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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이산하[百二山河] 천부지국[天府之國] 조선[朝鮮]의 경도[京都] 한양[漢陽]
조선사[朝鮮史],........ 일만년[一萬年]의 유구[悠久]하고 장구[長久]한 세월을 이어 내려온 우리의 역사[歷史],........ 고조선[古朝鮮]으로부터, 고려[高麗]를 이어 우리 역사[歷史]의 마지막 왕조[王朝]로 기록[記錄]된 태조[太祖] 이성계[李成桂]의 조선[朝鮮],........ 이 근세[近世] 조선[朝鮮]의 황도[皇都]였던 한양[漢陽]인 경성[京城]은, 오백년[五百年]의 역사[歷史]를 지닌 유서[由緖] 깊은 조선[朝鮮]의 황도[皇都]였다.
조선왕조[朝鮮王朝] 오백년[五百年]의 역사[歷史]속에서, 명[明]나라가 일어나고 망[亡]했으며, 청[淸]나라가 그 뒤를 이어 일어나고 역사[歷史]속으로 사라졌다.
조선[朝鮮] 한양성[漢陽城]의 교외에는 수[數] 만[萬]마리의 군마[軍馬]가 달리고 있었으며, 경도[京都]의 도성[都城]은 웅장[雄壯]하고 드높이 솟아 구름 속에서 휘황찬란[輝煌燦爛]하게 빛나고 있었다.
북[北]으로는 삼각산[三角山]이 높이 솟아 도성[都城]을 감싸않고, 남[南]으로 한수[漢水]가 띠처럼 두르고 있었으며, 삼면[三面]이 물로 쌓여 있었다.
조선[朝鮮]의 성상[聖上]이 한번 교외로 행차 할 때는, 일만의 기병[騎兵]이 창검[槍劍]을 번득이며 호위[護衛]하고 금갑[金甲]이 찬란[燦爛]히 빛났다.
수[數] 천[千]에 이르는 조정[朝廷]의 백관[百官]들이 금관옥대[金冠玉帶]를 띠고 그 뒤를 따랐으며, 그 행렬[行列]은 수[數] 십리[十里]에 걸쳐 이어졌었다.
한양[漢陽]의 남산[南山]인 목멱산[木覓山]은 구름 속에 드높이 솟아 있었으며, 목멱산[木覓山]의 기슭에는 천하[天下]의 기이한 절경[絶景]이 곳곳에 펼쳐져 자리 잡고 그 경관[景觀]을 천하[天下]에 자랑 했다.
이러한 조선[朝鮮]의 한양[漢陽] 모습은, 모두 당시[當時]를 살았던 선조[先祖]들이 남긴 역사[歷史]의 생생[生生]한 기록[記錄]들이다.
반도사관[半島史觀]은, 조선[朝鮮]의 한양[漢陽]이 반도[半島]의 서울에 있었다고 주장[主張]한다.
역사[歷史]를 왜곡[歪曲]하고 기만[欺瞞]하며 조작[造作]하고, 선대[先代]의 조상[祖上]을 능멸[凌蔑]하고 폄하[貶下]하며, 국가[國家]와 국민[國民]과 후세[後世]들을, 왜곡[歪曲]과 거짓의 역사[歷史]로 속이고 우롱[愚弄]하는 것도, 그 정도[正道]는 있어야 하는 것이다.
식민사관[植民史觀]인 반도사관[半島史觀]의 역사[歷史]에 대한 거짓과 왜곡[歪曲]은, 역사[歷史]의 기록[記錄]만을 놓고 보더라도 그 교활[狡猾]하고 오활[迂闊]함이 백일[白日]하에 들어나고 있다.
양이[洋夷]와 일제[日帝]의 역사[歷史]에 대한 거짓과 왜곡[歪曲]을 충실히 수행하는 반도사관[半島史觀]은, 이미 그 한계를 뛰어 넘은지 한참 오래 되었다.
학문[學文]의 정도[正道]를 버리고 곡학아세[曲學阿世]하며, 국가[國家]의 대도[大道]와 국가[國家]의 대의[大義]를 헌 신짝처럼 버리고. 국가[國家]의 정도[正道]와 국가[國家]의 정체성[正體性]을 뒤흔드는 파렴치[破廉恥]한 행위를 일말[一抹]의 양심[良心]도 없이 계속하는 반도사관[半島史觀]은, 우리의 소중[所重]한 역사[歷史]를 다시 한 번 철저히 짓밟고 있으며, 그러한 역사[歷史]의 사실[事實]들을 조선[朝鮮]의 후예[後裔]들은 분명[分明]히 알고 있어야 할 것이다.
조선[朝鮮]의 한양[漢陽]은, 고조선[古朝鮮]의 마한[馬韓] 지역이었으며, 백제[百濟]의 한산[漢山], 고구려[高句麗]의 남[南] 평양[平壤], 그리고 고려[高麗]의 남경[南京] 지역 이었다.
이렇듯 역사[歷史]의 연원[淵源]이 깊고도 깊은 조선[朝鮮]의 한양[漢陽]은, 조선사[朝鮮史]의 역사[歷史]에 대한 왜곡[歪曲]이 극성을 부리고 수 많은 역사[歷史]의 유적[遺跡]과 유물[遺物]들이 파괴되고 사라져가고 있으나, 장구[長久]한 오천년[五千年] 역사[歷史]의 문헌[文獻]과, 그 역사[歷史]의 흔적[痕迹]과 자취는 그 대로 간직하고 있으니, 역사[歷史]를 속이는 자들은 춘몽[春夢]의 일장[一場]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역사[歷史]속의 조선[朝鮮] 한양[漢陽]의 위치[位置]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의 주장[主張]과 그에 대한 추정[推定]과 가설[假說]들이 난무[亂舞]하고 있다.
반도[半島]의 서울은 조선[朝鮮]의 한양[漢陽]이 아니다. 그 것은 조선[朝鮮]의 왕릉[王陵]에 대한 역사[歷史]의 기록[記錄] 하나만을 보더라도 그 거짓이 분명[分明]히 들어나고 있다.
조선왕조[朝鮮王朝]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의 인조[仁祖] 8년[八年] 경오[庚午]
4월[四月] 11일[十一日] 경신[庚申]의 병조등록[兵曹謄錄]편을 보자.
晝講, 入侍時, 左議政金瑬啓曰, 小臣爲總護使, 考見前後謄錄磨鍊遷陵時役事, 則其中最難者役軍也。大槪, 定山後, 可以知之, 而亦有遠近之異, 若用健元陵第二岡, 則役事甚省, 若用新山遠處, 則功役甚倍, [중략]
주강[晝講]이 있었다. 이때 입시한 좌의정 김류[金瑬]가 아뢰기를, “소신이 총호사[總護使]로서 전후의 등록[謄錄]에 마련한 천릉[遷陵]할 때의 역사[役事]를 상고해 보니, 그중에서 가장 어려운 것은 역군[役軍]에 대한 일로 이것은 대체로 능[陵]으로 쓸 산이 정해진 뒤에 알 수 있지만, 또한 거리에 따른 차이도 있습니다. 만약 건원릉[健元陵]의 둘째 능선을 사용한다면 역사가 매우 줄어들 것이지만, 멀리 있는 새로운 산을 사용한다면 공역[功役]이 갑절이나 될 것입니다. [중략]
穆陵國葬時, 用役軍九千名一朔赴役, 以此通計則二十七萬, 一日赴役如此, 農時調發役軍, 則似難支當, 而亦不可以農時而已也 [중략]
목릉[穆陵]에 대한 국장[國葬] 때에는 역군[役軍] 9000명[九千名]을 한 달 동안 부역시켰습니다. 이것을 가지고 통계해 보면 27만[二十七萬]명을 하루 동안 부역 시켜야 하니, 이처럼 농번기에 역군을 조발[調發]한다면 농사를 짓기 어려울 듯합니다. 그렇지만 농사철이라고 해서 그만둘 수도 없습니다. [중략]
병조등록[兵曹謄錄]에서는, 이렇게 조선왕릉[朝鮮王陵]의 역사[役事]에 대하여 기록[記錄]하고 있으며 그에 대한 설명을 하고 있다. 다른 역사[役事]의 기록[記錄]도 이와 다르지 않고 별반 차이가 없다.
조선왕조[朝鮮王朝] 황릉[皇陵]들의 규모가 어떠했는가를 보여주는 생생[生生]한 역사[歷史]의 기록[記錄]이며, 실제로 이러한 역사[歷史]의 기록[記錄]들은 한 치의 오차[誤差]도 없이 맞는 기록[記錄]이었음이 증명[證明]되고 있다.
지금 반도[半島]에 있는 조선[朝鮮]의 왕릉[王陵]에 대해서 한국[韓國] 사람이라고 한다면 모르는 사람이 아마 거의 없을 것이다. 반도[半島]에 있는 조선왕릉[朝鮮王陵]들의 크기와 그 규모의 역사[役事]에, 역군[役軍] 9000천명[九千名]이 한 달에 걸쳐 일을 해야 하는 크기는 절대 아닐 것이다.
다른 왕릉[王陵]의 역사[役事]에 대한 기록[記錄]에서는, 역군[役軍]의 역사[役事]가 여의치 못하면, 민간 백성[百姓]들을 동원하는데, 모두 6000명[六千名]을 넘어서고 있다.
