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로고 뿌리는 별표국수

별표국수
200만평 땅 투기에 실패해
자신이 벌어들인 재산을 고스란히 날려버린 이병철은 훌쩍 여행을 떠난다.
부산에서 시작한 여행은
서울을 거쳐 평양 신의주 원산 흥남을 지나 만주의 장춘, 심양과 북경, 청도,
상해까지 이어진다. 멀고먼 대륙여행이었다.
두 달 동안의 긴 여행이었다.
지금처럼 교통이 발달된 때가 아니었다.
기차는 연착을 하기 일쑤였고, 기차는 사람들로 북새통을 이뤘다.
여행은 자신의 마음을 달래기 위한 목적도 있었지만,
새로운 사업을 시작하기 위한 시장조사의 목적도 있었다.
머리를 식힐 겸 새 출발의 기회를 찾기 위한 여정이었다.
여정기간 이병철이 관심 있게 지켜본 것은 물자의 유통 과정과 상인이었다.
당시 만주에는 사과나 건어물이 매우 부족했다.
사과와 동해의 건어물을 만주지방에 수출하면 돈을 벌 수 있을 것 같았다.
무역업을 생각한 것이다.
그런 물품을 조선 땅에서 가져와 중국에 내다파는 전문업자도 거의 없었다.
이병철은 다시 한 번 생각한다.
그가 벌였던 땅 투기는 자신에게만 이익이 되는 사업이었다.
그래서 그 사업은 망하지 않았더라도 많은 사람에게는 피해가 되는 사업이었다.
하지만 무역업은 다르다.
국내에서 사과농사를 짓는 농민이나 물고기를 잡은 어민들에게도 이익이 될 것이고,
만주 주민들 역시 이익이 된다는 생각을 갖게 된다.
다시 국내에 돌아온 이병철은
중국시장에 가져다 팔 과일 작황과 어황을 끊임없이 조사했다.
작황이 안 좋아 가격이 급등할 때는 어떤 위험이 있는지,
또 물건은 필요한 양을 제때 대줄 수 있는지를 검토해 본 것이다.
이병철이 중요하게 생각한 건, 입지였다.
사과와 건어물을 모아서 기차에 실어 만주로 보내는 곳을 찾아보았다.
바로 대구였다.
대구는 경부철도의 주요 기착지였고
경북지역의 물산이 모이는 교통의 주요 길목이었다.
대구 근처에는 사과 과수원이 많았고,
포항이 근처에 있어 건어물도 쉽게 확보할 수 있었다.
이병철은 이렇게 치밀한 분석을 한 뒤 새로운 사업에 뛰어들었다.
1938년 대구시 인교동 61-1번지, 서문시장 근처였다.
지상 4층, 지하 2층의 목조건물에 ‘삼성상회’라는 간판이 내걸렸다.
삼성이란 브랜드가 처음 등장한 때였다.
바로 현재 삼성그룹의 모체가 되는 게 삼성상회였다.
삼성이라는 이름은 3이라는 숫자가 ‘크고, 강력하고,
영원하라’는 뜻을 담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3이라는 숫자는 기업인들이 좋아하는 숫자였다.
3이라는 숫자는 쓰러지지 않는다는 뜻으로 인식되고 있어서다.
화로처럼 삼발이가 달려 있는 기구들이 쓰러지지 않은 특징이 있기 때문이다.
일본 기업들도 이 3을 좋아했다.
일본 미쓰비시를 한문으로 쓰면 삼릉(三稜)이다.
비쓰비시 그룹을 창업한 이와사키 가의 가문을 상징하는
문장이었던 세 개의 마름에서 따온 것이다.
미쯔이도 한문으로 삼정(三井)이라고 쓴다.
세 개의 우물이 있던 자신의 고향마을을 상징한다.
삼성상회의 자본금은 3만원이었다.
하지만 삼성상회 건물가격이 2만원이나 했다.
건물 가격은 2만원. 이병철이 갖고 있는 돈으로 사기에는 자금이 모자랐다.
그는 1만원을 선금으로 내고 1만원은 2년 안에 갚기로 하고 건물을 사들였다.
삼성상회는 대구 근처에서 사과 등
청과물과 포항의 건어물을 사들여 만주와 북경에 내다 팔았다.
여기에 하나 더 새로운 사업이 추가됐다.
바로 국수사업이었다.
이병철은 제분기와 제면기를 가져다 놓고 국수를 만들어 팔았다.
글로벌기업 삼성의 첫 출발은 과일과 국수 사업이었던 셈이다.
국수 브랜드는 ‘별표’였다.
3개의 별이 선명하게 새겨진 ‘삼성별표 국수’ 상표다.
이병철은 당시 3개의 별을 의미하는 삼성을 ‘三星’이란 한자로 쓴 로고를 썼는데
이는 1950년대까지 널리 사용됐다.
그가 국수사업에 나선 건,
일제의 식량 수탈이 심해지면서 식량이 턱없이 부족하다는데 착안한 것이다.
국수는 히트를 쳤다. 한 다발에 10전짜리 국수를 60다발씩 포장한 상자가
하루에만 100개 이상 팔려 나갔다.
주요 고객은 안동과 봉화에서 온 도매상들이었다.
