고 세상에 주님의 기쁜 소식을 전해야만 했던 것입니다.
이 평화를 얻었기에, 제자들이 겪은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이 커다란 은총이 됩니다.
그리고 제자들도 십자가를 짊어지고 기쁘게 주님을 따를 수 있게 됩니다.
이런 제자들에게 주님께서는 사명을 전해주십니다.
바로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가 주님의 이름으로 모든 민족에게 선포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는 이스라엘의 하느님만이 아닌, 모든 민족의 하느님이라는 것을,
그리고 모든 민족에 대한 복음 선포입니다.
주님으로부터 받은 이 사명을 언제까지 지키고 따라야 할까요?
우리는 그날과 그때를 알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멈추지 않고 해야 합니다.
고통과 시련이 찾아와도 주님께서 주신 평화를 간직하면서
세상에 기쁜 소식을 전할 수 있어야 합니다.
흘러넘치는 옹달샘
류해욱 요셉 신부
부활 제 3주. 부활 축하의 인사를 드리며 부활의 기쁨을 함께 나눕니다.
우리는 오늘 엠마오로 가던 두 사람이 길에서 당한 일과 빵을 떼어 주실 때에야
비로소 그분이 예수님이라는 것을 알아보았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을 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시는 대목을 복음으로 듣습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먼저 “평화가 있기를!”하고 말씀하시면서 평화를 빌어주십니다.
당시 ‘샬롬!’이라는 말은 인사말이기도 했지만,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이제 그분만이 주실 수 있는 참 평화를 주시는 것입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참 평화를 빌어 주셨듯이
우리 모두에게도 참 평화를 빌어 주십니다.
그 평화를 깨뜨리며 전쟁을 일으키는 사람들에게 얼마나 아픈 마음으로
다시 평화를 빌어주고 계실까를 상상하면서
우리가 그 평화를 지키도록 마음을 모아야 할 것입니다.
부활의 이미지는 마치 산 속에서 고요히 흘러내리는 옹달샘과 같습니다.
고요하게 우리에게 다가와서 서서히 기쁨으로 가득 채우는
놀라운 사건이 바로 그분의 부활입니다.
부활의 이미지를 옹달샘에 비유한다면,
그 샘에서 처음으로 흘러나오는 물은 바로 평화입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많은 말씀을 하시지 않고 짧은 몇 마디의 말씀으로
사랑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촉촉이 적셔주시면서 위로를 주시는데,
늘 첫 마디는 ‘평화가 있기를!’이라는 축복입니다.
그분은 참으로 우리가 참 평화 안에 머물기를 원하셨습니다.
다음으로 부활하신 주님이 하시는 일은
당신이 사랑하시는 제자들에게 당신의 부활을 확신시켜 주시는 일이었습니다.
제자들은 너무나 놀랍고 무서워서 유령을 보는 줄로 알았습니다. 당연한 일이었지요.
그들에게 예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 손과 발을 보아라. 바로 나다. 나를 만져보아라.
유령은 살과 뼈가 없지만, 나는 너희도 보다시피 살과 뼈가 있다.”
손수 당신의 손과 발을 보여주시면서 당신이 참으로 부활하셨다는 것을 확신시켜 주십니다.
이제 그들은 사도로 파견하기에 앞서 가장 필요한 일이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제자에서 사도가 되는 유일한 조건이 있다면, 바로 당신의 부활을 믿는 그 믿음이지요.
당신의 부활에 대한 확신.
그 확신을 지니고 부활하신 당신을 선포하는 것. 그것이 바로 교회의 시작인 것입니다.
그것을 위해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손수 손과 발을 보여주십니다.
그뿐만 아니라 그들이 보는 앞에서 구운 생선 한 토막을 잡수시기까지 하십니다.
부활하신 그분은 이제 시공을 초월하신 분.
