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호석 (통일학연구소 소장)
백악관 상황실에서 끝난 특대형 사기극
2008년 9월 5일 세계 각국의 정세분석가들은 영국 텔레비전방송 BBC가 방영한 보도에 관심을 집중하였다. 동영상 보도에는 리비아 수도 트리폴리(Tripoli)에 있는 어느 저택에 들어서는, 연회색 정장을 단정하게 차려입은 흑인 여성이 나오고, 흰색 전통의상을 입고 머리에 검은 모자를 쓴 사람이 나온다. 그 흑인 여성은 콘돌리자 라이스(Condoleezza Rice) 당시 미국 국무장관이고, 그를 맞이한 사람은 무아마르 카다피(Muammar el-Qaddafi) 리비아 국가원수였고, 그 두 사람의 상봉장소는 1986년 4월 15일 미국군 전폭기 편대의 공습으로 파괴된 적이 있는 카다피 국가원수의 관저였다.
이번에 미국군이 리비아 공습을 시작하기 불과 2년 6개월 전에 카다피-라이스 상봉이 있었다는 사실은 좀처럼 믿기 힘들다. 카다피-라이스 상봉과 미국군의 리비아 공습이라는 양극단 현상 뒤에는 복잡하게 얽힌 미국과 리비아 관계가 있다. 그 복잡한 관계를 살펴보려면, 미국과 리비아가 적대관계를 청산하고 점진적으로 관계정상화를 추진하기 시작한 2004년 6월 28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그 날 미국 국무부는 리비아에 연락사무소를 개설한다고 발표하였다. 그로부터 이태가 지난 2006년 5월 15일 콘돌리자 라이스 당시 국무장관은 미국이 리비아와 관계를 정상화하였다고 발표하였고, 조지 부쉬(George W. Bush) 당시 미국 대통령은 리비아를 ‘테러지원국 명단’에서 삭제한다는 보고서를 연방의회에 제출하였다.
조심스럽게 추진되어온 미국과 리비아의 관계정상화가 가시적 성과를 전 세계에 보여준 때는 2008년이다. 그 해 1월 3일 압델 라흐만 샬감(Abdel Rahman Shalgam) 당시 리비아 외무장관이 워싱턴을 방문한 것을 계기로 미국-리비아 과학기술협력 협정이 체결되었고, 8개월 뒤인 9월 5일에는 콘돌리자 라이스 당시 국무장관이 트리폴리를 답방하였다. 그로부터 한 달이 지난 2008년 10월 5일 미국은 리비아에 무역사무소를 개설하였다. 리비아에 미국 무역사무소가 개설되자 자연히 교역량이 늘어났고, 그에 따라 두 나라는 2010년 5월 20일 트리폴리에서 미국-리비아 무역투자기본협정(TIFA)을 체결하였다.
이처럼 리비아와 미국은 2004년 이후 겉으로 보기에는 평온하게 관계정상화를 추진해왔다. 리비아는 미국과 관계를 정상화하여 자국의 주권과 안전을 보장받고 있는 줄로 생각하였다. 그러나 놀랍게도, 미국이 리비아와 관계를 정상화한 것은 리비아를 기만하고 농락한 특대형 사기극에 지나지 않았고, 미국의 사기극에 감쪽같이 속아넘어간 리비아는 자국의 주권과 안전이 보장받았다고 안심하며 깊은 최면상태에 빠져들었다.
미국이 리비아를 기만하고 농락한 특대형 사기극은, 2011년 3월 15일 백악관 지하에 있는 상황실(situation room)에서 끝났다. 그 날 오후 4시부터 밤 11시까지 백악관 상황실에서는 버락 오바마(Barack H. Obama) 대통령이 참석한 가운데 국가안보회의가 계속되었고, 그 회의에서 결정된 것은 리비아 무력침공이었다. 백악관 국가안보회의의 무력침공 결정에 따라, 나흘 뒤 미국 군부는 영국군, 프랑스군을 참가시킨 가운데 미사일구축함, 핵추진 잠수함, 스텔스 전투기, 전폭기, 공중조기경보통제기, 전자전기, 무인정찰기, 특수전 병력, 강습상륙함, 상륙소송함 등을 동원한 ‘오디세이 새벽 작전(Operation Odyssey Dawn)’이라는 선제공습으로 리비아에 대한 무력침공을 개시하였다. 2011년 3월 19일은 미국이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에 이어 세 번째로 이슬람 국가를 침공한 날이다.
