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정하언 대사간 공(정간 서)
| 鄭夏彦, : 美仲,玉壺子, 止堂, 선고행록초 |
| 府君 諱 夏彦, 字 美仲, 號 玉壺子, 又號 止堂, 系出 迎日之鄭, 新羅 諫官大夫, 諱 宗殷之後, 我 朝, 知議政府事 諡 恭簡, 諱 洪, 十世孫. 兵曹判書 諡 貞肅 諱 淵 九世孫, 高祖 諱 忠邦蔭補 察訪. 不仕祖 曾祖 諱 洛 成均生員 贈 執義. 祖 諱 碩基 贈 左承旨. 考 諱 堥 公州牧使 贈 吏曹參判. 三世之贈 以府君也. 牧使公 三配, 豐川盧氏 諱 穎(瀕)女, 松齊 諱 叔仝後 是生. 府君 配 貞夫人, 豐壤趙氏 判敦寧府事 號 墨沼 諱 錫命之女. 府君以 肅宗 (1702년)壬午 十日月 十八日 亥時 生于 公州官舍. 幼失怙恃 伯仲皆蚤 世零丁孤苦 依於庶兄 然 自幼志氣淸明 未嘗 與群童嬉戱 文藝自進 不煩師敎 (1714년)十三歲製 科體詩如 夏梁再別蘇通國 等 作膾炙人口, 年(1716년)十五 公 都會 主試自 勸之赴, 府君不應. (1719년)十八 嘗味冠, 墨沼公 親父 舍人公 於公州 金璧亭, 聞府君名 來訪 許以 東床. (1720년) 其翌年, 歸 貞夫人 於府君 是歲. 景宗 辛丑(1721년) 中 進士, 墨沼公 因令 贅居 京中 府君 不從也. 每有 超脫俗臼 隱居讀書之志, 豐原君 趙公 顯名 力挽之惟, 東谿趙公 龜命 勸之曰, “以君之才 讀書林下 其成就 必非 科宦之比矣”, 墨沼公 亦不能 止之府君 旣歸乃卜日. 小壑於扶餘 白馬江之濱境 甚荒僻 人跡罕到名 其洞曰 玉壺, 築屋居之囂然. 有終 老之意詩 以所著文送 示東谿輒 稱賞 不已語人曰 玉壺子 策略置之 東坡集中 未易辯矣. 居玉壺 八年 貞夫人 久離 雙親 爲憂, 在京親知 策書交至, 府君 不得已 還京. 居雙里洞時, 墨沼公 浚巡榮途以琴 書林園 自娛日 與府君 徜徉吟呤, 親知競勸 爲擧業而 府君 不肯也. 一日 林公象元 趙公時敏 相率而來 要做科策, 府君而 無宿工辭 强而後, 始閱東人作 數篇命題 取小片紙 細細成文 無一抹改暫刻而 就一左閣 筆稱奇傳 相象玩. 其後略製 表策輒爲 人所騰傳. 1721 辛丑中 進士, 1735 乙卯增廣以策三中 解額會試 以表三中 策三中 俱中 豐原來賀曰 遲君十年 及第者 錫汝也, 錫汝 東谿字也, 府君笑答曰 誤我者 大監也. 豐原 自是日來 從容曰 自少 太惡流俗 今旣出世而 不改此度 誠恐 後悔於進取矣. 府君曰 吾之覓科 祇爲 窮餓求升斗 祿耳以 不合 流俗成實 欄邊 無知如何矣. 鄭羽良 方爲時 輩所推以 承旨來見曰, 吾輩族 雖踈俱是 孤宗無近親宜相 視與同室 仍語 涉世之道. 府君 曰 四君子 處世寧受 四面風露 不可借人 矮簷下宿. 鄭羽良 不悅而去. 梧川 李公宗城 後 至聞 府君答 二人之語 歎 曰, 四君子 立心 當如是矣. 冬應 文臣殿講 上親問 春秋文義, 下降褒 有錫馬之典 入堂. 後 攝記注 時麒麟察訪缺. 豐原 以吏判 在政廳 以小紙書示, 府君曰 參下 文官 家貧 好讀書者 誰也. 府君答之曰, 無如答書者 其他 不知俄而 府君除 麒麟, 白下 尹公淳 聞其事語, 府君曰 此 豐原釣君矣. 一時 諸議皆責, 豐原曰 有此 問所 以邀 此答也. 