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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3년] 93대전엑스포 개막
← 대전 엑스포의 상징탑인 한빛탑의 모습.
세계인의 축제 대전엑스포가 새로운 도약에의 길을 다짐하며 1993년 8월 6일 오전 막을 올렸다. 8월 7일 오전에는 간단한 개장식을 갖고 일반공개를 시작했다. 전 세계 1백8개국과 33개 국제기구가 참가, 전문엑스포 사상 최대규모로 치러진 대전엑스포는 6일 오전 10시30분 대전시 유성구 도룡동 엑스포장 내 대공연장에서 역사적인 개회식을 가짐으로써 11월 7일까지 93일간 계속되는 대축제가 개막됐음을 전 세계에 알렸다.
개회식은 김영삼 대통령과 오명 엑스포조직위원장, 3부요인, 테드 알랜 BIE(국제박람회기구) 의장, 참가국 관계자, 각계 초청인사 등 2천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열렸다. 엑스포(EXPO)는 영어의 엑스포지션(exposition)의 앞음절을 딴 말로 통상 `박람회`로 번역된다. 1백40여년의 역사를 지닌 엑스포는 그 자체가 산업-과학기술문명의 발달사이자 곧 미래사이기도 하다. 제1회인 런던엑스포는 당시 건축기술을 능가하는 4천5백t의 철골구조물에 30만장의 유리를 씌운 수정궁에서 산업혁명의 총아인 기관차, 선박용 엔진 동력기 등을 소개했다.
1889년의 파리엑스포는 오늘날 지하철 건설의 토대가 된 철골구조물 에펠탑을 선보였다. 이밖에 전화기(1876 필라델피아), 자동차-축음기-냉장고(1878 파리), 지하철-토키영화(1900 ), 나일론-플라스틱-TV(1939 뉴욕), 자기부상열차(1985 쓰쿠바)등이 엑스포에 소개된 당대의 첨단제품들이었다.
[1969년] 독일의 철학자 테오도르 아도르노 사망
← 독일 철학자 테오도르 아도르노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일원으로 유명한 독일의 철학자 테오도르 아도르노가 1969년 8월 6일 사망했다. 아도르노는 20세기 사상가 중에서 가장 음악에 밝은 인물이었다.
프랑크푸르트에서 태어난 그는 어머니가 성악가였던 덕분에 어린 시절 일찍이 소리의 세계를 깨우쳤다. 그는 청년 시절부터 음악 평론을 썼고, 12음계 기법을 창시한 현대 음악가 쇤베르크를 일생동안 존경했다. 아도르노는 음악뿐만 아니라 문학, 미술에 대한 소양도 깊었다. 그만큼 아도르노 사상에서 예술이 차지하는 비중은 남달랐다.
학자로서 아도르노의 명성은 프랑크푸르트학파 동료였던 호르크하이머와 함께 쓴 `계몽의 변증법`으로 높아졌다. 이 책은 나치즘을 통해 타락한 몰골을 드러낸 서구의 이성과 문명을 역사철학적 관점에서 비판한 20세기의 명저이다. 아도르노는 1950년대에 프랑크푸르트 대학 교수로 강의하면서 ‘부정 변증법’ 출간 등 왕성한 저작 활동을 펼쳤다. 또한 라디오와 텔레비전에도 출연, 자신의 비판 철학을 대중적으로 알리는 데도 적극적이었다.
그는 ‘68혁명’이라고 불리는 1960년대 말 서구 학생 운동의 폭력 사용을 비판하면서 학생들의 비난을 사기도 했다. 학생들과 심한 논쟁으로 골치가 아팠던 그는 1969년 스위스로 휴가를 떠났다가 심근경색으로 사망했다.
[1660년] 스페인 화가 벨라스케스 사망
1660년 8월 6일 17세기 스페인 미술의 거장 벨라스케스가 마드리드에서 사망했다. 그는 세비야에서 프란시스코 파체코의 도제가 되어 화가 수업을 쌓았고 1623년 마드리드로 갔다. 펠리페 4세의 초상화를 그려 명성을 얻었으며, 곧 궁정화가로 임명되었다. 그는 일생 동안 궁정화가로 있으면서 주로 왕가의 인물과 정물 작품들을 그렸다. 초기에는 주로 종교적·풍속적인 주제를 날카로운 관찰력과 뛰어난 붓놀림으로 담아냈다. 특히 구도·색채·명암을 적절하게 조절해 자연스럽고 사실적인 인물과 정물을 표현해냈다. 궁정화가가 된 뒤에는 2번에 걸친 이탈리아 여행을 통해 16세기 베네치아의 회화를 연구했다. 이탈리아 여행 후 그는 작품에서 세세한 드로잉이나 명암의 강렬한 대비를 강조하는 대신 풍부한 붓놀림과 자연광을 이용해 3차원적인 효과를 나타내는 데 치중했다. 벨라스케스의 화풍은 19세기 프랑스 인상주의의 선구가 되었다.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세비야의 물장수 Water Seller of Seville>·<시녀들 Las Meninas> 등과 펠리페 4세의 초상화를 비롯한 다수의 왕족·귀족들의 초상화가 있다.