그런데 미국이 리비아 공습을 개시하기 보름 전인 2011년 3월 4일 미국 군부가 지중해로 급파한 41,000t급 초대형 강습상륙함 키어사지호(USS Kearsarge)와 16,000t급 상륙수송함 폰스호(USS Ponce)가 수에즈 운하를 빠져나가고 있었다. 해병대 병력 1,890명, 지상공격기 5대, 틸트로터(tiltrotor) 헬기 22대, 대잠수함전 헬기 6대를 실은 키어사지호는 폰스호와 함께 그리스 크레테섬(Crete)의 수다만 해군기지(Souda Bay Naval Base)에 도착하였다.
그보다 앞서 2011년 2월 28일 <로이터 통신> 보도에 따르면, 미국 국방부 공보실장 데이빗 레이펀(David Lapan) 대령은 “결정이 내려질 경우 유연하게 다양한 선택방안들을 택할 수 있도록 미국 공군력과 해군력을 리비아 쪽으로 좀 더 가까이 이동시키고 있다. 리비아에 대한 여러 가지 비상계획(emergency plan)이 있다”고 말했다. 리비아에서 반정부 투쟁이 시작되자마자 미국 군부는 기다렸다는 듯이 리비아 침공계획을 행동에 옮기고 있었다.
미국 중앙정보국과 하프타군의 은밀한 관계
내막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리비아의 반정부 투쟁이 격화된 현상을 수박 겉핥기 식으로 이해하고, ‘민주혁명’ 또는 ‘재스민혁명’이 리비아에까지 번졌다고 말한다. 그러나 리비아 반정부 투쟁의 격화과정을 정밀분석하면, 그런 주장이 얼마나 이치에 맞지 않는 헛소리인지 알 수 있다. 언론에 보도되지 않은 내막은 이렇다.
2011년 2월 13일부터 16일까지 지방도시들인 벵가지(Benghazi), 다르나(Darnah), 바니 왈리드(Bani Walid)에서 소규모 시위가 벌어졌다. 당시 시위대가 외친 구호는 지연된 공공주택 건설을 하루속히 마무리해달라고 정부당국에 촉구하고, 정치인들의 부패를 청산하라는 수준이었다. 그러한 수준의 요구를 제기하는 소규모 시위는 다른 나라에서도 얼마든지 자연발생적으로 일어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2월 17일부터 시위양상이 갑자기 폭동화되었다. 카다피 정권의 퇴진을 요구하면서 경찰본부를 방화하는 폭력사태로 돌변한 것이다.
왜 이런 급변현상이 일어났을까? 그 까닭은, 2월 17일을 이른바 ‘분노의 날(Day of Rage)’로 선포하고 전국적 범위에서 폭동을 일으키라고 선동하였을 뿐아니라 실제로 폭동을 조직한 세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반대를 위한 리비아 전국회의(National Conference for the Libyan Opposition)’가 폭동을 선동하고 조직하였다. 이 단체는 카다피 정권 타도를 주장하는 해외 망명객들이 2005년 6월 25일 영국 런던에서 결성한 것이다. 시위가 폭동으로 돌변한 때로부터 불과 열흘 뒤인 2월 27일 미국 피츠벅 대학 출신의 전직 법무장관 무스타파 압둘 잘릴(Mustafa Abdul Jalil)을 대표로 한 ‘과도국가협의회(Transitional National Council)’가 벵가지에서 결성되었다. 북아프리카와 중동에서 친미독재정권 퇴진을 요구하며 일어난 다른 나라의 반정부 투쟁과 리비아의 반정부 투쟁이 근본적으로 다른 차이는, 리비아에서 시위발생 열흘만에 신속하게 과도정부가 출현한 것에서 나타난다. 이것은 리비아의 반정부 투쟁이 자연발생적 대중투쟁이 아니라 처음부터 준비되고 조직된 반란이라는 사실을 말해준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것은, ‘과도국가협의회’는 결성되자마자 반란군 조직부터 서둘렀다는 점이다. 반란군은 개인화기는 물론이고, 다련장로켓포, 대전차 미사일, 견착식 대공미사일, 방공포, 곡사포, 전차, 보병전투차량, 미그 전투기, 정찰기, 공격헬기, 수송기, 프리깃함, 콜벳함으로 무장하였다. 리비아 반란군은 자기들의 공군부대를 ‘자유리비아공군(Free Libyan Air Force)’이라 부르고, 자기들의 지상군부대를 ‘리비아인민군(Libyan People’s Army)’이라 부른다.
