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탄] 그룹사운드 B-19로 미8군 무대 입문한 뒤 안치행과 “실버코인스” 결성
구리남양주시민의소리는 창간 3주년을 맞아 1972년 불후의 명곡 ‘등불’을 발표한 영사운드의 보컬 유영춘의 “한국 그룹사운드 백서”를 연재한다.
1962년 영국의 비틀스가 몰고 온 한국의 그룹사운드의 열풍, 고등학교 2학년 무작정 음악을 시작해 50년간 영사운드를 이끄는 유영춘의 생생한 증언으로 우리나라 그룹사운드의 탄생과 일화를 재구성한다.
이번 호는 제1탄으로 유영춘이 8군 무대에 입문해 활동한 “B-19”, 안치행을 중심으로 한 “실버코인스” 결성까지를 소개한다.(편집자 주)
KBS 가요무대에서 불후의 명곡 '등불'을 노래하는 유영춘 (유영춘 제공)
- 유영춘은 누구인가
유영춘은 미 8군 무대에서 수년간 활동한 경험을 바탕으로 “HE-5” 의 결성에 참여했고, 싱어로서 두각을 나타냈던 인물이다.
‘초원’, ‘메아리’, ‘정주고 내가 우네’ 등 주옥같은 히트곡들을 노래하며 70년대 초중반에 두터운 팬을 확보했다.
그 후 "영사운드"의 멤버로서 ‘등불’, ‘달무리’, ‘험한 세상의 다리가 되어 (Bridge Over Troubled Water - 사이먼 & 가펑클)’, ‘아름다운 계절 등 영사운드의 대표곡을 노래했다.
1991년 기타리스트 김홍탁과 아들 유원우와 함께 “선생님, 아빠 그리고 나"를 결성하여 퓨전 사운드를 들려주기도 한 우리나라 그룹사운드 보컬의 원조로 정평이 나 있다.
유영춘의 그룹사운드 활동 대표 앨범... HE-5, 영사운드, 선셍님 아빠 그리고 나
- 유영춘 비틀스에 빠지다
유영춘은 1946년 서울 후암동에서 태어났고, 5살에 공주에 거주하며 금학초등학교에 입학하고 4학년 서울 영등포초등학교를 거쳐 동양중학교를 졸업했다.
그는 공부를 제법 잘한 착한 청소년이었다. 당시 서울에서 두 손가락 안에 들던 서울 경복고등학교 입학을 준비했으나 체력장을 죽을 쑤고, 입학에 자신이 없자 백지 답안을 내고 수험장을 나왔다.
그리고 선린상업고등학교 야간에 입학하게 된다. 백지답안지는 예술가의 기질을 보인 사춘기 반항의 멋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그는 고2가 되자 비틀스 음악에 심취하고, 전국콩쿠르대회에 나가 입상을 한다. 비틀스의 ‘아이 워너 홀드 유어 핸드(I Want To Hold Your Hand)’를 흥얼거리며 등하교를 한다.
음악은 잘 몰랐지만, 비틀스의 매력적인 창법에 반했다. 떨림 즉 바이브레이션이 없는 창법은 비틀스만의 독특한 발성이라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그는 비틀스 멤버 가운데 폴 메카트니(Paul McCartney)를 최고로 뽑았고, 폴이 부른 ‘에스터데이(Yesterday)’ 비틀스 최고의 음악으로 여겼고, 그 창법을 충실하게 따라 불렀다.
그는 비틀스는 물론 롤링스톤즈 등 그룹사운드 음악에 심취한다. 그에게 음악은 최고의 선생이었다.
- 유영춘 미8군 무대에 서다
당시 선린상고 부근에 당시 최고의 연예 프로덕션인 “화양프로덕션(화양흥업)”이 있었다. 등하교 때마다 들리는 연주와 음악 소리가 매료되었다.
이 프로덕션에는 미8군 무대에 진출한 음악인이 대부분이었다. 유영춘은 공부는 뒷전 대학 입학 물론 취직도 안중에 없었다. 오로지 무대에 서는 것만 생각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화양프로덕션으로 달려가 오디션을 보고 당당히 합격했다. 무대에 서기 위해 하루에 10시간 넘게 연습했다. 유영춘이 속한 그룹은 “B-19”였다.
“당시 미8군에는 많은 클럽이 있었다. 계급에 따라 졸병(사병)클럽, 서전(하사관)클럽, 장교클럽 3부류로 나누었다.
8군 멤버 대부분 그룹사운드였기에 쓰리쿼터 미군 군용트럭에 악기와 연주자들을 태워 운송했다.”-유영춘 채록
60년대 8군 클럽으로 연주자와 악기를 운송했던 쓰리쿼터 트럭... 쓰리쿼터는 지프와 트럭의 중간급으로 적재량이 4분의 3톤이라 쓰리쿼터라 부른다. 흔히 ‘닷지’라 부르고, 사오톤, 통차, 포차, 케이포라고도 했다.