[1945년] 히로시마 원자폭탄 투하
← 일본 히로시마의 평화기념공원에 있는 기념비, 아치 너머로 보이는 건축물은 원폭 희생자들을 기리는 기념 돔
1945년 8월 6일 미국에서 개발한 원자폭탄이 일본 혼슈[本州] 남단의 히로시마[廣島]에 떨어졌다. 1943년 9월 8일 무솔리니 정권 몰락 후 이탈리아가 공식적으로 항복한 데 이어 1945년 5월 독일까지 항복함으로써 유럽에서는 제2차 세계대전이 사실상 종결되었다. 그러나 그때까지도 일본은 필리핀 전투에서 연합군과 교전하는 등 항복할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었다. 이에 미국군은 일본 본토로 진격하기 위해 오가사와라 제도[小笠原諸島]의 작은 화산섬 이오지마[硫黃島] 탈환 작전에 돌입했다. 미국군은 섬의 탈환에 성공했으며, 이후 일본 본토에 대한 공중폭격을 효과적으로 수행할 수 있었다. 그러나 해리 S. 트루먼 미국 대통령은 희생을 최소화하면서 일본을 굴복시킬 수 있는 방법으로 원자폭탄 투하를 결정했다. 마침내 히로시마에 첫번째 원자폭탄이 떨어졌고 폭발지점 일대가 초토화되면서 7만 명 이상이 죽고 7만 명 이상이 다쳤다. 일본 정부는 그때까지도 원자폭탄의 위력을 제대로 깨닫지 못했다. 그러나 8월 9일 다시 나가사키[長崎]에 2번째 원자폭탄이 떨어져 3만 5,000~4만 명이 죽고 비슷한 수의 부상자가 발생했다. 결국 1주일 뒤 일본의 항복으로 제2차 세계대전이 완전히 막을 내렸다.
[1902년] 시인 김소월(金素月) 출생
1902년 8월 6일 태어남 / 1934년 12월 24일 죽음
김소월은 전통적인 한(恨)의 정서를 향토적 소재와 민요적 기법으로 노래한 시인이다. 1915년 오산학교 중학부에 입학했으며, 3·1운동 직후 배재고등보통학교에 편입해 졸업했다. 1923년 도쿄상과대학[東京商科大學]에 입학했으나, 같은 해 9월 관동대지진이 일어나자 학교를 그만두고 귀국했다. 오산학교 재학 중 교사로 있던 김억의 영향으로 시를 쓰게 되었으며, 배재고등보통학교에 편입한 뒤부터 본격적인 창작활동을 했다. 김동인·김찬영·임장화 등과 함께 <영대 靈臺> 동인으로 활동했으며 주로 <개벽 開闢>·<영대>를 무대로 작품을 발표했다. 김소월의 시에는 한의 정서, 즉 순종과 미련, 간절한 기다림과 슬픔이 담겨 있다. 그의 대표작 <진달래꽃>은 떠나버린 임에 대한 미련과 집착, 처절한 슬픔을 읊은 작품으로, 향토적인 소재와 전통적인 3·3·4조의 음률이 잘 나타나 있다. 특히 2음보, 3음보, 후장 3음보, 3·3·4조 등을 발전시킨 민요체의 리듬은 김소월 시의 특징으로 <그리워>·<산유화> 등의 작품에서도 잘 나타난다. 이밖에도 김소월은 설화적 내용이나 여음, 방언 등을 작품에 효과적으로 채용해 한국적인 기다림의 정서와 비극적인 정서를 잘 보여 주었다. 생활고를 비관해 음독자살했다. 1968년 3월 한국일보사가 남산에 그를 기리는 시비를 세웠다.
[1928년] 정세영(鄭世永) 출생
← 포니 자동차
현대자동차, 2005서울모터쇼 →
1928. 8. 6 강원 통천~2005. 5. 21 서울.
1953년 고려대학교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한 후 1957년 미국 마이애미대학교 대학원을 졸업했다. 1983년 미국 마이애미대학교에서 명예법학박사학위를 받았다. 1957년 현대건설(주) 상무로 입사하여 1967~87년 현대자동차(주) 사장을 지냈다. 현대자동차 초대 사장에 취임한 뒤 1974년 최초의 국산 승용차인 '포니'를 개발하여 수출을 시작하면서 전세계에 한국 자동차의 존재를 각인시키며 '포니 정'이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자동차에 관한 그의 행적은 한국 자동차의 역사나 다름없다. 1977년 대한배구협회 부회장, 1981~83년 한국과학기술원 부이사장, 1988년 한국무역협회 회장, 1988~92년 한미경제협의회 부회장 등을 지냈다. 1993년 현대그룹 회장 및 현대자동차(주) 회장을 비롯해 한·영경제협력위원회 위원장(1977), 한국경영자총협회 회장(1982), 전국경제인연합회 부회장(1987), 한미협회 회장(1998), 현대산업개발㈜ 명예회장(1999) 등을 역임했다. 명예대영제국훈장 커맨더장, 금탑산업훈장, 신산업경영인상 등을 받았다.
[1918년] 전 상공부장관 유창순(劉彰順) 출생
1918. 8. 6 평남 안주~.