리비아 반정부 투쟁이 북아프리카와 중동에서 일어난 다른 나라 반정부 투쟁들과 근본적으로 다른 또 하나의 차이점은, 리비아 국민들이 일으킨 자연발생적 시위가 경찰 탄압으로 과격해지면서 차츰 폭동으로 전화된 것이 아니라, 반란세력이 폭동을 선동하고 경찰 탄압을 유도하여 내전을 일으킨 것이다.
주목하는 것은, 리비아군의 무장반란 덕택에 리비아 반란군이 정규군의 각종 무기로 중무장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정규군의 무장반란을 군사정변(coup d'état)이라 하는데, 군부에 침투한 반란세력이 오랜 기간 동안 암약하면서 준비하지 않고서는 군사정변이 일어나지 않는 법이다. 이번에 리비아에서 일어난 무장반란이 어떠한 준비과정을 거쳤는지 구체적으로 알려진 바 없으나, 오래 전부터 미국이 반란세력을 배후에서 조종하며 무장반란을 은밀히 준비해오고 있었던 것이 분명해보인다. 리비아 무장반란에 얽힌 비화는 아래와 같다.
리비아 반란군을 지휘하는 리비아군 출신 군사지휘관이 두 명 있는데, 리비아군 육군 대령으로 복무한 경력과 미국 망명경력이 있는 칼리파 벨카심 하프타(Khalifa Belqasim Haftar)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리비아에서 폭동이 일어나자 그는 미국 망명생활을 급히 청산하고 리비아로 돌아가 반란군 지휘관이 되었다. 하프타의 정체는 무엇일까?
프랑스의 국제전문 월간지 <르 몽드 디플로마띠끄>가 2001년 3월에 발간한 책 ‘아프리카를 조종하다(Manipulations Africaines)’에 따르면, 리비아와 차드가 영토분쟁을 벌인 1980년대 후반, 당시 리비아군 육군 대령이었던 하프타가 차드군에게 전쟁포로로 붙잡혔는데, 차드에 잠입한 미국 중앙정보국(CIA)의 도움으로 전쟁포로인 그가 갑자기 종적을 감추었다. <워싱턴 포스트> 1996년 3월 26일 보도에 따르면, 하프타는 미국 중앙정보국의 배후조종을 받으며 카다피 정권을 무너뜨리려는 반란단체인 ‘리비아 구국전선(Libyan National Salvation Front)’ 산하의 무장조직 ‘리비아 국군(Libyan National Army)’ 지휘관이었다. 미국 중앙정보국의 도움으로 전쟁포로 신세를 면한 하프타는 1990년대에 어느덧 반란군 지휘관으로 변신해 있었던 것이다. 미국 의회조사국(CRS)이 1996년 12월 19일에 펴낸 보고서에 따르면, 미국은 ‘리비아 구국전선’과 ‘리비아 국군’에게 무기와 재정을 지원해주고 있었다. 미국 중앙정보국은 ‘리비아 국군’을 하프타의 이름을 따서 하프타군이라 불렀다.
<월 스트릿 저널> 2011년 2월 23일 보도에 따르면, 리비아 토브룩 지방의 군지휘관이었던 술레이만 마흐모드(Suleiman Mahmoud) 육군 중장이 2월 20일 자기 휘하의 병사 3,000여 명을 이끌고 무장반란을 일으켰다. 런던에 있는 반카다피 망명단체 ‘반대를 위한 리비아 전국회의’의 선동으로 폭동이 일어난 때로부터 불과 사흘 만에 현역 중장이 병사 3,000여 명을 이끌고 무장반란을 일으킨 것은, 자연발생적으로 일어난 반란사건이 아니라 오래 전부터 미국 중앙정보국의 배후조종을 받으며 리비아군에 침투하여 암약한 하프타군이 은밀히 준비해온 반란사건인 것이 분명해 보인다.
