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일 창조주 하나님께서 소유가 있는 자들에게 산천초목이나 공기, 햇빛 등 자연만물의 사용료를 요구하신다면? 그리고 죽어서 천당에 갈 수 있는 대가를 재화(財貨)로 요구하신다면? 그 값은 얼마나 될 것인가? 소유가 없는 사람들만이 자연만물을 대가 없이 사용할 수 있고, 죽어서 천당에 갈 수 있는 전제조건이 주어진다면? 인간들의 삶의 모습은 어떻게 변할 것인가? (참조 눅18:24, 마5:45)
이렇게 볼 때, 사도행전에 기록된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의 소유를 초월한 유무상통은 환상적인 것도 아니며 불가사의한 것도 아니며 지극히 정상적인, 피조물로서의 본분을 지키는 삶이었음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분은 하나님이시며 그 만물들을 대가없이 다스리고 사용할 수 있도록 하셨기 때문입니다(창 1:28-30). 그러므로 기독교인의 성경적인 재물관은 소유 개념이 아닌 공동사용 개념이어야 할 것입니다.
인간은 적신(赤身)으로 왔다가 적신으로 갑니다.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 것이 인생임을 동서고금 어느 종족들이나 모르는 사람은 없습니다. 따라서 천지만물 중에서 그 무엇을 자기 소유로 알거나, 그 소유를 하나님께 드린다는 것은 한마디로 '웃기는' 생각입니다.
하나님께서 인류에게 거저 주신 것들을 특정인이 독점하기 위하여 소유한다는 것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매우 가소로운 일입니다. 더구나 그 소유에서 하나님께 드린다는 명목으로 일부를 헌납하고 축복을 받으려는 생각은 주객이 전도되는 넌센스입니다. 그러기에 주님은 이 땅에 오시어 말씀하셨습니다.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마 19:21)
예외 없이 적신으로 태어나는 인간임에도 불구하고 인간들은 소유로 인하여 상반되는 인생을 살게 됩니다. 어떤 자는 제왕이나 고관대작 또는 갑부의 자녀로 태어난 덕분에 물려받은 소유로 부귀영화를 누리다가, 죽어서도 수백 평이 넘는 호화스런 분묘에 묻혀 소유를 대대로 누리는가 하면, 어떤 자는 소유가 없어서 멸시받으며 단 한 평의 내 집도 없이 셋방을 전전하다가 죽어 한 뼘 땅에도 묻히지 못하고 한 줌의 가루가 되어 강물에 뿌려집니다.
파스칼의 '팡세'에 '귀족은 얼마나 큰 이득을 보고 있는 것일까? 그들은 18세가 되면 이미, 다른 사람들은 50세가 되어야 겨우 얻을 명예와 존경을 얻게 된다. 그것은 아무 고생도 하지 않고 30년이나 버는 셈이다(B-322).'라는 단장(斷章)이 있습니다. 이는 인생의 불합리한 소유의 일면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인간의 소유의 불합리함을 성경은, 누가복음 16장의 '한 부자와 나사로라 이름하는 거지의 이야기'에서 극적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비록 육신적 인생은 소유로 인하여 불합리한 삶을 살지만 죽어서 육신적인 삶이 끝나면 생전의 그 소유가 얼(孼)이 되어 그 형편이 정반대로 엇갈리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가로되 "얘 너는 살았을 때에 네 좋은 것(소유)을 받았고 나사로는 고난(무소유)을 받았으니 이것을 기억하라. 이제 저는 여기서 위로를 받고 너는 고민을 받느니라(눅 16:25)." 적신으로 왔다가 적신으로 가는 인간의 삶의 의의를 깨닫게 하는 말씀입니다.
천지만물이 모두 주님의 것임에도 예수님은 마굿간의 구유에 태어나서 이 땅위에 머리 둘 곳조차 없이 사셨습니다, 무소유로 사셨기에 시장하시고, 피곤하셨습니다(마 21:18 막 4:38). 그러나 부활하신 주님은 하늘에 오르사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시고 인간들의 소유로 인한 불합리한 삶에 대한 심판의 날을 예비하고 계신 것입니다. (마 25:31-46)
인간들의 눈에 보이는 인생은 불합리하지만, 하나님께서 예정하시고 섭리하시는 인생은 결코 불합리한 삶이 아님을 그리스도인들은 굳게 믿어 의심치 말아야 합니다. 밤의 한 경점과도 같이 지나가는 이 땅의 나그네로서 필요불가결한 것 이외의 소유를 주장한다는 것은 하나님보다 재물을 소중하게 여기는 우상 숭배인 것입니다(마 6:24).