1937년 평양상업학교를 졸업한 후 미국으로 건너가 1950년 훼이스팅스대학교를 졸업했다. 1951년 이후 한국은행 도쿄[東京] 지점장, 뉴욕 사무소장, 부총재 등을 거쳐 1961년 한국은행 총재가 되었다. 1960년 부흥부 차관, 1962년 상공부장관, 1963년 경제기획원장관 등 경제관료직을 두루 거쳐으며, 1967년에는 롯데제과(주) 회장을 지내기도 했다. 1981년 이후 국무총리, 한국무역협회 회장, 한국적십자사 총재, 한미경제협력위원회 위원장, 국정자문위원, 해외동포모국방문후원회 회장, 경제구조조정자문회의 의장 등을 지냈으며, 1989~93년에는 비기업인 출신으로는 처음으로 전국경제인연합회 회장을 지냈다. 1993년 전국경제인연합회 명예회장, 롯데제과(주) 고문, 호남석유화학(주) 회장, 1997년 국제연합(UN) 한국협회 명예회장, 대신경제연구소 회장, 1998년 한국중견기업연합회 고문, 2002년 10월 국민통합21 창당준비위원회 위원장.
적십자태극장, 국민훈장무궁화장을 받았다.
[1911년] 미국의 성우·영화배우 볼(Ball, Lucille Desiree) 출생
← 볼과 아나즈
오랫동안 텔레비전 코미디 스타였다. 그녀가 출연한 프로그램 〈왈가닥 루시 I Love Lucy〉는 1951년 10월 15일 컬럼비아방송국(CBS)이 처음 방영한 상황희극물이었다. 그후 이 프로그램은 여러 가지 형태로 1957년까지 방영되었고, 1962~68년과 1968~74년에 재방영되었다.
젊은시절 볼은 일찍이 연극에 뜻을 두고 15세 때 맨해튼으로 가서 드라마 학교에 다니며 온갖 뜨내기 일을 했다. 몇 년 후 모델을 한 것이 계기가 되어 영화에서 조역을 맡게 되었다. 1933년에 영화를 시작했고 주로 아르케이오영화사(RKO)에서 일했다. 10년 뒤 더 비중 있는 역할을 맡게 되었으며, 1947년에는 CBS 라디오 연속극에서 변덕스러운 가정주부 역을 맡아 주목을 받았다. 1940년 인기 있는 악단장인 데지 아나즈(1917~86)와 결혼했다. 볼은 뒤에 텔레비전 연속 코미디 〈왈가닥 루시〉의 제작을 도왔으며, 이 작품에서 그녀와 아나즈는 이상스러운 사건과 재난으로 끊임없이 괴로움을 당하는 아내와 남편 역을 맡았다. 이 쇼는 본방송과 재방송 모두 대단한 인기를 끌어 그뒤 여러 해 동안 연속 코미디에 영향을 주었다.
[1914년] 영국의 시인·극작가·문필가 덩컨(Duncan, Ronald Frederick Henry) 출생
1914. 8. 6 로디지아 솔즈베리~1982. 6. 3 영국 데번 반스터플.
초기에는 사회주의에 관심을 가졌으나 뒤에는 그리스도교 및 불교(인도에서 마하트마 간디의 문하생으로 공부함) 작품을 썼으며, 말기에는 현대과학을 깊게 연구한 서사시 〈인간 Man〉(5부, 1970~74)을 썼다. 유명한 작품으로는 희곡 〈무덤으로 가는 길 This Way to the Tomb〉(1945)과 영국 작곡가 벤저민 브리튼을 위해 쓴 3편의 오페라 대본 〈루크레티아의 겁탈 Rape of Lucretia〉(1946)·〈사랑하므로 존재한다 Amo Ergo Sum〉(1948)·〈성 피터 찬양 Hymn to St. Peter〉(1951)이 있다. 덩컨은 문학지 〈타운즈맨 The Townsman〉(1938~46)의 시 부문 편집을 맡았으며 브리튼 축제를 위해 쓴 종교 희곡 〈성모의 잔 Our Lady's Tumbler〉은 1951년 솔즈베리 성당에서 공연되었다. 1953~70년 새로운 희곡 14편을 발표했고, 1955년에는 뛰어난 희곡 작가들을 여러 명 발굴한 잉글리시스테이지컴퍼니(English Stage Compa-ny)를 세웠다. 텔레비전 드라마도 많이 썼다.
[1915년] 프랑스계 캐나다의 서정시인·극작가 라스니에(Lasnier, Rina) 출생
1915. 8. 6 캐나다 퀘벡 생그레구아르~1997. 5. 9 생장쉬르르리슐리외.
도서관 사서, 언론인, 또는 비서로도 일했다. 그녀는 희곡으로 다비드상(1943)과 뒤베르네상(1957) 등 많은 상을 받았다. 라스니에의 작품은 대개 종교적 감정으로 활력을 얻고 있으며, 특히 종교사에서 영감을 얻은 희곡이 많다. 야곱과 라헬의 이야기에 바탕을 둔 노래극 〈승천의 노래 Le Chant de la montée〉(1947)에서 라스니에는 자신의 서정적 능력을 마음껏 발휘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후기에 쓴 시는 너무 복잡하고 미래주의적인 요소가 섞여 있어서 별로 좋은 반응을 얻지 못했다. 〈거울 : 산문 Miroirs : proses〉(1960)에 수록된 이야기와 스케치는 문제가 인상주의적이어서, 산문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시에 더 가깝다. 〈리나 라스니에 선집 Le Choix de Rina Lasnier〉(1982)이라는 제목의 사화집에는 작가생활 전반에 걸쳐 다양한 시기에 쓴 작품들이 수록되어 있다.
