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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한국독립운동사 원문보기 글쓴이: 신동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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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주 이상룡 : 1858(철종 9) 경북 안동~1932. |
애국계몽운동을 전개하다가 만주로 망명해 서로군정서의 독판(督辦),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국무령을 지냈다. 본관은 고성(固城). 자는 만초(萬初), 호는 석주(石洲). 일명 계원(啓元)·상희(象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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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는 승목(承穆)이다. 영남학파의 학통을 이은 김흥락(金興洛)을 사숙하고 경서·천문·지리·수학·역기·병서 등을 섭렵했다. 1895년 을미사변이 일어나자 박경종(朴慶鍾)과 함께 가야산에서 거의하고 의병장 권세연(權世淵)·이강년(李康年) 등을 지원했다. 그러나 일제의 근대적 군사력에 대항하는 의병항쟁에 회의를 느끼고 유인식(柳寅植)·김동삼(金東三) 등과 애국계몽운동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1907년 협동학교(協東學校)를 설립했으며, 1909년 대한협회(大韓協會) 안동지회를 결성하여 회장을 지내면서 시국강연을 개최했으나 1910년 일제의 강점으로 해산당했다. 1909년 신민회 간부 비밀회의에서의 결정에 따라 독립운동기지를 확보하기 위해 1910년 이시영(李始榮)·이철영(李哲榮)·이석영(李石榮)·이동녕(李東寧)·이광(李光)·김형식(金衡植)·황만영(黃萬英)·이명세(李明世) 등이 만주로 떠나자 그도 양기탁(梁起鐸)과 협의한 후 1911년 2월 서간도로 망명했다. 1911년 최초의 만주지역 항일자치단체로 개간과 영농에 종사하는 경학사(耕學社)를 조직하여 경학사장에 추대되고, 그 부속기관으로 신흥강습소(新興講習所)를 설치했으며 민족해방운동 방략에 있어서 산업·교육 우선주의와 군사중심주의를 병행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1912년 경학사를 발전시켜 퉁화 현[通化縣] 합니하(哈泥河)에 교포들의 자치기관인 부민단(扶民團)을 조직하고 허혁(許赫)에 이어 단장으로 추대되었으며, 신흥강습소도 이전하여 제2의 기지를 정했다. 부민단은 중앙부에 서무·법무·검무(檢務)·학무·재무 등을 두었으며, 중앙·지방·구(區)·패(牌)의 4단계 조직을 통해 주민을 관할하여 퉁화 현, 린장 현[臨江縣], 류허 현[柳河縣], 하이룽 현[海龍縣] 등에 산재한 동포들을 결속하고 계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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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3·1운동을 계기로 서간도의 독립운동도 무장운동의 길로 들어서게 되어 부민단도 발전적으로 해체하여 대동단합의 자치단체로 류허 현 삼원보(三源堡)에 한족회(韓族會)를 조직했고, 이를 바탕으로 임시군정부(臨時軍政府)를 조직한 후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되자 서로군정서로 개칭, 최고책임자인 독판에 취임하여 독립군 양성에 주력하고 임시정부를 지지했다. 또한 신흥강습소를 신흥무관학교로 개칭하여 독립운동 간부를 양성했으나 일제의 소위 '불령선인(不逞鮮人) 토벌'로 1920년 지청천(池靑天)이 300명의 부대를 이끌고 안투 현[安圖縣]으로 가면서 이 학교는 해산되었다. 남·북 만주와 연해주에 산재한 항일단체와 독립군단의 통합을 시도하여 1921년 서로군정서와 의용군 일부를 정비, 관뎬 현[寬甸縣]에서 남만통일회를 개최하여 서간도 일대의 항일단체와 독립군단을 통합하여 대한통군부를 조직했다. 다시 대한독립군단 등 8단9회(八團九會)의 단체를 통합하여 대한통의부(大韓統義府)를 수립하고, 그 산하에 의용군을 조직했다. 1923년 자유시참변을 겪은 서로군정서를 어무 현[額穆縣]에 이전하고 민병제를 실시하여 주경야병(晝耕夜兵)의 훈련을 실시했다. 1924년 정의부가 발족되자 독판에 선출되었으며, 대한민국임시정부임시대통령 박은식(朴殷植)의 죽음으로 후임에 추대되었다가 1925년 임시정부의 관제가 대통령제에서 국무령제로 바뀌면서 국무령에 취임했다. 당시 임시정부 의정원은 미국의 조선위임통치안을 주장하는 이승만을 탄핵하여 대통령에서 해임시키고, 임시대통령 박은식의 지휘 아래 대통령 중심제에서 국무령 중심의 내각책임제로 개헌하는 동시에 무장운동 노선으로 전환하면서 만주 무장운동의 상징적 존재인 이상룡을 국무령에 추대한 것이다. 그러나 임시정부 내의 사상적 대립으로 다음해에 사임하고, 서간도에서 정의부·참의부·신민부의 3부 통합운동을 지도했다. 일본의 괴뢰국인 만주국이 건설되던 1932년 5월 지린 성[吉林省]에서 병으로 죽었다.