府君之 郵稟 餘不歸於家 修廨官而 新之廳璧, 有記 御史 洪昌漢 以持身淸約 終日讀書而 郵卒頌 惠褒聞. 1739 己未 瓜遞歷典籍 禮兵佐郞. 1740 庚申 拜 正言. 1741 辛酉 以慶尙都事, 掌試審灾于 嶺右 後來 士風澆雜 每當試 取有 亂場之患, 以故 動臂民力 堅棘 圍環儐館 撥卒 守衛試官 出入設戈戟, 府君 豫下令 悉除之匹馬 徐行而 入 諸生聳觀 無敢喧動 及 榜出一路 服其公名榜 中人 後 登第過半 中 司馬殆盡 四十年 後 不肖爲嶺邑 至今 稱 鄭試官之榜. 是歲 嶺南木綿荒 朝廷 不及災民情 大壤, 府君與左道災詳 壬公象元 約會 馳啟 擅給災, 自請 罪終免 何問而 民大慌 是行無, 督運御史 漕嶺穀 十萬石 送北道 賑飢, 船粟來去 皆適其宜 北人賴活, 南民無怨 1744 甲子 復掌試湖西 亦 嶺右之爲, 是秋 有纂輯 續大典之 命大臣 摠之堂郞 各十員 府君與焉, 衆議不一 莫先下手 府君言于, 大臣令人 各起草裁 擇而用之, 後數日 手寫一冊而 進之 徐公宗玉曰, 聞某奇才 果然矣. 首相 金在魯 遂 以基本 進于. 上上曰 好矣, 此是 卽廳 自筆乎, 樓下 褒敎 仍命書, 御製篇題 後又 命書 光範門額. 徐公奏曰 此亦 不必多人 堂卽 雖缺姑 勿出代好矣, 上曰 一某足矣 此後 有闕勿補可也, 未一年 卽 皆缺 獨府君在 命勿檢擬 他職間除, 司書問學 命除入直 抄啓御史, 旣承 召詣闕而 上 以續典 未畢寢之, 每五日 以抄本 登筵裁稟, 或 以御筆刻改 春注益 降時 泮儒 以領詳宮 典禮司 投疏有. 親鞫之命 幷拏 疏頭儒生之父 將施刑 訊基臣 欲言 進前輒下 投畀之命 天威震樓. 府君 方 以問 卽入侍特拜 掌令. 府君 進前 曰, 泮儒 雖有罪 至於設鞫 固已萬萬, 過當而 以子罪而 幷及其父, 尤非 聖世所宜 有臣目見, 君上之過擧 畏威 囁嚅則 豈可曰, 有臣分乎 請亟寢鞫命. 上 怒甚曰 此人亦如 諡號, 命 遠竄旋改 以削職, 俄而 又 還收而 牌招 府君 違牌而 出自是, 政望屢 靳批久 後除 奉常正. 府君 自以情地之 不安求 外補得 蔚珍, 旣辭 陛領相奏 續典 今雖入梓 或有 可改處 非他手所 可續. 上曰 改差待竣事 以善地擇 送可也 續典印進. 上曰 冣後看檢自 具宅奎也, 特加一資 鄭某 熟馬 一匹 賜給, 自由是命 人或 疑前日 威怒之未霽也 領相 請對 奏曰 某則 首尾委任 具宅奎則 縡居其半 賞典 太涉斑駁矣. 上曰 予豈不知而 經善加資於渠 河好耶 人謂. 上意 以未 經官職古 靳許 加資也. 後數日 薦擬於 菜伯二十日 不下適 淸道郡守缺, 銓曹 以有善之擇 送之 命 又 擬入 及 政下 以淸道 批然 後 當淸選 鄭羽良作 相力沮之 以府君之 不附而 售其嬚也. (1747. (英祖23)) 丁卯除 義州府尹, 1749 己巳 秩滿 廩餘錢穀貯 以萬討 府君 以爲 作別備則 要名私惠則 要譽遂作 一庫名曰 察眉, 使民取殖 以當繇役民 至今受其澤 及 歸行橐 不過 書籍, 歷承旨 刑兵曹參議. (1750년, 英祖26년) 庚午除 三陟府使. (1753년)癸酉 瓜滿歸 又除 洪州牧使, 關東御史 李顯重 論 三陟時 檢獄不親 坐謫原州到 配卽宥. (1754년) 甲戌除 驪州牧使, 上命 繡衣閱 上游諸州還穀 以麗牧 執法不撓 唯於重臣 喪貸糶二石, 聞上曰 借人 與修續典 宜其執法 借人 二石之犯 可當他人 千石, 且欲 以此懲 他人也 命罷職. 