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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사상>, 2026년 봄호
한용운의 『님의 침묵』의 서지 사항 및 님 고찰
맹문재
1. 『님의 침묵』의 서지 사항
한용운의 『님의 沈默』은 1926년 5월 15일 인쇄해서 닷새 뒤인 20일 회동서관(滙東書館)에서 발간되었다. 판권의 실제 표기는 ‘大正十五年五月十五日 印刷’, ‘‘大正十五年五月二十日 發行’으로 되어 있다. ‘大正’은 ‘다이쇼’를 우리의 한자음으로 읽은 이름으로, 다이쇼 천황이 재위했던 시기의 연호로도 쓰인다. 다이쇼는 1912년에서 『님의 침묵』이 발간된 해인 1926년까지 재위했다. 일제의 한국에 대한 무단통치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뒤 시기이자 3·1운동을 기점으로 문화통치를 거쳤던 시기이기도 하다.
『님의 침묵』의 저작 겸 발행자는 한용운(韓龍雲)으로 주소는 경성부 안국동 40번지이다. 저자와 발행인이 동일인으로 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만해가 시집 발간을 주도한 것으로 보인다. 『님의 침묵』의 인쇄자는 권태균(權泰均)으로 주소는 경성부 공평동 55번지이다. 인쇄소는 대동인쇄주식회사로 주소는 인쇄자의 주소와 동일하다. 발행소는 회동서관으로 주소는 경성부 남대문통 1정목 17번지이다. 발행소의 전화번호는 광화문 1558번이고, 진체(振替) 구좌는 경성 712번이다. 시집의 정가는 1원 50전이고, 우세(郵稅)는 16전이다. 그리고 ‘복제 불허’라는 안내 문구가 판권에 있다.
『님의 침묵』의 크기는 13.2×19.2(cm)이고, 쪽수는 168쪽이다. 겉표지에는 특이하게 시집의 제목이 없고, 그 대신 속표지에 ‘님의 沈默’이라는 시집의 제목이 있다. 본문 이전에 「군말」이 나오는데, 시집의 제목과 마찬가지로 붉은색으로 인쇄되어 있다. 군말은 ‘군더더기 말’이란 의미로 ꡔ님의 침묵ꡕ의 서문에 해당한다. 작품을 쓴 동기나 의도를 겸손하게 설명해주는 것이다.
부산에서 활동하는 신정식 서지학자가 소장하고 있듯이 『님의 침묵』은 재판본이 간행되었다. 1934년 7월 27일(昭和 九年 七月 三十七) 인쇄해서 7월 30일 한성도서주식회사(漢城圖書株式會社)에 다시 발간한 것이다. 판권의 저작인은 한용운으로 주소는 경성부 안국동 42번지이다. 만해가 시집을 간행한 뒤 이사를 한 것으로 여겨진다. 재판본의 발행인은 한규화(韓奎相)로 주소는 경성부 견지동 32번이다. 재판본에 이르러서 저자와 발행인이 분리된 것을 알 수 있다. 인쇄인은 김진호(金鎭浩)인데 주소가 발행인과 동일한 것으로 보아 출판사가 인쇄소까지 운영했음을 알 수 있다. 시집의 정가는 1원 50전으로 초판본과 변화가 없다.
이렇듯 『님의 침묵』은 일제강점기에 두 번 간행되었다. 그렇지만 재판본은 “누군가 다소 무식한 사람이 매우 서둘러서, “맞춤법”에 따른답시고 다소 무원칙하게 고쳐 놓았고 띄어쓰기를 했고, 한자를 많이 빼버리든가 괄호 속에 넣기도 했다. 이 편집자의 무식은 “叙情詩人”을 “숙정시인(叔情詩人)”(9)으로 잘못 읽은 데서 잘 드러나며, 그의 무모한 서두름은 뒤의 시행을 앞에다 끼워 넣고 끝의 2행을 잘라버린(10)의 경우가 잘 말해 준다. 탈자, 오자도 굉장히 많다.”라는 다소 신랄한 비판이 있듯이 아쉬움이 크다. 이와 같은 상황으로 보면 재판본 시집은 만해가 교정을 보지 않은 것으로 짐작된다.