저술로는 〈한만관계사 韓滿關係史〉(1911), 재만한인이 지켜야 할 중국인과의 관계와 일본제국주의에 대한 항일자세 등에 대해 재만한인에게 호소한 〈경고남만주교거동포 警告南滿洲僑居同胞〉(1913), 종래의 화이관(華夷觀)을 비판하고 우리도 교육만 잘 받으면 문명인이 될 수 있다고 하면서 민족의식을 고취한 〈존화양이변 尊華攘夷辨〉(1914), 우리나라의 역사를 서술하여 신흥학교의 교과서로 사용한 〈대동역사 大東歷史〉(1921) 등이 있다. 1962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 |
1858년 안동의 고성 이씨 종택, 임청각에서 태어난 석주의 전기적 생애는 다음과 같이 정리된다.
퇴계의 학통을 이은 영남의 유학자 서산 김흥락의 가르침을 받았다. 1876년 강화도 조약에 충격을 받아서 척사위정(斥邪衛正) 활동을 하다가 일제가 을미사변을 일으키자. 책을 덮고 구국 의병활동을 시작하였는데, 이 때 그의 나이 서른여덟. 1907년, 일송 김동삼, 동산 류인식 등과 함께 협동학교 설립하였다.
경술년에 나라를 빼앗기자 이듬해, 쉰셋의 나이로 주위 유림들의 만류를 뿌리치고 인척 50여 가구를 이끌고 서간도로 망명. 1914년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를 설립, 독판(督辦:국가원수)으로 취임하고 부설 신흥무관학교를 세웠다.
1925년 9월, 상해 임시정부의 개정헌법에 따라 초대 국무령(국가원수)에 선출, 취임.
1932년, 75세를 일기로 길림성 서란현에서 순국.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 추서. 유해는 중국에서 봉환되어 1990년 대전 국립묘지에 안장되었다가 96년 임정묘역으로 옮겨졌다.
▲ 석주로(맨위) 한가운데에 선 나무 왼쪽의 철길 너머에 임청각이 있고 오른쪽은 안동댐으로 이어지는 낙동강이다. 법흥 고가다리 아래서 찍은 도로표지판(아래 오른쪽)과 육사로(왼쪽).
석주의 생애는 흔히, 조선 최고의 명문가의 후예로 나라를 잃자, 전재산을 팔아 현재 화폐 가치로 400억 가량의 자금을 모은 후, 모든 혈족을 이끌고 간도로 망명, 석주와 함께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한 아나키스트 우당 이회영 선생과 비견된다. 흔히들 '노블리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 가진 자의 도덕적 의무'의 화신으로 불리는 우당이 남의 노비들에게 존대하고,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스스로 집안의 노비들을 모두 해방시키고, 임금을 주는 현대적 고용 관계를 체결했듯이 석주는 노비문서를 불사르고 집안의 종들을 해방시키면서 보상금까지 지급하였는데 이는 안동의 반가에서 처음 있는 일이었다.
우당이 집안의 반대를 무릅쓰고 교회에서 결혼식을 올리고 청상과부가 된 누이를 재가시키는 등 인습을 거부했듯, 석주는 "공자·맹자는 시렁 위에 얹어 두고 나라를 되찾은 뒤에 읽어도 늦지 않다"며 서간도 망명을 결심하게 된 사유를 조상의 사당에 나아가 아뢰고, 친척들의 비난을 사면서도 그 신주를 땅에 묻고 망명길을 떠났던 것이다.
50여 년에 걸친 그의 구국 운동은 '무력항일투쟁'과 여러 독립운동 조직의 '통합'과 '대동단결'을 위한 노력으로 압축된다. 간도 망명 이래, 그는 독립운동 계열의 의견조정과 단합을 위해 힘쓰고 독립운동계의 분열을 막기 위한 노력을 계속하였으며, 대한독립군단 등 독립군의 군세 확장 등 군사통합을 꾀하였다.