[1909년] 광복군 지달수(池達洙) 출생
1909. 8. 6 서울 ~ 1969. 5. 16.
본관은 충주. 일명 이달수(李達洙). 아버지는 광복군 총사령관 청천(靑天)이다. 일찍이 아버지를 따라 만주로 건너갔으며, 1928년 지린 성[吉林省] 검성중학교(檢成中學校)를 졸업했다. 오상현(五常縣)에서 농촌청년회(農村靑年會)를 조직하고 회장에 취임하여 농촌청년들의 항일독립사상 고취에 힘썼다. 1931년 한국독립군(韓國獨立軍)에 입대, 총사령관인 아버지 밑에서 활약했다. 1932년 쌍성보(雙城堡) 전투에 참가했으며, 1933년에는 중국군과의 연합작전에서 주자툰[牛家屯] 전투 등 크고 작은 전투에 소대장으로 참가하여 많은 공을 세웠다. 이해 난징[南京]으로 가서 중국중앙군관학교 제2분교에서 군사학수업과 군사훈련을 받았으며, 1934년 중국군관학교 뤄양 분교[洛陽分校] 한국인특별반에 입학하여 교육을 받았다. 1936년 임시정부에서 화북평수지구(華北平綏地區) 공작단원으로 임명되어 활동했으며, 같은 해 민족혁명당(民族革命黨) 중앙위원 겸 쑤이위안 성[綏遠省] 당부위원장(黨部委員長)이 되었다. 1940년 9월 한국광복군 창설에 참가하고 총사령부 경리로 임명되어 충칭[重慶]에서 활동했으며, 다음해에는 한국광복군 제2지대 2구대장으로 임명되어 쑤이위안 성, 산시 성[山西省] 등지에서 항일선전활동을 하고 청년들을 규합하여 광복군에 편입시켰다. 1945년 해방이 되자 부지대장으로 일본군에 강제 징집되었던 한국 병사를 인수하여 훈련을 시켰으며 교포의 재산보호 및 귀국알선 등에 힘썼다. 귀국 후 대한국민당 중앙위원, 민주국민당 중앙감찰위원, 한국광복군전우회 부회장, 한국광복군동지회 부회장, 대한독립동지회 상임위원장 등을 역임했다. 1963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수여되었다.
[1881년] 스코틀랜드 세균학자 플레밍(Fleming, Sir Alexander) 출생
1881. 8. 6 스코틀랜드 에어 록필드~1955. 3. 11 런던.
1928년 페니실린을 발견하여 감염성 질병에 대한 항생제 치료법이 효과적으로 실행될 수 있는 길을 열었다. 1939년부터 플레밍의 기본적인 발견들을 더욱 진전시켜 페니실린을 분리·정제하고 시험했을 뿐만 아니라 많은 양을 얻기 위해 시도했던 E. B. 체인, H. W. 플로리와 1945년 노벨 생리학·의학상을 공동 수상했다. 1906년 런던대학교의 세인트 메리 병원 의과대학에서 학위를 받은 후, 인간 조직에 무해한 항세균성 물질에 관해 연구했다. 그는 제1차 세계대전 중에 왕립군사의무단에서 헌신적으로 봉사하는 한편 연구를 계속했다. 1918년 연구와 강의를 위해 세인트 메리 병원으로 돌아왔으며, 왕립외과협회의 헌터좌(座) 교수가 되었고(1919), 애리스앤드게일 강사가 되었다(1928). 1921년 눈물·타액 등의 분비액과 일부 동물조직에서 발견되며 항생작용을 보이는 효소인 리소자임을 동정(同定)하고 분리했다. 포도상구균을 대상으로 연구하던 1928년, 이 세균의 배지에 오염으로 증식한 페니실리움 노타툼(Penicillium notatum)의 포자 주위에 무균의 환(環)이 형성되는 현상을 볼 수 있었다. 계속적인 연구를 통해, 800배 정도로 희석해도 세균의 증식을 억제하는 기능을 그대로 지닌 물질을 곰팡이에서 발견했다. 그는 이 물질을 페니실린이라고 명명하고, 1년 후 그 결과를 〈영국 실험병리학 저널 British Journal of Experimental Pathology〉에 발표했다. 1943년 왕립학회의 회원으로 선출되었으며, 1944년 기사작위를 받았다.
[1978년] 로마 교황 바오로 6세(Paulus VI, 1897~1978) 사망
1978년 오늘 교황 바오로 6세가 81살을 일기로 타계했다. 교황으로 즉위한 지 15년 만이다.
이탈리아 브레시아 출신인 바오로 6세는 1963년 요한 23세의 뒤를 이어 교황이 됐다. 전임자가 소집했던 제2차 바티칸공의회를 성공적으로 종결지음으로써 과감한 가톨릭의 쇄신을 단행했다. 특히 타 종교와의 화해와 교류에 주력하고 인도 뭄바이를 방문하는 등 해외도 자주 오갔다.