그리스도인의 사회(교회)는 땅에 속한 것이 아니고 하늘에 속한 것이며, 그리스도인은 땅엣 것을 생각지 말고 위엣 것을 찾으며 살아야 하므로 그리스도인의 사회는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일반인들의 사회와 구별되어야 합니다. 곧 구원받은 자의 거듭난 삶이란 천국을 소망하면서 나그네로 이 세상을 살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무소유로 살아야 함은, 마치 교도소에 갇힌 죄수가 무소유로 사는 경우와 같습니다. 교도소에 갇힌 죄수가 거저 받는 의식주 외에 대가를 요구하고 일을 할 수 없듯이, 그리스도인 역시 육신적 삶에 필요한 자기 몫 외의 소유를 누릴 수 있는 신분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유를 위하여 온갖 부정한 행위를 자행한다면 그는 분명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교도소에 갇힌 죄수들이 비록 무소유라 할지라도 출소하는 날까지 목숨을 위한 삶을 보장받고 있듯이, 마귀의 권세 속에서 온갖 유혹을 물리치고 하나님만을 의뢰하며 생활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는 주님의 확실한 약속이 상존하고 있음을 잊어서는 안됩니다(마 6:31-34).
예수님께서 복음전도를 위하여 12제자를 보내시며 "너희 전대에 금이나 은이나 동이나 가지지 말고 여행을 위하여 주머니나 두 벌 옷이나 지팡이를 가지지 말라. 이는 일꾼이 저 먹을 것 받는 것이 마땅하니라" 고 하시기 전에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라고 말씀하신 뜻은 복음사역에 종사하는 경우, 먹고 입고 잠자는 대접을 받는 것은 당연하지만, 복음전파나 질병치유 또는 귀신을 쫓아내는 대가로 돈을 받아 소유하는 행위는 절대로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마10:8-10)
초대교회의 사도를 위시한 제자들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라"는 주님의 말씀에 온전하게 순종한 그리스도인들이었습니다. "내가 아무의 은이나 금이나 의복을 탐하지 아니하였고 너희 아는바에 이 손으로 나와 내 동행들의 쓰는 것을 당하여 범사에 너희에게 모본을 보였으니 곧 이같이 수고하여 약한 사람들을 돕고 또 주 예수의 친히 말씀하신 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심을 기억해야 할지니라" 예루살렘으로 가면서 밀레도에서 에베소 교회의 장로들에게 마지막 작별할 때의 사도 바울의 말이었습니다(행 20:35).
히브리서 저자도 "오직 선을 행함과 서로 나눠주기를 잊지 말라 이 같은 제사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느니라(히3:16)"고 기록하고 있으며 사도 요한도 "저희(전도자)가 주의 이름을 위하여 나가서 이방인에게 아무 것도 받지 아니함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요삼 1:7).
이를 미루어 생각할 때, 오늘날 복음 전파에 전무하는 사역자들에 대한 교회적 관심은 보수라든가 급료라는 직업적 소유개념이 아닌 '일군이 저 먹을 것 받는(마 10:10)' 또는 '일군이 그 삯을 받는(딤전 5:18)' 봉사적 개념의 범위에서 고려되어야 합니다. 복음전파를 대가로 하는 직업적인 보수로 청빈이나 절제가 결여된 분수에 넘치는 경제적 삶을 영위하는 것은 하나님께 거저 받은 것으로 축재하는 복음 장사꾼에 불과할 뿐입니다.
그러므로 바람직한 사역자는 한 가정의 경제적 책임을 지지 않는 독신자이거나 아굴라와 브리스길라 부부와 같이 자비량(自備糧)하는 사람이어야 합니다(행 18:3). 초대교회에 나타난 성도들의 유무상통은, 이미 존재하는 불평등한 소유를 평균하게 나눔으로 공동체내에서 핍절한 사람이 없도록 하려는 성도간의 진실한 사랑으로, 진정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 그리스도인으로서 온전하고 거룩한 무소유의 삶이었습니다.
출애굽기에서, 광야에서 공동체 생활을 영위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만나’를 통해 백성들이 양식을 위하여 각 사람이 '필요한 만큼'만 취할 때는 남음도 없고 부족함도 없으나 욕심을 내어 '필요한 만큼'을 넘게 소유하면 먹을 수 없는 양식으로 변한다는 예표적인 교훈을 주셨음을 기억해야 합니다(출 16장).