완고한 유림의 본고장 안동에서 성장하였으나 그는 고루한 관념적 항일에 머물지 않고 외교론·준비론·실력양성론 등을 물리치고 무력항일투쟁을 조국독립의 방안으로 일관되게 주장하였다 한다. 그는 임시정부를 다시금 독립운동의 구심체로 세우고 분열된 독립운동계에 활력과 연대감을 불어넣으려는 생각으로 임시정부 국무령에 취임하였고 김좌진·김동삼 등을 국무위원에 임명하여 임정이 다시금 활발한 항일무장투쟁을 이끌기를 희망했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은 결국 뜻과 같이 이룩되지 못하였다. 상해와 간도의 독립운동 상황은 너무도 달랐던 것이다. 그는 임정 국무령을 사임하고 간도로 돌아와 전민족유일당 결성을 힘쓰다가 1932년 5월 중국 서란소성자에서 "조선 땅이 해방되기 전에는 데려갈 생각을 마라. 조선이 독립되면 내 유골을 유지에 싸서 조상 발치에 묻어 달라. 외세 때문에 주저하지 말고 더욱 힘써 목적을 관철하라"는 유언을 남기고 목숨을 거두었다.
▲ 위에서 내려다 본 임청각(왼쪽)과 행랑채 마당. 무릇 집은 사람이 살지 않으면 쉬 쇠락해 버린다. 임청각 홈페이지에서 가져온 사진이다.
육사로가 끝나는 곳에서부터 시작되는 석주로 들머리에, 한때 석주가 독립자금 충당을 위해 1천원의 거금에 매매를 시도했다는 안동 고성이씨의 17대째 대종가, 안채·중채·사랑채·사당·행랑채·별당 등을 갖춘 전형적인 조선시대 양반 가옥인 임청각이 있다. 도연명의 귀거래사(歸去來辭)의 '동쪽 언덕에 올라 길게 휘파람 불고 맑은 시냇가에서 시를 짓는다[登東皐以舒嘯 등동고이서소 臨淸流而賦詩 임청류이부시]'는 시구에서 유래한 이름이다.
임청각은 99칸 규모로 안동에서는 가장 규모가 큰 양반 가옥인데, 이 고택에서 석주를 비롯, 무려 9분의 독립운동가가 태어났다. 석주와 함께 간도 망명을 함께 떠났던 당숙 이승화(애족장), 아우인 상동(애족장), 봉희(독립장), 조카로 상동의 아들인 운형(애족장), 형국(애국장), 봉희의 아들인 광민(독립장), 친아들 준형(애국장), 친손자 병화(독립장)가 그들이다. 당숙 이승화 선생까지 넣으면 무려 4대에 걸친 이바지다. 석주의 부인은 협동학교를 열었던 도사댁 백하 김대락의 맏누이로, 여성으로 안동지방에서 유일하게 건국훈장을 받은 김락 여사와 자매간이다. 모두들 만만찮은 기개를 지닌 인물들이다.
▲ 임청각과 이웃해 있는 고성이씨 탑동파 종택(왼쪽)과 그 앞에 선 신세동 7층 전탑. 탑 바로 오른쪽에 중앙선 철길이 지나간다.
▲ 뒷산에서 내려다 본 임청각. 안동댐에서 내려오는 낙동강가의 석주로와 임청각 사이가 중앙선 철길인데 펜스 때문에 보이지 않는다.
석주로로 달려가도 석주의 고택은 보이지 않는다. 임청각 대문 앞에 바투 들어선 중앙선 철길 탓이다. 대를 이어 걸출한 독립지사를 배출한 집안의 내력을 못마땅하게 여긴 일제가 마당을 가로지르는 철길을 놓아 집안의 기를 끊고자 했다는데, 그 탓에 지금은 70여 칸만 남아 있다. 철로로 인해 기운이 끊겼는지는 알 수 없으나, 낙동강을 굽어보던 시원스런 경치가 사라진 것은 분명하다. 이 한맺힌 고택을 굽어보고 천년 세월을 지켜온 통일신라시대의 벽돌로 쌓은 탑(국보 16호 신세동 칠층 전탑)이 지척에 그 세월을 위로하고 있으니 그나마 다행스러운 일이다. 지금도 이 500년 고택은 밤낮으로 발치를 오가는 철마의 쇳소리를 들으며 이 땅의 고단한 역사를 침묵으로 증언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