그런데 이 문제는 이후에 간행된 『님의 침묵』에 반복되어 나타났다는 점에서 심각함이 있다. “바로 이 “개정판”을 그대로 다시 찍어낸 제3판이 1950년 4월에 서울 진명(進明)문화사에서 나왔다. 거의 틀림없이 한성도서주식회사의 제2판(“개정판”)의 지형을 입수해서 찍어낸 것으로 보인다. 유감스럽게도, 바로 이 제3판이 수십 번 판을 거듭하여 70년대까지 <님의 沈默>의 애독자가 볼 수 있었던 거의 유일한 판본을 제공했으니, 한국 현대문학의 자료정리가 엉성함을 실감케 한다.”
1934년 한성도서주식회사에서 간행한 재판본 『님의 침묵』은 1950년 발행인이 이창익(李昌翼)으로 바뀌어 다시 제3판이 간행되었다. 이 시집은 출판사가 같기에 이전의 재판본의 지형으로 인쇄한 것으로 추측하기 쉽다. 그러나 두 시집을 비교하면 전혀 다른 책일 정도로 새로 조판한 것이다. 내용 전체를 새로운 맞춤법에 따라 고치느라 여러 가지 중대한 결함을 보인다. “一九五○年 本은 出版社가 再版과 동일한 漢城圖書이기 때문에 믿기 쉬운 책이지만, 절대로 믿어서는 안 될 책이다. 그러므로 一九五○年의 漢城圖書本은 詩集 『님의 沈默』의 텍스트를 作成하는 사람이 빠지기 쉬운 큰 함정이며, 텍스트를 망그러뜨리는 禍根이 아닐 수 없다.”라고 비판받을 정도로 큰 문제를 지니는 것이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한성도서주식회사에서 간행된 『님의 침묵』은 박문인쇄소, 대한인쇄공사, 서울신문사 등으로 인쇄소가 바뀌면서 계속 발행되었다.
『님의 침묵』은 서문에 해당하는 「군말」, 본문에 해당하는 88편의 시작품, 그리고 후기에 해당하는 「독자에게」 등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독자에게」를 “맨 끝에 수록된 “讀者에게”는 시가 아니라 그냥 “후기” 같은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나, 역시 틀림없는 시이다.”라고 시작품으로 보는 연구자도 있지만, 글의 내용과 형식으로 보았을 때 마무리 글 및 후기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독자에게」의 끝부분에는 ‘乙丑八月二十九日밤 ᄭᅳᆺ’이라는 날짜가 명기되어 있다. 1925년 8월 29일 「독자에게」를 씀으로 『님의 침묵』의 원고를 마무리했음을 밝힌 것이다. 만해는 백담사에서 시집 원고를 탈고한 뒤 곧바로 시집 발간에 들어갔다. 그 결과 8개월 뒤인 1926년 『님의 침묵』을 회동서관에서 발행한 것이다.
『님의 침묵』의 목차를 보면 ‘사랑’을 주제로 한 작품이 많이 수록되었음을 알 수 있다. 「사랑의 측량」「사랑의 존재」「사랑하는 까닭」「사랑의 불」「사랑을 사랑하야요」「사랑의 끝판」 등에서 보듯이 ‘사랑’을 작품의 제목으로 사용했다. 그뿐만 아니라 「이별은 미의 창조」「가지 마셔요」「자유 정조」「당신이 아니더면」「의심하지 마서요」「당신을 보았읍니다」「첫 키스」「당신의 편지」「떠날 때의 님의 얼골」「버리지 아니하면」「당신 가신 때」「당신의 마음」 등의 제목에서 보듯이 사랑을 연상하는 작품들이 많다. 결국 『님의 침묵』은 사랑하는 님을 노래한 시집으로 볼 수 있다.