위의 정보를 종합하면, 백악관 국가안보회의는 2004년 6월 28일 이후 앞에서는 리비아와 관계를 정상화하는 척하면서 뒤에서는 미국 중앙정보국의 카다피 정권 전복공작을 추진하면서 내란을 일으킬 결정적인 기회를 찾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리비아 인접국인 이집트에서 반정부 시위로 친미독재정권이 무너진 기회를 이용하여, 미국 중앙정보국은 하프타군에게 리비아군이 무장반란을 일으키도록 지령을 내렸다. 하프타군과 리비아군 반란세력이 합세하여 내란을 일으키자, 미국 군부는 내란이 일어나기를 기다렸다는 듯이 방대한 무력을 리비아 인근으로 급파하여 무력침공을 개시하였고, 원래 대사가 없었던 리비아 주재 미국 대사관에서 대리대사로 있었던 크리스토퍼 스티븐스(J. Christopher Stevens)를 ‘연락관’에 임명하였다. 백악관 국가안보회의가 리비아 반란군을 배후에서 조종하는 임무를 ‘연락관’에게 맡겼다는 점은 누구나 짐작할 수 있다.
위에서 논한 것을 읽어보면 알 수 있듯이, 이번에 리비아에서 일어난 내란은 미국의 배후조종으로 일어난 ‘급변사태’인 것이다. 내전을 교사하고, 내란에 개입하는 무력침공을 감행하고, 무력침공으로 반미정권을 무너뜨리는 것은 백악관 국가안보회의가 선호하는 전형적인 침략전쟁 시나리오다.
지금 백악관 국가안보회의가 리비아에서 실행에 옮기고 있는 침략전쟁 시나리오는 리비아에 국한된 것이 아니다. 그 시나리오는 백악관 국가안보회의가 원래 리비아가 아니라 한반도에 적용하려던 것이다. 백악관 국가안보회의 지시에 따라 미국 군부는 북측에서 ‘급변사태’를 일으키려는 ‘작전계획 5030’을 세워두었고, 북측에서 ‘급변사태’가 일어나는 즉시 선제공격을 감행하여 정권을 무너뜨리고 핵무기를 탈취하려는 ‘작전계획 5029’도 세워두었다. 리비아에서 하프타군이 일으킨 내란이 격화되어 미국군이 선제공습을 감행하고 있을 때, 한반도에서는 ‘작전계획 5030’과 ‘작전계획 5029’에 의거한 ‘키 리졸브/독수리’ 북침전쟁연습이 벌이지고 있었다.
공격 받고서도 반격하지 못하는 리비아
리비아군은 119,000명 정규군과 45,000명 예비군으로 편성되어 있다. 다 합해봐야 164,000명밖에 되지 않는다. 총인구가 660만명인 나라에서 그 정도의 병력을 유지하는 것은 정상이다. 내란이 일어난 직후 수 천명이 반란군으로 넘어갔으니 160,000명 정도로 줄었을 것이다. 리비아군이 비록 160,000명밖에 되지 않지만, 침공을 격퇴할 전투력을 가졌더라면, 미국군이 함부로 공격하지는 못하였을 것이다.
리비아군이 미국군의 침공을 격퇴하려면 미국군 전략거점을 타격할 작전능력이 있어야 한다. 만일 리비아군이 미국군의 선제공습을 받은 즉시 반격에 나서 지중해 지역의 미국군 군사기지를 한 곳이라도 타격하였다면, 전세는 완전히 달라졌을 것이다. 그러나 미국군이 영국군, 프랑스군을 참가시킨 가운데 선제공습을 계속하는데도 리비아군은 반격하지 못하고 있다. 왜 속수무책으로 타격만 받는 것일까?
