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수필을 사랑한다는 그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자유로울 수 있으며, 삶의 기쁨을 누린다. 그러나 한 발 앞서 독자에게 무언가 가슴에 품어 안을 감동어린 수필을 쓰고 싶은 마음에 늘 충일하다. 그래서 생활의 여유에서 오는 심심파적이 아니요, 글을 쓰는 일을 제관의 무왕이나 되는 듯 여기지 않으며, 그저 사명감으로 신명을 다 바쳐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렇기에 언제나 수필을 쓰는 바른 마음을 갖고자 애쓴다. 그것은 겸손과 진실이다. 마치 이 세상을 모두 아는 듯, 제 위에 아무도 없는 듯 생각하거나, 문학을 마치 생활의 도구로 삼거나 장식품 정도로 여기는 사람이 있다면 이는 반드시 경계해야 할 일이다. 그저 수필을 사랑한다는 그 이유 하나만으로 더하거거나 덜함이 있을 리 없다. 그렇기에 수필을 사랑하는 만큼의 값진 고통을 뛰어 넘는 창작의 고뇌를 수반해야 할 일이겠다.
나는 완숙한 문장보다 사물에 대한 깊고 밝은 눈을 갖고자 애쓴다. 다른 이들은 전혀 눈여겨보지 아니하는 하잘것없는 사물 하나하에까지 의미를 부여하며 나의 시선이 머물도록 애쓴다. 그리고 그 속에 감추어져 있는 것의 발견, 어떤 내 나름대로의 의미와 진리를 찾아내고자 노력한다. 그것은 어쩌면 내 나름대로의 발견법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 이는 수필을 쓰기에 앞서 멍석을 까는 그런 명상법이라 해도 좋겠다.
발견의기쁨을 누리기 위해서 나는 때를 놓치지 않고 언제나 깨어있는 눈을 갖고자 노력을 기울인다. 그래서 분주하게 메모하는 버릇을 버리지 아니한다. 메모지는 내가 움직이는 어떤 곳에든 미리 준비해 놓고 소용 닿는 대로 이용한다. 모처럼 떠오른 생각을 망각하기 전에 메모라도 해 두어야 활용할 수가 있어서다. 순간순간에 번득이는 기지나 영감을 놓치기라도 한다면 이야말로 천재일우의 기회를 놓치는 일이 아니겠는가. 당장에 소용되지 않는 소재나 제재라도 그것이 어느 날 빛을 띠고 가치를 나타낼 때도 있어서다.
그리고는 어떻게 진실하게 형상화시켜 놓을까 고심한다. 나는 그때마다 적지 아니 갈등을 빚곤 한다. 나의 생각이 보편성을 초월하여 사색과 명상 속에서 건져낸 잘 읽은 발효의 맛을 띠어야 하기 때문이다. 생명의 신비를 찾아 영감적인 눈과 머리로 소나기가 뿌린 후에 이슬처럼 영롱히 빛나는 수필을 창작하는 작가는 참으로 행복한 사람이리라.
모든 일에는 자마다의 어려움이 뒤따르는 법이다. 글을 쓰는 일도 그리하다. 몇 날이고 계속해 붓을 놓지 않고 떠오르는 상념을 표현할 수 있을 때 이 기쁨은 마치 열락의 시간과도 같다. 그러나 한 주일 또는 한 달을 붓방아만 찧을 때의 고통. 그래서 늘어나는 파지만을 바라보며 전전긍긍할 때의 고통은 차러리 문학을 버리고 싶은 경우이기도 하다.
다른 문학 장르도 그렇겠거니와 수필만큼 글쓴이의 진실을 요구하는 장르도 없을 것이다. 수필은 자신을 살피는 문학적 용기임은 물론, 수필만큼 독자를 감동시키는 문학도 없을 것이다.
글이란 자기 내면의 솔직한 표현이다. 그러므로 좋은 글일수록 은은한 인생의 향기를 지니게 마련이다. 이런 글은 읽는 이의 가슴에 와 닿는다. 그래서 독자의 심금을 울리고 진한 감동을 주게 된다.
수필의 생명은 한 마디로 진실이 아닐까 싶다. 수필은 글쓴이의 마음을 통통 드러내어 발가벗은 자아를 내보이는 글이다. 그렇기에 진실이 요구될 수밖에 없다. 진실의 목소리, 일상의 삶에서 건져낸 반짝이는 무늬가 아롱져 있는 수필은 읽는 이의 마음을 훈훈하게 하며 공감하게 된다. 만일 수필이 그러하지 못한다면 그 글은 이미 죽은 글일 수밖에 없다. 따라서 생명이 있는 글로 형상화 되기 위해서는 진실성이 필요한 것은 불문가지이다. 그렇기에 삶의 진실이 담겨 있는 글을 쓰고자 나는 언제나 고군분투한다.
