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성스캔들>의 원작은 1930년대를 배경으로 한 시대물 《경성애사》예요. 6년 전 쓴 작품인데 판권은 올해 팔렸어요. <커피프린스 1호점>도 비슷한 시기에 판권계약을 했고요. <내 이름은 김삼순> <헬로 애기씨> 등 로맨스 소설을 원작으로 한 드라마들이 유행하면서 저도 덩달아 주목받은 것 같아요. 올해가 돼지해인데 제가 황금돼지띠거든요. 운이 좋았어요.”
스스로 운이 좋았다고 할 만큼 최근 이선미 작가에게는 경사가 겹치고 있다. 그중에서도 <커피프린스 1호점>의 성공을 첫 손가락에 꼽을 수 있을 것이다.
동화 속 멋진 왕자님 같은 남자와의 로맨틱한 러브스토리, 소녀들이 꿈꾸는 판타지가 종합선물세트처럼 들어 있는 이 드라마는 최고의 시청률을 자랑하며 많은 신드롬을 낳았다. 공유, 이선균 등 연기자들이 여성들의 폭발적인 사랑을 받게 된 것은 물론, 드라마의 배경이었던 홍대 앞 허름한 커피숍은 수많은 드라마 폐인들이 진을 치는 명소가 되었고 원작 《커피프린스 1호점》은 베스트셀러 반열에 올랐다.
“제가 이 작품의 대본작업을 직접 하게 된 것은 이윤정 감독님의 권유 때문이었어요. 아무래도 원작자가 직접 각색을 하면 감정선이 더 잘 살지 않겠냐는 거였죠. 드라마 대본은 써본 적이 없으니 작법 책 한 권 읽을 시간이라도 달라고 했더니 ‘그냥 일단 해보라’고 밀어붙이시더군요.(웃음)”
처음에는 드라마 대본에 대한 경험과 이해가 부족한 탓에 자신의 스타일대로 대본을 써내려 가다 보니 A4 80매에 이르는 방대한 양의 작업을 하느라 밤을 새기 일쑤였다. 그러다 남편과 함께 <발리에서 생긴 일> <신입사원> 등을 쓴 부부 작가로 유명한 이선미 작가가 공동 작업에 합류하면서 형식에 대한 감을 조금씩 찾아갔고 분량도 절반으로 줄일 수 있었단다. 이선미 작가와는 이름이 같아 방송에서는 그가 ‘이정아’라는 아명을 필명으로 사용한다.
“저와 다른 작가분 모두 집이 지방이라 이태원에 있는 감독님 집 근처에서 합숙 작업을 했어요. 각자 한 회 분량의 대본을 쓰고 바꿔 보며 수정하는 과정을 네다섯 차례 반복하는 방식이었죠. 체력이 달려 피로회복제를 달고 살았지만 새로운 것을 배울 수 있어서 좋은 시간이었어요.”
많은 이들이 <커피프린스 1호점>에 나오는 수많은 명장면을 줄줄이 꿰고 있지만, 작가가 좋아하는 장면은 6회분에서 한결(공유 분)이 은찬(윤은혜 분)에게 “한 번만 안아 보자”고 하는 대목이라고 한다. 은찬이 남자인 줄 아는 한결의 갈등과 설렘이 미묘하게 교차하는 장면이라는 것. 하지만 ‘남장 여자’ 은찬과 한결의 러브스토리가 동성애 코드로 부각되었던 것에 대해서는 작가로서 의도한 부분이 아니기 때문에 의외였다는 반응이다.
“감독님과 저는 단지 싱그러운 청춘의 사랑이야기를 담아내고 싶었어요. 한결의 마음은 그저 은찬을 좋아한 거고, 그래서 은찬이 남자든 여자든 상관없었을 뿐이에요. 제작진이 미처 생각지 못했던 부분까지 꿰뚫어 보는 시청자들의 반응에 저 또한 놀랐습니다. 저희는 그냥 예쁜 사랑으로 다룬 것뿐인데….”
어려서부터 《빨강머리 앤》이나 《캔디》 같은 순정물을 좋아했던 이선미 작가는 소설ㆍ영화ㆍ드라마ㆍ만화를 가리지 않고 두루 섭렵하며 작가의 꿈을 키웠다. 고등학교 졸업 후에는 독학사로 국문학을 공부하며 문학적 소양을 쌓기도 했다.
