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세계자전거여행 원문보기 글쓴이: 김용준
카주라호를 지나 우따르 프라데쉬(uttar pradesh)주에 들어서자 길 상태가 엉망진창이었다. 명색이 주 도시를 잇는 국도(National highway)인데도 불구하고 도로 중간 여기저기에 커다란 구멍이 나 있었고 심지어 커다란 돌무더기도 심어져 있었다. 카주라호에서 다음 목적지 바라나시까지 지도상으로 봤을 때 대략 500km, 처음에는 7~8일 예상하고 출발했지만 이런 길 상태로 봤을 때 적어도 10일 이상은 더 걸릴 거 같았다.
길 상태가 좋지 않다보니 사람들 살아가는 생활상도 양호해 보이지 않았다. 작은 면소재지 지나갈 때도 어찌나 복잡하고 흙먼지가 날리던지....길가에는 사람, 자전거, 오토바이로 뒤섞여 질서는 병아리 오줌만큼도 보이지 않았다. 경적소리와 흙먼지가 하나 되어 어서 지나가라고 무섭게 몰아쳤다.
인도를 여행하며 소가 또 하나의 가족이고 재산이며 심지어 신이라고 느껴졌다. 소가 없는 인도는 상상할 수 없었으며 집집마다 소를 키우지 않는 곳은 없었다. 우리나라처럼 소가 따로 사는 마구간 없이 버젓이 집 앞에서 사람과 함께 살아가고 있었다. 집뿐만 아니라 마을 골목길, 도심 대로변, 심지어 고속도로 중앙선에도 소는 아무런 제재 없이 어슬렁어슬렁 돌아다녔다. 그러면 왜 유독 인도에서 소는 절대 식재료로 쓰일 수 없는 성스러운 동물로 추앙받고 있는 것일까?
먼저 마른소똥은 귀중한 연료로 쓰였다. 집집마다 똥을 말리기 위해 소똥탑이 세워져 있었고 심지어 어떤 가정은 집 전체가 똥으로 둘러싸여 한마디로 똥밭이 된 곳도 있었다. 소는 하나도 버릴게 없다고 하더니 소똥마저도 소중한 연료로 쓰이는 귀중한 연료인가 보다.
구수한 냄새를 풍기는 따끈따끈한 똥을 이런 식으로 아이들이 돌아다니며 수집하고 있었다.
똥은 또한 집 벽면에 발라져 모기 같은 해충이 집 안으로 침입하는 것을 막는데 쓰이기도 했다.
소는 소중한 운송수단 뿐만 아니라 밭을 가는 동력수단으로 활용되기도 하고...
그 밖에도 우유의 생산 공장이기도 하니 인도에서 소의 소중함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이런 이유로 인도에서는 소가 신적인 존재로 받아드려지고 있는 게 아닐까? 문화의 상대성은 이렇게 여행을 통해 하나하나 이해되고 받아드려지는 것 같다.
식사를 하기 위해 작은 식당을 찾아 들어갔는데.....헐, 동네사람들이 외국인은 처음 보는지 내 주위로 몰려 들었다. 이런 관찰행위와 질문공세는 인도여행 시작한 이후 수백 번도 더 겪었기 때문에 절대(?) 당황하지 않았다. 사진만 찍고 감자튀김(사모사) 5개만 포장해 서둘러 사람들의 눈길을 피해 식당을 빠져 나왔다.
5km정도 달려 사람들 눈길을 피해 식사 가능한 널찍한 공터를 발견했다. 이곳에서 포장해 온 감자튀김을 개봉해 점심을 해결하기로 했다.
사모사는 으깬 감자를 밀가루로 만든 피에 쌓아 기름에 튀긴 음식으로 저렴한 가격과 쉬운 제조법으로 인도인들에게 가장 사랑받는 길거리 음식이다. 사실 사모사가 맛있어서 사 먹는 게 아니라 시골만 다니다 보니 식당을 쉽게 찾을 수 없었고 온통 이런 튀김음식만 팔았기 때문이었다. 어쨌든 배만 채울 수 있다면야 뭘 못 먹겠나! 우걱우걱 잘 먹고 있는데....
어느새 동네 아이들 레이더망에 걸려들고 말았다.