반도[半島]에 있는 조선[朝鮮]의 황릉[皇陵]에 대한 역사[歷史]의 사실[史實]들은, 누군가는 그에 대한 역사[歷史]의 진실[眞實]을 분명[分明]히 알고 있을 것이다.
현지[現地]에 남아 있는 조선[朝鮮] 황릉[皇陵]들의 규모를 살펴보면, 왕조실록[王朝實錄]의 황릉[皇陵]에 대한 역사[歷史]의 기록[記錄]들이 역사[歷史]의 사실[史實] 이었음을 실감[實感] 할 수 있다.
대체적[大體的]으로 모든 왕릉[王陵]들의 길이가 1km, 약 1000m를 상회[上廻]하고 있으며, 수없이 많은 거대한 석조물[石造物]들의 위용은,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의 기록[記錄]들을 다시금 돌아보게 한다.
북한산성[北漢山城]과 남한산성[南漢山城]의 기록[記錄]들은 부절[符節]을 합한 것과 같이 일치하고 있으며, 역사[歷史]의 준엄[峻嚴]함과 역사[歷史]의 천리[天理]는 고금[古今]에 변함이 없음을 다시 한 번 상기 시키고 일깨워 주고 있다.
지금 서울에 있는 삼각산[三角山]이 조선[朝鮮] 한양[漢陽] 도성[都城]의 삼각산[三角山]이라고 반도사관[半島史觀]은 주장[主張]하고 있으며, 그렇게 교육[敎育]을 받은 대다수의 국민[國民]들도 모두 그렇게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반도사관[半島史觀]의 역사[歷史]대한 설명과 주장[主張]은 새빨간 거짓말에 지니지 않는다.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많은 역사[歷史] 기록[記錄]들은, 대부분이 한양[漢陽]의 도성[都城]과 삼각산[三角山]이 북한산[北漢山]과 서로 인접[隣接]되어 있는 것으로 그려지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역사[歷史]의 기록[記錄]들은, 조선사[朝鮮史]를 왜곡[歪曲]하고 축소[縮小]하는 자[者]들에 의하여 당시[當時]의 원전[原典]이 훼손[毁損]되고 변조[變造] 되었기 때문이다.
조선사[朝鮮史] 역사[歷史]속의 북한산[北漢山]과 삼각산[三角山]은, 한양[漢陽]의 도성[都城]으로부터, 북[北]쪽으로 100리[百里]가 넘게 멀리 떨어져 있었다.
이러한 조선[朝鮮] 한양[漢陽]의 북한산[北漢山]과 삼각산[三角山]을, 반도[半島]의 서울에 심어놓고, 이리저리 역사[歷史]의 기록[記錄]에 나오는 이름들을 갖다 붙이며, 여기에 관계된 모든 역사[歷史]의 기록[記錄]들을 왜곡[歪曲]하고 조작[造作]해 놓았으니, 그 비열[卑劣]하고 교활[狡猾]하며 그 치졸[稚拙]하고 추악[醜惡]함은 일일이 다 지적 할 수 없다.
옥오재집[玉吾齋集]
因判書閔鎭厚上書蕩春城役便否議
판서 민진후의 상서로 인해 탕춘성[蕩春城] 쌓는 일의 합리성 여부에 관한 의론
今此蕩春城役。自初多言其不便。非獨今日重臣之書爲然也。就其書辭言之。則大要有二
지금 탕춘성[蕩春城] 공사에 대해서는 시작 단계부터 사리에 맞지 않는다는 말이 많았으니 오늘 중신[重臣]이 올린 글에서만 그런 것은 아닙니다. 민진후[閔鎭厚]가 올린 글의 내용을 가지고 말씀드린다면 요점은 크게 두 가지입니다.
一則聯絡三城。百餘里决無可守之勢。一則處於都城北漢之間。賊若登高俯瞰。則必不可支云。其言誠有所見矣
하나는 세성[三城]을 연결해도 100여리[百餘里]나 되는 지역을 절대 지킬 수 없다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탕춘성[蕩春城]은, 도성[都城]과 북한산[北漢山] 사이에 있어서 적[賊]들이 만일 높은 곳에 올라가 내려다본다면 반드시 버텨낼 방도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 말은 진실로 좋은 견해입니다.
第念北漢之始議也。聖上與廟堂諸臣。反復商論。以爲他日依歸之所者。豈不珥城之闊大難守故歟
다만 생각건대, 북한산성[北漢山城] 쌓는 일을 처음 논의할 때 성상[聖上]께서, 조정[朝廷]의 여러 신하[臣下]들이 반복해서 따져 보고 의논하여, 뒷날 의귀[依歸]할 곳으로 여긴 그 이유는, 도성[都城]이 너무 넓어서 지키기 어렵다는 문제점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
且以前史觀之。縱外寇入內。坐守京城者。十無一幸。成敗之跡。斑斑可考。以此言之。旣入北漢之後。則臣恐都城自不得不棄
또 전[前] 시대[時代]의 역사[歷史]를 통해 보더라도 외구[外寇]들이 침입해 왔을 때 경성[京城]에 앉아 지켜낸 경우는 열 번 가운데 한 번도 없었으니 성패[成敗]의 자취를 분명하게 알 수 있습니다. 이런 사실을 근거로 말씀드리자면, 이미 북한산성[北漢山城]으로 들어간 뒤에는 아마도 어쩔 수 없이 도성[都城]을 버리게 될 것입니다.
都城旣棄。則雖城蕩春。不可謂之三城。而設令都城不守。蕩春孤危。我亦豈可坐而拱手。苟能臨機審勢。把守要害。如古所謂先據北山者。而與北漢相爲表裏。則亦豈至於如探囊中物乎。今以此城之故。並與已完之北漢而棄之者。無乃太過乎
도성[都城]을 이미 버렸다면 비록 지금 탕춘성[蕩春城]을 축조해 두더라도 성[城]이 세 개[三城]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설령 도성[都城]을 지키지 못하게 되고 탕춘성[蕩春城]이 고립되어 위태롭다면 우리가 어찌 가만히 앉아 팔짱만 끼고 있겠습니까 ? 진실로 처한 사태에 따라 형편을 살펴서 요해지[要害地]를 지키는 것이 옛사람의 이른바 먼저 북[北]쪽 산을 점거해야 한다는 말과 같아서 북한산성[北漢山城]과 서로 표리[表裏]관계가 되니 또한 어찌 제 주머니 속에 있는 물건을 더듬는 것과 같은 데에 이르겠습니까 ? 지금 이 성[城]의 문제로 이미 완성된 북한산성[北漢山城]마저 포기하는 것은 너무 지나친 일이 아니겠습니까 ?
大抵天下之事變無窮。兵家勝敗。尤决於呼吸之間。有不可一定論者。况於無事之時。逆料未然之事。必曰如是則安。如是則危者。安保其鑿鑿皆中乎
대저 천하[天下]에 발생하는 사변은 무궁무진[無窮無盡]하고 병가[兵家]에서의 승패[勝敗]는 더욱 한순간에 결정되므로 한 가지 측면에서만 논할 수가 없습니다. 하물며 아무 일도 발생하지 않은 시점에서 아직 발생하지 않은 일을 미리 짐작하여 반드시 이렇게 하면 안전[安全]하고 이렇게 하면 위태[危殆]롭다고 하는 말들이 어찌 하나하나 다 맞을 것이라고 보장하겠습니까 ?
若使灼見利害。熟究終始。初不輕擧。則善矣。今乃不然。徒以甲乙之論。大役甫始。遽議還罷。事同兒戱。不亦顚倒之甚乎
만일 이[利]로운 점과 해[害]로운 점을 분명하게 알고, 일의 시말[始末]을 자세하게 강구하여 처음부터 경솔[輕率]하게 진행하지 않았다면 좋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이미 그렇게 하지 못하고 이런저런 주장[主張]으로 큰 공사를 시작하자마자 갑자기 이 일을 그만두어야 한다고 한다면 이 일은 애들 장난과 같아지게 되니 또한 너무 잘못된 것이 아니겠습니까 ?
臣意則姑以見在之物力。就完已半之功役。而當此飢癘孔慘中外愁怨之日。時屈擧贏之患。亦不可不念。設有未盡之處。勿復經紀。徐待日後而處之。恐合於定人心弭衆弊之道。伏惟上裁
신[臣]의 생각으로는 현재 동원 가능한 물력[物力]으로 이미 반쯤 완성된 일을 마무리해야 하는데, 이처럼 기아[飢餓]와 전염병[傳染病]이 심하여 온 나라 안의 사람들이 근심하고 원망[怨望]하는 때를 만났으니 좋지 않은 때에 너무 많은 재원이 소요된다는 문제점도 생각해야만 합니다. 탕춘성[[蕩春城] 공사에서 미진한 부분이 있더라도 다시 일을 추진하지 말고 천천히 뒤의 좋은 날을 기다려 대처하신다면 아마도 인심[人心]을 안정시키고 많은 문제점을 해결하는 도리에 맞을 것 같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성상[聖上]께서 재가하여 주십시오. [중략]
옥오재집[玉吾齋集]에서는, 한양[漢陽]의 도성[都城]과 북한산성[北漢山城]의 중심[中心]에 있는 탕춘성[[蕩春城]을 축조[築造]하는 역사[歷史]에 대하여, 당시[當時]의 지리적[地理的] 위치[位置]와 당시[當時]의 형편과 정세[情勢]에 관하여 자세하게 진언[進言]을 올리고 있다.
