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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주의와 홀로코스트
아프리카의 괴링
나미비아의 수도 빈트후트(Windheok)에 가면 다니엘 마누마바 거리(Daniel Manumava Street)가 있다. 수도를 남북으로 길게 가로지르는 인디펜던스 거리와 로버트 무가베 거리(Robert Mugabe Avenue)를 동서로 잇는 거리이다. 옛 독일 총독부와 나미비아 개발은행, 중앙우체국을 끼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중요한 거리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지도를 찾아 보면 '괴링 거리(Goring Street)'라는 거리명이 괄호 안에 병기된 경우가 꽤 있다. 20세기 세계사를 조금이라도 안다면 괴링이라는 이름이 그다지 낯설지 않을 것이다. 나치의 실력자이자 공군 사령관, 뉘른베르크 재판에서 확신범 나치의 전형을 보여준 헤르만 괴링 덕분이다. 그렇다고 괴링 거리의 주인공이 악명 높은 헤르만 괴링이라고 속단하지는 말자. 이 거리의 주인공은 헤르만 괴링의 아버지 하인리히 에른스트 괴링(Heinrich Ernst Goring)이다. 그는 1885년 5월부터 1890년 8월까지 독일 제국의 첫 번째 전권위임 총독으로 재임하면서 독일령 남서아프리카, 즉 오늘날의 나미비아를 지배했다. 나치 전범의 아버지가 독일 식민주의 지배에 복무했다는 사실은 아무래도 예사롭지 않다. 우연이라며 지나치기에는 켕기는 데가 있다. 독일 제국의 군복을 입고 거수경례를 하며 환하게 웃는 어린 괴링과 그 군국주의 장난꾸러기를 바라보며 미소 짓는 가족의 사진은 다가오는 역사의 비극을 알려주는 불길한 예언 같은 것이었다. 20세기초 나미비아에서 자행된 독일 제국의 식민주의 제노사이드와 동유럽에서 나치가 저지른 홀로코스트가 어린 시절 괴링의 가족사진에 절묘하게 겹쳐 보인다면 지나친 반응일까? 독일의 식민주의 제노사이드와 홀로코스트의 연속성을 강조하는 최근의 연구 경향에 비추어보면 사실 과민반응이랄 것도 없다.
홀로코스트에 대한 세상의 기억이 만들어지는 데는 몇 번의 중요한 전환점이 있었다. 1961년의 아이히만 재판, 6일전쟁이라 일컬어지는 1967년의 중동전쟁, 베트남 반전운동과 68혁명, 1978년 미국의 미니시리즈 <홀로코스트>의 미국 및 독일 방영, 1989년 베를린 장벽의 붕괴에 이은 현실사회주의 블록의 와해 등이 그것이었다는 데 이론의 여지가 없다. 이 전환점들은 홀로코스트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에 대한 따듯한 공감, 희생자의식을 도덕적으로 정당화할 때 발생하는 위험성, 제노사이드의 공범이 된 평범한 사람들, 스탈린주의의 희생자 홀로코스트 희생자가 동유럽의 기억 공간에서 공존하고 경쟁하는 문제 등 새로운 이슈들을 제기하며 홀로코스트가 국경을 넘는 기억의 연대를 향해 나아가는 데 한몫을 했다. 그리고 2000년 1월에 발표된 '스톡홀름 선언'은 새로이 유럽연합과 나토에 가입하려는 동유럽 국가들에 홀로코스트 교육의 의무화라는 조건을 제시함으로써 그동안 냉전의 장벽에 가려져 있던 동유럽의 홀로코스트에 세간의 관심이 모이도록 했다. 폴란드, 우크라이나, 벨라루스, 발트 3국 등 이른바 '피투성이의 땅'에서 벌어진 홀로코스트는 강제수용소의 참상과는 또 다른 끔찍한 범죄를 증언해주었다.
나미비아 원주민 학살과 히틀러
그런데 홀로코스트 연구와 기억에서 2004년이 중요한 전환점이라는 사실은 그다지 알려져 있지 않다. 2004년은 독일 식민주의 특수부대가 1904년 나미비아에서 봉기한 헤레로와 나마 부족을 학살한 식민주의 제노사이드가 일어난 지 100년이 되는 해였다. 자연히 이 비극을 재조명하는 다양한 학술 행사들이 기획되고 새로운 여구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 밑에 깔린 가장 중요한 화두는 바로 이런 질문들이었다. '빌헬름 2세 시대의 독일 식민주의가 나치 독일의 홀로코스트에 영향을 미쳤는가, 만약 그렇다면 어떤 영향이었는가, 또 아프리카에서 독일이 행사한 식민주의적 폭력은 나치가 동유럽 슬라브인에게 자행한 폭력적 지배와 어떠한 연관성을 갖는가.' 세세한 부분에서는 여전히 이견이 많지만, 식민주의의 경험과 홀로코스트의 연관성을 더는 부정하기 어려운 게 현실이다.