배고픔도 있을 리 없겠지만, 제자들의 확신을 위해서 자상함을 보이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서를 깨닫게 하시려고 그들의 마음을 열어주시면서
“너희가 이 모든 일의 증인이다”고 말씀하십니다.
처음에 너무나 놀라고 무서워 떨던 제자들이
부활을 확신시켜 주시는 예수님의 그 자상함에 서서히 마음이 열리고
기쁨으로 차오르는 모습을 그리며 여러분 모두의 마음 안에도 기쁨이 가득하여
나가서 그분의 부활을 외치지 않고는 견딜 수 없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마음을 여시어 성경을 깨닫게 해 주셨습니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오늘은 부활 제3주일입니다.
오늘 <말씀전례>는 우리로 하여금 부활의 신비에 더 깊이 참여하도록 이끌어줍니다.
<제1독서>에서는 사도 베드로가 성전 문 곁에 있는 앉은뱅이를 치유한 다음,
솔로몬 주랑에서, 예수님의 죽음으로 예수님의 영광이 드러나셨음을 선포합니다.
곧 베드로는 앉은뱅이의 치유를 예수님 부활의 의미를 일깨워주는 징표로 들려줍니다,
<제2독서>에서는 사도 요한이 온 세상의 속죄 제물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느님 앞에서 우리를 위해 변호해주신 분이심을 선포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살아계신 하느님께 대한 올바른 깨달음으로
변화된 삶, 부활의 삶으로 살아갈 것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부활의 의미를 깨우치시고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주간 첫날, 엠마오로 가던 길에서 예수님을 만난 두 제자들이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보니, 열한 제자와 동료들이 모여
“주님께서 되살아나시어 시몬에게 나타나셨다.”(루카 24,34)고 말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엠마오로 가다가 되돌아온 두 제자들도
그들이 길에서 겪은 일과 빵을 떼실 때 그분을 알아보게 된 일을 이야기 하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들 가운데 서시며 당신의 평화를 주십니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루카 24,36). 그러나 제자들은
“너무나 무섭고 두려워 유령을 보는 줄로 생각하였습니다.”
마치 바다를 걸으신 예수님을 보고서 그랬던 것처럼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왜 놀라느냐? 어찌하여 너희 마음에 여러 가지 의혹이 이느냐?
내 손과 내 발을 보아라. 바로 나다. 나를 만져보아라.”(루카 24,38-39)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증명하시기 위해, 손발의 상처를 보여주시며 만져보라고 하십니다.
우리도 제자들처럼, 보고도 믿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당신께서는 보지 않고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고 말씀하셨지만,
사실, 우리는 보고도 믿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마치, 히브리인들이 모세를 따라 홍해를 건너왔건만 기적을 보지 못해서가 아니라,
목이 뻣뻣하여 믿지 못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우리 역시 매일의 삶에서 벌어지는 기적들을,
특히 성체성사를 매일 만지고 먹으면서도 그럴 때가 많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단지 보고 만져보라고만 하시는 것이 아니라,
물고기를 잡수시면서 당신이 유령이 아니라 살아계심을 증명해 보여주시기까지 하십니다.
‘음식을 먹는다.’는 것은 단지 유령이 아니라는 것을 증거 하시는 것만이 아니라,
제자들과 여전히 친교를 이루고 함께 사신다는 사실을 드러내줍니다.
이처럼, 보여주고, 만지게 하고, 함께 먹으며 친교를 나누시는 주님의 사랑으로
제자들은 차차 눈이 열려갑니다. 그러나 꼭 필요한 한 가지가 남았습니다.
진정 필요한 한 가지, 그것은 바로 “말씀”이었습니다.
믿음은 기적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말씀으로부터 오는 까닭입니다.
마침내, “성경말씀”을 들려주심으로 제자들의 마음을 활짝 열어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마음을 여시어 성경을 깨닫게 해 주셨습니다.”(마태 24,45)
그렇습니다. 눈도 귀도 마음을 열어주는 통로입니다.
그러니, 당신의 영으로 하여 그 통로를 열고 마음을 열어야 할 일입니다.