이와 같이 '필요한 만큼'이상의 소유는, 욕심에서 기인하는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는 이방인의 재물관입니다. 목회서신인 디모데서나 디도서를 통해서 교회의 감독이나 집사들에게 권면하기를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것이니라.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서 자기를 찔렀도다(딤전 6:8,10)’라고 하면서 돈을 사랑치 말며(딤전 3:3) 더러운 이를 탐하지 말고(딤전 3:8,딛 1:7) 절제하라(딤전 3:2,딛 1:8)는 부탁을 거듭 거듭 말씀하고 있습니다.
아굴의 잠언에서도 "내가 두 가지 일을 주께 구하였사오니 나의 죽기 전에 주시옵소서. 곧 허탄과 거짓말을 내게서 멀리 하옵시며 나로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내게 먹이시옵소서. 혹 내가 배불러서 하나님을 모른다. 여호와가 누구냐? 할까 하오며 혹 내가 가난하여 도적질하고 내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할까 두려워함이니이다."라고 간구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 가셨을 때,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자들을 내어 쫓으시고 그들의 상과 의자를 둘러엎으시고 만민이 기도하는 하나님의 집을 강도의 굴혈로 만든다고 질타하신 것도 하나님을 섬기는 행위를 빌미로 소유를 위한 사리사욕을 채우는 불순한 상행위를 책망하신 것입니다(마 21:12-13).
요즘 기독교 백화점이라 일컫는, 신앙 관련 서적이나 기타 교회 용품을 팔고 있는 점포에 가보면 하나님의 말씀이 취리를 위하여 남발되고, 이용되고 있음을 실감합니다. 성경책과 찬송가책은 불완전한 주석이나 해설을 첨가하여 호화스런 장정(裝幀)으로 꾸며 고가로 팔고 있으며 성구나 성화를 주제로 한 장식용 액자 및 다양한 액세서리 등은 전도보다 이윤을 목적으로 하는 상혼을 읽기에 충분합니다.
통일된 기독교 신문이나 라디오 방송이나 텔레비젼 방송이 불가능한 이유도 알고 보면 신앙이나 교리상의 문제보다는 경제적인 막대한 이권으로 인한 것임을 볼 때 '거룩한 성전을 강도의 굴혈로 만드는도다'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자기 배만 위하는 거짓 그리스도인들의 실상을 정확하게 포착한 말씀임을 깨닫게 됩니다.
강도란 협박이나 폭력으로 남의 재물을 빼앗는 도둑으로, 그러한 도둑의 무리가 모인 곳이 곧 강도의 굴혈입니다. 주님께서 제사용품을 매매하는 장사꾼들을 강도로 단정하시고 그들이 모이는 성전을 소굴이라고 표현하신 것은 어찌 보면 지나친 표현이 아닐까? 하는 의문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일을 구실 삼아 재리를 탐하는 행위는 가증스러운 영적인 강도행위이며 (렘 7:8-11) 그러한 자들이 모이는 성전이라면 강도의 소굴과 다를 바가 없을 것입니다.
교회에서 오늘날 이루어지는 상행위는, 교회건물의 대형화와 제도적인 조직에서 비롯됩니다. 교회가 대형화되면 인건비, 시설비, 시설 유지관리비가 엄청납니다. 헌금의 용도가 바뀔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가능한 한, 성도들의 거주지역 단위로 존재하여 건물이나 제도에 구애받지 않고 헌금은 본래의 목적대로 전도, 구제비 등으로 충당하는 것이 성경적입니다.
그리고 교회라는 간판을 걸고 이루어지는, 용납하기 어려운 상행위는 개척했다는 이유로 교회를 매매하는 행위이며, 교회 담임을 대물림하는 행위 등입니다. 또한 부흥집회를 끝내고 테이프나 주석서 등을 판매하는 행위로 이는 충동구매 심리를 이용하는 바람직하지 못한 상행위입니다.
그리고 사역자들이 교인들의 가정을 심방할 때나 결혼, 장례, 개업식 등에서 예배를 집례할 때 받는 사례비도 또 다른 방법의 상행위입니다. 예배의 사례비란 거의가 축복기도의 대가로 교인들의 기복신앙을 충족시키는 촌지나 떡값 같은 종류의 부정적인 거래가 아닐 수 없습니다.