1904년 헤레로 부족과 나마 부족이 반란을 일으키자 독일 식민주의는 절멸 정책으로 답했다. 어린이와 여성, 노인을 포함한 5~8만 명의 헤레로, 나마 부족민이 사막과 강제수용소에 고립되어 기아와 탈수, 질병과 학대로 사망했다. 당시 독일 식민주의자들은 이미 '절멸', '강제수용소'같이 나치의 동유럽 침략과 홀로코스트를 상징하는 용어를 거리낌없이 사용했다. 나미비아에서 독일 식민주의자들이 행한 제노사이드가 마치 홀로코스트의 전사(前史)처럼 느껴지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독일 식민주의의 특수성만은 아니였다. 예를 들어 강제수용소를 뜻하는 독일어 'Konzentrationslager'는 1904년의 헤레로, 나마 반란 당시 나미비아의 독일 식민주의자들이 영어 'concentration camp'를 번역해 사용한 것이다. 'concentration camp'는 1898년 보어전쟁 때 영국의 식민주의자들이 남아프리카에서 강제수용소 운영을 검토하면서 사용하기 시작한 용어인데, 이것 역시 쿠바독립전쟁(1895-1898) 중 에스파냐 식민 지배자들이 고안한 'reconcentracion)'을 영어로 번역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쿠바독립전쟁 당시 토벌대 대장이었던 에스파냐의 장군 발레리아노 웨일레르(Valeriano Weyler)의 별명이 '도살자'였다는 사실도 예사롭지 않다.
독일이 발명한 개념은 '생활공간(Lebensraum)'이었다. '게으르고' '미개'한 '원주민'을 몰아내고 '문명화'된 게르만인의 거주 공간을 확보해야 한다는 생각에서 비롯된 것으로, 독일 제국의 인류지리학자인 프리드리히 라첼(Friedrich Ratzel)이 주창한 개념이다. 라첼은 젊은 시절에 미국의 서부를 여행하면서 백인과 원주민의 투쟁을 목격한 뒤 문명의 진보를 위해 미개한 원주민이 문명화된 백인에게 공간을 양보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식민지 나미비아에서 현장 조사를 하면서 라첼의 이 생각은 신념으로 발전했고, '생활공간'이란 개념은 그 부산물이었다. 실은 이마저도 라첼의 독창적인 생각은 아니었다. 라첼은 미국의 역사를 '대(大)서부의 식민화 과정'으로 해석한 프레더릭 잭슨 터너(Frederick Jackson Turner)의 프런티어 역사관에 깊은 영향을 받았다. 터너의 프런티어 역사관은 미국의 문명이 미시시피강을 건너 서부를 개척했다는 승리의 역사관이기도 하다. 백인 이주민이 선주민 인디언을 학살하고 추방한 역사를 미국의 성공 스토리로 도금한 것이다. 라첼은 거기에 다윈의 진화론에서 가져온 생존경쟁 개념을 접목시킴으로써 유럽계 이주민이 자행한 인디언 절멸 정책을 정당화했다. 터너는 1896년 역사적 '서부'를 다룬 새로운 글에서 '공간'에 대한 라첼의 글을 광범위하게 인용함으로써 라첼의 관심에 화답했다.
