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주 고달사지
세번째 답사다
우리동네에 조선최고 최대 사찰이었다는 회암사지가있다
발굴 전인 2000년도 서울에서 이사를 와서
적어도 100회 이상 답사를 했을 것이다.
그런 회암사지와는 이상하게 다른 맛이 있다.
10여 년전에 처음 왔을 때, 빈터를 지키고 있던
원종대사 탑비를 보고는 그냥 눈물이 났던 기억이 있다.
수없이 보았던 절터와 절 그리고 신도비들에서 느끼지 못했던
장엄한 힘과 고독함이 전율로 느껴졌다.
아마 그때부터 우리동네 회암사지의 빈듯하면서 꽉찬 느낌과
구별하지 않았나 싶다.
고달사지에 오면 왠지 종합선물을 받았던 어린시절 기분이 난다.
2기의 승탑을 보면서 보물과 국보의 차이를 공부하고
미묘한 차이와 디테일이 명품을 만들었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처음 보았을 때는 차이를 느끼지 못했지만, 보고 다시 보고
두 곳을 오르락내리락거리면서 차이를 찾다보면
아 사람만 운이 따르는 것이 아니로구나~~~
시셋말로 하늘 아래 최고가 둘이 될 수 없다고
왜 하고 많은 자리 놓아두고 같은 터에 자리를 했더냐~~~
먼저간 발자국을 따라 가면서
서산대사의 아래 시가 자연 떠오릅니다
踏雪野中去(답설야중거) ; 눈 내린 들판을 밟아갈 적에는
不須胡亂行(불수호난행) ; 그 발걸음을 어지러이 걷지 말라
今日我行跡(금일아행적) ; 오늘 걸어가는 나의 발자국은
遂作後人程(수작후인정) ; 뒤에 오는 사람의 이정표가 되리니라
기념사진이나 인증사진 한장이 생각났습니다
발자국 주인에게 멀리서 소리질러 봅니다
"사진 한장 찍어주세요"
뜬금없는 소리에 한참 기다려주셨습니다
겉모습으로 보아 분명 전공자나 관계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눈덮인 날 깨끗한 입성에 구두까지~~~~
"찍어드릴께요" 했더니 괜찮다고 했다
말을 건네려했더니, 한마디만 받고 갈 길을 갔다
서로 거리를 두고 제 볼일을 봤다.
눈이 얼마나 많이 왔나 주변 많은 고목의 가지가 꺾여 속살을 들어냈다. 눈은 은근히 사람이나 자연의 인내심을 실험한다
참~~~거돈사지 가운데 훼손된 불상대와 이곳의 불상대를 비교하면서 거돈사지에 얼마나 큰 부처님을 모시고 있었나 짐작이 되었다
거돈사지 해설사님과 주고받은 대화 가운데 절의 산신각 이야기가 있었다. 고려시대까지는 절에 산신각이 없었을 것이라 했다
국가에서 불교를 숭상했으므로 알아서 시주가 들어 왔으므로
경제적으로 아쉬운 것이 없었을 것이라 했다.
조선시대에 들어 궁핍을 면하려 산신각을 짓고 시주를 받았다 했다
~~~그런 논리로 추론하면 아무리 큰 부처님을 조성한다 해도
금전적인 부담이 없지 않았나 싶었다. 반면 소리없이 죽어났을 민초들의 애환은 말해 뭐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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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 조상의 슬기
여주 고달사지
하늘냄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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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1.16 0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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