3. 『님의 침묵』의 님
그동안 만해 한용운의 시 세계에 관한 주요 연구는 작품에 등장하는 ‘님’이 과연 누구인가를 규명하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 ꡔ님의 침묵ꡕ에 등장하는 님을 민족, 조선, 조국의 독립, 부처, 불교적 진리, 중생, 자연, 시적 대상, 마음, 불완전한 존재, 여성 등으로 보고 그 근거를 제시하고 의미를 고찰하는 것이었다. 어떤 연구는 님을 한 대상으로 보았고, 어떤 연구는 님을 한두 가지 대상으로 보았으며, 어떤 연구는 님을 모든 대상으로 보았다. 만해의 시에 등장하는 님이 누구인가를 단적으로 말하기는 어렵다. 어떤 작품에서는 부처로 읽히고, 어떤 작품에서는 조국이나 민족으로 읽히고, 어떤 작품에서는 중생으로 읽히는 등 작품마다 다양하게 다가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차원에서 「군말」의 이해는 중요하다.
「님」만 님이 아니라 기룬 것은 다 님이다. 중생이 석가의 님이라면 철학은 칸트의 님이다. 장미화의 님이 봄비라면 마치니의 님는 이태리다. 님은 내가 사랑할 뿐 아니라 나를 사랑하느니라.
연애가 자유라면 님도 자유일 것이다. 그러나 너희는 이름 좋은 자유의 알뜰한 구속을 받지 않느냐. 너에게도 님이 있느냐. 있다면 님이 아니라 너의 그림자니라.
나는 해 저문 벌판에서 돌아가는 길을 잃고 헤매는 어린 양이 기루어서 이 시를 쓴다.
―「군말」 전문
“군말”에서 “「님」만 님이 아니라 기룬 것은 다 님이다”라고 표명하고 있듯이 만해는 기룬 상대를 모두 님이라고 인식한다. 그립거나 아쉽거나 안쓰러운 존재들을 님으로 품는 것이다. 그리하여 만해는 중생이 석가의 님이고, 철학이 칸트의 님이고, 봄비가 장미화의 님이고, 이탈리아가 혁명과 통일을 위해 싸운 혁명가 마치니의 님이라고 그 예를 들고 있다. 종교적인 차원은 물론 철학적인 차원, 자연적인 차원, 정치적인 차원의 존재를, 즉 우주의 모든 존재를 망라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님」만 님이 아니라 기룬 것은 다 님이다.”라고 했을 때 앞에 놓인 님은 이성의 연인을 나타낸다. “기룬 것은 다 님이다”라고 이어지는 기술에 의해 부정되고 있지만, 연인으로서의 님이 우선적인 것은 분명하다. 이와 같은 면은 “연애가 자유라면 님도 자유일 것이다”라고 이어지는 기술에서도 확인된다. 자유의 우선적인 주체가 연애이고 그에 따라 님도 자유의 주체가 되고 있으므로, 이성에 대한 사랑이 자유의 토대가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해 저문 벌판에서 돌아가는 길을 잃고 헤매는 어린 양이 기루어서 이 시를 쓴다”라고 했을 때 “어린 양”은 “이름 좋은 자유에 알뜰한 구속을 받”고 있는 이성의 연인이 된다. 결국 만해는 “사랑”하는 연인을 그리워하고 안쓰러워하고, 그리고 “님은 내가 사랑할 뿐 아니라 나를 사랑”한다고 믿고 시를 쓴 것이다. 만해는 사랑하는 연인에 대한 그 마음을 확장시켜 조국의 독립은 물론 조선, 부처, 중생, 불교적 진리, 자연, 마음, 시적 대상 등을 사랑한 것이다.