뭰헨에서 벌인 우스꽝스러운 쿠테타(1923)가 실패로 끝나고 란츠베르크암레흐(Landsberg am Lech)의 감옥에 수감되어 있던 히틀러도 라첼의 책을 감명 깊게 읽었다. 당시 <나의 투쟁> 집필에 열중하고 있던 히틀러에게 쿠데타를 함께한 루돌프 헤스(rudolf Hess)가 라첼의 책을 전했다. 헤스는 10년 뒤 제3제국의 부총통 자리에 앉게 될 인물로, 라첼의 공간 개념을 지지하는 뮌헨 공대 지리학 교수 카를 하우스호퍼(Karl Haushofer)의 제자이기도 했다. 미국 서부의 선주민 제노사이드와 나미비아의 식민지 제노사이들의 경험은 이렇게 히틀러의 세계관에 녹아들었다. 나치의 종말론적인 폭력은 독일의 특수성이라기 보다는 '문명화된' 서유럽 식민주의에 그 전조가 있었던 것이다. 히틀러가 가장 즐겨 읽었다는 카를 프리드리히 마이(Karl Friedrich May)의 대중소설이 서부 개척과 인디언 정복에 관한 이야기인 것도 우연은 아니다. 히틀러는 <나의 투쟁>으로 벌어들인 수입으로 마이의 소설책을 구입해 동부전선으로 떠나는 독일 병사들에게 나눠주기도 했다. 나치 독일에 슬라브족이 살고 있는 동부는 미국의 서부 같은 곳이었다. 나치의 소련 침공 작전명이 '바르바로사(Barbarossa,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프리드리히 1세의 별명에서 유래한 것으로, 붉은 수염이라는 뜻)'였다는 점을 상기하자. 붉은 수염의 이 게르만 왕은 스스로를 십자군전쟁의 영웅으로 여겼다. 실제로 히틀러는 자신과 나치 독일이 소련의 볼셰비즘이라는 이교도적, 아시아적 야만에 맞서 유럽의 기독교 문명을 수호하는 십자군 정쟁을 치르고 있다는 메타포를 즐겨 사용했다.
슬라브 동유럽과 '하얀 검둥이'
훗날 나치 독일의 소련 침공으로 광대한 흑토지대가 열렸을 때 나치의 식민장관 프란츠폰 에프(Franz Ritter von Epp)는 아프리카 식민지 거주 경험이 있는 독일인들에게 먼저 이주를 권했다. 폰 에프에게 동부전선은 아프리카였고, 슬라브인은 '하얀 검둥이'였다. 그는 1904년 나미비아에서 '갈색 셔츠'를 입은 특수부대를 이끌고 헤레로와 나마 북족 학살을 주도한 문제적 인물이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직후인 1919년 2월에는 우익 준군사조직인 '자유군단(Freikorps)'을 창설했는데, '갈색 셔츠'의 제복에 이르기까지 두루두루 식민주의 특수부대의 학살 전통을 계승한 조직이었다. 루돌프 헤스와 그레고르 슈트라서(Gregor Strasser), 에른스트 룀(Ernst Rohm)등 나치의 핵심 인사들은 이 자유군단에서 폭력을 배웠다.
인류학자 오이겐 피셔(Eugen Fischer)도 식민주의 경험에서 빼놓을 수 없다. 그는 독일의 한 대학에서 해부학 교수로 있을 당시 나미비아의 강제수용소에서 헤레로와 나마 부족은 물론 이들과 현지의 백인 남성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들을 대상으로 인류학적 조사를 실시한 후 인종 간결합이 열등한 인종 형질을 재생산한다고 주장했다. 그의 주장은 훗날 아리아인과 유대인의 결혼을 금지하는 내용이 포함된 뉘를베르크 법의 과학적 근거가 된다. 무엇보다 피셔는 '카이져 빌헬름 인류학, 유전, 우생학 연구소(Kaiser Wilhelm Institute of Anthropology, Human Heredity, and Eugenics, KWI-A)' 소장에 취임함으로써 나치의 과학적 인종주의 이데올로그로 등극했다. 피셔는 지리학자 라첼이 주장한 '생활공간' 개념을 이렇게 인류학적 연구(?)를 통해 정당화했다. 그러니 이 열등 인종이 사는 아프리카는 독일 식민주의자들에게 '주인 없는 땅(no man's land)'이었고, 슬라브족이 사는 소련의 광대한 흑토지대는 나치에게 '주인 없는 땅'이었다.
미국 서부의 선주민 제노사이드는 독일 제국의 나미비아나 히틀러의 동유럽에 앞서 미군의 필리핀정복전쟁(1898-1902)에서 재현되었다. 이 전쟁에서 더글러스 맥아더(Douglass MacArthur)의 아버지 아서 맥아더(Arthur MacArthur) 장군이 지휘한 미군 4,000명이 필리핀 선주민 25만~75만여 명을 학살한 것으로 추산한다. 이 전쟁을 지휘한 30명의 미군 장군 가운데 26명이 이미 미 서부에서 아메리칸 인디언 학살로 군 경력을 쌓은 원주민 학살의 베테랑들이었다. 아서 맥아더 장군은 "백인과 달리 원주민들은 상처를 회복하는 능력"이 없어서 많이 죽었다며, 미군의 선주민 학살을 변호했다.