미국 군부는 리비아 침공을 위해 지중해 지역에서 군사기지 세 군데를 사용하고 있다. 이탈리아 씨실리섬(Sicily)의 씨고넬라(Sigonella)에 있는 씨고넬라 해군항공기지(Sigonella Naval Air Base)를 리비아 침공을 위해 사용하는데, 이 군사기지는 미국군이 중시하는 지중해의 전략요충지다. 또한 그리스 크레테섬의 수다만 해군기지도 리비아 침공 군사기지다. 또한 이탈리아 동북부에 있는 아비아노 공군기지(Aviano Air Base)도 리비아 침공 군사기지다. 바로 이 공군기지에서 출격한 미국군 F-22 랩터(Raptor) 스텔스 전투기가 리비아를 공습하였다.
트리폴리에서 씨고넬라 해군항공기지까지 직선거리는 537km이고, 리비아 중부 내륙에서 수다만 해군기지까지 직선거리는 800km이고, 트리폴리에서 아비아노 공군기지까지 직선거리는 1,470km다. 지리적 조건을 살펴보면, 리비아군에게 사거리 1,500km의 준중거리 미사일만 있었어도, 미국군은 함부로 리비아를 침공하지 못했을 것이라는 점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리비아군은 지중해에 전진배치된 미국군 기지를 타격할 준중거리 미사일이 한 발도 없어서 무력침공을 당하고 말았다. 리비아군의 미사일 전력은 왜 그렇게 약할까?
원래 리비아군은 ‘약골’이 아니었다. 1980년대에 미국은 카다피 정권을 무너뜨리려고 무력침공에 매달렸다. 미국은 리비아 북쪽 지중해 연안에 있는 싸이드라만(Gulf of Sidra)에서 해상작전권을 장악하기 위해 지중해에 배치한 제6함대를 동원하여 리비아 군사시설을 여러 차례 공습, 파괴하였고, 리비아 남쪽에 있는 리비아-수단 국경지대에서는 수단군을 배후에서 지원하여 무력충돌을 일으켰다. 미국은 리비아 북쪽과 남쪽에서 이처럼 협공을 퍼부으면서도 리비아와 전면전을 벌이지 못했다. 그 까닭은, 리비아군이 무력침공을 격퇴할 미사일 전력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리비아군의 미사일 전력은 미국의 농간에 의해 완전히 무장해제되고 말았다. 그 기막힌 사연은 이렇다.
1979년 12월 29일 미국은 리비아를 ‘테러지원국 명단’에 올려놓았고, 1981년 5월 6일 리비아와 단교하였다. 미국이 리비아 압박이 더 심해진 까닭은, 1981년 1월 20일 극우성향의 레이건 정권이 출범하였기 때문이다. 레이건 정권은 리비아와 단교한 뒤 석 달이 지난 8월 19일 미국군 전투기를 출격시켜 지중해 상공에서 리비아군 전투기 두 대를 격추하였다. 공공연한 도발의 시작이었다.
레이건 정권은 1986년 1월 7일 리비아에 대한 강력한 경제제재를 추가로 실시한다고 발표하였고, 1986년 4월 5일 독일 베를린에서 일어난 폭탄테러로 미국군 두 명이 죽은 것에 대한 보복이라고 하면서 4월 15일에 미국군 전폭기 편대를 동원하여 리비아를 공습하였다. 미국이 이처럼 리비아를 공습하면서도 공습을 한 차례만 감행하고 금방 물러선 까닭은, 계속적인 공습에 맞선 리비아군의 반격이 가해질 경우 리비아군의 미사일 공격이 자기들에게 적지 않은 타격을 입힐 것으로 예상하였기 때문이다.
1970년대와 1980년대에 리비아를 지원해준 소련이 해체되자, 미국은 리비아에서 ‘급변사태’와 ‘정권교체’를 일으키기 위한 봉쇄와 압박을 더욱 강하게 밀어붙였다. 미국은 유엔안보리를 움직여 리비아를 압박하는 결의안을 채택하도록 공작하였다. 1992년 1월 21일 유엔안보리 결의안 731호, 3월 31일 유엔안보리 결의안 748호, 1993년 11월 11일 유엔안보리 결의안 883호가 잇달아 나왔다. 거기에 더하여, 1996년 8월 5일 미국 연방의회는 ‘이란-리비아 제재법안(Iran-Libya Sanctions Act)을 의결하였다.