우리의 외적인 눈이 열리고, 속눈이 열리고, 영의 눈이 열려야 할 일입니다.
비록 우리가 볼 수 있고 만질 수 있고 들을 수 있어도,
결코 마음을 열지 않고는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 부활의 신비입니다.
막달레나 마리아도 예수님이 서 계셨지만 그분이 예수님이신지를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들도 함께 걸어가면서도 그분이 예수님이심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부활의 신앙은 믿음의 눈을 떠야만 다다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마음이 열리면 곧 부활입니다. 눈이 열리어 하느님의 눈으로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 어디에서나 누구에게서나 부활의 신적 생명을 보는 일입니다.
그리하여 부활의 증인이 되는 일입니다.
이는 부활신앙이 기적을 보는 데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에 대한 “말씀”에서 비롯된다는 사실을 밝혀줍니다.
“말씀”이 우리의 마음을 믿음으로 여는 열쇠임을 말해줍니다.
그렇습니다. 오늘도 우리 주님께서는 “말씀”으로 우리의 마음을 열어주십니다.
우리의 마음을 열고, 부활의 생명을 부어주십니다. 그 지고한 사랑을 말입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부활의 증인으로서의 사명을 부여하시고자,
먼저 그들을 깨우치시고 사명을 주십니다.
“성경에 기록된 대로,
그리스도는 고난을 겪고 사흘 만에 죽은 이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야 한다.”(루카 24,46)
하오니, 주님!
제 뼈에 새겨지고 제 위장 속에 부어진 말씀이 심장 속에서 불처럼 타오르게 하소서.
제 마른 뼈가 살아나고, 제 마음이 뜨겁게 타오르게 하소서.
당신 무덤의 문을 열듯, 성소의 장막을 가르듯, 제 마음의 빗장을 벗기소서.
무지와 어리석음을 부수소서. 당신 빛으로 말씀을 깨닫게 하소서. 아멘.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그들의 마음을 여시어 성경을 깨닫게 해 주셨다.”(루카 24,45)
주님!
제 마음 속 깊은 곳을 여시어,
침묵의 언어로 새겨진 당신의 말씀을 깨닫게 하소서.
깨달은 바를 제 삶으로 인쇄하게 하소서.
제 삶이 당신의 말씀을 기록하는 잉크가 되게 하소서.
당신의 선과 질서, 당신의 뜻과 지혜,
형언할 수 없는 당신의 신비들을 온몸에 새기며 살아가는
당신의 복음서가 되게 하소서. 아멘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5대양 6대륙’이라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오래 전 지구는 하나의 대륙이었다고 합니다.
하나의 대륙은 두 가지 문제가 있었습니다. 하나는 대륙을 떠받치는 맨틀입니다.
맨틀은 하나의 대륙을 감당할 수 없었습니다. 대륙의 무게가 너무 컸기 때문입니다.
맨틀은 숨을 쉴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감당할 수 없는 화산이 폭발했습니다.
오랫동안 화산이 폭발하면서 지구는 몸살을 앓았습니다.
지구 생명의 대부분이 멸종하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다른 하나는 생명 다양성의 문제입니다.
하나의 대륙은 갑작스러운 재난을 피할 수 없었습니다.
생태계는 사슬처럼 묶여있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하나의 대륙에서는 재난이 발생하면 모든 생명체가 영향을 받기 마련입니다.
화산폭발과 소행성의 충돌 등의 원인으로 지구의 생명은 5번의 멸종을 겪어야 했습니다.
오랜 시간이 지나면서 하나의 대륙은 지금의 모습처럼 6대륙이 되었습니다.
6대륙이 되면서 바다의 생명도 풍성해졌습니다.
대륙마다 낮은 바다가 있었고, 낮은 바다는 생명이 살 수 있는 터전이 되었습니다.