오서요 당신은 오실 때가 되었어요 어서 오서요
당신은 당신의 오실 때가 언제인지 아십니까 당신의 오실 때는 나의 기다리는 때입니다
당신은 나의 꽃밭에로 오서요 나의 꽃밭에는 꽃들이 피어 있습니다
만일 당신을 쫓아오는 사람이 있으면 당신은 꽃 속으로 들어가서 숨으십시오
나는 나비가 되어서 당신 숨은 꽃 위에 가서 앉겠습니다
그러면 쫓아오는 사람이 당신을 찾을 수는 없습니다
오서요 당신은 오실 때가 되었습니다 어서 오서요
당신은 나의 품에로 오서요 나의 품에는 보드라운 가슴이 있습니다
만일 당신을 쫓아오는 사람이 있으면 당신은 머리를 숙여서 나의 가슴에 대십시오
나의 가슴은 당신이 만질 때에는 물같이 보드랍지마는 당신의 위험을 위하여는 황금의 칼도 되고 강철의 방패도 됩니다
나의 가슴은 말굽에 밟힌 낙화가 될지언정 당신의 머리가 나의 가슴에서 떨어질 수는 없습니다
그러면 쫓아오는 사람이 당신에게 손을 댈 수는 없습니다
오서요 당신은 오실 때가 되었습니다 어서 오서요
당신은 나의 죽음 속으로 오서요 죽음은 당신을 위하여의 준비가 언제든지 되어 있습니다
만일 당신을 쫓아오는 사람이 있으면 당신은 나의 죽음의 뒤에 서십시오
죽음은 허무와 만능이 하나입니다
죽음의 사랑은 무한인 동시에 무궁입니다
죽음의 앞에는 군함과 포대가 티끌이 됩니다
죽음의 앞에는 강자와 약자가 벗이 됩니다
그러면 쫓아오는 사람이 당신을 잡을 수는 없습니다
오서요 당신은 오실 때가 되었습니다 어서 오서요
―「오서요」 전문
위의 작품의 “님”은 이성적인 연인의 존재를 넘어선다. 그와 같은 면은 “죽음의 앞에는 군함과 포대가 티끌이 됩니다”라는 구절에서 확인된다. “죽음의 앞에는 강자와 약자가 벗이 됩니다”라는 데서도 마찬가지이다. 따라서 “님”을 다른 존재로 확대할 수 있는데 조국의 독립으로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이와 같은 관점으로 보면 작품의 화자가 “오서요 당신은 오실 때가 되었어요 어서 오서요”라고 부르는 목소리는 매우 간절하다. 민족의 한 구성원으로서 조국의 독립이 올 때가 되었으니 기꺼이 맞이하려고 하는 절실한 자세인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일제의 탄압을 이겨내고 조국의 광복이 이루어지리라고 전망하는 것이기도 하다. 화자의 그 희망은 “당신은 나의 죽음 속으로 오서요 죽음은 당신을 위하여의 준비가 언제든지 되어 있습니다”라는 자세를 보이고 있기에 가능해 보인다.
위와 같이 만해는 님과의 이별에 대해 슬퍼하거나 원망하지 않고, 언젠가는 다시 만날 것이라고 노래했다. 김소월이 님과의 이별을 묵묵히 받아들이면서도 절대로 떠나보내지 않겠다는 마음을 내보였다면 만해는 이별하는 님을 원망하지 않았다. 소월이 떠나가는 님을 체념하고 심지어 헌신적으로 축원하면서도 이별의 정한을 애절하게 노래했다면 만해는 이별하는 님을 기꺼이 포용한 것이다. “님은 갔지마는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님의 침묵」)다고 여기고 님과의 재회를 노래한 것이다.
만해의 님을 향한 사랑은 불교적 진리인 공(空)의 세계와 마찬가지로 눈으로 볼 수 없고 손으로 만져볼 수도 없다. 불립문자(不立文字)의 세계여서 마음으로만 깨달을 뿐 말이나 글로 나타낼 수 없는 것이다. 그렇지만 만해는 이별한 님에 대한 사랑을 의심하지 않고 품었다. 자연인으로서, 시인으로서, 승려로서, 그리고 독립운동가로서 돌아올 님을 확신하며 기꺼이 노래한 것이다.
맹문재
시론 및 평론집으로 『한국 민중시 문학사』 『시학의 변주』 『만인보의 시학』 『여성성의 시론』 『시와 정치』 『현대시의 가족애』 등. 안양대 국문과 교수.
【한용운 시인 연보】
1879(1세)
8월 29일 충청남도 홍성군 결성면 성곡리 491번지에서 아버지 한응준과 어머니는 온양 방씨(方氏) 사이에서 둘째아들로 태어나다. 이름은 유천(裕天).
1884년(6세)
향리에서 한문을 배우다.
1892년(14세)
전정숙(全貞淑)과 혼인하다.
1896년(18세)
글방의 선생으로 아이들을 가르치다. 명성황후 시해 소식이 전해지자 홍주에서 일어난 의병 투쟁에 가담하다.