옥오재집[玉吾齋集]의 인판서민진후상서탕춘성역편부의[因判書閔鎭厚上書蕩春城役便否議]에서 말하고 있는 북한산[北漢山]과 한양[漢陽] 도성[都城]의 거리와 탕춘성[[蕩春城]에 대한 설명은 일치[一致]하고 있으며, 북한산성[北漢山城]이 그 위치位置]에 정확히 자리 잡고 있다.
이 탕춘성[[蕩春城]을 쌓는 곳에는 탕춘대[蕩春臺]가 있었다. 탕춘대[蕩春臺]는, 영조[英祖] 30년[三十年] 갑술[甲戌], 9월2일[九月二日] 무인[戊寅]에, 영조[英祖]의 명[命]으로 그 이름이, 연융대[鍊戎臺]로 고쳐지고 있다.
上曰 子曰 必也正名 蕩春臺之名不正。 旣設京營, 時或臨焉, 不可不釐正。 其更名曰鍊戎臺
성상[聖上]께서 말씀 하셨다. 공자(孔子)가 이르기를, 반드시 올바른 이름으로 바꾼다. 하였는데, 탕춘대[蕩春臺]의 이름은 바르지 않다. 이미 경영[京營]을 설치하고는 때때로 나아가기도 하니, 바로잡지 않을 수 없다. 이름을 다시 연융대[鍊戎臺]라고 고치도록 하라. 하였다.
한양[漢陽]의 북한산[北漢山]인 삼각산[三角山]에는, 고려[高麗]와 조선[朝鮮]의 황제[皇帝]들이 거동하여 국가[國家]의 안녕과 태평[太平]을 기도하고 복[福]을 기원하던 수 많은 고찰[古刹]들이 자리 잡고 있었다.
이 수 많은 사찰[寺刹]중에서 승가사[僧伽寺]에 대하여 살펴보기로 한다. 현재 한국[韓國]에서 설명하는 승가사[僧伽寺]에 대한 내용은 생략하기로 한다.
세종실록[世宗實錄]
지리지[地理志]
경기[京畿] 양주도로부[楊州都護府]
僧伽寺 在三角山南, 屬禪宗, 給田百四十五結
승가사[僧伽寺], 삼각산[三角山] 남[南]쪽에 있다. 선종[禪宗]에 붙이고 밭 1백 45결[結]을 주었다. [중략]
다산시문집[茶山詩文集]
승가사를 지나가며[歷僧伽寺]
일백 굽이 바윗길 끝없이 뻗었는데 百曲巖蹊細不窮
산허리 절간 하나 단풍에 기대어 있네 山腰禪閣倚丹楓
용사가 북으로 가자 큰 비석이 우뚝하고 龍師北過豐碑屹
옥불이 동으로 오니 대웅보전 드높구나 玉佛東來寶殿崇
時自燕京賜玉佛一軀。安于此寺
이때 연경[燕京에서 옥불 하나를 내려주어 이 절에 봉안하였다.
서울 장안 수많은 집 차가운 빗속이라면 萬室榱題寒雨裏
겹성의 성가퀴는 저녁 연기 속이로세 重城睥睨暮煙中
서산에 해는 지고 종소리 일어날 제 西峯日沒鍾聲起
높은 누각 위태롭고 떠가는 기러기 보내노라. 獨上危樓送遠鴻
문곡집[文谷集]
九秋之望。陪仲氏兼携晦仲,子輝。乘月訪僧伽寺。一宿而返。賦短律以記之
9월 15일 둘째 형님을 모시고 아울러 회중과 자휘를 데리고 달빛 비추는 밤중에 승가사[僧伽寺]를 방문하여 하룻밤을 묵고 돌아왔다. 단율을 지어 이 일을 기록한다.
좋은 절기 중양절 이후에 令節重陽後
네 사람 함께 멋진 약속하였지 佳期四子同
멧부리엔 높이 오솔길 하나 매달렸고 峯危懸一徑
사찰은 아득한 허공에 솟아 나왔는데 寺迥出層空
수많은 골짜기에 바람이 내려오고 萬壑風斯下
제천에 달이 가운데 떠 있구나 諸天月正中
그동안 평생 노닐던 곳 가운데 平生遊歷地
어디가 이보다 웅장하겠는가? 誰與此爲雄
백사집[白沙集]
重遊僧伽寺
승가사[僧伽寺]에서 거듭 노닐다.
거듭 오니 어느덧 한 해가 저물었는데 重來不覺歲崢嶸
우리 무리 삼인이 예전에 이 곳을 왔었네 吾輩三人昔此行
탑 위의 고황과는 구면이 남아 있는데 塔上古皇餘舊面
언덕 머리 새 제비는 봄의 소리를 짓누나 岸頭新燕作春聲
장안의 거마 소리는 땅에서 진동하고 長安車馬地中殷
강한의 파도 소리는 하늘 밖에 울리도다. 江漢波濤天外鳴
막걸리 석 잔 마시고 옷소매 떨치고 떠나니 白酒三杯拂衣去
산승은 다만 늙은 서생이라 말하누나 山僧只道老書生
甞與擇中,益之同遊。故及之
일찍이 택중[擇中], 익지[益之]와 함께 와서 놀았기 때문에 언급한 것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한성부[漢城府]
문수봉의 동쪽 가지가 형제의 두봉이 되고 또 남쪽으로는 구준봉[狗蹲峯], 백악산[白岳山]이 되며, 문수봉의 서쪽 가지가 칠성봉[七星峯]이 되고, 거기서 두 갈래로 나뉘어 떨어져서 나한[羅漢], 증봉[甑峯], 혈망[穴望], 의상[義相]의 여러 봉이 되어 중흥 수구[重興水口]에 이르며, 한 가지가 서[西]쪽으로 달려서 승가사[僧伽寺]의 비봉[碑峯]과 불암 향림사[佛巖香林寺]의 후봉인 백운봉[白雲峯]이 되며,
서[西]쪽으로 돌아서는 영취[靈鷲], 원효[元曉]의 두 봉이 되어 중흥 수구에 와서 멈춘다. [중략]
승가사[僧伽寺] 삼각산[三角山]에 있다. 고려[高麗]의 상서[尙書] 이오[李䫨]의 중수기[重修記]가 있다. 옛날 신라 낭적사[狼迹寺]의 중 수태[秀台] 어령대사[飫聆大師]의 성적[聖跡]이다. 삼각산 남쪽에 좋은 곳을 가려서 바위를 깨고 굴을 만들며, 돌을 깎아 대사의 도용[道容], [도통한 이의 성스러운 모습]을 본따 새겼다. 나라에 재난과 이변이 있으면 기도하여 재앙을 물리쳤는데, 소원이 이루어지지 않는 적이 없었다 한다. [중략]
완당전집[阮堂全集]
僧伽寺。與東籬會海鵬和尙
승가사[僧伽寺]에서 동리와 함께 해붕화상을 만나다.
그늘진 골짝에는 비가 항상 오는데 陰洞尋常雨
한송이 푸르러라 위태로운 저 봉우리 危峯一朶靑
솔바람은 불어서 탑 쓸어주고 松風吹掃榻
별을 길러 병으로 돌아 보내내 星斗汲歸甁
돌은 본래의 면목 입증한다면 石證本來面
새는 무자의 경을 참견하누나 鳥參無字經
좌부는 속절없어 박락해가니 苔趺空剝落
규전을 뉘가 다시 새길 것인가? 虯篆復誰銘
용헌집[容軒集]
僧伽寺。次孔漁村詩
승가사[僧伽寺]에서 공어촌의 시에 차운하다.
사찰이 바위 밑에 기댔는데 佛刹依巖底
천화가 설법 자리에 내렸네 天花落講筵
높은 자취 비석에서 찾아보고 高蹤尋碣石
맑게 들리는 샘물 소리 좋구나. 淸聽愛風泉
한 줄기 흰 물이 바다로 이어지고 一水白連海
푸르른 삼각산이 하늘로 솟아 있네 三峯靑揷天
앉아 있으면 속세 생각 끊어지니 坐來塵想絶
이로부터 불교에 귀의하려네 從此欲逃禪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
승가사[僧伽寺]
이 절을 들은 지 이미 오래라 此寺聞惟夙
제군들의 모임이 역시 훌륭하도다. 諸君會亦良
나무가 가지런해 평평히 가지를 내려다보고 樹齊平俯杪
별이 커서 가까이 빛을 휘어잡겠네 星大近攀光
석굴[石窟] 속의 부처는 무단히 웃는데 窟佛無端笑
봉우리의 비석[碑石]은 만고에 푸르구나 峯碑萬古蒼
서자의 퉁소 소리 듣고 나서 洞簫徐子捻
한밤중에 홀연히 서늘해지네 夜半倏生涼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
僧伽寺石像
승가사[僧伽寺]의 석상[石像]
三角山僧伽寺石窟。有石像。顔如老嫗。蒙頭之物。恰如儒家幅巾。背有石障。若蓮花。後刻太平四年甲子。案高麗史顯宗十五年甲子 [중략]
삼각산[三角山] 승가사[僧伽寺] 석굴[石窟]에 석상[石像]이 있는데, 얼굴이 늙은 할머니 같고 머리에 쓴 물건은 유가[儒家]의 폭건[幅巾]과 흡사하며, 등 뒤에 연꽃과 같은 석장[石障]이 있는데, 그 뒤에 ‘태평[太平] 4년[四年], 갑자[甲子], 고려[高麗] 현종[顯宗] 15년[十五年], 갑자[甲子]라 새겨져 있다. [중략]
行契丹年號。卽聖宗隆緖太平四年。而宋仁宗天聖二年也。距今庚子十三甲子。揔八百十七年。輿地勝覽。此爲秀台道人像 [중략]
상고하건대 이 거란[契丹]의 년호[年號]는, 요 성종[遼聖宗] 융서[隆緖]의 태평[太平] 4년[四年]이며, 송 인종[宋仁宗]의 천성[天聖] 2년[二年]이다.