지구의 맨틀도 무게를 감당할 수 있었습니다. 6개의 대륙으로 나뉘어졌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화산이 폭발하지만 하나의 대륙에서처럼
오랜 시간 대규모의 화산폭발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재난과 질병이 발생하여도 6개의 대륙으로 나뉘어져있기 때문에 멸종에 이르지는 않습니다.
우리는 느끼지 못하지만 대륙은 지금도 매년 조금씩 이동한다고 합니다.
지금은 높은 산이지만 예전에는 깊은 바다였던 곳도 있습니다.
사하라의 사막도 예전에는 초원지대였다고 합니다.
고고학과 지리학은 지구의 역사를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지구의 미래도 예측하고 있습니다.
하나의 대륙이 6개의 대륙으로 나눠진 것은 분열이 아니라 진화였습니다.
2000년 전예 예수님은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표징을 보여주셨고, 말씀에는 새로운 권위가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예수님께서 빵을 많게 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로마의 식민 통치로부터 이스라엘을 해방시켜 주시리라 믿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예수님께서 영광의 자리에 오르면 부와 권세를 얻을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가난하고 굶주린 이들에게 자유와 해방을 주시고,
묶인 이와 갇힌 이를 풀어 줄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라,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서 있다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더 이상 율법과 계명을 따르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사람들의 기대와는 다른 말씀을 하셨습니다.
사람의 아들은 반드시 십자가를 지고 가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첫째가 되고자 하는 사람은 꼴찌가 되라고 하셨습니다.
누가 왼뺨을 때리면 오른 뺨까지 내어주라고 하셨습니다.
누가 겉옷을 달라고 하면 속옷까지 주라고 하셨습니다.
벗을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에서는 세상에서 얻을 수 있는 부와 명예
그리고 성공과 권력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떠났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지키기도, 따르기도 어려웠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제자인 유다도 예수님을 배반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잡혀갔고, 제자들은 모두 도망쳤습니다.
베드로는 3번이나 예수님을 모른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비참하게 죽었고, 모든 것이 허무하게 끝난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런데 갈릴래아에서부터 이상한 소문이 시작되었습니다.
그 소문의 시작은 예수님을 따랐던 여인들에게서 나왔습니다.
여인들은 무덤을 찾았으나 예수님을 볼 수 없었습니다.
천사들이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로 가셨다고 하였습니다.
여인들은 이 소식을 두려움에 떨고 있던 제자들에게 전하였습니다.
엠마오로 가던 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빵을 나누었습니다. 제자들은 더 이상 두려움에 떨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죽음의 의미를 새롭게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죽음은 하느님께서 예언자들을 통해서 이미 알려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허망한 죽음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수치와 굴욕이 아니었습니다.
하느님의 의로움과 하느님의 뜻이 드러나는 사건이었습니다.
모든 것이 끝난 것 같았지만 새로운 시작이었습니다.
새로운 시작의 이름은 ‘부활’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절망이 아니라 새로운 희망이 되었습니다.
“성경에 기록된 대로,
그리스도는 고난을 겪고 사흘 만에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야 한다.
그리고 예루살렘에서부터 시작하여,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가 그의 이름으로 모든 민족들에게 선포되어야 한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루카 24, 36)
한상우 바오로 신부
평화는
하느님의 뜻이다.
부활은
평화에 동참하는
평화의 삶이다.
하느님의 힘은
참된
평화로 드러난다.
평화는
평화가 필요한
우리를 향해 있다.
평화는
십자가를 되찾아준다.
십자가의 수난으로
일구어낸 참사랑이다.
십자가 없는
평화는
가짜이다.
평화는
우리의 가면을
벗겨낸다.
십자가의 여정이
평화의 여정이다.
평화는
묶여있던
이 모든 것을
풀어준다.
평화는
하느님의 현존이다.
예수님
삶 자체가
살아있는 평화
그자체이다.
부활하신
예수님과 함께
평화를 이루는 삶이
참된 사랑의 삶이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함께하는 평화이다.
평화는
새로운 삶이다.