府君 旣絶義 榮途吏役 亦非 小好構 一小亭 於東郊之 明德洞 優游養閑 罕入城闉 自號止堂. 間有除 職乍出旋環于. 1757 丁丑 以承旨 入侍時 鏡城 荐饑 道臣 狀請擇守 新守 已出 方辭 朝 上曰 予 堂子擇 此承旨 可去矣. 府君受 明至鏡 便宜設施 邑民忘灾 按堵, 如 古鏡荒原 自古 無文學 府君 選士 稟養親 自敎導, 1758 戊寅 明年 二人 中 進士 鏡之有 進士自府君始. 戊寅 以府降 判官遞. 1759 己卯 配 大司諫 旋除 原州牧使, 1761 辛巳 以府降 判官遞, 壬午 秋 臺諫 柳善襄 乘時 希覬訐 府君 前爲承旨 不白 趙宗漙 上, 東宮書謂之 欺蔽坐 削黜. 1764 甲申始 叙 判決事 兵曹參議 旋除 綾州牧使. 翌年 1765 乙酉 牧使公 棄世之周 甲也, 府君常 以幼孤 不克之服 爲終身慟 是年棄官 歸公州 墓下追服 居廬日拜墓 寒暑 不廢 以終三年, 陋室飯疏 雖少壯 不堪其苦而 七老至之年 處之裕如. 1767 丁亥 以工曹參議 還朝 應製 連三居首, 上敎曰 其文老而 益公, 1768 戊子再任 驪州, 1769 己丑 患感 以五月 初七日 未時卒于. 官命弔祭 致賻葬于, 國士洞 壬坐之原 牧使公 墓地西麓 遺命也, 有遺集 若干卷. 府君 於書讀 不十遍而 終身不忘, 晩年 見子壻 背講尙書 久未熟日 吾讀, 此書 在十餘歲時 因誦三四篇, 每夜 看書明燭 到曉, 亂抽卷帙 隨手而 取及看訖 首尾貫通, 著詩文 不拘古格 沛然 由中嘗 曰文者言也, 發於其意 形於其詞而 已若之模倣 前人 非詩文之本也. 然 所著述 輒棄而不收, 曰 自適其意而 已安用 留蹟 是故遺稿 所集僅 十之二三 白下語. 府君 曰 君於筆若少用力 非我比也, 府君 曰 小技也, 此 不足爲 多徒爲 人役而 已晩益厭 於酬應 不屑爲也. 明於試鑑 每參時 主試者 以不得 壯元爲優, 府君 必於落券 記其字拔取之置, 壯元皆 當時 有 文名者 府君在試 席同試者 皆不敢挾 私出語. 人曰 與某同試 私意之萌 自消矣於 一切財貨 示如糞土, 衣食殆不辨 羔惡之品 居處不事 修潔室中 只有 書帙硯慙之 具無冗物. 嘗在堂後 八朔院中 例有 久債筆債 李公成中 兪公彦國 前後伴直 沽酒相酬 不問其餘, 院中 吏隷 傳爲美談 鄕試官 例用落幅 府君 悉付本官 隨求酬應 及 還不問其餘. 在彎府三年 每事行還閱 象胥貨包 有涉禁例 屬官 見可欲以燕 直取之前, 尹無不然 府君一物 未嘗過眼 灣人爲之語 曰, 府尹淸白 前有 韓使 後有 鄭公韓指 韓公祉也. 屢典州郡 家無 膽石之增 家人以貧 爲憂, 府君曰 人情 每患不足 雖 陶朱 其不足 一也, 吾以 窮氣之人 子女 滿前 世稱 福人得 彼則 必害於此 豈忍以此 而易彼哉. 凡有憂患 未嘗動心 輒以談笑 遣之 曰, 若當 愁苦之時 每思 不如我者 無不可 寬慰者矣. 府君 有一妹 寡奉養牛 家得美味 不先入于 口同室 三十年 庭無間言, 府君 卒妹子 復之猶 諸父 曰, 舅氏於 吾母猶 司馬公之養 其兄也. 庶兄之養 府君者 府君平生 愛敬不懈 所欲皆從 其歡心 衣食與 已無別而從 其年救, 幼時受學人之者 置之嶺邑 厚衣食之 及 死送財葬之. 府君爲 吏治法坦 夷人易以感服. 