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歸天> 하늘로 돌아가리라.-千祥炳(천상병)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새벽 빛 와 닿으면 스러지는
이슬 더불어 손에 손을 잡고,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노을 빛 함께 단둘이서
기슭에서 놀다가 구름 손짓하면은,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나무 -千祥炳(천상병)
사람들은 모두 그 나무를 썩은 나무라고 그랬다.
그러나 나는 그 나무가 썩은 나무는 아니라고 그랬다.
그 밤 나는 꿈을 꾸었다.
그리하여 나는 그 꿈속에서 무럭무럭 푸른 하늘에
닿을 듯이 가지를 펴며 자라가는 그 나무를 보았다.
나는 또다시 사람을 모아 그 나무가 썩은 나무는 아니
라고 그랬다.
그 나무는 썩은 나무가 아니다.
유리창 -千祥炳(천상병)
창은 다 유리로 되지만
내 창에서는
나무의 푸른 잎이다.
생기 활발한 나뭇잎
하늘을 배경으로
무심하게도 무성하게 자랐다.
때로는 새도 날으고
구름이 가고
햇빛 비치는 이 유리창이여 -
主日 2 -千祥炳(천상병)
1
그는 걷고 있었습니다.
골목에서 거리로,
옆길에서 큰길로.
즐비하게 늘어선
상점과 건물이 있습니다.
상관 않고 그는 걷고 있었습니다.
어디까지 가겠느냐구요?
숲으로, 바다로,
별을 향하여
그는 쉬지 않고 걷고 있습니다.
2
낮에는 찻집, 술집으로
밤에는 여인숙,
나의 길은 언제나 꼭 같았는데......
그러나
오늘은 딴 길을 간다.
아가야 -千祥炳(천상병)
해뜨기 전 새벽 중간쯤 희부연 어스름을 타고 낙심을 이리처럼 깨물며
사직공원길을 간다. 행도 드문 이 거리
어느 집 문밖에서 서너 살 됨직한 잠
옷 바람의 앳된 계집애가 울고 있다.
지겹도록 슬피 운다.
지겹도록 슬피 운다.
웬일일까?
개와 큰집 대문 밖에서 유리 같은 손으로 문을 두드리며 이 애기
는 왜 울고 있을까?
오줌이나 싼 그런 벌을 받고 있는 걸까?
자주 뒤돌아보면
서 나는 무심할 수가 없었다.
아가야, 왜 우니?
이 인생의 무엇을 안다고 우니?
무슨 슬픔 당했다고, 괴로
움이 얼마나 아픈가를 깨쳤다고 우니?
이 새벽 정처 없는 산길로 헤매어가는
이 아저씨도 울지 않는데…….
아까야, 너에게는 그 문을 곧 열어줄 엄마 손이 있겠지.
이 아저씨에게는 그
그런 사랑이 열릴 문도 없단다.
아가야 울지 마!
이런 아저씨도 울지 않는데.....
새 세 마리 - 千祥炳(천상병)
나는 새 세 마리와 함께 살고 있다.
텔레비 옆에 있는 세 마리 새는
꼼짝도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진짜 새가 아니라
모조품이기 때문이다.
한 마리는 은행에서 만든 저금통 위에 서 있는 까치고
두 마리는 기러기 모양인데
경주에서 아내가 사가지고 왔다.
그래서 세 마리인데
나는 매일같이 이들과 산다.
나는 새를 매우 즐긴다.
평화롭고 태평이고 자유롭고
하늘이 그들의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이들을
진짜 새처럼 애지중지한다.
막걸리 - 千祥炳(천상병)
나는 술을 좋아하되
막걸리와 맥주밖에 못 마신다.
막걸리는
아침에 한 병(한 되) 사면
한 홉짜리 적은 잔으로
생각날 때만 마시니
거의 하루 종일이 간다.
맥주는
어쩌다 원고료를 받으면
오백 원짜리 한 잔만 하는데
마누라는
몇 달에 한번 마시는 이것도 마다한다.
세상은 그런 것이 아니다.
음식으로
내가 즐거움을 느끼는 때는
다만 이것뿐인데
어찌 내 한 가지뿐인 이 즐거움을
마다하려고 하는가 말이다.
우주도 그런 것이 아니고
세계도 그런 것이 아니고
인생도 그런 것이 아니다.