지금의 경자년[庚子年까지 갑자[甲子]로 따져보면 13번의 갑자년[甲子年]이 들어 있어 모두 8백[八百] 17년[十七年]이 되었다. 여지승람[輿地勝覽]의 기록을 보면 이 석상[石像]은 수태도인[秀台道人]의 상[像]이라고 하였다. [중략]
동문선[東文選]
제 승가굴[題僧伽窟]
정항[鄭沆]
험준한 돌길에 구름을 밟고 올라오니 崎嶇石棧躡雲行
화려한 구조가 하늘에 닿아 화성[化城]과 같아라 華構隣天若化城
가을 이슬이 보슬보슬 천 리가 상쾌하고 秋露輕霏千里爽
저녁 해는 멀리 한 줄기 강[江]에 잠겼구나. 夕陽遙浸一江明
공중에 일렁거리는 이내는 향연을 연이었고 漾空嵐細連香穗
골짝에 우는 한가한 새는 풍경소리와 섞갈리네 啼谷禽閑遞磬聲
부럽구나, 도가 높은 저 승[僧]의 마음 可羨高僧心上事
세상 길 명리를 온통 다 있었거니 世途名利摠忘情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세종[世宗] 4년 임인[壬寅] 5월4일 경신[庚申]
遣右議政鄭擢于興天寺, 谷山府院君 延嗣宗于僧伽寺, 設藥師精勤。 判左軍都摠制府事李和英于開慶寺, 設觀音精勤
우의정 정탁[鄭擢]을 흥천사[興天寺], 곡산 부원군[谷山府院君)] 연사종[延嗣宗]을 승가사[僧伽寺]에 보내어 약사 정근[藥師精勤]을 배설하고, 판좌군도총제부사[判左軍都摠制府事] 이화영[李和英]을 개경사[開慶寺]에 보내어 관음 정근[觀音精勤]을 배설하였다.
무명자집[無名子集]
승가사[僧伽寺]
도성 북쪽 창의문[彰義門] 걸어나갈 때 步出彰義門
두세 벗이 나와 함께 따라나섰네 從我二三子
저 멀리 북한산성 바라다보니 遙望北漢城
세 봉우리 웅장하게 나누어 섰네 三角儼分峙
한양성[漢陽城성]은 굳건한 금성탕지[金城湯地]니 金湯壯國都
아름다운 산하란 말 참이로구나 信乎山河美
봄바람이 옷자락을 불어 날리니 春風吹我衣
담소하며 걷다가 멈추다 하며 談笑行且止
깊은 골짝 만개한 꽃 찾아도 보고 / 窈窕尋繁花
구불구불 흐르는 물 따라가누나 逶迤逐流水
세검정[洗劍亭]에 올라가 옷깃 헤치니 披襟洗劍亭
강개하여 비장한 노래 나오네 慷慨悲歌起
흐르는 물 깨끗하고 바위는 흰데 泉潔復石白
곳곳에서 많이들 종이 만드네 處處多造紙
반나절 한가한 틈을 냈더니 偸得半日閑
그윽한 경치가 끝이 없구나 幽賞殊未已
울퉁불퉁 높고 낮은 골짜기 바위 谷巖互出沒
험하게 육칠리 이어졌는데 崎嶇六七里
소나무 바위 잡아 높이 오르고 躋危攀松石
떨어질까 무서워 칡넝쿨 잡는다. 畏墜攬葛藟
사자고개[獅子嶺] 올라서자 陟彼獅子嶺
반 허공에 뜬 듯 如入半空裏
앞에는 만[萬] 길[丈]의 바위 있는데 前有萬丈巖
험준함이 어쩜 저리 이어지는지 陡起何峛崺
풍경 소리 구름가서 들려오더니 淸磬落雲際
사찰이 홀연히 나타나누나 梵宇忽入指
용마루가 허공으로 뻗어 서리고 蟠空亘甍棟
단청에 햇살 비쳐 선명하여라 耀日流金紫
감도는 돌 비탈길 위태한 잔도[棧道] 回磴接危棧
걸음 좁게 떼느라 한참 걸리네 促步輒移晷
사다리를 부여잡고 누각 오르니 攀梯試登樓
무서워서 아래를 볼 수가 없구나. 不可俯以視
사람이 뺏었도다 하늘의 조화 人工奪天造
집터 없던 이곳에 누각 서다니 無地而有此
바위 깎아 달구지로 실어 나를 제 斲石輦車牛
백성 모는 채찍질 낭자했으리 驅民任鞭箠
층층 대 높이는 몇 백 척[尺] 이던가? 層臺幾百尺
우뚝이 두른 둘레 천 치(雉)나 되네 屹如列千雉
그 위에 서 있는 장수전[長壽殿]이여 上有長壽殿
아스라이 보이네 화려한 모습 縹緲極華侈
단청이 사람의 눈길 빼앗고 丹碧奪人目
처마는 꿩 날개요 몸체는 화살 如翬更如矢
귀퉁이 네 곳에 풍경 매다니 四角懸風箏
공중에서 아름다운 음악 들리네 空中聞宮徵
문을 열자 불상이 안에 있는데 開門見佛龕
눈이 부셔 지척을 분간 못하네 眩晃迷尺咫
아로새긴 천정엔 황금 구슬들 鏤屋簇金珠
좌탑엔 비단 요가 깔려 있누나 築榻堆錦綺
향그런 향등(香燈)을 쌍쌍 매달고 雙懸沈香燈
술 장식을 여기저기 드리웠으며 流蘇交垂繠
위에는 황제의 시 적혀 있는데 上寫皇帝詩
기교 부려 단장하고 아로새겼네 粧刻騁奇技
옥 불상이 유리 갑 속에 있는데 玉佛琉璃匣
정교하고 교묘함이 비할 데 없네 巧妙誠無比
구경 오는 사람들 다투어 모여 遊人競來萃
날마다 시장처럼 시끄러운데 日日閙如市
절에 사는 중들이 세력을 부려 居僧盡豪健
믿는 구석 있는 듯 큰소리 치네 咆哱如有恃
내가 보고 해괴한 생각이 들어 我見駭心目
까닭이 무엇인지 물어봤더니 借問此何以
어떤 객이 나에게 말해주기를 有客向余言
“그대가 사정을 모를 뿐이네 顧君不知耳
이 절의 이름이 승가사[僧伽寺]인데 寺名曰僧伽
전에는 작은 암자 여기 있었네 小菴舊在是
작년에 나라의 경사를 맞아 前年遇邦慶
사신이 중국에 다녀왔는데 中國往有使
저기 저 불상과 한 쌍의 향등 維佛與彼燈
바로 그때 황제가 내린 것이네 蓋乃承皇旨
중국은 불교를 숭상하기에 其俗尙浮屠
이런 물건 내려서 복을 빈 거네 錫茲祈福祉
사신이 받들어 돌아와서는 星軺奉以歸
황제의 은혜를 입었다 했네 謂是恩所被
마침내 이곳으로 터를 정하여 遂焉就斯地
저처럼 웅장하게 사우[寺宇]를 짓되 開築乃如彼
팔로[八路]의 물력을 모두 사용해 用此八路力
천 년토록 길이길이 전하게 했소 將以垂千祀
이 말에 놀랍고 한탄스러워 我聞驚且嘆
사우[寺宇]를 응시하며 서성거렸네 注目頻徙倚
재물을 허비하고 백성 해치기 糜財與病民
불교처럼 심한 것 다시 없으니 未有如佛氏
명산에 연이은 높은 절들이 名山巍相望
예로부터 역사서에 기록되었네 終古書諸史
생각이나 했으랴 서역[西域]의 불상 豈意西方像
멀리 동해[東海] 끝으로 건너올 줄을 遠來東海紀
사람들은 새롭고 기이한 걸 좋아하여 人情艶新異
먼 데서 가까이서 물결처럼 몰려와서 奔波共遐邇
나는 듯한 전각[殿閣]을 공경히 바라보고 飛閣聳觀瞻
남자고 여자고 앞 다투어 절을 하네 男女爭拜跪
푸른 기와 흰 섬돌이 어우러지니 碧瓦映雪砌
구름으로 착각하고 파도로 착각하네 雲譎復波詭
애처롭지 않으랴 수많은 백성 蒼生豈不哀
중들만 저희끼리 기뻐하누나 緇徒自相喜
부질없이 대국[大國]의 보배 전해져 空傳大國寶
영원히 우리나라 수치 되겠네 永作小華恥
이 같은 토목공사 하지 않아도 雖微爲此役
불상을 두기에는 충분했으리 亦足置之矣
더구나 기존의 사우 있는데 況有故佛殿
화려하게 지을 것 무에 있었나 何必事侈靡
조정에선 아직도 망설이는데 廟謨尙媕娿
임금님 깨우칠 사람 없구나 無人警丹戺
미천한 나로서는 말할 수 없어 微賤戒出位
속절없이 안타깝게 속만 태우다 耿耿徒爲爾
저물녘에 읊조리며 돌아오는데 沈吟薄暮歸
산 달이 저 아래서 떠오르누나 山月生衣履
승가사[僧伽寺] 석굴[石窟]로 가는 잔도[棧道]
승가사[僧伽寺] 석굴[石窟]의 암벽[岩壁]을 감싸고 흐르는 한줄기의 강
승가사[僧伽寺] 수태도인[秀台道人]의 신상[神像]
승가사[僧伽寺] 석굴[石窟]의 중앙 석실[石室]
동문선[東文選]
三角山重修僧伽崛記[李預]
삼각산[三角山] 중수[重修] 승가굴기[僧伽崛記]
이예[李預]
盖聞恒星匿彩。彰異兆於大虛。滿月端容。耀休光於賢劫。力摧魔外之衆。獨作天人之師。曁㲲身之旣灰。憫世眼之將滅 [중략]
대개 들으니 항성[恒星]의 숨은 빛은 허공에 이상한 징조를 나타내며, 둥근 달의 단아한 얼굴은 아름다운 광채를 현세[現世]에 비친다. 힘써 마귀의 무리를 배제하고 홀로 하늘과 인간의 스승이 되었다. 인간으로의 몸이 장차 사라진 뒤에 세상 사람들이 바라볼 만한 것이 없어질 것을 민망하게 여기었다.