미국이 이렇게 선주민 제노사이드에 탁월했다면, 제국 독일은 인종주의를 법률적 차별로 현실화하는 데 각별한 재능을 발휘했다. 1905년 나미비아에서 통과된 '부성애적 징벌법(Vaterliche Zuchtigungstrecht)'은 독일 이주민에게 계몽을 빌미로 원주민을 채찍이나 주먹으로 때릴 수 있는 권한을 부여했다. 또 1906년과 1912년에는 각각 독일령 나미비아와 사모아섬에서 인종 간 혼혈을 금지하는 법을 공포했다. 아리아인과 유대인의 결혼은 물론 성행위조차 금지한 뉘른베르크 법의 원조는 바로 이들 식민주의적 법령들이었다.
한편 식민주의 제노사이드란 범죄에서는 히틀러보다 무솔리니가 선배였다. 1935년 10월 3일 에티오피아에 출병한 이탈리아 파시스트들은 여지없이 식민주의적 잔인성을 드러냈다. 파시스트 민병대는 전투원과 비전투원을 가리지 않고 원주민을 학살했다. 부녀자와 아이도 예외가 아니었다. 이들은 독가스 공격도 마다하지 않았으며, 리비아와 에티오피아 유목민을 대상으로 인종청소를 예고하기도 했다. 1936년 에스파냐 내전 당시 프란시스코 프랑코(Francisco Franco Bahamonde) 장군이 지휘하던 아프리카 군단이 저지른 잔학 행위도 식민주의적 폭력의 연장으로 이해된다. 이 군단의 주력부대는 에스파냐령 모로코의 이슬람 용병들로 구성된 부대였는데, 이들은 모로코의 선주민 마을을 쑥대밭으로 만드는 데 이골이 난 병사들이었다. 프랑코 장군과 극우 정당인 팔랑헤당(Falange Espanola) 파시스트들은 자국의 농민들을 아프리카의 원주민처럼 대했다. 평생을 에스파냐 내전 연구에 바친 영국의 역사가 폴 프레스톤(Paul Preston)이 프랑코 군대의 학살극을 '에스파냐의 홀로코스트'라고 명명한 것도 일리가 있다.
그럼에도 무솔리니나 프랑코가 행한 제노사이드는 양과 질 모두에서 나치의 제노사이드와 비교할 수준이 아니다. 나치는 아예 정부 내각에 장관급 부서인 동방부(Ostminsterium)를 설치해서 동유럽 점령지의 행정을 총괄하게 했다. 영국 내각의 부서 가운데 하나인 인도부(India Office)를 본뜬 동방부는 나치의 동유럽 지배가 본격적인 식민지 지배임을 말해준다. 나치 독일에 동유럽은 영국의 인도 같은 존재였다. 히틀러에게 "유럽과 아시아의 경계는 우랄산맥이 아니라 독일인의 정착지가 끝나고 순수한 슬라브인의 거주지가 시작되는 곳"이었다. 괴벨스에게도 폴란드는 아시아일 뿐이었다. 동유럽이라는 '아시아' 식민지에서 나치가 구상한 청사진은 삼중 구조의 인종주의적 특권 사회였다. 그 사회는 독일 이주민을 최상위에 놓고, 그 아래 '하얀 검둥이'인 슬라브인은 독일인을 위한 노예 노동력으로 배치했다. 가장 밑바닥의 유대인은 절멸시켜야 할 대상일 뿐이었다. 인민의 차 '폭스바겐'을 타고 새로 건설한 '아우토반'을 달려 크리미아반도로 이주하는 독일 식민주의자들의 이미지는 그러한 특권 사회의 상징이었다.