하나둘씩 모여들기 시작한 아이들로 둘러싸이기 시작했다. “제발 혼자 있게 해줄래.” 하지만 말도 통하지 않았고 가라고 내 쫓을 수도 없었으니...참 여러모로 난감했다. 인도에서 혼자 있기는 정말 힘든 일이다. ㅜ.ㅜ
비포장도로는 기대와 달리 끝없이 이어졌다. 마을사람들에게 언제쯤 포장도로와 만날 수 있는지 물어 볼 때마다 제각각 하는 답이 다 달랐다. ‘포장도로가 곧 나오겠지’ 허망한 기대를 가지고 자전거를 끌다시피 하며 전진했지만 기대했던 포장도로는 나오지 않았다. 길가에 있는 표지석도 알려주기를 거부했는지 땅 깊은 곳에 박혀 꽁꽁 숨어 있었다.
‘힘들고 귀찮아도 인상 찌푸리지 말고 차근차근 가...’ 환한 얼굴을 한 인상 좋은 할아버지가 투덜거리며 가는 내게 이렇게 말해주는 것 같았다. ‘네, 할아버지....급할 거 없으니 조급해하지 말고 천천히 갈게요.’ 속으로 이렇게 답하며 최대한 여유를 가지고 천천히 전진했다.
도로 상태를 개선하기 위한 공사가 구간마다 진행 중이었다. 얼른 완공되어 지역 주민들이 편안하고 말끔한 도로에서 먼지 없이 살아가는 날이 빨리 왔으면 좋겠다.
석양은 하루를 마감하라고 재촉했다. 속도계에는 일일 총주행거리 41km로 찍혀있었다. 이러다가 바라나시까지 10일 이상 걸릴 것 같아 살짝 걱정되기 시작했다.
따뜻한 아침햇살 덕분에 알람이 따로 필요 없었다.
다음날도 비포장도로는 끝이 없었다. 꼬마 친구는 요리조리 장애물을 피해 잘도 탔지만 40kg를 웃도는 짐을 단 자전거를 끄는 나는 고역이 타로 없었다.
길이 안 좋다보니 좀처럼 안 나던 펑크도 났다. 그런데 때마침 가까운 곳에 있는 자전거 수리점을 발견할 수 있었고 여행 시작 후 처음으로 남의 손을 빌려 펑크를 때웠다. 펑크 수리비는 단돈 10루피(200원)로 정말 저렴했다.
식당에 모여들어 쳐다보던 인도남자들과 달리 서글서글한 커다란 눈망울로 바라보는 호기심 많던 인도아이들은 정말 예뻤다.
비포장도로와의 사투가 끝남과 동시에 알라하바드(Allahabad)라는 대도시에 입성했다. 알라하바드는 4년마다 한번 열리는 힌두교 최대행사인 쿰(kumbh)이 열리는 곳으로 쿰 기간에는 무려 7백만 명이 넘는 인도인들이 이 도시로 모여 든다고 한다. 백만 명이 사는 도시에 칠백만이 넘는 사람들이 모여 들다니 아마도 그 때 되면 도시 전체가 사람으로 매여 터지지 않을지 상상이 가지 않았다.
얼마 만에 만나는 제대로 된 식사인가....카주라호를 떠난 이후 좀처럼 찾을 수 없었던 식당이 천지에 널려 있었다. 고심 끝에 고른 메뉴는 도싸(dosa)였다. 도싸는 남인도가 고향으로 으깬 감자에 다양한 야채를 섞어 만든 인도의 대표적인 음식 중에 하나이다. 오랜만에 푸짐한 음식을 먹고 나자 힘이 부쩍부쩍 났다. 커다란 도싸로 배만 만족시키고 서둘러 알라하바드를 지나쳤다.
알라하바드를 지나자 거대한 갠지스강 물줄기와 만났다. 갠지스강은 4대문명 중 하나인 인더스문명의 발생지라는 특별한 명성답게 커다란 물줄기를 이루어 동쪽으로 서서히 흐르고 있었다.
갠지스강을 넘은 이날도 해가 지기 전 몸에 쌓인 땀과 먼지를 씻어내기 위해 작은 마을에 있는 조용한 우물가를 찾았다. 10월 말 이후 가을로 접어들면서 오후 6시가 지나면 급격히 기온이 떨어지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한 따뜻한 오후 3~4시경 마을에 있는 우물이나 물펌프을 찾아 샤워를 하려고 노력 중이다.