1897년(19세)
의거의 실패로 피신하려고 고향을 떠나다.
1899년(21세)
강원도 인제군 설악산의 백담사 등지를 전전하다. 세계 여행을 계획하고 러시아의 블라디보스토크까지갔으나 여의치않아 귀국하다.
1904년(26세)
고향 홍성으로 내려가다. 12월 21일 맏아들 보국(保國) 태어나다(한국전쟁 때 행방불명).
1905년(27세)
1월 26일 백담사에서 승려가 되어 김연곡(金蓮谷) 스승에게 득도하다. 승려 이름(법명)은 용운(龍雲), 승려 아호(법호)는 만해(萬卍·海).
1908년(30세)
4월 일본의 교토, 도쿄 등을 다니며 일본의 불교계와 새로운 문물을 시찰하다. 귀국해일제로부터 개인 및 사찰 소유의 토지를 지키려는 의도로 서울에 경성명진측량강습소(京城明進測量講習所)를 개설하고 소장에 취임하다.
1909년(31세)
7월 30일 강원도 표훈사(表訓寺) 강사로 취임하다.
1910(32세)
9월 20일 경기도 장단군 화산강숙(華山講塾) 강사로 취임하다.
1911년(33세)
박한영, 진진응, 김종래 등과 순천 송광사 및 동래 범어사에서 승려 궐기대회를 개최하고 한일불교동맹 조약 체결을 분쇄하다. 범어사에 조선 임제종(臨濟宗) 종무원을 설치하여 3월 16일 관장으로 취임하다. 망국의 울분을 참지 못하고 만주로 가 독립 지사들과 만나 독립운동의 방향을 논의하다.
1913년(35세)
박한영, 장금봉 등과 불교종무원을 창설하다. 5월 19일 통도사 강사로 취임하다. 5월 25일『조선불교유신론』(불교서관)을 발행하다.
1914년(36세)
4월 30일 경전을 대중화하기 위해『불교대전』(범어사) 발행하다. 8월 조선불교회 회장에 취임하다.
1915(37세)
영남 및 호남 지역의 사찰을 순례하며 강연회를 열다. 10월 조선 선종 중앙포교당 포교사로 취임하다.
1917년(39세)
4월 6일 『정선 강의 채근담(精選講義菜根譚)』(신문관) 발행하다.
1918년(40세)
9월 월간지『유심(惟心)』을 창간하고 편집 겸 발행인이 되다. 창간호에 논설 4편과 신시 「심(心)」발표하다. 12월 3권 발행하고 중단하다.
1919년(41세)
1월 미국 윌슨 대통령이 민족자결주의를 제창함에 따라 여러 인사들과 조선 독립을 깊이 논의하다. 최남선이 작성한「독립선언서」의 자구를 수정하고 공약 3장을 첨가하다. 3월 1일 서울 명월관 지점에서 33인을 대표해 독립선언을 연설한 뒤 일제의 경찰에 체포되다. 7월 10일 서대문형무소에서 일본 검사의 신문에 대한 답변으로「조선독립의서」를 제출하다. 8월 9일 경성지방법원 제1형사부에서 3년 징역형 판결을 받다.
1920년(42세)
일제가 3·1운동에 대한 참회서를 제출하기를 회유하나 거부하다.
1921년(43세)
12월 22일 출소하다.
1922년(44세)
3월 24일 법보회(法寶會)를 발기하다. 조선 학생 및 청년들에게 독립사상 등을 강연하다.
1923년(45세)
1월 2월 조선 물산 장려운동을 지원하다. 4월 민립대학 설립운동을 지원하는 강연하다.
1924년(46세)
10월 24일 조선불교청년회 총재에 취임하다.
1925년(47세)
6월 7일 강원도 인제에 있는 오세암에서「십현담주해(十玄談註解)」를 탈고하다. 8월 29일백담사에서「님의침묵」을 탈고하다.
1926년(48세)
5월 15일 『십현담주해』(법보회) 발행하다. 5월 20일『님의 침묵』(회동서관) 발행하다. 12월「가갸날에대하여」를 『동아일보』에 발표하다.