'서양' 지식인들은 왜 나치의 폭력에만 분노할까
나치 독일의 첫 동유럽 점령지였던 폴란드에서 나치의 지배는 철저하게 식민주의 관행을 따랐다. 아프리카 원주민이 백인 점령군에게 그랬듯이, '하얀 검둥이' 슬라브인인 폴란드인은 아리아인에게 절대 복종해야 했다. 폴란드인은 영화관, 콘서트, 전시회, 도서관, 박물관, 극장 같은 곳에 출입할 수 없었고 통금시간을 엄수해야 했다. 문명개화의 상징인 자전거, 카메라, 라디오, 악기, 전축, 전화 등을 소유해서도 안 되었다. 가죽으로 만든 서류가방조차 가질 수 없었다. 폴란드인은 인도를 걷다가도 독일인과 마주치면 차도로 내려가 모자를 벗고 독일인에게 경의를 표해야 했다. 열차를 이용할 때도 폴란드인은 독일인과 같은 창구와 대합실을 쓸 수 없었고, 독일인 전용 객차에 출입할 수 없었다. 독일인들에게 폴란드는 한마디로 동양이었다. 당시 (그리고 지금도) 독일에서 인기 있는 관광안내서인 <베데커(Baedeker)>의 폴란드 점령지 편에는 (독일) 제국에서 동쪽으로 가는 여행객들은 폴란드에서 '동양 세계'의 첫인사를 받게 된다"고 쓰여 있었다. 식민주의적 범죄에 대해 누구보다 먼저 예민한 문학적 감수성을 드러낸 영국의 작가 조지프 코래드(Joseph Conrad) 가 유제프 태오도르 콘라드 코르제니오프스키(Jozef Teodor Konrad Korzeniowski)라는 이름의 폴란드인으로 태어난 것도 우연이라고 생각되지는 않는다.
같은 맥락에서 나치의 소련 침공은 '모스크바-아시아적인 야만의 유대-볼셰비즘에 맞서 유럽의 문명을 수호하는' 십자군 전쟁으로 묘사되었다. 나치 독일군은 '아시아적인 붉은 군대'에 맞서 기독교 문명을 수호하는 유럽의 십자군이었다. 그들은 우랄산맥에 야만적인 아시아인의 침입을 막는 문명의 만리장성을 쌓을 것이었다. 그러면 볼가강은 나치 독일의 미시시피강이 될 터였다. 나치의 이데올로기는 폴란드와 러시아 등 동유럽을 '동양화'했던 19세기 서유럽의 오리엔탈리즘적 전통 위에 서있었던 것이다. 나치의 동유럽 지배는 이처럼 식민주의적 지배의 전형을 보여준다. 마크 마조워가 <검은 대륙>이ㅔ서 잘 지적했듯이, 나치의 이데올로기는 아프리카와 아시아의 유색인 대신 유럽의 슬라브 백인을 식민 통치의 대상으로 삼은 전도된 식민주의였다. 홀로코스트를 식민주의 제노사이드의 맥락 속에 놓고 보는 포스트식민주의적 해석이 가능한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서양' 지식인들이 유독 히틀러의 나치즘에 분노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아프리카를 문명화하려 했던 무솔리니와 달리 나치는 유럽인을 문명화의 대상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에메 세제르(Aime Cesaire)의 촌철살인을 빌리면, 그들은 히틀러가 '인류'에 반하는 범죄(crime against the humanity)를 저질렀기 때문이 아니라 '백인'을 대상으로 범죄(crime against the white man)를 저질렀기 때문에 용서할 수 없었던 것이다. 양심적 백인 지식인 대부분이 홀로코스트 이전에 일어난 식민주의 제노사이느에 대해서는 침묵으로 일관했다는 점을 감안하면, 세제르의 비판은 설득력이 있다. 홀로코스트가 '야만적인' 아프리카나 아시아가 아니라 '문명화된' 유럽의 한복판에서 일어났기 때문에 유별나게 비판을 받았다는 사실은 지구촌이 기억하는 제노사이드가 서구 중심주의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의미이다. 벨기에령 콩고에서 1885년부터 1920까지 약 1,000만 명의 원주민이 가혹한 노동에 탈진해 죽고 살애당한 아프리카의 제노사이드, 글자 그대로 '절멸된' 태즈메이니아(Tsmania)의 선주민 제노사이드, 많게는 1,800만 명으로 추산되는 미국의 선주민 제노사이드보다 홀로코스트가 각별히 더 비극적이라고 생각할 이유는 없다.
NBC의 미니시리즈 <홀로코스트>를 보면 식민주의 제노사이드에 비해 홀로코스트가 유럽인들에게 유독 더 감정적인 분노를 불러 일으킨 이유가 분명해진다. 제노사이드의 희생자가 이국적인 식민지의 낯선 유색인이 아니라, 바로 자기 이웃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전형적인 백인 중산층이었기 때문이다. <홀로코스트>가 독일에서 그토록 큰 반향을 일으킨 것도 이미 독일인으로 동화된 중산층 유대인이 주인공이었기 때문이다. 홀로코스트 희생자 대부분이 동유럽의 가난하고 무지한 하층 유대인들이라는 역사적 진실과는 거리가 있지만, 나치가 '백인에게 저지른 범죄'를 처음으로 생생하게 그렸다는 게 성공의 비결이다.