故金人之體飛漢夢以告來。貝葉之詮傳竺乾而重譯。憑玆衆正。導彼群生。若聞雷而解聾。如執熱鎰濯。繇是列刹相峙。丕冒幅員之區。神僧閒生。漸弘調御之法
그러므로 금으로 만든 불상은 한(漢)나라 황제의 꿈에 날아와서 들어와 고하였고, 패엽[具葉]에 기록한 불경의 말씀은 인도[印度]에서 전하여 거듭 번역되었다. 이러한 모든 법에 의하여 저 여러 중생을 인도 하였으니, 우레소리를 듣고 귀가 트이고 뜨거운 것을 잡았다가 물에 손을 넣는 것과 같다. 이로 인하여 여러 사찰이 서로 솟아 있어 세계의 방방곡곡에 크게 널려 있으며, 거룩한 중이 종종 나타나서 차츰 지도하는 방법을 넓혔다.
至如康會踐吳王之殿。道安登晉帝之車。石趙圖澄。姚秦羅什。則僧稠上杰。梁朝乃寶誌明公。皆化跡多奇。亦聲名甚偉 [중략]
이를테면 강회[康會]는 오왕[吳王]의 궁정에 들어갔고, 도안[道安]은 진제[晉帝]의 수레에 올랐다. 석씨[石氏]의 조([趙]나라에서는 도증[圖澄]이 있었고, 요씨[姚氏]의 진[秦]나라에서는 구마라집[鳩滅什]이 있었으니, 이들은 모두 승려 중에서도 가장 걸출한 인물이었다.
양대[梁代]의 보지명공[寶誌明公]은 모두 감화시킨 행적에 기이한 것이 많고, 또한 명성[名聲]도 매우 위대하였다.
然而生前沒後。濟品物以無殊。此土他方。罄歸依而不異者。卽李唐僧伽大師獨步矣。大師俗姓何氏。西域何國人也。年三十。振錫東遊。唐國時龍朔初。隷名於楚州龍興寺。後於泗州臨淮縣信義坊。乞地施標
그러나 생전과 죽은 뒤에 모든 사람을 제도함이 다름이 없고, 이 땅이나 다른 지방에서 귀의[歸依]하는 정성을 바침이 다르지 않은 사람은, 곧 이씨[李氏]의 당대[唐代]의 승가대사[僧伽大師] 한 분일 것이다. 대사가 세속에서 쓰던 성은 하씨[何氏]인데 서역[西城]의 어느 나라 사람이다. 나이 30에 지팡이를 휘두르고 동[東]쪽으로 당[唐]나라에서 놀았다. 이 때 용삭[龍朔] 초년에 초주[楚州] 용흥사[龍興寺]에 이름을 걸고 있다가, 후에 사주 임회현 신의방[泗州臨淮縣信義坊]에 토지를 구하여 표를 세웠다.
將立伽藍於其標下。握得故香積寺銘記。幷金像一軀。上有普照王佛字。遂立寺焉。景龍二年。中宗皇帝遣使迎師入內道塲。尊爲國師。帝及百官。執弟子之禮。以師事焉
그 표의 밑에다 절을 지으려 했는데 그 곳을 파다가 옛날 향적사명기[香積寺銘記]와 금불상 하나를 얻었는데, 불상 위에 보조왕불[普照王佛]이라는 글자가 있었다. 드디어 그 자리에 절을 세웠다. 경룡[景龍] 2년에 중종[中宗] 황제가 사절을 보내어, 대사를 대궐 안에 있는 도량[道場]으로 맞아들여 높여서 국사[國師]로 삼고, 황제와 백관이 제자로서의 예절을 행하고 스승으로 섬기었다.
尋出居薦福寺。常獨處一室。而頂上有穴。恒以絮窒之。夜則去絮。香從頂穴中出。煙氣滿房。非常芬馥。及曉香還頂中。又以絮窒之。師常濯足。人取其水飮之。痼疾皆愈
얼마 후에 천복사[薦福寺]에 나가서 거처하였다. 항상 방 하나에 혼자서 거처하는데 그 정수리 위에 구멍이 있어서 솜으로 막아 두었다가 밤이 되면 솜을 빼버렸다. 그러면 그 정수리 구멍에서 향기가 나와서 연기가 방에 가득하여 특이한 향내를 풍기었다. 새벽에 향기가 다시 정수리 속으로 들어가면 또 솜으로 이를 막아 두었다. 대사가 항상 발을 씻는데 사람이 그 물을 받아 마시면 고질병이라도 모두 나았다.
中宗一日於內殿。語師曰。京畿無雨。已是數月。願師慈悲。解朕憂迫。師乃將甁水汎灑。俄傾陰雲聚起。甘雨大降。中宗大喜。詔賜所修寺額。以臨淮寺爲名。師請以普照王寺爲名
중종[中宗]이 하루는 내전[內殿]에서 대사에게 말하기를, “서울에 비가 오지 아니한 것이 수 개월이 되었으니, 바라건대 대사는 자비를 베풀어 나의 고민을 해결해 주시오.” 하였다. 대사가 곧 병에 들어 있는 물을 가지고 널리 뿌렸더니, 별안간 검은 구름이 모이더니, 단비가 많이 왔다. 중종이 크게 기뻐하여 명을 내리어 수리한 절의 이름을 임회사[臨淮寺]라 하였더니, 대사는 ‘보조왕사[普照王寺]’라고 이름지어 달라고 청하였다.
盖欲依金像上字也。景龍四年三月二日。於長安薦福寺。端坐而化。神色如生。享年八十有三。在西土三十年。入中國五十二載
이것은 자기가 얻은 불상 위에 있는 글자대로 하려는 것이었다. 경룡[景龍) 4년 3월 2일에 장안[長安] 천복사[薦福寺]에서 단정하게 앉아서 죽었는데, 얼굴빛이 살아 있는 것과 같았다. 향년[享年] 83세로 서역[西域]에서 30년, 중국[中國]에 들어와서 52년이었다.
中宗卽今於薦福寺起塔。漆身供養。俄而大風欻起。臭氣徧滿於長安。中宗問曰。是何祥也。近臣奏曰。僧伽大師化緣在臨淮。恐是欲歸彼處。故現此變也
중종[中宗]은 곧 천복사에 탑[塔]을 세우고 시체에 옻칠을 하여 공양하려 하였더니, 별안간 큰바람이 일어나고 냄새가 장안에 가득히 퍼졌다. 중종이 묻기를, “이것이 무슨 좋은 징조냐.” 하니, 측근의 신하가 아뢰기를, “승가대사[僧伽大師]는 교화를 실시한 인연이 임회[臨淮]에 있기 때문에, 그곳으로 돌아가려 하여 이러한 변을 나타낸 듯합니다.” 하였다.