바오로 6세는 국제평화에도 큰 관심을 가지고 활동했다. 1965년에는 뉴욕의 유엔 본부에서 강연도 했다.
[1931년] 간디, 무저항주의 제창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처음에는 인도의 독립을 촉진하기 위하여 영국의 입장을 지지하였으나, 전쟁 후 영국의 배신과 1919년의 롤라트 법안(Rowlatt Act)과 같은 반란진압조령(條令)의 시행 때문에, 사티아그라하운동을 전개하기도 하였다. 이를 위하여 인도 여러 곳을 두루 순회하였고 수방(手紡:charkha)운동을 장려하였다. 1919년 인도국민회의파의 연차대회에서는 간디의 지도 하에 영국에 대한 비협력운동 방침이 채택, 납세거부 ·취업거부 ·상품불매 등을 통한 비폭력 저항을 실시하였다. 이듬해에 반영 ·비협력 운동이 선언되고 외국제 직물의 불매운동은 성공하였으나, 인도 각지에서 유혈사태가 일어나자, 1922년 간디의 호소로 운동은 잠시 중지되었다.
그 동안 간디는 투옥되었다가 풀려 나왔으며, 1924년부터 1년간 인도국민회의파의 의장으로 있으면서 수방운동으로써 인도인이 자력에 의한 농촌구제에 나설 것을 역설하면서 전국을 돌아다녔다. 1929년의 연차대회에서 국민회의파는 창립 이래 처음으로 완전독립을 선언하였고, 61세가 된 간디는 1930년 3월에 사티아그라하운동의 지지자들을 이끌고 소금세 신설 반대운동을 벌였다. 이로 인하여 그는 구금되었으며, 1931년 석방 후, 어윈 총독과 절충한 결과, 간디어윈 협정을 체결하여 반영(反英) 불복종운동을 중지하였다. 간디어윈협정에도 불구하고 다시 탄압정책을 쓰는 영국 당국에 항의하기 위한 불복종운동을 재개하여 투옥되었다가 1932년 석방된 이후부터 인도 카스트의 최하층인 하리잔의 지위 향상에 진력하였다.
[1868년] 프랑스의 시인, 극작가 클로델(Claudel, Paul) 출생
클로델 [Claudel, Paul(-Louis-Charles-Marie), 1868. 8. 6~1955. 2.23]
엔현(縣) 빌뇌브쉬르페르 출생. 파리의 리세 루이 르 그랑에 입학한 다음 신앙을 잃었다가, 파리의 법률학교 재학 중에 신비적인 체험을 함으로써 로마가톨릭 신앙을 회복하였다. 처음에는 H.A.텐과 르낭 등의 영향을 받아 자연주의 ·인상주의 ·상징주의 등의 세기말적인 풍조에 젖었으나, 1886년 J.N.랭보의 작품을 접하게 되어 생명적인 초자연의 세계에 눈뜨게 되었다. 이 무렵을 전후하여 S.말라르메의 화요회(火曜會)에 출석하면서, 아이스킬로스, 셰익스피어 등의 영향을 받아 희곡 《황금의 머리 T te d’or》(1890) 《도시 La ville》(1893)를 발표하여 M.마테를링크, J.말라르메, R.구르몽 등의 절찬을 받게 되었다.
그는 이미 독자적인 시법을 확립하여 호흡의 리듬에 입각한 시행(詩行)을 발표하였으며, 우주적인 넓이를 무대로 한 전인적인 극을 전개하였다. 한편, 1890년에 외교관 시험에 수석으로 합격, 1935년까지 외교관으로서 중국 ·일본 ·미국 ·유럽 등지에서 근무하였다. 많은 희곡과 시를 통하여 피안(彼岸)의 세계에서의 온갖 생의 가능성을 구상화하면서, 말라르메의 시적 방법에 의한 종교적 세계 인식을 성숙시켰다.
희곡 《정오의 분할 Partage de midi》(1906 간행, 48 초연)에서는 1900년 수도사가 되려다가 좌절한 것, 유부녀와의 사랑의 파국, 이런 것을 계기로 정복자적인 자아주의의 탈을 벗고 진정으로 신을 중심으로 한 겸허한 마음을 가지는 것으로 되어 있다. 이런 내용을 집대성한 것으로 에스파냐풍의 희곡 《비단 구두 Le Soulier de satin》(1926 간행, 1943 초연)가 있다.
만년에는 성서의 시적 주해(註解)에 전념하였으며, 주요작품으로 《5대 송가 Cinq grandes odes》(1910) 《세 목소리의 노래 Trois po mes de guerre》(1915)가 있으며, 희곡으로는 《마리아에의 수태고지(受胎告知) L’Annonce faite Matie》(1912 초연)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의 책》(1930 작, 1953 초연) 《잔다르크 Jeanne d’Arc》(1939 초연) 등이 있다. 그의 희곡은 1940년 이후 장 루이 바로 극단이 연달아 상연하였으며, 그는 현대 프랑스의 대표적인 시인 ·극작가로 평가되었다. 1946년 아카데미 프랑세즈의 회원이 되었다.