이런 진실을 바탕으로 한 수필을 쓰기 위한 예비조건은 체험과 사색이다. 며칠이고 끈기 있게 기다리며 인내한 끝에 비로소 벙그는 꽃봉오리일 때 그 꽃의 아름다움은 배가될 것이다. 그런 글일수록 삶의 향기가 넘치고 오래 두고 읽는 이의 가슴을 따뜻하게 해줄 것이다.
소재가 선택되고 이를 배열하여 한 편의 작품으로 짜기에 앞서 나는 오래도록 궁리한다. 이런 때 머릿속에서 짜여진 글의 얼개는 반드시 주제의식의 구현을 위한 문학성을 염두에 두게 된다. 주어진 소재를 어떻게 의미화 하여 언어로 질서화할 것인가에 대해 오래도록 고심한다. 그것은 문학적 형상화라는 생명감을 부어넣기 위한 작업이다. 그러나 때로 얽어 짜기로만 끝나버리는 일도 허다하다. 그런 경우는 미완성 상태로 서랍 속에서 며칠이고 잠재우게 된다. 언제고 빛을 볼 그날을 위한 예비된 기다람이다. 기다림은 이런 경우에만 국한하지 않는다. 완성된 작품도 어느 정도의 시간을 기다린다. 그리고는 다시금 원점으로 돌아가 전체의 내용과 문맥 또 낱말 하나하나에 이르기까지 철저한 탐색을 시도한다. 그때마다 새로운 영감이나 다른 영감이 일 수 있으며, 문장의 오류나 낱말의 쓰임에 대한 교정이 병행되곤 한다. 이때 중요한 사안은 서두 쓰기와 결말 쓰기다. 독자의 흥미를 유발할 수 있는 참신하고 산뜻한 서두 쓰기 그리고 여운과 감동을 줄 수 있는 결말 쓰기는 한편의 수필을 성공적으로 이끌기 위한 촉매 구실을 한다.
수필의 생명은 무엇보다도 진실에 있다고 했다. 진솔한 삶의 이야기, 평범함에서도 비범함, 벗어난 듯 하면서도 그 안에 삶의 고뇌와 번득이는 기지 그리고 해학이 넘치며 여유와 함께 소박함이 담겨있는 글은 독자를 매료시키기에 충분하다. 여기 진실성이란 허구의 도입을 상정할 수는 없다는 점과 통한다. 수필은 필자의 개성이 노출되는 가장 개성적인 글이다. 그러므로 애초 허구의 도입을 차단한다. 진실을 포장한 위선이 존립할 틈을 주지 아니한다. 수필은 진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평범하지만 번득이는 비범성. 여기에 수필문학만이 지닌 묘체가 살아 숨쉬고 그것이 문학적으로 형상상화될 때 생명이 있기 마련이다. 그러므로 나는 처음부터 끝까지 진실을 드러내는 작업에 임한다는 생각으로 수필창작에 매달린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좋은 수필을 쓰는 길은 작가 정신과 통한다. 이는 수필문학에 대한 어떤 소명의식이라도 말해도 좋을 것이다. 나는 수필을 사랑한다. 수필을 위해 태어난 사람이라고까지 자부한다. 오직 수필을 위한 삶을 살겠다는 철저한 자기 인식. 이를 소명이라 불러도 좋으리라. 또 뚝심이라 하면 어떠할까. 수필문학에 전 생애를 걸겠다는 뚝심. 그건 집념이자 의지다. 그런 집념이 아니고서는 수필문학을 타락시킬 뿐이다. 주변문학으로 매도되던 수필문학의 위상을 바로 잡겠다는 소명감이 있는 이는 좋은 수필을 쓸 수 있으리라고 본다.
수필은 내게 있어 '나의 인생' 그 자체다. 내가 터잡고 살아가는 현실은 바로 수필의 현장이다. 그렇기에 삶의 진실이 담겨있는 글을 쓰고자 나는 오늘도 정화된 한 표주박의 샘물을 긷는다.
한상렬 수필집, <<나의 인생, 나의 수필이여>>, 수필과 비평사, 2017, 인하공업전문대학 <<교양국어>> 탑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