굴욕적인 비밀협상과 무장해제
10년 이상 지속된 강력한 봉쇄와 압박으로 더 이상 버티기 힘들게 된 리비아는 결국 1999년 봄 미국에게 정치적으로 굴복하고 말았다. 리비아가 요청한 굴욕적인 비밀협상에 관한 정보는 오랫동안 비밀로 묻혀있다가, 클린턴 정부 시기 미국 국무부 중동 담당 차관보였던 마틴 아인딕(Martin S. Indyk)의 발언이 2004년 3월 31일 <파이낸셜 타임스>에 실리면서 세상에 알려졌다. 그가 언론에 전한 바에 따르면, 당시 리비아는 미국에게 리비아군 화학무기를 폐기하는 문제를 다룰 비밀협상을 시작하자고 요청하였는데, 미국은 비밀협상을 시작하기 전에 먼저 리비아가 미국 항공기 테러에 대한 책임을 인정하고, 희생자 유족들과 보상문제를 해결하라는 전제조건을 내걸었다. 누구가 알 수 있듯이, 미국이 내건 전제조건은 리비아에게 굴복을 요구한 것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리비아는 미국이 내건 굴욕적인 전제조건을 받아들였다. 미국에게 굴복한 리비아는 1988년에 있었던 미국 항공기 테러에 연루된, 리비아 정보기관에 연관된 혐의자 두 사람의 신병을 1999년 4월 5일 네덜란드에 넘겨주었고, 1989년에 있었던 프랑스 항공기 테러에 대한 프랑스 당국의 조사에 협조하기 시작하였다.
미국은 리비아가 굴복한 것을 보고 나서야 리비아의 비밀협상 요구를 받아주는 척하였다. 1999년 봄에 시작된 비밀협상에서 리비아는 리비아군 화학무기를 자진해서 폐기하겠다고 미국에게 공약하였다. 리비아가 화학무기를 폐기하는 것은 무력침공을 막을 전쟁억지력을 스스로 포기하는 것인데도, 리비아는 자국의 주권을 지킬 마지막 군사적 수단까지 포기하면서 미국에게 굴복하였다.
누구나 예상할 수 있는 것처럼, 리비아가 전쟁억지수단을 포기한 것은 회복하기 힘든 치명적 실책으로 되었다. 리비아를 얕잡아본 미국은 화학무기를 폐기하겠다고 공약한 리비아에게 이번에는 생물학무기 의혹을 들이대면서 계속 압박하였다. 2001년 11월 19일 생물학무기 국제협약(Biological Weapons Convention) 검토회의(Review Conference)에 나타난 당시 미국 국무부 군축 및 국제안보 담당 차관보 존 볼튼(John Bolton)은 리비아가 국제협약을 위반하고 생물학무기를 개발 또는 배치하려고 한다고 주장하였다. 2002년 5월 6일에도 그는 리비아가 생물학무기를 개발하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사태가 그처럼 심각해지고 있었는데도, 리비아는 미국과의 굴욕협상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 2003년 3월 초 리비아는 자국의 대량파괴무기 프로그램을 제거하는 문제를 다룰 포괄적 협상을 하고 싶다는 의사를 밝혔고, 그에 따라 미국, 영국, 리비아의 비밀협상이 시작되었다. 당시 백악관 국가안보회의 관리였던 플라인트 레버렛(Flynt Leverett)이 2004년 1월 23일 <뉴욕 타임스>에 기고한 글에 따르면, 비밀협상에서 미국은 리비아가 대량파괴무기 프로그램을 포기하면 그에 대해 “확실하고 응당한 보상(explicit quid pro quo)”을 주겠느라고 약속하였다. 미국이 그런 약속을 꺼내놓은 것은, 미국이 대량파괴무기를 제거하겠다는 거짓명분을 내걸고 이라크를 침공하기 불과 한 달 전에 있었던 일이다.
