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말로 이미지(image)라고도 한다. 심상을 한자 그대로 풀어내면 '마음에 나타난 어떤 모습'이다. 국어사전이나 백과사전(심리학)에는 '감각기관에 대한 자극작용 없이 마음 속에 떠오르는 영상(映像)'으로 나와 있다.
문학에서의 심상은 '어떤 사물을 감각적으로 정신 속에 재생시키도록 자극하는 말'을 뜻한다.(이상섭 『문학비평용어사전』) 따라서 심상은 감각적, 정신적 체험과 연관되며 그것의 시적 재생이라 할 수 있다. 나아가 이러한 시적 재생은 독자의 상상력과 결합하여 효용과 의미를 더하게 된다.
심상의 종류로는 감각적 심상과 비유적 심상 그리고 상징적 심상이 있다. 그러나 오늘의 시조들을 보면 이러한 종류상의 엄격한 구분이 적용된다기보다는 이들이 동시에 사용되거나 이 중 어느 하나가 두드러지게 사용된다고 할 수 있다.
쳐라, 가혹한 매여 무지개가 보일 때까지
나는 꼿꼿이 서서 너를 증언하리라
무수한 고통을 건너
피어나는 접시꽃 하나.
<이우걸의 「팽이」>(고통을 이겨내는 모습)
'팽이'라는 사물을 의인화, 자기화하여 전개하되 그 대립점에 '매(채찍)'를 갖다 놓았다. '매'는 희망(무지개-은유)이 보이지 않는 고통의 현실을 암시하며 그 고통을 극한 자리에는 '접시꽃'을 대신 내놓고 있다. '팽이-나-고통과 증언-접시꽃'의 전개와 '매-너-가혹'의 전개가 만나 하나의 구도를 보여준다. 독자는 이 시조를 읽으면서 우선은 '팽이돌리기'라는 유년의 놀이에 대한 기억이 마음에 잡혀질 것이다. 그리고 한걸음 더 나아가 이 시조가 개인적 고통의 초극, 암울한 시대 현실의 초극을 배경 내지 주제로 삼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시인은 이 과정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또는 생생한 느낌을 전달하기 위하여 지배적 심상으로 촉각(쳐라-'치다'는 가학적 또는 피학적 심상이지만 이 시조에서는 팽이의 표면에 닿는 채찍과 인간의 살갗에 닿는 아픔의 이미지로 다가온다. '쳐라'가 비록 직접적인 촉각적 심상은 아닐지라도 독자의 심상에는 촉각적 심상으로 감지될 수 있다.)과 근육감각적인 심상(꼿꼿이)을 동원하였다고 볼 수 있다.
눈감고 뛰어드는 불나방 보아라
사랑은 앞 뒤 가리지 않고
몸을 던지는 것
불타는
花心 속으로
깊이 빨려드는 것.
<권갑하의 「사랑한다는 것」>(열정적인 사랑의 모습)
'사랑'이라는 추상적 대상을 독자의 마음에 재생(구체화, 영상화)시키기 위해 '불나방', '불타는/花心' 등의 시각적 심상을 동원하였다. '불나방'은 이 시의 주인공이다. 그러나 '불나방'의 생태를 이야기하고자 함이 아니라 인간 사랑의 한 모습을 현현시키기 위해 내세운 대체물이다. 따라서 의인화된 대상이다. 열정적인 인간 사랑의 모습을 효과적으로 드러내기 위해 시인은 이러한 비유적 장치 외에도 동적 심상을 집중 배치하고 있다. '뛰어드는, 던지는, 타는, 빨려드는' 등의 동사들은 그러한 주제를 도드라지게 하는 데 기여한다. 이 시조에서 시적 주체(시를 이끌어가는 전개자로 대개는 시인 자신이거나 시인이 내세운 사물이나 사람, 대상 등이 될 수 있다.)는 그 이름(예를 들면 '나' 등등)이 명시되어 있지 않다. 그러나 시적 주체의 목소리가 있다. 그것이 '보아라'와 '것'이다. '저것 봐라 사랑이란 저렇게 하는 거야, 저런 것이야!' 이러한 목소리(어조)를 독자의 심상에 호소하고 있는 것이다.