1927(49세)
1월 신간회를 발기하다. 5월 신간회 중앙집행위원 겸 경성지회장에 선출되다.
1928년(50세)
『건봉사 및 건봉사 말사 사적』(전봉사) 발행하다.
1929년(51세)
11월 조병옥, 송진우, 김병로 등과 광주학생 의거를 전국적으로 확대하는 민중대회를 열다.
1931년(53세)
6월 『불교』지를 인수하여 사장으로 취임하다. 8월 「불교 청년총동맹에 대하여」, 9월 「국보적 한글 경판의 발견 경로」, 10월 「조선 불교의 개혁안」등 많은 글을 『불교』에 발표하다. 9월 24일 윤치호, 신흥우 등과 나병구제연구회를 조직해서 여수, 대구, 부산 등지에 간이수용소 설치를 결의하다. 12월 김법린, 김상호, 이용조, 최범술 등이 조직한 청년 법려 비밀 결사 ‘만당(卍黨)’의 영수로 추대되다.
1932년(54세)
「원숭이와 불교」를 비롯해 많은 글을 『불교』에 발표하다.
1933년(55세)
유숙원과 재혼하다. 「한글경 인출을 마치고」를 비롯해 많은 글을 『불교』에 발표하다. 벽산 스님이 집터를 기증하고 박광 등의 성금으로 성북동에 심우장(尋牛莊)을 짓다.
1934년(56세)
9월 1일 딸 영숙(英淑) 태어나다.
1935년(57세)
4월 9일∼1936년 2월 4일 장편소설 「흑풍」을 『조선일보』에 연재하다.
1936년(58세)
장편소설 「후회」를 『조선중앙일보』에 연재하는데 신문 폐간으로 50회로 중단하다. 단재 신채호의 묘비를 세우다. 7월 16일 정인보, 안재홍 등과 다산 정약용 타계 백년 기념회를 개최하다.
1937년(59세)
3월 1일∼11월 재정난으로 휴간되었던 『불교』를 속간하고 많은 글을 발표하다. 3월 3일 독립운동가 김동삼이 옥사하자 유해를 심우장으로 모셔 장례를 지내다.
1938년(60세)
2월∼11월 논설 「불교 청년 운동을 부활하라」를 비롯해 많은 글을 『불교』에 발표하다. 5월 18일(1939년 3월 12일까지) 장편소설 「박명(薄命)」을 『조선일보』에 연재하다. 만당(卍黨) 당원이 일제의 경찰에 검거되자 감시를 받다.
1939년(61세)
7월 12일(음력) 서울 청량사 및 경남 사천의 다솔사에서 마련한 회갑연에 참석하다. 11월 1일(1940년 8월 11일까지) 『삼국지』를 번역해 『조선일보』에 연재하다.
1940년(62세)
박광, 이동하 등과 창씨개명 반대 운동을 벌이다. 신백우, 최범술 등과 단채 신채호 유고집을 간행하기 위해 원고를 수집하다.
1943년(65세)
조선인 학병의 출정을 반대하다.
1944년(67세)
6월 29일(음력 5월 9일) 심우장에서 입적하다. 미아리 화장장에서 다비한 뒤 망우리 공동묘지에 안장되다.
(정리 : 맹문재)
【한용운의 시】
님의 침묵
나는 잊고자
나의 길
이별
의심하지 마셔요
사랑의 존재
복종
인과율
수의 비밀
칠석
오셔요
고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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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님의 침묵』 복각본 띠지 문구
<앞면>
한용운 시집 『님의 침묵』 출간 100주년 기념!
최고의 선본(善本), 완벽한 복간!
“님은 갓습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갓슴니다”
푸른사상
<뒷면>
“아아 님은 갓지마는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얏슴니다”(「님의 沈默」)
만해 한용운의 『님의 침묵』은 김소월의 『진달래꽃』과 함께 한국 현대시를 꽃피운 시집이다. 만해는 님과의 이별을 슬퍼하거나 원망하지 않고 어린 양처럼 품었다. 님을 향한 사랑을 의심하지 않고 기루어서 기꺼이 노래했다.
― 맹문재(시인·안양대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