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밤 불덩이처럼 뜨겁게 타오르던 태양을 어둠이 사르르 덮으면 천지는 암흑의 세계로 빠져든다. 너른 들판에도 논두렁 위에도 저승사자들이 제멋대로 춤추고, 도깨비들은 희희낙낙 큰 방망이를 휘두르면서 더운 밤을 설쳐대면 철없는 우리 애송이 초딩이 다섯 명은 겁도 없이 단잠에 빠져든 서당골 넓은 밭 가장자리로 유유히 나타난다.
발소리를 죽이며 밭 가운데로 잠입하여 후래시를 낮게 비추었을 때 얼굴에는 함박웃음이 저절로 솟아나고, 입은 나도 모르게 떡 버러질 정도로 노란 참외들은 덩굴 속에서 꿈틀거리며 누워있다. 푸른 수박들은 큰 덩치를 주체하기 어려운 듯 좌우로 구르며 주인을 기다리는 눈치고, 토마토들은 부끄러운 듯 잎 속에 숨어숨어 붉고 알차게 익으며 우리들을 기다리는 눈치가 역력하다.
우리 어린 도둑들은 어두움 속에 사방을 응시하면서 민첩하게 미리 준비한 포대를 꺼내 참외와 수박과 토마토를 또옥 똑 따 담아 어깨에 메고 밭고랑을 걸음아 날 살려라 하고 빠르게 달려 나올 때 가슴은 콩닥거리고 이마에는 무서운 식은땀이 줄줄 흘러 내렸다. 어린 후배들은 앞줄에 세우고 꼬마대장인 나는 맨 뒤에서 무거운 포대를 메고 끙끙 거리며 달리노라면 춤추던 저승사자들이 옷자락을 잡아당길 때 머리가 쭈뼛쭈뼛 곤두서고, 즐겁게 노래하던 도깨비들은 심심한지 방망이로 우리들을 툭툭치면 논에 빠져 허우적거렸다. 그럴 때 노란 참외를 이빨로 깨물어 씹어 먹으면 달콤한 맛에 하늘이 노래지고, 붉은 토마토를 툭툭 던지며 짖궂은 도깨비를 쫒다 보면 발걸음은 어느새 동산에 이르렀다. 소나기가 오늘처럼 지루하게 내린 오후면 배고픈 소를 몰고 동산을 넘어 서당골로 향하면 긴 들녘에 억새풀들이 널려있어 순한 암소는 꼬리를 살살 흔들어 쇠파리를 쫒으며 큰 배를 넉넉하게 채워나간다. 그러면 심심한 나는 길가에 무성하게 자란 쑥대를 꺾어 땅을 치면서 동요도 부르고, 그리운 친구들 얼굴을 머릿속에 그리며 행복한 웃음을 짓노라면 소는 저만치 멀어져 부지런히 풀을 뜯어 먹고 있다.
그 날도 친구네 큰 밭둑에 이르자 가장자리에 자욱하게 숲을 이룬 산딸기나무에 빨갛게 익은 딸기들이 먹음직스럽게 향기를 내뿜으며 주렁주렁 널려있다. 달콤새콤한 산딸기를 한참 맛있게 따먹은 후 소처럼 어슬렁거리며 느릿느릿 밭둑을 거닐고 있으려니 머얼리 밭 가운데서 빨간 열매들이 빗물에 반사되어 영롱하게 빛이 났다. 나는 잠시 소고삐를 놓은 채 밭 가운데로 발걸음을 향하자 잠시 후 ‘아리바바의 도둑’처럼 눈이 휘둥그레졌다. 밭에는 수박과 참외와 토마토들이 잘 익은 채 무진장 널려있어 나는 그 중 잘 익은 열매들을 따 꽉 깨물자 달큼한 맛과 향이 골고루 넘쳐나 근사하게 맛을 보면서 친한 셋집의 후배들 생각이 차례로 났고 이 기막힌 맛을 맛보이고 싶은 생각이 불현듯 솟아올랐다. 한참 후 소는 배가 부른지 물가에가 물을 충분히 먹은 뒤 예전처럼 후다닥 뛰어 집으로 갔고 나도 뜀박질을 하며 경주하듯 소 뒤를 따랐다.
초저녘 암흑 속을 뚫고 서리한 과일 포대를 메고 서당골 논길을 가로질러 가려니 귀신이 자꾸 뒤에서 잡아 나꿔채는 것 같아 머리털은 곤두서고, 어린 후배들은 밤이 무서운지 연신 좌우를 돌아보며 바들바들 떨기만 했다. 나는 무서움과 친구네 것을 서리했다는 죄책감에 사로잡혀 식은땀을 줄줄 흘리며 용케 동산에 도착하여 쌍묘가 나란히 놓여 있는 사이에 참외와 수박과 토마토를 쏟아 놓으니 수북하게 쌓였다.
우리 초딩이들은 후라시의 노란 불빛을 낮게 드리우고 미리 개울물에 잘 씻은 과일들을 장돌로 깨서 동산 풀밭에 늘어놓고 맛있는 파티를 시작하였다. 빠알간 수박은 잘 익어서 씹을수록 물이 달콤하고, 속이 토실토실 익은 샛노란 참외는 맛이 시원시원하며, 통통하게 익은 토마토는 새큼한 맛을 내면서 미각을 돋워 어린 후배들은 오랜만에 과일들을 배터지게 먹으며 무서움도 잊고 흐뭇함 속에 연신 종알거린다. 그런 동생들을 넉넉하게 바라보면서 밤이 기울도록 이야기하다 배가 출출하면 또 수박과 참외를 맛있게 먹고...... 끝에는 동생들에게 철저하게 서리에 대한 입막음을 시킨 후 먹다 남긴 과일을 동산 기슭에 괭이로 땅을 파고 묻어 흔적을 철저히 없앤 후 밤중에 혼자 집으로 오려니 죄책감과 두려움이 한꺼번에 몰려들어 숨쉬기도 힘들었다.
그 뒤로도 작은 서리는 여러 번 더 하였으나 운 좋게 들키지 않아 동네사람들도 모르게 지나갔으나 지금 생각하면 재미있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미안한 생각도 들어, 죄를 많이 지은 내 몸을 어찌하면 좋을까 두렵기만 하다.
그쳤던 비는 다시 부슬부슬 내리고 빗속에 어린 후배들 모습이 스치다 이내 성인의 모습으로 가까이 다가오면 난 그리움에 손바닥의 빗물을 얼굴에 촉촉히 적시며 먼 옛날을 되돌아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