노회나 총회 등 교역자들이 모이는 집회에서는 소위 거마비라는 명목의 교통비가 실비와는 상관없이 관례적으로 지불됩니다. 예배를 하면서 기도, 성경봉독, 설교, 축도 등을 맡은 분들에게 예배비라는 명목으로 사례비가 지불됩니다. 기관장 선거나 임직식에서는 거액의 선물이 오고 갑니다. 이러한 것은 모두 관행으로 자연스레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자기 유익을 챙기기 위한 사전 포석인 명절이나 기념일을 빙자한 과분한 선물 수수, 정상적인 수입이 아닌 대가를 위한 뇌물성 금품 수수, 알선수뢰, 중계료, 소개료, 실비를 초과하는 수고비 등의 부수입은 그리스도인에게 바람직하지 못한 재물 취득이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성경에 보면, 아무런 하자가 없는 응분의 사례마저도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라’ 는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려고 청빈과 절제의 삶을 산 사역자들이 있습니다. 아람왕의 군대장관 나아만은 문둥병을 고침 받고 은 10달란트, 금 6천 개, 의복 10벌을 감사의 예물로 엘리사에게 받기를 강청했으나 엘리사는 "나의 섬기는 여호와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내가 받지 아니하리라"라고 끝까지 고사(固辭)하고 돌려보냈습니다(왕하 5:16).
또한, 아브람은 소돔에 살던 조카 롯이 전쟁 중에 사로잡혔음을 전해 듣고 곧 가서 적들과 싸워 쳐서 파하고 롯과 더불어 소돔성의 백성들과 빼앗겼던 재물을 모두 찾아왔는데 소돔왕이 아브람에게 "백성은 내게 보내고 물품은 네가 취하라"고 했을 때 아브람은 소돔왕에게 이르되 "천지의 주재시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 여호와께 내가 손을 들어 맹세하노니 네 말이 내가 아브람으로 치부케 하였다 할까 하여 네게 속한 것은 무론 한 실이나 신들메라도 내가 취하지 아니하리라"고 단호하게 거절했습니다(창 14장).
반면,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능력의 대가를 자기가 취하려는 자들은 그에 상응한 징계를 받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베드로후서에 ‘발람은 불의한 삯을 사랑하다가 자기의 불법을 인하여 책망을 받되 말 못하는 나귀가 사람의 소리로 말하여 이 선지자의 미친것을 금지하였느니라(벧후 2:15-16)’고 증거하고 있으며 엘리사의 종인 게하시는 주인이 고사한 나아만의 예물을 탐내어 속여 취했다가 오히려 문둥병을 옮겨 받는 징계를 받았던 것입니다(왕하 5:27).
어느 장로교회에 출석하는 모 집사는 공무원으로 재직하면서 신앙 칼럼을 써서 한 권의 책을 출판했습니다. 그는 출판사에서 인세로 받은 것을 한 푼도 쓰지 아니하고 전액을 부랑아들을 돌보고 있는 어느 전도사에게 전달했다고 합니다. 그 집사의 변(辨)인즉, 자기는 공무원으로 이미 일정한 급료를 받고 있다는 것입니다. 진실이란, 거저 받은 것을 거저 주는 곳에 깃들이는 것입니다. 그것도 아무도 모르게 거저 주는 은밀한 곳에 하나님의 은혜는 풍성하리라고 믿습니다.
사실, 거저 받은 것을 거저 준다는 것은 놀라운 일은 아닙니다. 극히 당연한 일임에도 불구하고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죄인들의 마음이기에, 받을 때는 거저 받고 싶고 남에게 줄 때는 대가를 받고 싶은 심리가 잠재해 있기 때문입니다. 참 그리스도인이라면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보다는 ‘땀 흘려 얻었을지라도 할 수만 있다면 거저 주어라’라고 함이 어울리는 말일 것입니다. 자료출처/ 창골산 봉서방 카페
첫댓글 <교회에서 오늘날 이루어지는 상행위는, 교회건물의 대형화와 제도적인 조직에서 비롯됩니다. 교회가 대형화되면 인건비, 시설비, 시설 유지관리비가 엄청납니다. 헌금의 용도가 바뀔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가능한 한, 성도들의 거주지역 단위로 존재하여 건물이나 제도에 구애받지 않고 헌금은 본래의 목적대로 전도, 구제비 등으로 충당하는 것이 성경적입니다.> 모든 교회들이 이렇게 변화한다면 이세상은 천국이 될 것입니다. 너무나 공감이 가는 좋은 글 감사합니다.
좋은글 읽고 은혜받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