中宗默然心許。其臭頓息。頃刻之閒。奇香遍洽。卽以其年五月。送至臨淮。起塔供養。卽今塔是也。中宗別勑度弟子慧岸慧儼木义三人。各賜衣鉢。令嗣香火
중종[中宗]은 잠자코 마음속으로 그렇게 해야겠다 승낙하였더니, 그 냄새가 갑자기 없어지고 잠깐 사이 기이한 향기가 두루 퍼졌다. 곧 그 해 5월에 임회[臨淮]로 보내어 탑[塔]을 세우고 공양하였으니, 현재 있는 탑이 그것이다. 중종은 때로 명을 내리어 제자인 혜안[慧岸], 헤엄[慧儼], 목의[木义] 세 사람에게 도첩[度牒]을 주고 각기 가사[衣]와 바리때[鉢]를 주어 그의 향화[香火]를 받들게 하였다.
後問萬回師曰。僧伽大師何人耶。萬回曰。是觀音化身也。如法華經云。應以比丘身得度者。卽皆現之而爲說法。此則是也
뒤에 만회[萬回]대사에게 묻기를, “승가대사[僧伽大師]는 어떠한 사람이냐.” 하니, 만회는 말하기를, “이는 관음보살의 화신입니다. 법화경[法華經]에 이르기를, ‘마땅히 비구[比丘]의 몸으로 제도하는 사람은 곧 모두 그대로 나타내어 설법[說法]을 한다.’ 하였으니, 이것이 바로 그러한 것입니다.” 하였다.
大宋有朝散大夫蔣之奇。秘書著作郞柳紳。天壽寺大師贊寧。各撰大師傳。中條山居士辛崇所集大師行狀三十六條。皆有靈異。竝印行於世。故此不錄焉
송대[宋代]에 조산대부[朝散大夫] 장지기[蔣之奇]와 비서[秘書] 저작랑[著作郞] 유신[柳紳]과 천수사[天壽寺] 대사[大師] 찬녕[贊寧]이 각기 대사의 전기를 썼고, 중조산거사[中條山居士] 신숭[辛崇]이 편집한 대사의 행장[行狀]이 36개 항목인데, 모두 신령하고 기이한 행적이 있었다. 모두 세상에 간행되었으므로 여기에는 기록하지 않는다.
案崔公致遠文集。昔有新羅代狼迹寺僧秀台。飫耹大師之聖跡。尋選勝于三角山之南面。開巖作窟。刻石摸形。大師道容。益照東土
최치원[崔致遠] 공[公]의 문집[文集]을 보면, “옛날 신라[新羅] 시대에 낭적사[狼迹寺]의 승[僧] 수태[秀台]가 대사의 거룩한 행적을 익히 듣고, 삼각산[三角山] 남[南]쪽에 좋은 장소를 골라 바위를 뚫어 굴을 만들고, 돌을 조각[彫刻]하여 얼굴을 묘사하니, 대사의 얼굴이 더욱 우리 나라에 비치었다.
國家如有乾坤之變。水旱之災。凡所可疑之事。禱以禳之。無不立應。故遣使春秋設齋各三日。歲杪兼獻襯衣。用爲恒例。孰云乎去聖愈遠。咸嘆乎旣明且慈
국가[國家]에 천지의 재변이 있을 때나 수재나 한재 등 모든 의심스러운 일이 있을 때에, 기도를 올려 이를 물리치면 그 자리에서 응답을 받지 않은 적이 없었다. 그러므로 사절을 보내어 봄과 가을에 3일씩 재[齋]를 베풀고, 연말에는 아울러 임금의 옷을 바치는 것을 정상적인 규례로 삼았다.” 하였으니, 성인과의 거리가 더욱 멀어졌다는 말을 누가 할 수 있겠는가. 밝으시며 또 인자함을 모두들 감탄하도다.
至如無兒婦。稽顙而祈。卽生良㣧。失馬翁淪誠以白。還得舊驂。告病苟哀。蟻榻之鬪聲忽息。求官儻切。鷺庭之滯迹俄翔。或乞監而海客炙來。或請帽而京姬製獻。其餘神驗。不可殫論
자식 없는 여자가 절하며 기원하면 곧 훌륭한 아들을 낳으며, 말을 잃은 노인이 정성을 다하여 고하면 바로 잃었던 말을 찾는다.
병든 사람이 애절히 간구하면 병상에서 신음하던 소리가 곧 그치며, 벼슬을 구하는 사람이 간절히 원하면 조정에서 막혔던 벼슬길이 바로 트인다. 소금을 구하면 바닷가의 사람이 구워 가지고 오기도 하며, 갓을 원하면 서울의 여자가 만들어 바친다. 그 밖의 신기한 경험은 이루 다 말할 수 없다.
故我太祖開國之後。歷代之君。皆親瞻禮焉。彼唐有九帝駕幸淸涼山。歸仰文殊菩薩。卽可仁日而語矣
그러므로 우리 태조[太祖]께서 나라를 세우신 뒤에 역대[歷代]의 임금들이 모두 친히 여기에 와서 예[禮]를 올리셨다. 저 당[唐]나라의 아홉 황제가 청량산[淸涼山]에 가서 문수보살[文殊菩薩]에게 귀의한 것과 같다고 볼 수 있다.
大安六年。宣王駕幸詣窟修齋。施納寶物。以致敬焉。重瞳俯回。十里周覽。梁紋壁繪。凝野馬以頗昏。瓦縫簷牙。被▣邪而半壞。特命龜山寺住持禪師領賢。權住神穴寺。專掌重修之務
대안[大安] 6년 선종[宣宗]께서 행차하시어, 굴에 나아가서 재를 올리고, 보물을 희사하시어 공경을 극진히 하셨다. 눈을 돌리어 10리[十里]를 돌아보니 들보의 채색과 벽의 그림은 먼지가 결어서 시커멓게 되었고, 기왓장의 이음새와 처마의 추녀는 피해를 입어 반쯤 무너졌다. 특별히 귀산사[龜山寺]의 주지[住持]인 선사[禪師] 영현[領賢]에게 명[命]하여, 임시로 신혈사[神穴寺]에 거주하면서 다시 수리할 사무를 맡게 하셨다.
賢公擇工也。得般爾之巧手。度木也取豫章之良材。俾執風斤。勉施日力。奉晬容而不動。粧聖窟以增華。鹿苑可期。鷲峯無遠
영현공[領賢公]은 목수는 옛날 반이[般爾]와 같은 우수한 사람을 선택하고, 재목은 예장[豫章]과 같은 좋은 나무로만 골랐다. 곧 연장을 잡고 날마다 공사를 힘써 시켰다. 석상[石像]은 잘 받들어 움직이지 못하게 하고, 모신 굴은 단장을 베풀어 화려함이 증가되었다. 부처님이 계시던 녹원[鹿園]과 영취산[靈鷲山]과도 비슷한 듯하였다.
仍命臣撰重修記而未奏。曁壽昌五年秋。我主上命有司。備車駕與王妃太子及祐世僧統倂主上命有司。備車駕與王妃太子及祐世僧統倂兩府群僚。千從萬騎。雲委霧合。匝地盈山
인하여 신[臣]에게 명[命]하여 중수[重修]한 데 대한 기[記]를 지으라 하셨는데 미처 나라에 아뢰지 못했었다. 수창[壽昌] 5년 가을에 우리 임금께서 사무 담당관에게 명[命]하여 거가[車駕]를 준비하시고 왕비[王妃], 태자[太子] 및 우세승통[祐世僧統]과 양부[兩府]의 여러 관료를 데리고 임어[臨御] 하시니, 천여[千餘]명의 승려[僧侶]와 일만[一萬]의 기마[騎馬]가 구름이 모인 듯, 안개가 어울리듯 땅에 가득하여 산을 채웠다.
行幸到窟設齋。仍獻白銀香椀手爐各一事。金剛子水精念珠各一貫。純金束帶一腰。倂金花果繡幡茶香衣對錦綺等。用伸歸敬之禮
행차가 굴에 도착하여 재[齋]를 베풀고 인하여 백은으로 만든 향 그릇과 손에 드는 향로 한 벌 씩과 금강석, 수정으로 만든 염주[念珠] 한 벌씩과 순금제인 띠 한 벌을 금화과[金花果], 수번[繡幡], 차[茶] 향, 의복, 비단 등과 함께 바치시어 귀의[歸依]하시며 공경을 드리는 예절을 나타내시었다.
仍遣禪師領賢。揔監營作之事。以畢其功焉。賢師是新羅代窟主禪師如哲所創神穴寺先祖王師子膺之法㣧也
인하여 선사[禪師] 영현[領賢]을 보내어 공사 전체를 감독하여 그 일을 완성하게 하셨다. 영현[領賢] 선사[禪師]는 바로 신라[新羅] 시대에 이 굴의 주지였던 선사[禪師] 여철[如哲]이 창건한 신혈사[神穴寺]의 처음 조사[祖師]이며, 왕사[王師]인 자응[子膺]의 법윤[法胤]이다.
美矣崇眞之朝。營玆植福之田。足使聖日長明。仁風永覆者也。銖衣盡石。慈悲之室猶存。碧海飛塵。功德之林尙茂
훌륭하도다. 진리[眞理]를 숭상하는 조정에서 여기에 복[福]을 심는 터전을 경영하셨으니, 성[聖]스러운 태양은 오래도록 빛날 것이며, 인자한 바람은 영원히 퍼지게 되리로다. 가벼운 옷이 돌로 변할지라도 자비스러운 집은 오히려 남아 있을 것이며, 푸른 바다에 먼지가 날릴지라도 공덕[功德]의 수풀은 오히려 무성하리로다.
