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11. 10. 주일예배설교
에베소서 4장 1~16절
팔짱을 끼고 가만히 앉아있지 않으시기를
■ 학창 시절 기억나는 선생님이 있습니다. 뭔가 골몰히 생각할 일이 있으시면, 꼭 자신의 팔짱을 끼시던 선생님이 계셨습니다. 그런데 이와는 달리, 우리에게 뭔가 불만이 있을 때, 팔짱을 끼시던 선생님도 계셨습니다. 그리고 뭔가 어색할 때, 팔짱을 끼시던 선생님도 계셨습니다.
이렇듯 팔짱을 낀다는 것은 여러 의미, 나름의 메시지를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팔짱을 끼는 것을 건방지게만 보지 않아도 될 것 같습니다. 그런데 팔짱 중에 개인적으로 못마땅한 태도가 있습니다. 양해를 구하고 밝히겠습니다. 게으름의 태도입니다. 아무 것도 안 하는, 그대로 가만히 있는 팔짱 낀 태도가 그것입니다.
물론 이런 태도도 이유는 있을 것입니다. 자신이 동의하지 않은 일에 대해 항의의 표시로 팔짱을 끼고 관망할 수도 있습니다. 이해할 수 있는 태도입니다.
하지만 반드시 해야 하는데, 하지 않고 팔짱을 끼고 있는 경우는, 양해를 구했다시피, 바람직한 태도가 아닙니다. 오늘 본문이 내내 설명하고 강조하고 있는 내용이 이것입니다. ‘팔짱 끼고 가만히 있지 마시오. 팔짱을 풀고 움직이시오. 아니 적극적으로 달려가시오!’ 이것이 오늘 본문의 메시지입니다. 그렇다면 적극적으로 움직여야 하는 구체적인 태도는 무엇일까요?
■ 본문은 에베소 교인들에게 애정이 담긴 바울의 권면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권면을 구체적으로 하기 전에 자신의 처지에 대해 짤막한 언급을 합니다. “주 안에서 갇힌 내가...” 무슨 말인가요? 주님을 위해서 일하다가 감옥에 갇힌 자신을 말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복음을 전하기 위해 로마에 2년간 수감 된 적이 있었습니다. 이때 옥중에서 쓴 편지가 4통인데, 오늘 본문인 ‘에베소서’와 ‘골로새서’, ‘빌레몬서’, ‘빌립보서’입니다.
본문이 옥중에서 쓴 편지이니 갇힌 자신을 언급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왜 이 지점에서 갇힌 자신을 언급했는지가 궁금해지는 것도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이유가 무엇일까요? 팔짱 끼고 관망하지 말라는 이유입니다. 갇힌 자신을 대신해 여러분이 더 달려주십사 하는 부탁입니다.
자신은 갇혀있지만, 여러분은 저 바깥으로 나가 하나님이 부르신 그 부름에 합당한 달음질을 하라고 부탁한 것입니다. 1절입니다. “그러므로 주 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부르심을 받은 일에 합당하게 행하여” 분명하죠? 하나님께서 바울 자신처럼 에베소서 교인들도 불러주셨으니, 그 불러주신 목적에 합당하게 살아가라는 권면입니다.
그렇습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구원에로의 부름을 받은 사람입니다. 그리고 이 부름에 합당한 삶을 살도록 각각의 사명을 부여받은 사람입니다. 바로 이 부름과 사명을 놓치고 엉뚱한 곳에서 헤매지 말라는 것이 바울의 첫 번째 외침이었습니다.
■ 그렇다면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부르심에 합당한 삶, 헤매지 않는 삶인가요? 먼저, 2~3절입니다.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먼저, 두 가지를 권면합니다. 하나는, ‘무엇보다도 사랑으로 서로 용납하라’는 것입니다. 용납이라는 것은, 상대방을 너그럽게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런데 용납/너그러움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이 필요합니다. 자신을 낮추는 ‘겸손’과, 마음이 따뜻하고 부드러운 ‘온유’와, 견디고 참아내는 ‘오래 참음’이 있어야 너그러움이 나타날 수 있습니다. 그래야 이것은 사랑이 됩니다.
또 하나는, ‘성령님께서 평화의 줄로 하나가 되도록 묶어주신 것을 그대로 보존하도록 노력하라’는 것입니다. 사실 하나가 된다는 것은 말이 아름답지, 현실적으로 쉬운 일이 아닙니다. 저마다의 생각과 특징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한두 번쯤은 강제가 필요할 때가 있습니다. 무엇보다 성령님께서 강제적으로 하나가 되게 해 주셔야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이 강제를 나쁘게 볼 이유는 없습니다. 안 되는 것을 도와주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령님의 감동으로 하나가 되는 경험을 하신 적이 있다면, 이 말씀의 의미를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성령님께서 서로의 불편했던 감정, 혹은 공동체의 갈등을 해결해 주시는 분이시니, 3절의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심”은 이해하기가 어렵지 않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3절을 강조하기 위해 부가적인 설명을 이어갑니다. 4~6절입니다. “몸이 하나요 성령도 한 분이시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받았느니라. 주도 한 분이시요 믿음도 하나요 세례도 하나요 하나님도 한 분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도다.”