이 쓰리쿼터는 아무나 타는 것은 아니었다. 마스터급 연주자만 탑승할 수 있었다.
밴드 역시 오픈밴드와 하우스밴드가 있었는데, 하우스밴드는 미8군 클럽에 3개월 6개월 단위로 계약을 한 전속악단을 말하며, 오픈밴드는 심사에는 통과했으나 전속계약을 맺지 못한 떠돌이 악단을 말한다.
유영춘 역시 오픈밴드와 하우스밴드 오가며 공연했다.
“이들은 석 달 또는 여섯 달마다 심사를 받았는데, 직전 심사에서 우수한 등급을 받은 악단도 탈락하기가 일쑤였다.
그런 까닭에 체계적으로 공부하지 않을 수 없었고 독창성도 함께 갖추어야 했다. 훗날 우리 영사운드도 일반 무대에서 그 덕을 톡톡히 보게 된다.” -유영춘 채록
우리 그룹 B-19는 하우스밴드로 양주와 포천(운천)의 클럽에서 주로 활동했다. 클럽에서는 당시 최고의 주가를 올린 비틀스와 엘비스 플레슬리의 록큰롤을 곡을 주로 연주했다.
비틀즈의 ’아이 소우 허 스탠딩 데어(I Saw Her Standing There)'는 '1,2,3,4' 카운팅으로 시작해 분위기 띄우기에 안성맞춤이었다.
미군들은 미친 듯한 환호가 지나면 엘비스플레슬리의 ‘캔 헬프 폴링 인 러브(Can't help falling in love)’로 고향에 두고 온 애인을 그리게 했다.
미8군의 무대는 그냥 노래만 부르는 것이 아니라 열정과 향수를 연출해야 했다. 이렇게 두 시간 정도 연주가 끝나면 다시 쓰리쿼터에 올라 서울로 온다.
-유영춘 그룹사운드의 고향을 탈퇴하다
유영춘은 그렇게 좋아했던 음악과 친해졌지만 먹고 사는 게 문제였다. 당시 A급 연주자의 개런티(출연료)는 1만 5천원 정도였는데, 유영춘은 월 3천원 정도였다.
이는 겨우 한 달 하숙비도 빠듯했다. 차비도 모자라고 담배값도 부족했다. 웬만한 거리는 걸어 다녀야 했다. 당시 유영춘 가족은 돈벌이하는 형제가 없었다. 유영춘은 많은 갈등이 머리에서 가슴으로 쏟아져 내렸다.
“당시 우리는 합숙을 했다. 팀 마스터에게 ‘집에 일이 있어 다녀와야겠어요. 차비와 여비 좀 빌려주세요. 나중에 갚을게요.’라고 하자. 단장은 ‘너 도망가려고 하지.’라는, 이 한마디가 얼마나 서운한지. 그룹을 탈퇴할 결심을 했다.” -유영춘 채록
평소 사람과 사귀는 것도 남에게 비빌 줄도 몰랐던 자존심이 워낙 강했던 유영춘에게 단장은 파격적인 대우를 제시했지만 거절하고 음악의 고향인 ‘B-19’를 떠난다.
-유영춘 당대 최고의 작곡가 안치행을 만나다
안타프로덕션의 안치행 대표(사진 안타프로덕션)
그리고는 집에서 칩거에 들어간다. 이때 당대 최고의 작곡자이자 작사가인 안치행과 친한 장현종이 유영춘을 찾아온다.
그즈음(1967년) 안치행은 남산 아래에 그룹사운드를 구성하고 연습 중이었다. 함께하자는 장현종 제안에 흔쾌히 수락한다.
그는 안치행을 처음 만난 순간을 영원히 잊지 못한다. ‘그룹사운드는 위대하다. 밴드는 악보를 따라 연주하면 되지만 그룹은 음악이 맞아야 한다. 팀원 간의 호흡이 중요하다.’라는 말은 지금도 수없이 되뇐다.
그는 멤버들 앞에서 그동안 닦은 노래로 오디션을 봤다. 더블A(AA)였다. 최고의 게런티를 받기로 하고 입단을 한다. 그가 새로이 합류한 그룹은 “실버코인스”였다.
실버코인스는 1967년에 결성되어 1972년 영사운드에 이르기까지 그룹의 중추는 안치행(기타), 유영춘(보컬), 장현종(키보드)이었다. (계속)
출처 : 구리남양주 시민의소리(http://www.gnsiminsori.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