三陟官閑境淸 府君 淸簡爲治 日以觴詠 自適泛舟, 行竹西樓 下二人 沿水而 至問之 邑民 以親屬 爭於奴婢 送於官者也, 府君曰 吾得 偸閑於 此者 爲峽俗 淳美也, 汝等 至親訟於 此間得無 汗穢淸境乎, 賜汝一觴 可洗滌 其爭心也, 兩人 相顧頓首 受飮 曰 差前之爲 出而相讓 乃平分之. 驪州 多士族 糴政 稱㝡難有 一士人浦 三十石 被執而入, 府君見其 年少佳雅 文其姓族 乃八代祖後也. 問何爲 多逋還穀, 曰 老父母在貧 無而渭養至親 在麗自衆而 未 見顧恤 而至於此 府君曰, 吾爲汝償 其十一 因下帖諸, 鄭曰 徵族之法 自官先之家貧 親老之宗烏 可不恤, 明日 擔負相連 數日而畢 他族, 亦相聞風 效之境內 傳以爲美事 不燔刑以 化人多類 此至於明 覈之處幽隱. 立見 督運嶺南時 安使 以穀簿 有相左査而 不得府君, 一閱簿而 得營吏奸美之跡 因歷擧列邑 穀數舶隻 來去 無所記錄而 不錯一二 按使驚謂, 人曰 吾見絶人之聰明矣. 在淸道時 金山有疑獄 滛(淫?)殺事 屢覈未決 府君一案而 理出之按使 權爀 謄擛置案 遇人必展 日經濟手也 嶺人久而傳誦. 在三陟時 江陵有疑獄 十年未決, 府君爲 推官 追檢陳案, 犯人斯得 放出滯囚, 按使 尹得和 抵書曰, 此案 可謂鬼神 失期明寃 枉得 伸於我時 其爲幸不, 但 在於得伸之人也. 至於處世之跡 府君持守 高潔尤爲, 君子之所 難盖決科 出世 非府君之 素之而放. 釋褐之初 趙豐原 兄弟與 鄭羽良 俱以姻族之 誼爭慕之 方有引進之 意而府君 辭而郤之. 不與俯仰 府君 榮悴升沈 已窆於 發軔之始矣, 又與 趙豊恩 載浩 少相善也 及 (趙)豊恩 繼父叔當路 府君絶不見 豊恩甚怒, 與府君 遇於 弼雲臺 執手致懽 要與作詩 府君 有世故邇 來見面 稀之句, 豊恩 作色而起 乙亥 以後 豊恩失勢 屛退 東郊嘗所夢 其力者 乃反擠之 又下石所 素忌敵者 擧彈冠而 起時, 府君 閑處 郊서 携酒 往訪以叙 平生之好 一語不及 於時事, 豊恩 始歎服於家人 曰 吾見 欺於某多矣 賢哉其人 惜哉其才 及 謫居 府君使 不肖送別, 豊恩曰 噫 明喆君子 大爺之謂也, 江湖浮雁 雖欲從而 末由也. 府君 尤明於先見 家庭之間 每於不肖輩 曰 某也 必敗某也 必災, 又言 世道變幻 吉凶倚伏之數 後無不如 合符節, 且曰 吾之避榮途 人或謂之 有操守而 吾心實在於 遠害而全身 汝等日後 或有立朝者 常思吾言也, 盖當. 府君之世 朝廷之上別生 黨岐首尾 三十年 榮辱禍福 皆由 此 出入于, 彼必出於 此 府君 立朝適(籍)丁 是時, 中立不倚 和而不流也 其機關 利害之處屢 當進取之 會而見機 遠引若避仇敵. (梧川)嘗言 吾之行已 只有無敵無莫 不激不隨 八字符耳 是以當路者, 雖 一人之身而 或怒 或悅怒也 怒其不附於 已說也 說其不附於 彼從, 見其無所附離 則 怒如說 皆不深 以故無先後 汲引者而 亦 無 擠陷機阱之心. 有權勢降 赫人所畏敬者 獨不尊之而 人不而爲傲有 失勢 齮齕親戚, 皆絶者 獨不踈之而 人不以爲危充 然自 得不求, 其外 雖 風波時 起覆 轍滔滔而 府君 長坦坦也. 梧川 嘗謂 府君曰 君以經世之才 華國之文 不能見用於 世然, 吾不爲 君惜而反爲 君營之, 嗚呼 府君事行 只在一 世人耳目而 府君知友 今無 在世者 恐後愈久而 遂泯焉. 謹術遺事 藏于家後之聞 府君之風而 稱慕之者 庶或立言者矣. 不肖 孤 杆 敬述. |
▧ 해설 ;
돌아가신 아버님의 경력과 살아생전의 행실을 처음으로 기록한다.