삶으로
함께하시는
주님이시다.
부활의 삶은
평화의 삶이다.
십자가와 부활을
하나로 이어주는
평화가
우리들 가운데 있다.
그 평화를
기쁘게 나눈다.
체벌을 하면 안 되는 이유: 자녀는 어차피 부모를 닮는다.
전삼용 요셉 신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나타나시어 당신 부활을 믿게 하십니다.
당신이 영적으로 부활하신 것이 아니라
육체적으로도 부활하셨음을 믿게 하시기 위해 생선토막을 먹어 보이십니다.
그리고 성경을 설명해주시며 구약의 모든 예언이 당신을 통해 성취되었음을 깨닫게 해 주십니다.
신약에서 완성되는 그리스도의 구원이 구약에 모두 예언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에서 이렇듯 당신의 삶은 ‘구약의 예언을 성취하는 삶’이었음을 밝히십니다.
“성경에 기록된 대로,
그리스도는 고난을 겪고 사흘 만에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야 한다.”
예수님은 구약의 말씀을 성취하기 위해 사셨습니다.
구약의 모든 내용이 다 이것이라 굳이 예를 들 필요는 없겠지만,
아담과 요나의 예언만 보아도 그렇습니다.
하느님은 아담의 옆구리에서 갈비뼈를 빼내어 하와를 만들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께서 당신의 옆구리에서 물과 피를 원하신다는 것을 아셨기에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그러나 아담이 깨어난 것처럼 당신도 부활하실 것임을 믿으셨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되었습니다.
요나 예언자가 니네베 사람들을 회개시키기 위해
물고기 뱃속에서 사흘 밤낮을 머물러야 했듯이
예수님께서도 세상을 회개시키기 위해 땅속에 그렇게 묻혀계셨어야 했습니다.
결말은 니네베의 회개였습니다.
니네베가 교회라고 본다면 교회는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회개한 이들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후에 “너희는 이 일의 증인이다.”라고 하신 것입니다.
지금 우리의 삶으로 나의 아버지가 누구인지 결정됩니다.
“예루살렘에서부터 시작하여,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가
그의 이름으로 모든 민족들에게 선포되어야 한다.”라고 하십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께서 구약을 성취하기 위해 사셨다면,
우리는 신약을 성취하려는 마음으로 살라는 뜻입니다.
구약은 예수님을 향한 아버지의 뜻이었고, 신약은 우리를 향한 그리스도의 뜻입니다.
매를 아끼면 자녀를 망친다는 말이 많은 나라의 속담으로 존재합니다.
하지만 매를 때린다는 말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매를 때리지 않으면 부모의 말을 듣지 않을 것이란 생각이 들어있습니다.
그러나 매를 때린다는 말은 “넌 나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야.”란 말이 들어있고,
그렇게 체벌을 많이 당한 아이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됩니다.
이렇게 자존감이 떨어지는 존재는 스스로 자신의 고귀함을 채우려 하는데 이것이 자존심입니다.
이 자존심은 돈이나 쾌락, 명예로 채워집니다.
유대인 600만 명,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사상자를 내게 만든 전쟁을 일으킨 히틀러는
어떤 부모에게서 자랐을까요?
우리가 잘 아는 대로 폭력을 행사하는 아버지와 순종적이기만 한 어머니에게서 자랐습니다.
아버지는 사회적인 면에, 어머니는 가정적인 면에 영향을 줍니다.
그러니 히틀러는 사회적으로는 폭력적으로, 대내적으로는 순종적으로 사람들을 만들려고 했습니다.
그렇게 열등감을 극복하려 한 것입니다.
체벌은 절대로 좋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어차피 자녀는 부모를 닮게 되어있기 때문입니다.
자녀가 부모를 닮으려는 것은 ‘본능’입니다. 생존본능입니다.
만약 전갈이 개구리나 인간을 닮으려 한다면 어떨까요?
