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의 문학도들은 나름 여행과 음악을 통하여 시의 소재들을 얻기도 했던 작은 섬들 서울에서 바다를 보려면 인천 연안부두로 가야만 했다
사색의 향기에 흠뻑 빠져 섬 여행들을 떠났던 시절에 감성이 다시 살아 움직임에.....
1970년대 인천 옹진군 연평도 섬사람들의 발이 되어 주었던 생활 수단으로 하루에 한번 육지로 나올 수 있는 배편이 전부였다
어느날 우연히 학생지 맨 뒷면에 펜팔란을 보게 되었다
지금처럼 방송 매체가 많아 기사들을 송출하는 시대가 아니였기에 유일한 소식통은 신문이였던 만큼 경제. 사회. 문화등을 접할 기회가 없는 섬사람들에게는 신문을 보내주면 좋겠단 생각에 그렇게 섬 청년과의 인연이 시작되었다
주소를 보는 순간 소녀는 메모를 하고 당장 내일부터 보내주기로 마음 먹으니 웬지 큰일이라도 해낼 사람으로 뛸듯이 기뻤다 작은 선행이 섬에 닿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설레임과 몇가구 안된 그곳 사람들의 통신망을 누군가 담당을 한다는건 지금 생각해도 선뜻 나서지 못했던 일이기에 마음속으로 자신에게 기특하다고 칭찬까지 한걸 보면 지금도 환한 얼굴에 미소가 번져 온다
그때는 조선일보가 조간 신문으로 국내외를 비롯한 사회 전반에 걸친 소식들을 전날 인쇄가 되어 서울 한복판 신문 가판대에 새벽부터 묵묵히 자리잡고 시민들을 기다리고 있던 시절 소녀는 이른 아침 신문 한장을 들고 우체국으로 향했다
신문 페이지도 많지 않아 서류 봉투에 밀봉을 하지 않고 얇고 누런 편지 봉투를 반으로 자르고 그위에 주소를 써내려 갔다 인천 옹진군 연평도 .... 신문을 적당한 크기로 접어 주소가 적힌 노란 편지 봉투를 가운데 두르고 마지막 우표를 붙여 연안부두에서 출발하는 배편으로 가는 신문 한장은 집배원 아저씨의 손에 들려 소녀의 신문 전달은 매일 그렇게 시작 되었다 .
배편으로 가기에 어느땐 하루가 늦게 들어 갈때가 많았다
한참을 지나 그먼 연평도에서 섬 청년은 서울의 소녀에게 감사하다는 말을 꼭 전하고 짜장면이라도 한그릇 나누고 싶다는 편지가 날아 들었다 그 시절에 짜장면은 최고의 맛있는 음식으로 꼽았었다
지금은 관광객들이 주변으로 몰리기 시작하면서 맛집도 펜션도 자리하고 섬주민들의 생활 터전도 점차 좋아졌지만 서해 최북단 10키로 앞에 북한땅이 내려다 보이는 연평도 아직까지도 대치 상태로 안전이 우선시 되는섬 주민들의 애환이 기억에서 하루빨리 잊혀질 날을 기대해 본다
아득한 수평선 너머에 꽃중년 신사로 변해 있을 섬 청년 지금도 그섬에 남아 많은 봉사로 멋진 삶을 그려내고 있으리라 .
송도와 월미도는 바다를 접할 서울 사람들의 기회를 주었던 곳으로 아직도 기억의 저편에서 갈매기들이 반갑게 손 흔들어 가을 하늘에 추억의 나래를 한껏 부추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