上謂曰。菩薩神通之化。招提修葺之由。宜刻貞珉。敻流後世。爰徵不敏之伎。俾演無疆之休。臣譽乏渾金。科叨片玉。逢時積幸。濫膺文苑之備員。避命無階。輒讚梵宮之能事。時乾統六年丙戌歲十月日。謹記
임금께서 이르시기를, “보살의 신통한 조화와 절을 수리한 내력을 마땅히 돌에 새기어 멀리 후세에 전하여 나의 불민[不敏]한 솜씨로도 영원한 아름다움을 누리게 하라.” 하시었다. 내가 재주가 부족하나 요행히 과거에 합격하였고, 다행히 좋은 시대를 만나서 외람되이 문장을 맡은 관료에 뽑혀, 명[命]을 회피할 길이 없어 곧 불가 사찰의 훌륭한 업적을 찬양하였다. 때는 건통[乾統] 6년 병술[丙戌] 10월[十月] 일[日] 삼가 기[記]를 적는다. [중략]
승가사[僧伽寺]는 신라[新羅] 시대에 창건된 이래로 고려[高麗]와 조선[朝鮮]의 제왕[帝王]들이 거가[車駕]를 멈추던 유서 깊은 대 가람 이었다.
삼각산[三角山]에 있었던 승가사[僧伽寺]에 대한 위의 여러 기록[記錄]에서 보듯이 승가사[僧伽寺]의 연혁[沿革]과 승가사[僧伽寺]에 얽힌 일화[逸話], 그리고 승가사[僧伽寺]의 지리[地理]와 자연환경[自然環境]에 대하여 자세히 기술[記述] 되고 있다.
반도[半島]의 서울 삼각산[三角山]에 있는 승가사[僧伽寺]는, 역사서[歷史書]에서 말하는 승가사[僧伽寺]가 아니다.
반도[半島]에 있는 승가사[僧伽寺]가 마치 역사[歷史]속의 승가사[僧伽寺]처럼 각인되고 있는데, 이처럼 조선사[朝鮮史]에 대한 역사[歷史]의 왜곡[歪曲]은, 종교[宗敎]를 가리지 않고 모든 영역[營域]에 걸쳐서 다방면적[多方面的]으로 진행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 승가사[僧伽寺]가 있는 지역은 서안[西安]에서 서북[西北]쪽으로 200여리 되는 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조선[朝鮮] 한양[漢陽]의 북한산성[北漢山城]이 자리 잡고 있는 삼각산[三角山] 주봉[主峰]의 서[西]쪽에 역사[歷史]의 기록[記錄]대로 승가사[僧伽寺]는 그 지역에 자리 잡고 있었다.
지금 현지에서는 순읍현[旬邑县] 마가하석굴[马家河石窟]이라고 부르고 있다. 잔도[棧道]를 따라 깍아지른 석벽[石壁]이 연이어져 있고, 수 많은 불상[佛像]들이 석굴[石窟]과 석벽[石壁]에 새겨지고 조각[彫刻]되어 있는데, 그 중의 많은 불상[佛像]들이 파손[破損]되어 있다.
지금은 화려했던 옛 승가사[僧伽寺]의 모습은 볼 수 없으나, 석굴[石窟]과 불상[佛像]들은 그대로 남아 있어서, 역사[歷史]의 기록[記錄]들을 새롭게 하고 있다.
승가사[僧伽寺]의 석굴[石窟]이 자리 잡고 있는 잔도[棧道]의 석벽[石壁] 아래로는 한 줄기의 강[江]물이 감돌며 흘러 나간다.
옛 선현[先賢]들이 남긴 승가사[僧伽寺]에 대한 시[詩]와 기록[記錄]들은, 역사[歷史]의 기록[記錄]과 더불어, 한 폭의 그림을 보는 것처럼 일치[一致]하고 있으며, 생생[生生]히 살아 움직이고 있음을 다시금 깊이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이 석굴[石窟]에는, 삼각산[三角山] 중수[重修] 승가굴기[僧伽崛記]에서,......... 옛날 신라[新羅] 시대에 낭적사[狼迹寺]의 승[僧] 수태[秀台]가 대사의 거룩한 행적을 익히 듣고, 삼각산[三角山] 남[南]쪽에 좋은 장소를 골라 바위를 뚫어 굴을 만들고, 돌을 조각[彫刻]하여 얼굴을 묘사하니, 대사의 얼굴이 더욱 우리 나라에 비치었다. 昔有新羅代狼迹寺僧秀台。飫耹大師之聖跡。尋選勝于三角山之南面。開巖作窟。刻石摸形。大師道容。益照東土 는, 승가대사[僧伽大師]의 석상[石像]이 있다고 하였다.
또 다른 기록[記錄]인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과,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 승가사[僧伽寺] 석상[石像]에서 말하는 그 신상[神像]은, 지금도 이 석굴[石窟]에 모셔져 있다. 이 신상[神像]의 석상[石像]에 대하여 알고 있는 사람들은, 이 석상[石像]을 신령[神靈]스럽게 모시며, 이 석상[石像]이 모셔져 있는 석굴[石窟]을 신감[神龛]이라고 부르고 있다.
이 지역 사람들의 석상[石像]에 대한 전언[傳言]을 들어보면, 석상[石像]이 한때 피도[被盗] 되었는데, 어느 날 석굴[石窟]로 다시 돌아와 있었다고 한다. 이 석굴[石窟]에 있는 불상[佛像]들이 고의적[故意的]으로 많이 파손[破損]되어 있는 것으로 미루어 보면, 그 들의 말을 모두 그대로 믿을 수는 없으나, 기이[奇異]하고 신비[神秘]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에서는, 삼각산[三角山] 승가사[僧伽寺] 석굴[石窟]의 석상[石像]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자세하게 그 모습을 설명하고 기록[記錄]으로 남겼다.
삼각산[三角山] 승가사[僧伽寺] 석굴[石窟]에 석상[石像] 이 있는데, 얼굴이 늙은 할머니 같고 머리에 쓴 물건은 유가[儒家]의 폭건[幅巾]과 흡사하며,. 三角山僧伽寺石窟。有石像。顔如老嫗。蒙頭之物。恰如儒家幅巾, 이렇게 말하고 있으며, 또 다른 기록[記錄]에서는, 저자[著者]가 승가사[僧伽寺] 석굴[石窟]의 석상[石像]을 직접 본 소회[所懷]를 말하고 있다.
이 석상[石像]의 모습은, 석상[石像]은 잘 받들어 움직이지 못하게 하고, 의 기록[記錄]으로 보아, 들어서 옮길 수 있도록 만들어진 석상[石像]이다.
여지승람[輿地勝覽]의 기록[記錄]에서는, 이 석상[石像]을 수태도인[秀台道人]의 상[像]이라고 했다고 하는데, 이 석상[石像]이 승가대사[僧伽大師]의 석상[石像]인지, 아니면 여지승람[輿地勝覽]에서 말하는 대로 수태도인[秀台道人]의 석상[石像]인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에서 말하고 있는, 얼굴이 늙은 할머니 같고 머리에 쓴 물건은 유가[儒家]의 폭건[幅巾]과 흡사하며, 顔如老嫗。蒙頭之物。恰如儒家幅巾,의 이 석상[石像]은 지금도 옛 승가사[僧伽寺]의 석굴[石窟]에 모셔져 있다.
조선[朝鮮] 황도[皇都]의 북[北]쪽에 있는 북한산[北漢山]은, 도성[都城]으로부터 100여리[百餘里] 떨어져 있었으며, 그 곳에 탕춘대[蕩春臺]와 탕춘성[蕩春城]이 있었고, 삼각산[三角山]을 주봉[主峰]으로 하여 사방 500여리[五百餘里]에 걸쳐 웅장[雄壯]게 솟아 오른 장엄[莊嚴]한 산[山]이었다.
북한산[北漢山]속에는 천하[天下]의 절경[絶景]이 곳곳에 자리 잡고 있다. 삼각산[三角山]은 고려[高麗] 시대에는 면악[面岳]으로 불리웠으며, 가마솥을 엎어 놓은 형상과 같다고 하여 복정산[覆鼎山]이라고도 했고, 세 개 주봉[主峰]의 산[山]모양이 나란히 솟아 있어 삼각산[三角山]이라고 불렀다.
삼각산[三角山]을 세 송이의 연화[蓮花]로 표현하고, 삼봉[三峯]으로 부르며, 세 송이의 꽃으로 비유[比喩]한 이면에는, 그럴만한 까닭이 있는 것이다.
지금도 현지[現地]에서는 삼각산[三角山]을 삼석산[三石山] 삼봉산[三峯山]으로 부르고 있는데, 삼각산[三角山]과 무슨 차이가 있을 것인가 ?
북한산성[北漢山城]은, 웅장[雄壯]하게 솟아오른 북한산[北漢山]인 삼각산[三角山]의 천[千]길 암벽[巖壁]으로 이어진 깍아지른 절벽의 암산[巖山]을 성곽[城郭]으로 의지하고 축조[築造]되어 있다.