[1610년] 조선 중기의 의학자 허준(許浚), '동의보감' 25권 완성
본관 양천(陽川), 자 청원(淸源), 호 구암(龜岩). 선조 때 내의(內醫)가 되어 왕실의 진료에 공을 세웠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어의(御醫)로 왕을 끝까지 호종(扈從)하고 돌아와 1604년 호성공신(扈聖功臣) 3등에 책록되고, 1606년 양평군(陽平君)에 봉해졌다. 후에 대간의 반대로 직위가 취소되고, 1608년 선조가 죽자 치료를 소홀히 했다는 죄로 한때 파직당했다.
1610년(광해군 2) 16년의 연구 끝에 완성한 《동의보감(東醫寶鑑)》은 조선 한방의학의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을 뿐만 아니라, 18세기에는 일본과 청(淸)나라에서도 간행될 만큼 높이 평가되었으며 지금도 여러 나라에서 번역 출판되고 있다. 저서에 《벽역신방( 疫神方)》 《신찬벽온방(新纂 瘟方)》 《언해구급방(諺解救急方)》 《언해두창집요(諺解痘瘡集要)》 《언해태산집요(諺解胎産集要)》 《맥결집성(脈訣集成)》 《찬도방론맥결집성(纂圖方論脈訣集成)》 등이 있다.
[1809년] 빅토리아 시대의 시인 테니슨(Alfred Tennyson, 1809~1892) 출생
중부 잉글랜드, 랭카셔의 서머스비 출생. 목사의 아들로 태어나 엄격한 아버지의 교육을 받았다. 1828년 케임브리지대학의 트리니티 칼리지에 입학하여, 시 《팀북투 Timbuctoo》(1829)로 총장상 메달을 받았다. 이미 형 찰스와 《두 형제 시집 Poems by Two Brothers》(1827)을 익명으로 내놓았는데, 실은 장형 프레드릭까지 포함한 3형제 시집이다. 이어 《서정시집 Poems, Chiefly Lyrical》(1830)을 발표, L.헌트에게 인정을 받았고, 1831년 아버지가 죽자 대학을 중퇴하였다.
1832년의 《시집》에는 고전을 제재로 한 《연(蓮)을 먹는 사람들 The Lotos-Eaters》《미녀들의 꿈 The Dreams of Fair Women》, 중세(中世)에서 제재를 얻은 《샬럿의 아가씨 The Lady of Shalott》, 그의 예술관을 보여 주는《예술의 궁전 The Palace of Art》등의 가작(佳作)이 들어 있다. 이 해 친구 아서 핼럼과 함께 유럽을 여행하였고, 이듬해 핼럼이 죽자 애도의 시를 쓰기 시작하였다. 1842년의 2권본 《시집》에는 《아서왕의 죽음》《율리시스 Ulysses》《록슬리 홀 Locksley Hall》《두 목소리 Two Voices》《고다이바 Godiva》등의 명작 외에 《정원사의 딸》《도라》등의 전원시(田園詩)가 실렸다. 이것은 T.칼라일, 에머슨, E.포 등에게도 애독되었으며, 다시 1847년의 《왕녀(王女) The Princess》로 명성을 떨쳤다.
1850년에는 걸작 《인 메모리엄 In Memoriam》이 출판되었으며, W.워즈워스의 후임으로 계관시인(桂冠詩人)이 되었다. 이 해에 그는 약혼녀 에밀리 셀우드와 결혼하였다. 《인 메모리엄》은 17년간을 생각하고 그리던, 죽은 친구 핼럼에게 바치는 애가(哀歌)로, 어두운 슬픔에서 신(神)에 의한 환희의 빛에 이르는, 시인의 ‘넋의 길’을 더듬은 대표작일 뿐만 아니라, 빅토리아 시대의 대표시이기도 하다. 그 후에도 《모드 Maud》(1855), 대작 《국왕목가(國王牧歌) Idylls of the King》(1859∼1885), 담시(譚詩) 《이녹 아든 Enoch Arden》(1864) 등을 써서 애송되었으며, 여왕으로부터 영작(榮爵)을 받고, 빅토리아 시대의 국보적 존재가 되었다.
[1825년] 볼리비아 독립
볼리비아의 초기 역사에 관해서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안데스 지역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것은 적어도 2만 1,000년 전부터이지만 지역적으로 중요한 의의를 갖는 문화가 발달한 것은 1000년 이후부터였다. 감자 및 라마가 전래된 것도 이무렵부터인 것으로 보인다. 600년 이후 한때 티티카카 호에서 남쪽으로 약 48km 떨어진 의식(儀式) 중심지 티아우아나코를 중심으로 상당한 수준의 문화가 번창했다. 이 문화는 500년 동안 발달하면서 외부세계에 영향을 끼쳤으며 당시의 문화발전 정도를 보여주는 기념비적인 구조물들을 남겼다. 1200년 이후에 아이마라어를 사용하는 많은 소왕국들이 티아우아나코 문화를 계승했고, 스페인 식민지 시대에 접어들 때까지 볼리비아 전역을 지배했다. 15세기말 케추아어를 사용하는 서북의 잉카인이 아이마라족을 그들 제국에 합병하고 합병지역을 코야수요라고 불렀다. 토착어 및 문화는 비교적 원래대로 남겨두었지만 이 지역은 케추아어를 사용하는 잉카의 식민지가 되었다.