“학교 다닐 때 누구나 한 번쯤은 노트에 일기나 소설을 적어서 친구들과 돌려 보곤 하잖아요. 저도 그런 걸 좋아했어요. 오락 시간에 다른 친구들이 노래하고 춤을 췄다면, 저는 이야기를 지어 내서 들려주곤 했어요. 한마디로 뻥쟁이였죠.”
증권회사 다니다 로맨스 소설 공모전 당선
이후 증권회사에 다니며 직장생활을 하던 중에도 이야기꾼의 천성을 버리지 못해 틈틈이 소설을 썼고, 1999년 《할리퀸 시리즈》로 유명한 신영미디어의 로맨스 소설 공모전에서 《아란야의 요정》이 우수작으로 당선되면서 본격적으로 로맨스 작가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주위 사람들이 보기에는 좀 무모한 도전이었다.
“감히 순수문학에는 도전하지 못하겠고, 장르 소설을 써보고 싶던 차였어요. 회사를 그만두고 로맨스 소설을 쓰겠다고 했을 때는 주위 분들의 반대가 심했죠. 명예도 비전도 없고 돈도 안 되는 일을 왜 하려 하느냐면서요. 고민 끝에 ‘그래도 하고 싶은 거 하면서 살자’는 결론을 내렸어요.”
작가로 활동한 지난 8년 동안 한 해 3~4편, 총 스무 편가량 로맨스 소설을 썼다는 그는 일할 때는 하루 14시간씩 집중해서 강행군을 한다. 그의 말을 빌리자면 현재 국내에서 활동하고 있는 로맨스 소설 작가는 어림잡아 1400여 명. 한 달에 60~100권의 로맨스 소설이 쏟아져 나오는데다 장르 소설인 만큼 열혈독자가 많아 경쟁력을 갖추려면 소재가 신선하고 구성이 탄탄해야 한다. 그만큼 자기관리에 철저해야 성공할 수 있다는 것. 그는 프리랜서인 직업의 특성상 자칫 나태해질 수 있기 때문에 계획적이고 짜임새 있게 일하려고 애쓰는 편이라고 한다.
통상 작품 한 편을 완성하는 데 걸리는 시간은 두 달여. 휴식시간에는 대중문화와 트렌드를 파악할 수 있는 활동들을 하며 다음 작품을 구상한다. 이렇게 로맨스 소설에 푹 빠져 살다 보니 사람들은 연애도 많이 해봤을 거라 생각하지만 실상은 전혀 그렇지 못하다.
“로맨스 소설이 좀 야하거든요. 그래서 작가의 사생활도 그러냐고 많이들 물어보세요. 그런데 실제 저는 연애 경험도 별로 없는 숙맥이에요.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상상의 여지가 많지 않나 싶어요.(웃음)”
아직도 꿈 많은 10대 소녀의 감수성을 지니고 있어서일까. 그는 나이를 가늠하기 힘들 정도로 어려 보였다. 아직 미혼이라는 그에게 이상형을 물었더니 이번 드라마에 등장하는 ‘프린스’들을 모두 합쳐 놓은 남자란다. 각각의 매력이 다른 ‘프린스’들의 장점만을 모은 사람이 과연 존재할까.
“물론 현실에서는 찾기 힘들죠. 그런데, 이렇게 비현실적인 판타지가 반영되어야 비로소 로맨스 소설이라고 할 수 있어요. 로맨스 소설 안에서 사랑은 변하지 않죠. 현실 속 연인이라면 불 같이 사랑하다가도 어느 날 차갑게 돌아서기도 하지만 로맨스 소설의 주인공들에겐 이별이 없어요. 결말은 언제나 해피엔딩이어야 하죠. 슬프거나 우울하게 끝난다면 로맨스 소설이라 할 수 없습니다.”
30년 넘게 대구에서 부모님과 함께 살아온 그는 곧 독립해서 서울에 둥지를 틀 예정이다. 드라마 공부를 제대로 해보고 싶기 때문. 딸 넷 중 장녀인 그가 로맨스 소설을 쓰겠다고 했을 때 극구 만류했던 부모님은 이제 “다음 드라마는 언제 나오느냐”며 궁금해 하는 팬이 되었다고 한다.
“로맨스 소설을 쓰는 것도, 드라마를 쓰는 것도 너무 재미있어요. 아직 부족한 점이 많아 더 많이 공부해야겠지만 기회가 된다면 두 분야에서 모두 왕성하게 활동할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동화같이 아름답고 판타지 가득한 로맨스 소설. 그 결말은 반드시 해피엔딩이어야 한다는 그의 말처럼 작가로서 그의 삶도 행복만이 가득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