미국이 2003년 3월 19일 이라크를 침공한 것을 뻔히 보면서도, 일단 대미관계에서 기가 꺾인 리비아는 미국과의 굴욕협상에 계속 매달리는 수밖에 없었다. 결국 2003년 8월 15일 리비아는 미국 항공기 테러에 대한 책임을 인정하고 희생자 유족들에게 보상하기로 공약하였고, 9월 11일에는 프랑스 항공기 테러 희생자 유족들에게도 보상하기로 공약하였고, 12월 19일에는 핵확산금지조약(NPT)과 화학무기 국제협약(CWC)을 준수하여 핵무기 및 화학무기 프로그램을 폐기하고,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사찰을 허용하고, 미사일기술통제체제(MTCR)의 규정에 따라 탄도미사일의 사거리와 탄두중량을 제한하겠다고 발표하였다.
그에 따라 미국은 2004년 1월 18일 실무처리반을 리비아에 파견하여 대량파괴무기 프로그램 제거작업을 개시하였고, 1월 27일 27.5t에 달하는, 핵개발 및 탄도미사일 프로그램에 관한 기밀문서들과 각종 관련장비들을 압수하여 미국으로 공수하였다. 3월 15일 스펜서 에이브러햄(Spencer Abraham) 당시 미국 동력자원부 장관은 미국이 가져온 기밀문서들과 관련장비들은 앞으로 미국이 압수할 전체 분량에서 불과 5%밖에 되지 않는 “빙산의 일각”이라고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2004년 3월 10일 당시 미국 국무부 검증 및 이행 담당 차관보 폴라 드수터(Paula DeSutter)는 미국 연방하원 국제관계위원회에 출석하여 미국은 리비아군이 보유한 사거리 800km의 스커드-C 미사일을 포함한 각종 탄도미사일들과 우라늄농축설비를 제거하였다고 보고하였다. 9월 22일 그는 연방하원 국제관계위원회에 다시 출석하여 리비아의 무장해제에 대한 검증이 기본적으로 완료되었다고 보고하였다.
미국은 리비아군 무장해제를 2010년까지 집요하게 추진하였다. 화학무기 금지기구(Organization for the Prohibition of Chemical Weapons)가 펴낸 2009년도 보고서는 2009년 말 현재 리비아가 보유한 화학무기 원료 가운데 39%가 폐기되었고, 겨자개스 23t 폐기작업은 아직 시작하지 않았다고 지적하였다. 2011년 2월 23일 화학무기 금지기구 대변인이 <합동통신(AP)>에 전한 바에 따르면, 리비아가 보유한 겨자개스 가운데 약 54%에 달하는 13.5t이 폐기되었다.
위의 정보를 종합하면, 미국은 리비아군 무장해제를 개시한 2004년 1월 18일부터 2011년 1월까지 7년이 지나는 사이에 리비아의 전쟁억지력을 완전히 제거해버렸음을 알 수 있다. 2011년 1월 현재, 리비아군에게는 미국군의 침공을 막아줄 전쟁억지력이 전혀 없었다. 리비아의 전쟁억지력 제거작업이 완료된 직후인 2011년 2월 25일 미국은 리비아 주재 미국 대사관을 폐쇄하고, 리비아에 있는 미국인들을 항공편으로 해외 대피시키고, 카다피 국가원수와 주변인물들의 미국 내 자산을 압류하는 제재를 재개하였다. 리비아를 침공하기 위한 사전조치였다.
어느 길이 옳았는지 오늘의 현실이 말해준다
2004년 2월 28일 아프리카연합(African Union) 정상회의에 참석한 카다피 국가원수는 “핵무기는 나라의 안전을 보장해주지 못하므로, 다른 나라들도 리비아처럼 대량파괴무기를 포기하라”고 촉구하였고, 5월 13일에는 대량파괴무기 확산의 우려가 있다고 미국이 지목한 나라들과 군사교류를 중단한다고 발표하였다. 그러나 그러한 발언과 행동은, 미국의 집요한 봉쇄와 압박에게 굴복하여 무장해제의 길을 택한 리비아가 미국의 사기극에 농락당하고 있는 줄 알지 못한 어리석기 짝이 없는 짓이었다.