한참을 씻고 있는데 한 남성이 다가오더니 샤워하는 모습을 구경하기 시작했다. 뭐 그냥 구경하고 지나치려는 사람인가보다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는데 손가락으로 입을 가리키며 혹시 밥 먹었냐고 물어오기 시작했다. ‘여기서 저녁은 해결하고 갈 수 있겠구나....’직감처럼 다가왔다. 손을 배에 가져다대고 배고프다는 제스처를 취했다. 사실 배가 아직 꺼지지 않았지만 항상 배고플 준비가 되어 있는 자전거여행자이기에 이런 기회를 놓칠 수 없었다. 그러고 나서 그 남성은 잠시 사라지더니 샤워가 끝날 때 쯤 스테인리스 그릇에 음식 한가득 담아 우물가로 돌아왔다.
가져 온 음식은 으깬 감자에 각종 야채를 섞어 만든 켤레와 통밀로 만든 두툼한 빵이었다. 진짜 오리지널 인도음식이었다. 맛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따뜻한 정 때문에 눈물 나게 고마웠다.
항상 느끼는 거지만 이렇게 따뜻한 웃음과 무한 친절을 베풀어 주는 사람들이 있기에 큰 탈 없이 여행을 계속할 수 있는 것 같다. 힘들었던 비포장도로, 관심의 도가 지나쳐 불편하게 만들었던 시골마을사람들도 우물가에서 받은 따뜻한 정 때문에 기억 속에서 눈 녹듯이 사라졌다. 깨끗해진 몸만큼 깨끗해 진 마음 덕분에 자전거 페달에 드는 힘도 한껏 가볍게 느껴졌다.
새벽공기가 차가웠다. 11월로 넘어가며 어느새 인도에도 성큼 가을이 찾아온 것이다. 그동안 침낭만 덮어도 안 춥게 잘 수 있었지만 이제는 침낭지퍼까지 꼭 잠그고 자야지 새벽에 찾아오는 추위의 습격을 막아낼 수 있다. 사실 아침, 저녁나절로 조금 쌀쌀한 추위 때문에 몸을 떨었지만 작년 2월 라오스 이후 따라오던 한나절 더위와 작별인사 할 수 있게 돼서 아침안개가 무지 반가웠다. 출발과 함께 시야를 가리던 안개가 서서히 걷히기 시작했다. 특히 이날은 다른 날보다 발걸음이 가벼웠다. 이유는 성스러운 갠지스강이 흐르는 힌두교 최대성지, 바라나시에 도착하는 날이었기 때문이었다. 며칠 간 끝없이 이어지던 비포장 길과의 사투 속에 도착하는 것이라 더욱 특별했다. 안개는 빠른 속도로 걷히고 바라나시에 빨리 도착하고 싶은 마음에 몸도 안달이 났는지 페달을 돌리는 허벅지에 힘이 들어갔다. 평소에 12~13km/h로 찍히던 속도계는 이날 바라나시를 향하는 동안 15~16km/h가 찍혔다. 인도를 여행하며 안타깝게 느낀 점 중에 하나는 시골에 있는 학교시설이 너무 열악하다는 것이었다. 여러 곳에서 인도아이들은 먼지 휘날리는 길가의 간의 건물에서 옹기종기 모여 공부하고 있었다. 더군다나 학교로 쓰는 간의건물도 좁아 밖에 돗자리를 펴두고 공부하는 아이들도 있었다. 라오스, 캄보디아 오지를 가도 적어도 아이들 공부할 수 있는 학교시설과 뛰놀 수 있는 운동장은 마련되어 있었는데 이와 달리 인도는 너무 열악했다. 인도는 인공위성을 쏘아 올릴 정도로 과학기술이 발달했고 핵폭탄이 있을 정도로 군사장비에 투자를 많이 하지만 시골 아이들이 편하게 공부할 수 있는 공간부터 마련해 주는 게 급선무이지 않을까? 먼지 날리는 길가에서 웃으며 벌 받는 아이들을 지나치며 괜히 한숨만 나왔다. 바람을 가르며 달린 끝에 정오가 되기 전, 바라나시에 도착했다. 인도하면 바라나시가 떠오를 정도로 이곳은 내게 환상 속의 도시 같은 곳이었고 2달간의 인도 여행 기간 동안 쌓인 피로를 이곳에서 풀고 싶었기 때문에 적어도 10일 간 푹 쉬다 가고 싶었다. 혼잡함으로 가득한 바라나시 도심을 뚫고 곧바로 싼 숙소가 몰려 있다는 벵갈리톨라(Bengali Tola) 골목으로 향했다. 벵갈리톨라는 예상과 달리 자전거 하나 지나갈 수 있는 어두침침한 작은 골목길이었다. 