목적은 다만 즐거움인 것이다.
즐거움은 인생의 최대 목표이다.
막걸리는 술이 아니고
밥이나 마찬가지다.
밥일 뿐 아니라
즐거움을 더해주는
하느님의 은총인 것이다.
들국화 千祥炳(천상병)
산등성 외따론 데,
애기 들국화.
바람도 없는데
괜히 몸을 뒤뉘인다.
가을은
다시 올 테지.
다시 올까?
나와 네 외로운 마음이,
지금처럼
순하게 겹친 이 순간이-
달빛 - 千祥炳(천상병)
여름이 오는 계절의 밤에
뜰에 나가 달빛에 젖는다.
왜 그런지 섭섭하다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사람들은 자려고 하고 있고
나는 잠들기 전이다.
밤은 깊어만 가고
달빛은 더욱 교교하다
일생동안 시만 쓰다가
언제까지 갈건 가
나는 도저히 모르겠다.
좋은 일도 있었고
나쁜 일도 있었으니
어쩌면 나는 시인으로서는
제로가 아닌가 싶다
그래서는 안 되는데
돌아가신 부모님들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
양지는 없고
강 물 千祥炳(천상병)
강물이 모두 바다로 흐르는 까닭은
언덕에 서서
내가
온종일 울었다는 그 까닭만은 아니다.
밤새
언덕에 서서
해바라기처럼, 그리움에 피던
그 까닭만은 아니다.
언덕에 서서
내가
짐승처럼 서러움에 울고 있는 그 까닭은
강물이 모두 바다로만 흐르는 그 까닭만은 아니다.
아내 千祥炳(천상병)
아내의 이름은
목순옥입니다.
내가 마흔세 살 때에
서른다섯 살 아내와
결혼했습니다.
결혼 초에는
아내가 다소
고생스러웠지만
요새는
아내가 카페를 하는 통에
유복하게 살고 있습니다.
아무것도 안 하고
놀고 있는 나를 살리는 것은
물론 아내 때문입니다.
새 千祥炳(천상병)
외롭게 살다 외롭게 죽을
내 영혼의 빈터에
새 날이 와, 새가 울고 꽃이 필 때는,
내가 죽는 날
그 다음 날.
산다는 것과
아름다운 것과
사랑한다는 것과의 노래가
한창인 때에
나는 도랑과 나무가지에 앉은
한 마리 새.
정감(情感)에 가득 찬 계절
슬픔과 기쁨의 주일(週日)
알고 모르고 잊고 하는 사이에
새여 너는
낡은 목청을 뽑아라.
살아서
좋은 일도 있었다고
나쁜 일도 있었다고
그렇게 우는 한 마리 새.
?천상병 [千祥炳, 1930.1.29~1993.4.28]
일본 효고현(兵庫縣) 히메지시(嬉路市) 출생. 1955년 서울대학교 상과대 4년 중퇴. 1949년 마산중학 5학년 때, 죽순(竹筍) 11집에 시 공상(空想) 외 1편을 추천받았고, 1952년 문예(文藝)에 강물, 《매기 등을 추천받은 후 여러 문예지에 시와 평론 등을 발표했다.
1967년 7월 동 베를린 공작단 사건에 연루되어 6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가난·무직·방탕·주벽 등으로 많은 일화를 남긴 그는 우주의 근원, 죽음과 피안, 인생의 비통한 현실 등을 간결하게 압축한 시를 썼다. 1971년 가을 문우들이 주선해서 내준 제1시집 《새》는 그가 소식도 없이 서울시립정신병원에 수용되었을 때, 그의 생사를 몰라 유고시집으로 발간되었다.
‘문단의 마지막 순수시인’ 또는 ‘문단의 마지막 기인(奇人)’으로 불리던 그는 지병인 간경변증으로 세상을 떠났다. 주막에서, 천(歸天), 요놈 요놈 요 이쁜 놈 등의 시집과 산문집 괜찮다 다 괜찮다, 그림 동화집 나는 할아버지다 요놈들아 등이 있다. 미망인 목순옥(睦順玉)이 1993년 8월 《날개 없는 새 짝이 되어》라는 글 모음집을 펴내면서 유고시집 나 하늘로 돌아가네를 함께 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