당시 대구에는 국수공장이 다섯 개가 있었다.
경쟁이 치열했던 것이다.
별표국수는 값이 가장 비싼데도 없어서 못 팔 지경이었다.
맛이 훨씬 좋았기 때문이었다.
이병철은 여러 국수공장 중의 하나가 되기 싫었다.
그래서 품질에 승부수를 던졌다.
먹을 것이 없어 배를 채우기 급급했던 때였다.
하지만 그는 값이 좀 비쌌지만 맛과 품질이 좋은 국수를 내다 파는 전략을 썼다.
결과적으로 그는 많은 돈을 벌 수 있었다.
이병철은 와세다 대학 때 절친으로 지냈던
이순근을 삼성상회 지배인으로 데려다 앉힌다.
이순근은 와세다 대학을 졸업한 뒤 귀국했으나
재학시절 학생운동에 참여한 탓에 요주의 인물로 찍혀 일자리를 얻을 수 없어
백수 생활을 하고 있었다. 이병철은 이를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리고 오늘날 삼성의 특징 중 하나인
전문경영인 시스템의 기초를 닦아 놓는다.
‘못 미더운 사람은 아예 쓰지 말고, 쓰거든 믿고 맡긴다’는
경영방침은 이때부터 시작된 것이다.
이병철의 장남 이맹희의 회고를 보면,
당시 별표국수 공장은 24시간 돌아갈 정도로 장사가 잘 됐다.
그러나 이병철의 가족들을 데리고 공장의 귀퉁이에서 새우잠을 잤다.
이병철도 공장 한켠에 종이상자로 칸막이를 만들고 잠을 잤다.
약속한 기일 안에 빚을 갚기 위해서였다.
또 밤중에도 기계를 돌렸는데, 잠을 자다가 기계가 멈추면
기계를 점검하기 위한 이유도 있었다. 그렇게 국수기계가 왕왕 돌아가는
소음과 밀가루 분진을 마시고 이병철과 가족들은 공장 안에서 2년을 보냈다.
이런 고생 끝에 이병철은
삼성상회 건물을 살 때의 빚 1만원을 2년이 채 안 돼 모두 갚았다.
삼성상회가 성장하자, 이병철은 새로운 사업꺼리를 찾았다.
바로 주류사업이었다.
당시 대구에는 여덟 개의 양조장이 있었다.
일본인이 4개를 갖고 있었고, 우리나라 사람이 4개를 갖고 있었다.
이 무렵 일본인 무네이가 경영하던 조선양조가 매물로 나왔다.
연간 7000섬의 생산능력을 갖고 있는 대형 양조장이었으나,
경영진의 내분으로 시장에 나온 것이었다.
이병철은 양조장을 12만원에 사들인다.
이병철은 양조사업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일제는 중일전쟁을 벌이고 있어
쌀이나 석유 등 주요 생필품을 통제하고 있었다.
단 허가받은 양조장에서 만드는 술만은 통제를 하지 않았다.
전비확충에 혈안이 돼 있던 조선총독부가 세금수입 확보를 위해서였다.
오히려 조선총독부는 세수확보를 위해
밀주 단속을 강하게 해 양조업자들은 재고가 부족할 정도였다.
1941년 6월3일 삼성상회는 주식회사로 등록했다.
개인 기업에서 근대적인 기업형태로 바뀐 것이다.
사업이 잘 되기 시작하면서 이병철은 다시 요정으로 발길을 옮겼다.
술 사업을 하다 만난 양조업자들과 어울려 요정으로 향했다.
돈과 시간을 주체하지 못해 밤마다 새벽 1시가 지나서 귀가하고
아침이면 10시가 지나서 일어나는 나태한 생활이 이어졌다.
대구의 요정출입에 싫증이 나면 서울이나 동래의 요정을 찾거나,
일본 규슈의 벳부나 멀리 교토지도 원정을 다녔다.
이병철은 8.15해방 전까지 요정출입은 이어졌다.
이병철은 그렇게 긴 방황의 세월을 보냈다.
그는 사업을 했지만
사업가로서 뚜렷한 목표를 정하지 못했기 때문에 방황을 한 것이었다.
장사꾼은 돈을 버는 게 목적이지만, 사업가는 돈을 버는 게 목적이 아니다.
돈을 버는 것, 그 이상의 가치를 추구해야 한다.
하지만 당시 이병철은 진정한 사업가가 아닌 셈이었다.
게다가 1941년에는 그의 어머니가 70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늦둥이 막내아들이었던 이병철은
아버지 보다 어머니에게 심리적으로 더 가까웠다.
막내아들 이병철에겐 어머니의 죽음은 세상에 홀로 떠넘겨진 것과 같이
견디기 힘든 충격이었을 것이다.
이병철은 그 당시를 이렇게 회고했다.
‘암담한 정세 속에서 찾아드는 말할 수 없는 허전한 심정이
밤마다 발길을 주석으로 돌리게 했을 뿐이다.’
이병철은 삼성상회와 양조장 운영은 지배인 이순근에게 맡기고,
1942년 봄 고향으로 돌아온다. 그리고 고향에서 해방을 맞는다.