벨갈리톨라를 중심으로 골목길이 미로처럼 얽혀 있었고 그 사이사이에는 음식점, 기념품가게, 여행자 숙소가 곳곳에 자리하고 있었다. 흥미롭게도 한국에 왔다고 착각이 들 정도로 골목길 구석구석에는 한글간판이 많이 걸려 있었다. 미로처럼 얽힌 골목길 탐험을 하며 한국인들이 많이 머무는 게스트하우스를 찾는 도중에.... 인도에서 처음으로 자전거여행자를 만났다. 이름은 리양, 중국인으로 중국 서부 청두에서 출발해 티벳과 네팔에 거쳐 5일 전 인도국경을 넘어 이날 바라나시에 도착했다고 한다. 5일 인도여행이 너무 힘들었다는 리양은 앞으로 기차를 이용해 인도를 여행한 후 그의 표현에 따르면 천국 같은 네팔로 다시 돌아가는 계획을 잡고 있다고 했다. 이 친구가 겨우 5일 간의 인도자전거여행에 혀를 내두르는 것을 보고 인도가 자전거여행하기에 쪼금(?) 힘든 나라라는 사실을 새삼스럽게 다시 확인할 수 있었다. 숙소에 짐을 푼 후 가트(ghat:선착장)를 따라 걸으며 바라나시 구경을 시작했다. 가트를 따라 계속 걷다 눈길을 사로잡은 곳은 노천화장터였다. 노천화장터에는 예식을 올리는 사람들과 불길에 사로잡혀 활활 타오르고 있는 시체로 가득했다. 예식은 담담히 진행되고 있었다. 인간의 죽음이 최종적으로 마무리 되는 화장터지만 아무도 슬퍼하는 사람은 없었다. 처음으로 구경하는 내게 노천화장터는 기묘함으로 가득했다. 한참을 멀리서 구경하며 사진을 찍고 있는데 한 서양여행자가 다가오더니 이곳에서 사진 찍어도 되냐고 물어 오는 것이었다. 그래서 잘 모르겠다고 대답했더니 자신은 사진 찍다가 한 제사장에게 걸려 크게 혼났다고 말했다. 그리고 내 뒤에 숨어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이 사실을 몰랐던 나는 그 말을 듣자마자 서둘러 카메라를 가방 속에 꼭꼭 감추고 혹시나 누가 다가오는지 살펴봤다. 다행이 아무도 뭐라 하는 사람은 없었고 따라오는 제사장도 없어서 멀리서 남아 노천화장터를 찍은 사진을 남길 수 있었다. 바라나사 메인가트에서는 매일 저녁마다 힌두교 예식인 푸자(puja)가 열렸다. 매일 저녁 6시 반이 넘으면 스피커를 통해 힌두노래가 흘러 나와 푸자가 열리는 것을 알렸고 본격적인 예식은 노래가 끝나고 저녁 7시부터 약 1시간 동안 5명의 제사장에 의해 진행됐다. 예식은 반복되는 기도와 절차 때문인지 좀 지루하게 느껴졌다. 특별히 눈길을 끌만한 점은 없었지만 바라나시라는 공간적 특수성과 예식에 집중하는 많은 사람들 그리고 스피커를 통해 흘러나오는 힌두노래가 뒤 섞이면서 묘한 아우라를 자아내는 게 거기에 있는 것만으로 영혼이 정화되는 느낌이었다. 바라나시의 성스러움은 새벽공기를 타고 온다? 바라나시에 오기 전 사진으로 봤던 갠지스강에서 목욕하는 인도인들의 모습을 일출시간에야 목격할 수 있었다. 안개사이로 뜨는 여명은 갠지스강의 성스러움을 더했고 여성들은 옷을 입은 체 남성들은 팬티만 걸친 체 차가운 새벽공기에 아랑곳 않고 강에 몸을 담그고 기도를 올렸다. 강물에 몸을 씻는 사람들, 푸자 예식을 치르는 사람들, 단체로 보트를 타고 갠지스강 위를 떠다니며 합창하며 기도 올리는 사람들까지....안개 사이로 서서히 밝아지는 태양빛과 함께 이른 아침부터 갠지스강가는 활기로 넘쳤다. 사실 바라나시 관광보다 더 기억에 남았던 것은 이곳에서 만났던 한국 사람들이었다. 지난 1년 3개월 동안 한국사람 만나기는 하늘에 떠있는 별 따기보다 더 어려웠지만 바라나시에 는 한국여행객들이 넘쳐흘렀다. 여행 시작하고 한 한국말보다 바라나시에서 한 한국말이 더 많았을 정도였고 가끔 내가 한국에 있다고 착각이 들 정도로 많은 한국 여행객들과 많이 만났다. 특히 우리나라사람들이 많이 가는 게스트하우스에 묵었던 덕분에 사람들과 즐겁게 그것도 한국어(?)