1532년 스페인이 잉카 제국을 침입했다. 16세기말 스페인은 지금의 수크레인 차르카스를 비롯해서 라파스·산타크루스·비야데오로페사(코차밤바) 같은 도시를 건설하고 포토시의 은을 채광하기 시작했다. 그곳은 당시 페루 부왕령에 속한 차르카스의 아우디엔시아라고 일컬어졌던 지역으로 17세기에 큰 번영을 누렸다. 포토시는 한동안 아메리카 대륙에서 가장 큰 도시였으며 여러 학술단체와 대학이 있었던 차르카스는 '아메리카의 아테네'로 이름을 떨치기도 했다. 그러나 17세기말에 이르러 광물이 고갈되기 시작했고 1800년대초 독립전쟁 후 심각한 경제침체가 뒤따랐다. 국가로 성립되었을 때 볼리비아의 경제는 상당히 낙후된 상태였다. 독립에 대한 요구는 1809년 무렵부터 일기 시작했다. 그러나 독립전쟁에 대한 지지가 전폭적인 차원으로 확대된 것은 시몬 볼리바르의 부관이었던 안토니오 호세 데 수크레가 1824년 아야쿠초에서 스페인 군대를 물리치고 승리를 거둔 이후부터였다. 1825년 마침내 수크레가 스페인 군대를 물리쳤다.
독립 이후 볼리비아의 정치사는 폭동과 불안정으로 얼룩졌다. 1839년 짧았던 페루와의 연합이 깨어졌고 1884년 태평양 연안의 아타가마 주를 칠레에게 빼앗겼다. 1880년 민간통치 시대가 시작되어 1936년까지 계속되었다. 1932∼35년에는 파라과이와 차코보레알의 지배권을 둘러싼 국경분쟁인 차코 전쟁을 치르면서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1940년대 정당들이 잇따라 생기면서 정치안정은 거의 불가능해졌다. 그러나 1952년 4월 광산 노동자, 농민을 비롯한 여러 집단이 동맹하여 당시의 군부정권을 전복시키고 볼리비아 국가혁명을 시작했다. 이 사회혁명으로 1950년대초 주석광산이 국유화되고 처음으로 보통선거가 승인되었으며 인디언의 상당수가 토지를 분배받고 부분적으로나마 노예신분에서 자유로워졌다. 1950년대 후반 침체된 경제의 바탕을 바로 세우기 위해 1952년 혁명과 함께 시작된 몇몇 사회계획을 중지했다. 뒤이어 1980년대까지 수십 년 간 불안정한 정국이 계속되었다. 쿠데타 때문에 1980년 실시된 민주선거가 무효가 되고 군부지배가 계속되다가 1982년 민중반란으로 걷잡을 수 없는 인플레이션이 발생하자 1985년 선거를 새로 실시하자는 요구가 일었다. 이에 따라 새로운 정부가 들어서 인플레이션을 억제하고 경제를 안정시키기 위해 강도 높은 긴축정책을 실시하고 있다.
볼리비아는 1965년 4월 대사급 외교를 수립한 후 그해 7월 국교를 수립했다. 북한과는 수교가 없는 상태이다. 한국공관은 1976년 7월에, 볼리비아 공관은 1981년 8월에 설치되었다. 대한무역진흥공사(KOTRA) 무역관이 있었으나 1984년 폐쇄되었다. 1971년 9월 문화협정이 체결된 바 있고 리틀엔젤스 예술단 공연이 있었다. 한국 정부는 의약품·컬러 텔레비전을 원조해왔다. 1991년 대한수입액은 484만 달러, 대한수출액은 104만 달러 정도이다. 1990년 6월 현재 교민수 1,146명, 체류자 11명이 있다.
[1953년] 시인 임화(林和), 北에서 총살
1908. 10. 13 서울~1953. 8. 6 평양.
일제 강점기 및 8·15해방 직후에 활동한 사회주의 문예운동의 대표적인 인물이다. 본명은 인식(仁植). 필명은 청로(靑爐)·임화(林化 또는 林華)·성아(星兒)·김철우(金鐵友)·쌍수대인(雙樹臺人).