천험[天險]으로 이루어져 나는 새도 오르지 못한다는 말은, 바로 이러한 북한산성[北漢山城]을 두고 이르는 말일 것이다.
역사[歷史]의 왜곡[歪曲]과 역사[歷史]의 거짓이 그 도[道]를 넘어 진실[眞實]과 거짓이 분별[分別]되지 않고, 사서[史書]들이 이루 헤아릴 수 없이 어지러워진 오늘에 이르러, 잃어버린 버린 우리의 역사[歷史]인 조선사[朝鮮史]의 본 모습을 찾아가는 길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역사[歷史]의 기록[記錄]을 따라 광활[廣闊]한 천하[天下]에서, 역사[歷史]의 기록[記錄]을 고증[考證]하고 증명[證明] 할 수 있는 유적[遺跡]과 유물[遺物]을 찿는 일도 또한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역사서[歷史書]에서 말하는 산천[山川]과 지리[地理]를 찾고, 자연환경[自然環境]과 민족[民族]과 풍습[風習]을 살피고, 이를 상고[相考]하여 거슬러 올라가 사서[史書]와 이를 대입하여 비교 고찰[考察]함으로서 고금[古今]에 이르는 역사[歷史]의 진실[眞實]과 사실[史實]을 들어내는 일이 어찌 수고롭지 않을 수 있겠는가 ?
초심[初心]을 잃지 않고 학문[學文]의 정도[正道]를 흐리지 않으며, 허[虛]와 실[實]을 구분하고, 그 뜻을 굳세게 하여 세파[世波]에 동요[動搖]되지 않으며, 고금[古今]의 변화[[變化]와 천리[天理]를 헤아려 사서[史書]를 읽고 깊이 살피며, 심중[心中]을 헤아려 청천[靑天]의 백일[白日]로 깨끗이 씻고, 천하[天下]를 한 눈에 굽어 살핀다면, 그 어찌 역사[歷史]의 본 모습을 꿰뚤어 볼 수 있지 않겠는가 ?
외세[外勢]가 만들어 놓은 거짓과 왜곡[歪曲]의 반도사관[半島史觀], 이 반도[半島]의 역사[歷史]속에서 변조[變造]와 조작[造作]이 끝없이 판을 치는 우리의 역사[歷史]는, 이제는 더 나락의 길로 떨어질 바닥조차도 없다.
반도사관[半島史觀]은 나라를 피폐[疲弊]하게 만드는 망국[亡國]의 사관[史觀]이다.
우리의 역사[歷史]는 반도[半島]에서 전개 되었으며, 약소국[弱小國]으로 중국[中國]이라는 나라들에게 늘 침략[侵略]만을 당하고, 중국[中國]의 속국[屬國]으로 늘 신하 노릇을 하였다.
태조[太祖] 이성계[李成桂]의 조선[朝鮮]은, 명[明]나라의 속국[屬國]과 같으며, 명[明]나라에게 온갖 굴욕[屈辱]을 당했고, 일제에게 병합되어 망[亡]하고 말았다.
조선[朝鮮]은 가난하고 힘이 없는 조그마한 반도[半島]의 나라였다.
이러한 역사[歷史]의 교육[敎育]을 어린 시절부터 받은 국민[國民] 들이 장차 어떠한 모습으로 성장[成長]할 것인가 ?
작금[昨今]에 벌어지고 있는 한국[韓國]의 비열[卑劣]하고 천박[淺薄]한 모습들은, 반도사관[半島史觀]의 거짓된 왜곡[歪曲]의 역사[歷史] 교육[敎育]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지금 서울의 인근에는 남한산성[南漢山城]이 있으며, 북한산성[北漢山城]은, 삼각산[三角山] 옆의 서울 속에 자리 잡고 있다.
조선[朝鮮]의 궁성[宮城]인 경복궁[景福宮]은 바로 북한산[北漢山] 기슭에 자리 잡고 있다.
한국[韓國]의 사학계[史學界]는 그 동안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
사서[史書]의 기록[記錄]에서 설명하고 있는 조선[朝鮮] 한양[漢陽]의 모습은, 치욕[恥辱]의 식민사관[植民史觀]인 반도사학[半島史學]이, 국가[國家]와 국민[國民]과 후세[後世]들에게 어떠한 짓을 하고 있는지를 극명[克明]하게 보여 주고 있다.
일만년[一萬年] 조선사[朝鮮史]의 본 모습이 하나하나 밝혀지면서, 들어나는 우리의 역사[歷史]는, 대륙[大陸]에 중심[中心]을 두고 천하[天下]를 호령하며 웅위[雄威]한 위대[偉大]하고 장엄[莊嚴]한 역사[歷史] 였다.
삼각산[三角山]과 북한산성[北漢山城], 사서[史書]에 기록된 북한산[北漢山]의 수 많은 폭포[瀑布]들, 북한산[北漢山] 흥망[興亡]의 역사[歷史]을 수[數] 천년[千年]간 지켜본 삼각산[三角山]의 대 가람들, 어느 것 하나 역사[歷史]에 기록되지 않음이 없고, 그러한 역사[歷史]의 기록[記錄]들은 모두 우리 역사[歷史]의 사실[史實] 이었다.
고구려[高句麗]의 남[南] 평양[平壤], 고려[高麗]의 남경[南京], 조선[朝鮮]의 경도[京都]인 한양[漢陽], 백제[百濟]의 한산[漢山], 고조선[古朝鮮]의 마한[馬韓] 지역 이었던 이곳에는, 남한산성[南漢山城]이 의연히 서 있다.
이 곳에는 지금도 병자[丙子]의 치욕[恥辱]을 증명[證明]하고 교훈을 주는 석비[石碑]가 서 있어, 조선[朝鮮]의 남한성[南韓城]임을 웅변[雄辯]해 주고 있다.
동방[東方]은 중화[中華]의 본체[本體], 요순[堯舜]의 중화[中華]는 아득한 고대[古代]의 사책[史冊]
영겁[永劫]의 시공[時空] 넘어온 중화[中華]는 삼한[三韓]에서 꽃을 피웠도다. 그 누가 중화[中華]의 화[華]를 반도[半島]라 웅변[雄辯] 하는가 ?
이미 사라진 흔적[痕迹]없는 중화[中華]의 중국[中國], 고금[古今]의 역사[歷史]는 말하고 있노니,
금세[今世]의 중화[中華]는 오직 조선[朝鮮]의 중화[中華] 일 뿐, 만리[萬里]에 남은 자취 오늘도 생생[生生] 하구나.
시간이 허락하는 대로 삼각산[三角山], 북한산성[北漢山城], 남한산성[南漢山城], 목멱산[木覓山], 서강[西江], 인왕산[仁王山], 아차산[峨嵯山], 목멱산[木覓山] 잠두봉[蠶頭峯] 삼전도[三田渡] 등, 한양[漢陽]을 고증하고 증명하는 역사의 생생한 모습과 사료[史料]들을 모두 소개할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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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안녕하세요!
정말 놀라운 일입니다. 현장을 직접 가보지 못한 관계로 오직 사서속에 기록된 내용만을 가지고 논해왔는데, 위와 같이 실제와 사서기록속의 내용이 일치한다는 것은........놀라운 일임에 틀림없으며, 조선사의 진실을 찾아야한다는 당위성에 채찍질을 더하게 합니다. 대륙조선! 사실은 그저 조선사이어야 함에도 대륙조선사라고 해야하는 작금의 사태가 안타까울 뿐입니다. 치욕의 삼정도비가 지금도 그대로 그곳에 보존되어 있다면 : 반도 서울 땅에 있다는 삼전도비는, 일제가, 매국사학자들이 조작해 만들었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이런 처죽일 놈들과 이 땅에서 함께 숨을 쉬고 있다니.....천벌을 받을 것입니다.
승가사는 사실 북한산에 운동 겸 해서 자주 올랐는데, 일선사와 함께 여러 번 그곳에 가봤습니다만, 이렇게 다양하고, 속깊은 내용이 있는 줄 몰랐습니다. 학자들의 문집과 여지승람등의 내용과 서안 근교의 승가사와 모든 것이 일치한다면 분명한 일이라고 생각됩니다. 정말 고생 많이 하셨습니다. 좋은 자료 염치없이 부탁드리겠습니다. 좋은 내용의 글을 조선사의 진실을 위해 부탁드립니다. 댁내 평안하시고, 늘 건강하시길 기원드립니다.
안녕 하십니까 ? 문무 선생님 근래에 펑안 하신지요.
조선의 한양에 대한 분명하고도 확실한 역사의 증거를 찾으면서 하나 하나 역사의 사료들을 축적해 오고 있었는데, 그 것이 여의치 못했습니다. 보일 듯 보일 듯 하면서도 연무에 가려지는 한양에 대한 역사의 증거는, 마지막으로 남한산성을 고증하여 증명 함으로서 조선의 경도에 대한 확실하고도 분명한 모습을 보게 되었습니다.
원전이 훼손되지 않은 역사의 기록들은 모두, 한치의 어긋남도 없는 역사의 사실이 아니겠습니까 ?
그저 성심을 다할 뿐 입니다.
문무 선생님께 다시 한번 깊은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댁내에 두루 평안 하시고, 항상 강건 하시기를 기원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