홀로코스트가 내장된 근대 문명
21세기 초 미국의 선주민 운동가 워드 처칠(Ward Churchill)은 콜로라도의 대학신문 사설에서 아메리카를 발견한 콜럼버스와 히틀러의 학살 총책 하인리히 힘러를 비교해서 논란이 된 바 있다. 미국 사회에 인디언 제노사이드에 대한 관심을 촉발하려는 의도였겠지만, 콜럼버스가 인디언을 절멸시킬 계획을 갖고 미 대륙에 발을 디뎠는지는 의문이다. 케리 멀로이(Kerri Malloy)의 비교는 훨씬 더 설득력이 있다. 캘리포니아에서 제노사이드의 역사를 가르치는 그를 처음 만난 것은 앞에서도 언급한 홀로코스트 기념박물관에서 열린 교수 세미나에서였다. 인디언의 피가 흐르는 이 중진 학자의 연구 분야는 미국 서부에서 백인 이주민이 인디언 선주민을 학살한 아메리카 제노사이드다. 그가 홀로코스트에 관심을 갖는 이유는 분명하다. 홀로코스트를 비교 분석의 지렛대로 삼아 인디언 제노사이드에 대한 미국 사회의 관심을 불러일으키려는 것이다. 홀로코스트와 인디언 제노사이드를 단순히 병치하는 것만으로도 효과가 대단하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미국의 서부 '개척' 당시 백인 이주민이 아메리카 선주민을 절멸시키기 위해 체계적이고 의도적인 학살을 저지른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런데도 미국의 시민사회나 대학 등의 학문기관들은 아메리카 인디언 학살을 좀처럼 제노사이드로 인정하려 들지 않는다. 홀로코스트의 주문이 필요한 것은 이때문이다.
멀로이 교수와 그의 제자들은 '북서부 캘리포니아 제노사이드 프로젝트(Northernwestern Califonia Genocide Project)'라는 이름의 디지털 아카이브를 운영한다. 캘리포니아 선주민 제노사이드 관련자료를 모아 놓은 이 디지털 아카이브(nwgenocide. omka. net)을 보면, 샌프란시코에서 오리건주의 경계에 이르는 갤리포니아 북서부에서 무려 7번의제노사이드가 있었다. 학살의 희생자는 윈투(Wintu), 위요트(Wiyot), 톨로와(Tolowa), 휘커트(Whikut), 포모(Pome), 유로크(Yurok) 부족 등 우리로서는 거의 처음 듣는 이름들이다. 운디드 니 대학살(Wounded Knee Massacre, 1890)처럼 잘 알려진 사건은 아니지만,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미 서부에서 인디언 학살이 얼마나 폭넓게 자행되었는지를 잘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어린이, 여자, 노인 등을 가리지 않고 죽이는 학살 양상은 비슷한데, 학살자는 다양하다. 운디드 니의 제7기병대처럼 군대가 주역일 때도 있지만, 백인 이주민들이 결성한 자경대가 주인공일 때도 많다. 이주민 공동체 내부의 의사결정 구조가 민주적일수록 학살의 강도도 세졌다는 사회학자 마일클만(Machael Mann)의 조사 결과를 접하고 나면, 도무지 착잡함을 감출 길이 없다.
인디언 제노사이드와 홀로코스트를 나란히 놓고 보면 뜻밖의 결과를 얻게 된다. 미국의 민주주의는 홀로코스트의 대척점에 서 있는 게 아니라 홀로코스트의 가능성을 내장한 체제라는 결론이 그것이다. 근대 문명은 홀로코스트를 내장하고 있다는 지그문트 바우만의 지적은 미국의 민주주의에도 해당된다. 홀로코스트를 '전근대적이고' '반봉건적'인 독일사의 특수성으로 국한시키려는 시도에는 정치적 알리바이의 냄새가 짙다. 식민주의 제노사이드의 맥락에 홀로코스트를 배치하는 순간, 영미식의 자유민주주의에 내장된 식민주의 제노사이드와 인디언 제노사이드의 원죄가 드러나는 것이다. 민주주의와 파시즘, 나치즘이 같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19세기와 20세기의 민주주의가 저지른 학살의 역사를 비판적으로 기억할 때 민주주의의 민주주화를 향한 21세기의 고민이 길을 찾을 것이라는 이야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