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대교구 낙산성당<상>
낙동강 뱃길따라 복음 씨앗 뿌려
경부고속도로 경북 왜관나들목을 빠져나와 낙동강변을 따라 차로 10여분 달리면 만나게 되는 낙산성당. 유유히 흐르는 낙동강이 내려다 보이는 자그마한 언덕 위에 자리잡은 낙산성당은 108년이라는 유구한 역사가 말해주듯 자태부터 고색찬연한 아름다움을 자랑한다.
시원스런 강바람을 등지고 언덕 위 성당으로 올라가면서 '왜 하필 낙동강 바로 앞에 성당을 지었을까'라는 의문이 꼬리를 물었다. 반갑게 맞아준 본당 주임현익현(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 소속) 신부의 말에서 의문은 눈녹듯 사라졌다.
"당시 낙동강은 가장 빠르고 편한 교통 수단이 됐지요. 본당 신부가 여기저기 사목하러 가려면 경상도 전체를 관통하는 낙동강의 뱃길을 이용하는 것이 좋다는 판단에서 강변에 성당을 지은 것입니다."
낙산성당이 설립된 것은 지난 1895년. 당시 이름은 '아름다운 집'이라는 뜻을 지닌 '가실(佳室) 본당'이었지만 1914년 일제의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낙산(洛山)'으로 바뀌었다. 이 땅은 1784년 한국교회 창립 당시 창령 성씨 집안의 실학자 성섭의 증손자 성순교(1860년 경신박해 때 순교)가 살았던 역사적 장소이기도 하다.
조선 후기 천주교에 대한 박해가 끝나고 경상도 지방 선교책임자로 부임한 로베르(한국명 김보록) 신부가 신나무골(현 경북 칠곡군 지천면 연화리)에 대구본당을 설립하고 선교를 박차를 가하며 경상도 북부지역 선교의 전초기지를 마련하고자 신설한 것이 가실본당. 초대 본당주임으로 부임한 파리외방전교회 소속 가밀로 파이야스(한국명 하경조) 신부는 5칸 규모의 기와집 한채를 구입해 성당으로 사용하며 사목활동을 시작했다. 당시 성주·선산·문경·상주·함창·군위·안동·예천·의성·김천·거창 등 경상도 북서부 일대와 충청도 황간, 전라도 무주를 아우르는 선교의 요람으로 관할 공소만 31개에 이를 정도였다.
낙산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낸 신수동(바오로, 66)씨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전한다.
"기록이나 어른들의 증언에 따르면, 당시 본당 신부들은 말이나 배를 타고, 또 수십 수백리를 걸어 각 공소는 매년 적어도 두번 이상 돌며 순회사목을 했다고 합니다. 선교사들의 뜨거운 선교 열정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지요."
그 덕분일까. 가실본당은 발전을 거듭해 본당 설립 6년만인 1901년 김천본당을 분가시킨 것을 시작으로, 점촌·퇴강(현재는 함창본당 관할공소)·왜관 본당 등 영남 서북부 지역에 자리잡은 수많은 본당의 모태가 된다.
낙산본당의 현재 건물은 1922~1924년에 지어진 고딕식 벽돌조 건물. 설계는 서울 명동성당과 대구 계산본당은 물론 1896~1925년까지 30년간 한국 교회의 거의 모든 교회 건축물을 설계한 파리외방전교회 소속 박도행(Victor Louis Poisnel) 신부. 중국 기술자들이 벽돌을 한장씩 구워 성당을 건립했다고 전해진다. 당시의 유물과 유산은 현재 옛 사제관 내 유물관에 보존돼 있다.
대구를 제외한 경북 지역 최초의 본당으로 시작해 선교의 요람이 된 낙산본당이지만 1970년대부터 시작된 공업화로 인해 젊은이들이 도시로 빠져나가는 이농현상의 벽을 넘을 수는 없었다. 1971년 1319명에 달하던 신자수는 70년대 후반 900명 수준으로 감소했고 80년대에는 700명대로 떨어지고 만다.
현재 낙산본당은 신자수는 600여명(240여 가구)에 불과하지만 아직도 다른 시골 본당에 비하면 결코 적지 않은 수치다. 108년이라는 역사를 지닌 본당에 대한 공동체 전원의 자부심과 이를 지키기 위한 남다른 노력 덕분이다.
본당은 옛등걸에서 새순이 돋게 한다는 일념으로 지난 1986년 본당 설정 100주년 기념사업 추진위원회를 구성, 내외적 재정비에 몰입했다. 본당 소공동체 활성화를 위해 레지오와 반모임, 주일학교 활성화에 박차를 가해 내적 성숙을 유도했다. 그 덕분인지 현재 낙산본당은 전체 신자 가구의 90%가 농사를 짓는 상황인데도 20~40대가 전체 신자수의 절반을 차지할 정도로 활기를 띠고 있다.
본당은 이와 함께 유휴공간을 적극 활용, 드넓은 잔디밭과 정원을 꾸며 성모당을 마련하고, 교육관을 건립하는 동시에 성당 정면에 순교자 성순교 가문의 신앙 유적비를 세워 본당 설정 100주년을 맞은 지난 95년 봉헌했다. 또 대희년을 기념해 감실을 비롯한 성당 내부 전체를 색유리화로 단장, 성당 자체가 아름다운 현대 종교미술의 전시공간이 되도록 변모를 꾀했다.
그래선지 국도를 이용해 대구나 김천, 구미 지역에서 왜관을 거쳐 가는 이들이 소문을 듣고 성당에 들어와 잠시 휴식을 취하고 가기도 한다.
현익현 신부는 "낙산본당은 본당 공동체 전원이 예로부터 이곳에서 신앙을 이어온 교우이기에 남다른 자부심과 긍지를 갖고 있다"면서 "작지만 아름다운 성당, 모든 교우가 가족처럼 사랑과 친교를 나누는 공동체로 만들어 후손들에게 아름다운 신앙의 유산을 물려줄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사진설명)
1.108년의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현재의 낙산성당은 1922~24년에 지은 고딕식 건축물로 서울 명동성당을 설계한 박도행 신부 작품이다.
2. 낙산성당 내부
3. 1920년대 낙산성당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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