이 긴 신학적 설명을 하는 이유는 분명합니다. 천국의 숫자는 ‘하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천국의 모습은 ‘통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유 불문하고, 성령님께서 평화의 줄로 하나가 되도록, 그리고 하나가 되라고 묶어주신 것을, 그대로 보존하기 위해 노력하라는 것입니다.
■ 이렇게 두 가지를 권면한 후, 바울은 2절과 3절이 별개의 권면이 아니라, 하나의 권면임을 설명하는 말씀을 내놓습니다. 15~16절입니다.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받음으로 연결되고 결합되어,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
2절과 3절이 연결된 권면이라는 점은, 2절의 핵심어 “서로 용납”과 3절의 핵심어 “하나 됨”이 같은 맥락이라는 데서 알 수 있습니다. 이를 15~16절에서 확인한 것입니다. 특히 16절의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받음으로 연결되고 결합되어”라는 말씀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용납-너그러움’이라는 사랑을 통해 연결과 결합이라는 하나 됨을 이루기는 하지만, 이것을 개별성을 무시하는 전체주의적 이해로 몰아가서는 안 됩니다. 16절 하반절의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는 말씀은 전체주의적 이해가 아닌 개별주체성을 인정하는 공동체 이해입니다. 그러므로 이 주체성은 상호주체성입니다. 서로의 존귀함을 인정하는 ‘너’ 그리고 ‘나’의 상호 사랑입니다. 그리고 공동체 안에서의 하나 됨입니다.
바울은 우리가 이러한 사실 아래 있음을 7~14절을 통해 다시 설명합니다. 우선 7~10절을 보겠습니다. “우리 각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선물의 분량대로 은혜를 주셨나니, 그러므로 이르기를 그가 위로 올라가실 때에 사로잡혔던 자들을 사로잡으시고 사람들에게 선물을 주셨다 하였도다. 올라가셨다 하였은즉, 땅 아래 낮은 곳으로 내리셨던 것이 아니면 무엇이냐? 내리셨던 그가 곧 모든 하늘 위에 오르신 자니 이는 만물을 충만하게 하려 하심이라.” 7~10절의 의미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 모두는 각각의 선물-은사를 받았다는 것입니다. 각자는 각각의 알맞은 선물-은사를 받은 것입니다.
그리고 이 선물-은사가 무엇인지 11절에서 소개합니다. “그가 어떤 사람은 사도로, 어떤 사람은 선지자로, 어떤 사람은 복음 전하는 자로, 어떤 사람은 목사와 교사로 삼으셨으니” 물론 이 선물 말고도 더 세분화된 선물이 있지만, 여기서는 이것을 예로 들어 각자에게 주신 선물-은사가 있음을 설명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은사를 주신 이유를 12절에서 설명합니다. “이는 성도를 온전하게 하여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여기서 설명하는바, 은사를 주신 이유가 무엇인가요? 거룩한 일을 하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풀어 설명하자면, 성도들을 숙련된 봉사 활동을 할 수 있도록 훈련 시켜서,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 안에서 일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팔짱 끼지 말고 하나님을 위해/하나님 나라를 위해 몸을 움직이라는 것입니다.
이어서 바울은 이렇게 은사를 따라 팔짱을 끼지 않고 움직일 때 어떤 결과를 만나는지를 설명합니다. 13~14절입니다.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 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속임수와 간사한 유혹에 빠져 온갖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그 결과란, 우리 모두가 춤추듯 서로 손발이 척척 맞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께 능숙하고 우아하게 응답하는 것입니다. 영적으로 성숙한 어른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어떤 간교한 교설의 풍랑에도 요동하거나 휘둘리지 않는 안팎으로 단단한 믿음의 소유자가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될 때, 머리이신 그리스도와 한 몸이 되는 것입니다. 15절입니다.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여기서 그리스도에게까지 자란다는 것, 즉 그리스도와 한 몸이 된다는 것은, 그리스도처럼 온전한 진리를 아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랑으로 그 진리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는 한마디로, 그리스도를 따라가는 것입니다.
■ 그런데 이는 독단적인 행보여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처럼 온전한 진리를 알고, 사랑으로 그 진리를 말하는 것은, 서로 발맞춰 나가는 것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16절입니다. “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받음으로 연결되고 결합되어,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서로 연결되어 있고, 서로 결합하여 있습니다. 그렇기에 사랑 없이는 이 연결과 결합에 사고가 납니다. 개별 행동, 이기적 태도는 반드시 사고를 일으킵니다.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에 분란을 일으킵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팔짱을 풀어야 합니다. 서로의 팔짱을 껴야 합니다. 그리고 서로 발맞춰 나아가야 합니다. 발맞춰 봉사의 일을 해야 합니다. 서로를 격려하며 너그러이 받아들여야 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부르신 목적이고, 우리에게 선물-은사를 주신 이유입니다.
■ 바라기는 우리 중 누구도 자신의 팔짱을 끼고 무관심하게 무반응으로 있지 않기를 소망합니다. 하나님께서 부르신 그 부름의 목적을 따라, 우리 함께 발맞춰 멋지게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갔으면 좋겠습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