이 두 작품은 감각적 심상과 비유적 심상이 주를 이룬 작품이다. 끝으로 상징적 심상은 한 작품, 한 권의 시집 또는 한 작가 크게는 한 시대의 작가들, 작품들, 국가 또는 세계의 작가들, 작품들의 이미지군(이미저리)에서 연상되는, 일종의 통합적 이미지 위에 건설되는 의미라 할 것이다. 그러므로 대개는 관념적 영상물을 이룬다고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로버트 프로스트의 <가지 않은 길>이라는 작품을 보면 시인은 물질적이고 가시적인 길(도로상의 길)을 보여주는 듯하지만, 그러한 길의 이미지들이 다양하고 독특하게 뭉치고 모여서(노란 숲 속 길, 두 길, 굽은 길, 바라다보는 길, 아름다운 길, 더 걸어야 될 길, 아침 두 길) 독자의 심상에는 인생 행로에서의 선택과 갈등, 후회와 아쉬움 등의 상념 등으로 맺히게 된다.
심상을 지극히 쉽게 이야기하자면 어떤 시를 읽었을 때 그 시를 매개로 독자의 마음에 맺혀지는 영상이라 할 것이다. 그것은 실제의 사물에 대한 감각적 심상(부드럽다, 밝다, 시끄럽다, 향그럽다, 무겁다, 달콤하다 등등)일 수도 있고 어떤 체험에서 비롯되었던 감정(예를 들면 기쁨, 슬픔, 절망, 희망, 사랑, 미움 등등)일 수도 있고 불현듯 와닿았던 관념적 영상(예를 들면 깨달음이나 판단, 의지, 지향 등등)일 수도 있다.
첫댓글심상은 창작의 원동력이 되지요. 비가 온 뒤 마당을 기어가는 두 마리의 지렁이를 보며 아이 싱그러워 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마당에 지렁이 기어 가는 자욱을 보며 두 마리 지렁이가 땅따먹기를 한다고 보는 사람의 차이는 시각에 대한 이미지화가 되는 사람과 그렇치 않는 사람의 차이가 아닐까요.
지렁이 하면 저는 어릴 때 시골 땅속에서 보았던 지렁이보다 햇볕 사정없이 내려 쬐는 어느 날 보았던 지렁이 생각이 납니다. 얼마나 뜨거운지 온 몸을 팔딱거리며 사정없이 몸부림을 치고 있더군요. 이렇게 이미지는 같은 사물을 보면서도 어느 땅에서 본 것인가에 따라서 차이도 나고 보는 사람의 사상이나 관심가지고
보는 방향에 따라서도 다 다르게 나타나지요. 저는 그 날 그 지렁이를 보면서 환경을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인간이 좋을라고 쳐발라 놓은 시멘트 바닥이 지렁이한테는 죽음이 되고 있었거든요. 도룡용이 환경지표 동물인 것처럼 지렁이는 땅을 정화시키는 동물이잖아요. 그래서 저는 지렁이를 물기가 있는 진흙 땅에 옮겨다
첫댓글 심상은 창작의 원동력이 되지요. 비가 온 뒤 마당을 기어가는 두 마리의 지렁이를 보며 아이 싱그러워 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마당에 지렁이 기어 가는 자욱을 보며 두 마리 지렁이가 땅따먹기를 한다고 보는 사람의 차이는 시각에 대한 이미지화가 되는 사람과 그렇치 않는 사람의 차이가 아닐까요.
지렁이 하면 저는 어릴 때 시골 땅속에서 보았던 지렁이보다 햇볕 사정없이 내려 쬐는 어느 날 보았던 지렁이 생각이 납니다. 얼마나 뜨거운지 온 몸을 팔딱거리며 사정없이 몸부림을 치고 있더군요. 이렇게 이미지는 같은 사물을 보면서도 어느 땅에서 본 것인가에 따라서 차이도 나고 보는 사람의 사상이나 관심가지고
보는 방향에 따라서도 다 다르게 나타나지요. 저는 그 날 그 지렁이를 보면서 환경을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인간이 좋을라고 쳐발라 놓은 시멘트 바닥이 지렁이한테는 죽음이 되고 있었거든요. 도룡용이 환경지표 동물인 것처럼 지렁이는 땅을 정화시키는 동물이잖아요. 그래서 저는 지렁이를 물기가 있는 진흙 땅에 옮겨다
놓은면서 이런 생각을 했었습니다. 내가 오늘 너를 만나 너를 구한 것은 한 생명을 구한 것이 아니라 땅을 구한 것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