어디에서나 소외당하게 될 것이고 그렇게 사랑을 받지 못하면 죽고 싶은 마음만 생길 것입니다.
따라서 무리 생활이 필요한 어떤 동물이건 자신의 부모를 찾아서 닮고자 하는 것은 생존본능입니다.
그러니 자녀가 말을 안 들으면 부모 자신이 모범을 보이는지 살펴야지 자녀 탓을 할 것은 아닙니다.
임영웅의 큰아버지는 2020년 3월 12일,
미스터 트롯 결승전에서 임영웅이 어떤 노래를 부를지 이미 알고 있었다고 합니다.
1995년 3월 12일이 아버지가 돌아가신 날이니
아버지의 애창곡인 ‘배신자’를 부를 것을 예상한 것입니다.
그런데 임영웅은 아버지가 5살 때 돌아가셔서 아버지의 기억이 전혀 없습니다.
그런데도 아버지의 애창곡을 부른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다 아버지가 옳았음을 증명하고 싶어 합니다. 이것은 본능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사춘기 전까지만 해당합니다.
그 이후에는 자녀들이 더는 부모를 닮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부모가 자신들의 참 창조자가 아님을 깨닫는 것입니다.
이때 기필코 하느님을 아버지로 믿게 해야 합니다.
요즘 박수홍 씨 이야기가 뉴스에 많이 올라옵니다.
그는 결혼할 여자를 어머니께 데려갔는데 어머니가 반대를 하여 여자와 헤어졌습니다.
지인들에 의하면 둘이 잘 맞았고 헤어질 이유가 전혀 없었다고 합니다.
아직 육적인 부모에게 독립하지 못한 자녀는
결국 자신에게도 가족에게도 커다란 슬픔을 안겨줄 수밖에 없습니다.
자녀에게 주님이 참 부모임을 믿게 하지 못한다면 부모에게도 결국 손해란 뜻입니다.
예수님도 ‘구약’, 즉 아버지의 말씀을 성취하며 사셨습니다.
우리가 성취하며 살아야 할 것은 그리스도의 삶, 즉 신약입니다.
이 모범을 찾지 못한 사람은 부모 없이 늑대에게 길러지는 것과 다름이 없습니다.
디팩 쵸프라는 자녀에게 어떤 예언을 주었을까요?
그는 아들 둘에게 사람들을 위해 어떤 좋은 일을 할 수 있을까만 생각하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다 잘 될 것이라 믿게 한 것입니다. 희생을 통한 사랑만이 죄를 없앱니다.
큰아들은 학교도 제대로 안 가고 사람들을 도와주었고,
작은아들은 꼴찌 하는 아이들에게 공부를 가르쳐 주며 학교에 다녔습니다.
그렇게 두 아들은 성장하여, 큰아들은 큰 사업가가 되었고
작은아들은 아버지처럼 하버드 대학교의 교수가 되었습니다.
자녀는 어쩔 수 없이 부모의 예언이 옳음을 증명하며 살기 때문에
항상 내가 이웃 사랑만이 유일한 진리로 가르치며 살고 있는지 살펴야 합니다.
유다인들은 ‘하느님 중심, 회당 중심, 랍비 중심’으로 삽니다.
자신들은 하느님 백성이기 때문에 하느님을 만날 수 있는 회당과 가까운 곳으로 이사하고
모든 대소사를 랍비와 상의합니다.
우리 부모들도 자녀들을 하느님 예언을 실현하는 사람으로 만들고 싶다면
하느님을 아버지라 인정하게 하고, 이를 위해 성당 가까운 곳으로 이사하며,
사제들에게 하느님 뜻을 먼저 묻는 신자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자녀는 부모를 통해 자연적으로
참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신앙으로 나아가게 될 것이고
분명 십자가를 거치겠지만 부활의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배반자요 불신자이며,
먼지요 티끌인 우리를 끝까지 존중하십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후 제자들은 ‘목구멍이 포도청’이라고, 우선 먹고살아야 했으므로,
다시금 전에 종사하던 생업으로 복귀했습니다.
