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덜란드의 독립
네덜란드의 독립을 가져온 계기는 종교개혁이었다.
이 사건은 유럽 역사와 세계사에 있어 무척이나 중요한 사건이다.
루터의 주장으로 종교개혁이 일어났다. 교회의 면죄부 판매가 직접적인 발단이 되었다.
루터가 교회의 개혁을 주장했다는 소식이 유럽으로 전해지자, 스위스에 있던 츠빙글리도 이에 동조하였다.
그도 면벌부 판매에 반대하는 한편, 로마 교황의 권위를 부정하고 성서 중심의 신앙을 주장하였다.
이 문제로 스위스에서는 내란이 발생하는 사태에까지 이른다.
이 츠빙글리의 뒤를 이어 스위스에서 종교개혁을 성공시킨 사람은 칼뱅이었다.
칼뱅은 원래 프랑스 태생이었는데, 개신교에 대한 탄압을 피해 스위스로 망명하였다.
그의 핵심 사상은 '예정설'이었다. 칼뱅은 “사람의 구원은 하나님의 '선택'에 따라 이미 정해져 있으며(=예정),
기독교인은 재산과 시간을 낭비하지 말고, 합리적이고 금욕적인 생활을 함으로써 신의 뜻을 완수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칼뱅의 생각을 따르는 사람을 칼뱅파라고 하는데, 칼뱅파는 어느새 북서부 유럽을 중심으로 퍼지게 되었다.
칼뱅파는 나라마다 부르는 이름이 달랐다.
잉글랜드에서는 퓨리턴(청교도), 스코틀랜드에서는 장로교, 프랑스에서는 위그노라 불렸다.
이들이 훗날 유럽 여러 나라에서 시민 혁명의 주도자가 된다.
네덜란드에도 칼뱅파가 보급되었다. 이렇게 되자 네덜란드의 가톨릭 교세가 위협을 받았다.
이 와중에 성상파괴 사건이 터진다. 성상이란 성당에 있는 조각이나 그림을 말하는데 이를 우상이라 보고 부숴버린 것이다.
독실한 가톨릭 신자인 스페인의 펠리페 2세가 이를 가만히 보고 있을 리 없다.
펠리페2세는 네덜란드의 신교도를 물리치기 위해, 산전수전 겪은 군 출신의 알바 공을 총독으로 파견하였다1567.
군대의 힘으로 ‘이단’ 네덜란드를 굴복시키려고 작정한 것이다. 파견된 알바 공은 군 출신답게 공포정치를 실시했다.
개신교를 탄압하고 가톨릭을 강요하는 것은 기본이었고, 개신교 지도자는 물론 시민들을 구금하고 사형하였다.
거기다 세금도 과하게 매기니 상공업은 큰 타격을 받았다. 오라녀 공도 처형 대상에 들었으나 해외로 도피하여 목숨은 건졌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네덜란드의 개신교 칼뱅파들이 무력으로 저항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스스로 ‘거지’란 뜻의 ‘고이센엄밀히 말하면 독일어다’이라 불렀다. 이 저항 운동의 선구에 선 사람은 빌렘공William of Orange이었다.
우선 스페인에 협상안을 내놓았다. 군대를 철수시키고 종교의 자유를 주면 스페인의 총독을 받아들이겠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스페인은 종교의 자유를 허락하지 않았다. 남은 것은 스페인과의 전쟁으로 독립을 쟁취하는 것뿐이다.
그런데 이즈음 네덜란드도 분열의 조짐이 왔다. 네덜란드의 북부 지방은 개신교 칼뱅파였지만 남부 지방은 아직 가톨릭이었다.
남부 지방이 독립전쟁에서 빠지고 그만 스페인 국왕에게 충성을 다짐한 것이다.
이때부터 네덜란드는 남북으로 갈라져 북부 지방은 네덜란드로 남고, 남부 지방은 지금의 벨기에가 된다.
남부 네덜란드의 탈퇴로 북부 네덜란드만의 독자적인 독립 투쟁이 시작되었다.
빌렘공을 중심으로 북부의 7개 주가 참여하는 위트레흐트동맹Union of Utrecht이 결성되었다.1578년
빌렘공은 이어 네덜란드 연방공화국을 성립하고 초대 총독에 취임하였다.1579년
나아가 위트레흐트동맹은 “스페인 왕은 더 이상 우리의 왕이 아니다”라고 선언한다.1581년 사실상 독립 선언인 셈이다.
그 전에는 스페인 총독에 대한 소극적인 저항이었지만 이제는 아예 스페인 국왕을 상대로 전쟁을 선언한 것이다.
다급해진 펠리페 2세는 빌렘공 목에 현상금을 걸었다. 현상금이 효과가 있었는지 빌렘공은 열혈 가톨릭 신자로부터 살해당한다.
독립 전쟁의 지도자가 죽었으니 네덜란드로서는 대위기였다. 하지만 하늘이 도왔다.
스페인의 시선이 영국으로 쏠린 것이다. 어떻게 된 일일까?
이 당시 영국의 엘리자베스1세개신교는 메리 스튜어트가톨릭를 처형했는데 펠리페2세는 참을 수가 없었다.