로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여행을 시작하고 많은 나라를 거쳐 오며 다양한 국적의 사람들을 만났지만 역시 한국 사람들과 노는 것이 가장 즐거웠다. 말은 정보 전달 역할뿐만 아니라 그 속에는 정서도 알게 모르게 숨어 있기 때문에 한국 사람들과 같이 지내며 그리운 고국의 향기를 흠뻑 느낄 수 있었다. 한국에 곧 돌아갈 여행객들로부터 고맙게도 수많은 여행용품을 공수 받을 수 있었다. 여러 사람들이 어려운 여행을 한다며 하나하나 주고 가시다 보니 수중에는 손난로, 감기약, 휴대용 칼, 털모자, 커피믹스까지...헤아리기 힘들 정도로 다양한 물품이 들려있었다. 하나하나가 정말 필요했던 물품들이었다. 아낌없이 여행용품을 주시고 가신 한분께 어떻게 말 할 수 없을 정도로 정말 고마웠다. “주신 물품 정말 유용하게 잘 쓰겠습니다!!” 축제의 나라 인도의 모습은 바라나시에 있는 동안에도 확인할 수 있었다. 축제 이름은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행사의 주인공들은 결혼한 여성들과 그녀들의 아이들이었다. 특이 했던 점은 축제가 벌어지는 시간이었다. 전날 일몰부터 시작된 축제는 다음날 일출까지 지속됐다. 말하자면 밤에만 지속되는 축제였고 대단원의 막은 일출로 끝나는 행사였다.특히 결혼한 여성들은 전날 저녁부터 강가에 담요를 깔아두고 앉아 뜬 눈으로 밤을 새우며 해가 뜨기를 꼬박 기다렸다. 이들이 강어귀에 심어 놓은 사탕수수는 조상을 모신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었고 촛불은 건강과 안녕을 의미한다고 한다. 새벽 3시부터 불꽃놀이와 함께 본격적인 축제의 막이 올랐다. 이들이 쏘아 올리는 폭죽소리로 인한 강한진동으로 숙소 건물이 흔들렸다. 소리만큼은 그야말로 폭탄 급이었다. 덕분에 새벽 3시부터 뜬 눈으로 밤을 지새워야만 했다. 그리고 새벽 5시, 하늘이 조금씩 밝아 올 때쯤 강가로 나갔다. 특별히 이 날은 가트에서 벌어지는 축제풍경을 보다 가까이서 보고 싶기 위해 해 뜨기 전 아침 일찍 서둘러 철수씨가 운영하는 보트를 탔다. 메인가트 주위에는 일출을 기다리는 사람들로 발 디딜 틈 없이 가득 차 있었다. 6시 20분이 지나자 해가 안개사이로 살며시 들어나기 시작했고 가트에 있던 사람들이 점차 바빠지기 시작했다. 누구는 기도를 외쳤고 맨 앞줄에 있는 결혼한 여성들은 강물에 들어가 흰 우유를 뿌리며 예식을 벌였다. 갠지스강에서 보는 일출과 가트에서 벌어지는 예식풍경은 장관이었다. 노천화장터에서 불탄 시체가 강에 버려지고 사람들은 그 강에서 목욕하며 영혼을 정화하는 이곳, 바라나시....갠지스강의 무엇이 이들로 하여금 영혼의 고향이자 안식처로 작용하게 하는 것일까? 바라나시에 머무는 동안 이 같은 질문이 머릿속에 떠나질 않았다. 바라나시에 있는 동안 그 독특한 매력에 빠져 헤어 나올 수 없었다. 극과 극은 통한다고 한다. 혼잡함과 고귀함, 더러움과 성스러움, 질서와 무질서가 혼재하는 이곳 바라나시는 이 말을 확인하기에 적합한 곳이었다. 갠지스강은 이 모든 것들을 블랙홀처럼 빨아들여 세상에 유일무이하게 존재하는 바라나시의 독특한 매력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이 때문에 바라나시는 지금도 인도 영혼의 속살을 보고자 하는 많은 여행객들의 발길을 잡아끌고 있는 게 아닐까 생각한다. 블로그- http://eletto02.tistory.com
|
출처: 세계자전거여행 원문보기 글쓴이: 김용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