한 바탕 꿈이었나, 생각하며 다시금 갈릴래아 호수에서 그물을 치기 시작했습니다.
다들 아무 말도 없이 묵묵히 고기를 잡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토록 강렬했던 예수님과의 만남,
그분과 동고동락했던 공생활 기간을 어찌 잊을 수 있었겠습니까?
작업이 끝나면 제자들은 호숫가에 둘러앉아 생선을 구워먹으며,
스승님에 대한 걱정, 죄책감, 송구함을 주제로 두런두런 대화를 이어갔을 것입니다.
그런 제자들에게 예수님의 부활 소식이 전해집니다.
엠마오 길에서 그분을 만난 두 제자는 신명이 난 나머지,
목소리를 높여 당시 상황을 생생하게 전하고 있었습니다.
다들 엠마오 제자들의 목격담에 귀를 기울이고 있던 그 때,
누군가가 슬그머니 제자들 등 뒤에 나타났습니다.
돌아보던 제자들을 소스라치게 놀랐습니다.
세상에! 부활하신 예수님이셨습니다.
온화한 표정의 예수님께서 평화의 인사를 건네십니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
두려워 떠는 제자들을 안심시키시며 더 가까이 다가서십니다.
의혹으로 가득한 제자들과 직접 접촉하십니다.
“내 손과 내 발을 보아라. 바로 나다. 나를 만져 보아라.”
그래도 믿지 못하는 제자들을 위해 이렇게 청하십니다.
“여기에 먹을 것이 좀 있느냐?”
제자들이 그분께 큼지막한 생선 소금구이 한 토막을 건네 드리자,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받아 그들이 보는 앞에서 맛있게 잡수셨습니다.
참으로 자상하고 친절하신 하느님이십니다.
전혀 그럴 필요가 없는 하느님, 그렇게까지 하지 않으셔도 되실 부활 예수님께서,
한 인간이 건네시는 구운 물고기 한토막을 드셨습니다.
아직도 의심과 불신으로 가득 찬 제자들에게 부활의 기쁨과 영광을 전하기 위해,
한 인간과 마주앉아 인간의 음식을 드신 것입니다.
참으로 놀라운 겸손이요 크나큰 자기낮춤이 아닐 수 없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이제 부활 이전의 예수님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분이십니다.
시공을 초월하시고, 육의 세계를 넘어서신 분이십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아직도 갈길이 먼 제자들,
신앙의 깊이가 얕은 제자들을 영적동반하시기 위해 또 다시 자신을 낮추십니다.
인간들 사이로 육화하십니다.
아무 것도 아닌 존재인 인간들과 친히 접촉하시고 소통하십니다.
그들이 건네는 하찮은 물고기 한 토막을 맛있게 받아 드십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배반자요 불신자이며, 먼지요 티끌인
우리 인간 존재를 끝까지 존중하십니다.
함부로 대하지 않으시고 지극정성으로 사랑하십니다.
또 다시 우리를 당신 구원 사업의 파트너로 선택하십니다.
그런 그분의 뜨거운 사랑은 불신과 의혹투성이인 제자들의 눈을 뜨게 하십니다.
그들의 나약함을 강건함으로 바꾸십니다.
마침내 그들을 주님 부활의 당당한 증인으로 서게 하십니다.
우리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진정으로 만날 때 더 이상 우리 안에 어둠이 머물 수 없습니다.
더 이상 낙담하거나 슬퍼하지 않게 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주시는 그 활기찬 사랑에 힘입어 담대해지고 당당해집니다.
더 이상 뒤로 물러서지 않고 뜨거운 마음으로 예수님 부활을 선포하게 됩니다.
이 모든 변화는 부활하신 주님께서 우리 삶에 끼어드실 때,
부활하신 주님께서 우리 삶의 중심에 자리 잡게 될 때 일어나는 변화입니다.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