또한 카다피 국가원수는 2008년 9월 1일 집권 39주년 기념연설에서 “우리가 미국에게 굴복하는 일은 없을 것이지만, 미국과 같은 나라에 적대적인 태도를 취하는 것이 리비아의 이익에 부합되는 것은 아니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 발언은 이미 비밀협상에서 미국에게 굴복하고 무장해제를 당한 치욕을 감추고 체면이나 차리려는 허세발언에 지나지 않았다.
주목하는 것은, 리비아가 미국에게 굴복하여 무장해제를 당하였건만, 미국은 리비아가 그토록 기다리던 ‘보상’에 대해서 철저히 외면하였다는 점이다. 리비아 외무장관 출신으로 유엔주재 리비아 대사로 부임한 압델 라흐만 샤이감은 2009년 3월 11일 <뉴욕 타임스> 보도기사에서 “우리는 장비들을 내주었고, 뇌관을 제거했지만, 미국은 우리에게 무엇을 주었는가? 아무 것도 없다”고 투덜거렸다. 2009년 9월 1일 모하메드 사야라(Mohammed Sayara) 리비아 국제협력부 장관은 <파이낸셜 타임스> 보도기사를 통해, 리비아가 미국의 요구대로 행동하였으나 그에 따른 적절한 보상을 받지 못했다고 생각한다고 하면서 불만을 표시하였다. 그러나 미국은 리비아를 기만하고 농락한 특대형 사기극을 벌인 것이었으니, 리비아에게 아무 것도 보상할 필요를 느끼지 않은 것은 당연한 이치다. 미국의 특대형 사기극에 감쪽같이 속아넘어간 리비아가 어리석었던 것이다.
이번에 리비아는 미국의 배후조종으로 일어난 내란과 미국의 무력침공이 시작되자 그때서야 자기들이 기만과 농락을 당했음을 깨닫고 가슴을 쳤을 것이다. 그러나 때는 너무 늦었다. 리비아가 무력침공을 받고 있지만, 자국의 이해관계만 따지는 냉혹한 국제사회에서는 아무도 리비아를 도와주지 않는다. 미국의 눈치나 슬슬 살피는 중국과 러시아는 리비아 침공을 유엔안보리의 이름으로 합법화한 유엔결의안을 채택한 자리에서 반대표를 던져 저지하지 않고 기권하며 뒤로 물러서더니, 미국의 리비아 침공이 시작되자 반대성명도 아니고 고작 유감성명이나 발표하고 말았다.
지구 위에 있는 수많은 나라들 가운데 오직 북측만이 미국의 눈치를 살피지 않고 미국의 리비아 침공을 강하게 단죄하였다. 2011년 3월 22일 북측 외무성 대변인은 미국의 리비아 침공을 “최대의 반인륜범죄로 준렬히 단죄한다”고 지적하였다. 미국의 리비아침공을 반인륜범죄로 단죄한다는 지적에는, 반인륜범죄를 징벌하는 국제형사재판소(International Criminal Court)에 미국을 제소해야 한다는 뜻이 들어있다.
지난 날을 돌아보면, 10년 동안 계속된 미국의 봉쇄와 압박을 견디지 못한 리비아는 대미 비밀협상에서 굴복하였지만, 60년 동안 미국의 봉쇄와 압박을 받아오는 북측은 혹독했던 ‘고난의 행군’에도 굴하지 않고 허리띠를 더욱 졸라매고 ‘강성대국 건설’을 추진하여 미국의 봉쇄와 압박을 완전히 무력화하였다. 미국에게 굴복한 리비아는 미국으로부터 기만과 농락을 당하면서 무장해제를 당하여 전쟁억지력마저 잃어버렸고 결국 무력침공까지 받았지만, 미국과 정면대결을 계속해온 북측은 ‘선군정치’를 실시하고 핵무기 보유와 인공위성 발사로 미국을 강하게 압박하면서 미국의 북침전쟁위험을 막아내고 그들을 한반도 평화회담으로 끌어내려고 한다. 허리띠를 졸라매고 ‘선군노선’을 선택한 북측과 굴욕협상으로 무장해제를 선택한 리비아, 그처럼 상반된 두 갈랫길 중에서 어느 길이 옳았는지 오늘의 현실이 웅변적으로 말해주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