서울의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나 소년시절을 유복하게 보냈다. 1921년 보성중학교에 입학해 이상·조중곤·윤기정 등과 사귀었으며, 문학에 흥미를 느껴 글을 쓰기 시작한 것은 보성중학교를 중퇴한 뒤부터이다. 조선 프롤레타리아 예술가동맹(KAPF)에 가입해 1928년 중앙위원이 되었고, 그해 〈유랑〉·〈혼가 昏街〉 등의 영화에 주연배우로 출연했다. 이듬해 박영희의 후원으로 연극공부를 하기 위해 도쿄[東京]로 유학을 갔으나 일본 사회주의자들의 영향을 받아 사회과학에 관한 책만 탐독했고 김남천·안막·한재덕·이북만 등과 함께 '무산자사'에서 활동했다. 1931년 귀국해 이북만의 누이 이귀례와 결혼했으며, 그해 KAPF 제1차 검거사건 때 검거되었다가 9월경에 불기소 처분으로 석방되었다. 1932년 4월 KAPF 중앙위원회 서기장이 되었고, 기관지 〈집단〉의 책임편집을 맡아보았다. 같은 해 KAPF 제2차 검거사건 때도 검거되었으나 폐결핵의 악화로 석방되었다. 1935년 김남천과 함께 경기도 경찰국에 KAPF 해산계를 제출하고, 그해 8월에는 요양을 위해 마산으로 내려가 1937년까지 그곳에 머물렀다. 후에 여기서 만난 지하련과 재혼했다. 1937년 학예사를 대리 경영했고, 〈사해공론〉·〈인문평론〉의 편집에도 참여했다. 1940년초에는 고려영화사 문예부 촉탁으로 근무했고, 1943년 조선영화 문화연구소의 촉탁으로 있으면서 〈조선영화연감〉·〈조선영화발달사〉를 편집했다. 8·15해방 직후 김남천·이원조·이태준 등과 함께 조선문학건설본부를 조직했으나 이기영·한설야·안막 등이 조직한 조선 프롤레타리아 문학동맹과 대립이 일어나자, 1946년 2월 박헌영의 지령을 받고 두 단체를 통합해서 조선문학가동맹이라는 단체를 결성했다(→ 조선문학가동맹). 1947년말 월북하여 황해도 해주에 머물면서 조소문화협회 중앙위원회 부위원장을 지냈다. 6·25전쟁 때 북한의 종군작가단으로 서울에 온 벅찬 감동을 시 〈너 어디 있느냐?〉와 인민군이 후퇴해 평안북도까지 쫓겨간 심정을 시 〈바람이여 전하라, 흰 눈을 붉게 물들인 나의 피 위에〉 등에 나타냈다. 그러나 이 작품들이 문제가 되어 1953년 남로당 계열이 숙청될 때, '미제의 고용 스파이'라는 죄명으로 이승엽 등과 함께 사형당했다.
그 밖에
2005년 2005 동아시아컵 여자축구대회 한국 우승
2005년 히로시마 원폭 투하 60주년
2005년 2005 세계육상선수권대회 핀란드 헬싱키에서 개막
2005년 월정사 주지배 평창지역 족구대회(2005.8.6~8.7)
2004년 국내 첫 인형극박물관 개관(관장에 강승균씨 선임)
2003년 인도네시아 수도 자카르타서 폭탄테러, 160여명 사상
1998년 모니카 르윈스키, ‘클린턴과 10차례 성관계’ 연방대배심서 증언
1997년 대한항공 747여객기, 괌공항 인근 산악지역에 추락(226명 사망,실종)
1996년 화성 운석에서 생물체 흔적 발견
1994년 이탈리아 가수 도메니코 모두뇨 사망
1994년 엑스포과학공원 개장
1993년 일본 의회, 새 총리에 호소카와 모리히로 일본신당대표 선출
1991년 유엔안보리, 남북한의 유엔가입신청안을 이의없이 채택
1991년 웹브라우저 창시자 팀 버너스 ‘월드 와이드웹(www)’ 공개
1990년 부토 파키스탄 총리 해임
1989년 프랑스 ‘르몽드’ 신문 창립자 위베르 뵈브 메리 사망
1989년 하이메 파스 사모라 볼리비아 대통령에 취임
1988년 중앙경제신문 오홍근 부장, 기사불만 정보사 장교에 피습
1985년 무역구조 민간협회 발족
1985년 ‘깃발’ ‘이화언론’용공유인물로 간주 보안법 적용으로 제작자 구속
1983년 여의도에 만남의 광장 개장
1983년 신흥사 승려살인 사건 발생
1980년 노영문-이재웅, 요트 ‘파랑새호’로 태평양 횡단 성공
1980년 국보위 상임위, 폭력 사기 밀수 마약등 사회악 일소위한 특별조치 발표
1979년 관훈미술관 개관
1975년 UN안보리 한국의 UN가입안 부결
1971년 김일성 ‘남한의 공화당 등 정당, 대중단체 기타 인사들과 접촉 용의’표명
1969년 독일의 철학자 테오도르 아도르노 사망
1965년 존슨 미국 대통령, 흑인투표권법에 서명
1962년 자메이카, 영국으로부터 독립
1961년 소련, 보스토크 2호 발사. 지구를 17바퀴 일주
1961년 한국-차드 국교 수립
1960년 쿠바, 전미(全美)자산의 국유화 발표
1955년 제1회 원폭-수폭금지 세계대회
1952년 히로시마 평화기념공원 건립
1949년 모병제에서 징병제로 병역법 개정
1949년 장개석 자유중국 총통 내한
1948년 중앙선 도농역서 열차전복 106명 사상
1937년 미소통상협정 성립
1932년 제1회 베네치아 영화제 개막
1929년 헤이그에서 독일배상에 관한 영국안 수정가결
1928년 팝 아트 운동의 창시자 앤디 워홀 출생
1926년 거트루드 캐롤린 에덜리, 여성 사상 최초 영국 해협 도영
1911년 전염병 격리수용소 순화원 준공
1909년 북경, 천진, 동삼성에서 안봉철도 문제에 항의. 일화(日貨) 거부운동 시작
1897년 영국, 노동자보호법 공포
1896년 프랑스, 마다가스카르연합법 성립
1886년 콜롬비아공화국 성립
1879년 독일 천문학자 요한 폰 라몬트 사망
1817년 중농주의 학파 이론의 프랑스 경제학자 피에르 사무엘 뒤퐁 사망
1806년 신성로마제국 멸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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