영국을 정벌하기 위해 함대를 보낸다.1588 이름 하여 무적함대Armada. 스페인이 영국을 쳐들어 간 것이다.
영국이 세계 최강 스페인 함대를 당해낼 수 있을까?
하지만 이것 역시 대봐야 안다. 무적함대는 영국 해군의 재빠른 공격에 당하고 폭풍우까지 덮치는 바람에 대실패를 보고 만다.
이름만 무적함대였을 뿐이다. 이 사건은 네덜란드에게는 기사회생의 기회였다.
만약 무적함대가 네덜란드까지 왔다면 네덜란드는 그야말로 쑥대밭이 되었을 것이다.
무적함대의 실패는 스페인도 이제 저물어 간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건이기도 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천하의 펠리페 2세도 숨을 거두었다. 스페인은 종이호랑이가 되었다.
그렇다고 전쟁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 네덜란드와 스페인 사이에는 지루한 교전과 휴전이 반복되었다.
하지만 네덜란드의 독립은 기정사실이 되었다.
드디어 1648년에는 30년 전쟁이 끝나면서 베스트팔렌조약Peace of Westfalen에 의해 네덜란드는 완전한 독립을 누리게 되었다.
2010.7.11, 남아프리카공화국 요하네스버그 사커시티 스타디움에서 열린 2010 남아공 월드컵 결승전 네덜란드-스페인 경기 직전의 모습.
한 때 지배를 하고 지배를 받던 스페인과 네덜란드, 두 나라 왕실이 다 모였다.
머플러만 봐도 스페인인지 네덜란드인지는 금방 구분이 된다. 참 재미있는 장면이다.
펠리페 스페인 왕세자(왼쪽)와 왕세자비 레티시아 오르티스(중앙 왼쪽서 두번째), 소피아 스페인 여왕(윗줄 왼쪽)
빌렘-알렉산데르 네덜란드 당시 왕세자, 지금은 국왕(윗줄 오른쪽), 막시마 당시 왕세자비, 지금은 왕비(오른쪽).
막시마 왕비는 아르헨티나 출신으로 2014년 브라질 월드컵 준결승전에서 네덜란드와 아르헨티나가 대결하자,
친정인 아르헨티나를 응원할 지, 남편 쪽인 네덜란드를 응원할 지 세인의 관심을 끌었던 여성이다.
오렌지의 비밀
빌렘공은 네덜란드 독립의 아버지로 추앙받는 사람이다. 미국의 워싱턴쯤에 해당하는 사람이다.
빌렘1세의 정식 이름은 ‘나사우 백작 오라녀공 빌렘’Prins van Oranje Willem, Graaf van Nassau이고,
영어로는 ‘오렌지공 윌리엄’William I, Prince of Orange이라 부른다.
그리고 빌렘공의 이름에서 ‘오렌지’의 비밀을 눈치 챈 독자도 있을 것이다.
프랑스 남부 지방에 오랑주Orange라는 도시가 있다.
프랑스어로는 오랑주, 네덜란드어로는 오라녀, 영어로는 오렌지라 읽는다.
이 지역을 오랑주 공국principauté d'Orange이라 부르고 지배하는 가문을 오랑주공Prince of Orange이라 불렀다.
오랑주 공국을 다스리던 필리베르가 1530년에 죽게 된다.
하지만 후손이 없자 오랑주 공국은 조카인 르네에게 상속된다.
르네는 독일의 서부 지방을 기반으로 하는 나사우 가문의 귀족이었는데 오랑주 공 작위도 이어 받게 되었다.
그 뒤 빌렘1세가 독일의 나사우 백작 가문에서 태어났다1533. 오라녀공 르네가 1544년에 죽자 오라녀공 작위는 사촌인 빌렘1세에게 상속되었다.
르네에게도 직계 후손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때부터 오랑주 공의 작위는 오라녀-나사우 빌렘1세 집안으로 이어졌다.
독일 나사우Nassau가와 프랑스 오랑주Orange가의 혈통을 같이 이어 받은 셈이다.
빌렘1세는 네덜란드 여러 주의 총독을 하면서 스페인으로부터의 독립 운동에 나선다.
이 오라녀 집안은 네덜란드 국민들로부터 열렬한 지지를 받는데 이 때문에 네덜란드는 오렌지가 나지도 않으면서 자랑스럽게 오렌지 국가라고 하는 것이다.
현재 네덜란드는 입헌군주국으로서 왕이 있다. 현재 왕은 빌럼 알렉산더르.Willem-Alexander
얼마 전까지는 베아트릭스 빌헬미나 아름하르트 반 오라녀-나사우Beatrix Wilhelmina Armgard van Oranje-Nassau가 여왕이었다.
오라녀-나사우 가문의 후손이다. 한국의 스포츠 용품 회사인 낫소도 이 나사우Nassau의 이름을 딴 회사다.
첫댓글 재밌게 읽었습니다! 이렇게 역사적으로 연관지어 써주시니 훨씬 재미있네요. 다른편들도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굿굿 흥미로웠습니다~ 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