삼성이야기에 삼성 로고 의미와 변천사 소개
삼성 CI의 비밀은 '별표 국수?'

삼성 그룹을 상징하는 기업 로고의 첫 출발은 국수에서 시작됐다.
삼성의 캠퍼스 리포터들이 만드는 삼성이야기 신년호(1043호)에
'삼성 로고의 의미와 변천사'(영삼성캠퍼스리포트 8기 상명대 최아영)가
소개돼 관심을 끌고 있다.
이에 따르면 삼성이 처음 제품에 로고를 붙인 것은 1938년 말이다.
당시 대구에서 출발한 삼성상회가 내놓은 '별표 국수'의 로고가
현재 삼성CI의 모태라고 '삼성이야기'는 소개하고 있다.

이 로고는 타원 내에 별 3개와 국수의 원료인 밀을 그려 넣은 것으로
1950년대까지 사용됐고, 1969년말에 첫 변신을 시도했다.
현재 삼성 로고와 비슷한 이미지의 흑백로고로 현재 영문으로 표기된
'SAMSUNG' 로고의 시발점으로 1979년까지 사용됐다.

삼성로고는 다시 1980년대 말부터 삼성전자의 전자제품이 성장하면서
일반에 가장 많이 알려졌던 형태로 바뀌었으며, 1992년까지 사용됐다.
3개의 별을 상징하는 삼성의 별 모양 로고는 여기까지 사용됐다.
이건희 삼성 회장이 '신경영'을 선언한 1993년에는
그동안 지속적으로 형상화됐던 '별 모양'은 로고에서 빠져 현재의 로고로 탈바꿈했다.

↑1993년 발표된 현재의 삼성 로고.
현 CI의 의미는 크게 2가지로 '영원한 삼성 , 글로벌 삼성'을 함축하고 있다.
바탕의 파랑색은 하늘과 바다를 상징하며,
비스듬한 타원은 우주와 세계무대를 의미한다.
영어로 삼성을 표기한 것은 글로벌화,
S자의 윗부분과 G 밑부분이 파란색의 타원과 연결된 것은
내부와 외부의 기를 통하게 함으로서 세계와 호흡하고
인류사회에 이바지 하려는 삼성의 의지를 담았다.
또 A자의 가로 지름을 뺀 이유는 개방성을 상징한다는 게 삼성의 설명이다.
출처: ‘돈이 보이는 리얼타임 뉴스’ 머니투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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