♠ 부군의 이름은 하언, 자는 미중, 호는 옥호자와 지당(즐기쓰던호), 본은 영일 정씨로, 신라 간관대부인 ‘종은’의 후손이다. 우리 조선시기 지의정부사로 시호를 공간으로 받은‘홍’의 10세손이고, 병조판서로 시호 정숙을 받은‘연’의 9세손이다. 고조의 이름은 충방으로 음보로 찰방이고, 벼슬 없는 증조의 이름은 락으로 성균관 생원이고 추증하여 집의로, 할아버님은 ‘석기’로 추증직하여 좌승지이고 아버지는‘무’공주목사 이고 추증직하여 이조참판으로 되었다. 3세대를 추증하신 분은 부군(하언)이시다. 정무의 셋째 부인으로 풍천노씨 송제 숙동의 따님으로 이름이 영이신 분이 부군을 낳았다. 배우자 정부인 풍양 조씨는 판돈녕 부사로 호 ‘묵소’, ‘조석명’의 딸이다. 부군 출생은 (1702년, 청 황제 강희 41년, 숙종 28년) 임오년 11월18일 해(亥)/22~24)시 공주 목사관사에서 태어났다. 어려서 부모님이 일찍 돌아가시고 맏형과 둘째 형도 일찍이 돌아가시니 권세도 살림살이도 다한 집안에 힘쓸 이가 아무도 없어, 외로이 배다른 형의 집에서 의지하며 살게 되었다. 어려서 지조와 기개가 있으며 맑고 밝았다. 아이들과 잘 어울려 놀지않고 문장과 기예를 스스로 열심히 연마하고 스승의 가르침을 어기지 아니하니, 13세에 과체시 “하량 재별 소통국”등 같은 것을 지어내니 주변 사람들에게 많은 소문이 돌았다. 15세에 유림들이 모여 시를 겨누는 대회에 초청을 받기까지 하였으나 참석치 못하였다. 약관 20세가 안된 18세 때, 공주 신풍리에 살고 있는 묵소공이 부친 사인공을 만나려고 금벽정에 왔을 때, 그 유명함의 소문을 듣고 만나 허혼하게 되어 다음해 부군의 정부인으로 삼게 되었다.
이 해 1721년 경종 원년 신축년에 진사가 되고, 장인 묵소공의 서울 처가살이를 만류하며, 시끄러운 곳을 피해 조용한 시골에서 공부하고자 하는 굳은 의지가 있었다. 한 편 풍원군 조공 현명, 동계 조공 구명이 과거시험을 볼 수 있는 능력이 충분한 재주를 보고, 과거에 응시하라는 권유를 받았으나, 부군이 실력을 더 연마하려고, 시골에 내려가 공부하고자 함에 말릴 수가 없었다. 그리하고 있을 때, 부군은 벌써 공부할 곳을 점 찍어둔 부여 백마강가 거칠고 험한 작은 골짜기 인적이 드문 곳에 가 있었다. 동네 모습이 옥호이나 배타는 곳이라 시끄런 마을이었다. 오랜만에 부군이 지어 보낸 문장을 본 동계는 칭찬하며 상을 주고, 말하기를 “옥호자는 동파의 문집에 비교하여도 그 뛰어남이 손색이 없겠네”하였다. 정부인이 부군과 함께 시를 주고받고 놀면서, 과거시험 응시를 권하니 아직 실력이 없어 그런지 부군이 요구를 거절하였다. 어느 날 임공 상원과 조공 시민이 같이 와 과거시험 과목 책을 (공부)지어 보라하니, 놀사이 없이 공부를 열심히 강행군 한 바, 옛날부터 모은 유명한 동인시화 수편의 명제를 취하여 들추어 본 후 조금도 고친 곳 없이 글을 지어 한번에 내려 써 끝내니, 서로들 기특하다 칭찬하며 좋다고 구경하며 그 모습에 대해 이구동성으로 칭찬하였다고 전해지고 있다. 그 후 과거시험에서 표와 책에 관한 문제를 열심히 들추어 보는 등 노력하여, 1721년(경종1) 신축년 20(만19)세에 진사가 된 후, 1735년(영조 11년 을묘, 만33)세에 증광문과 책3, 복시에 시험보는 회시의 표3, 책3 양장(두 시험)에서 다 합격하였다. 처가족의 가까운 친구인 ‘풍원’이 와서 축하하며 말하기를, “군이 과거급제하는 것 10년이나 기다린 이는 석녀야”했다. 석녀는 조동계의 자이다. 군(하언)이 웃고 대꾸하기를 나를 그릇친 이가 대감이요 하였다. 풍원이 이후 찾아와 넌지시 말하기를 군은 어려서 어려운 어린 시절을 살았으면서, 지금은 출세길이 열리고 있으니, 정성들여 더 힘써 나갈 방도를 바꿔보지 않겠는가? 하였다. 부군은 말하기를, 내 과거공부를 위해 위만 쳐다보고 공경을 들여, 굶주리고 배고파서 벼슬길을 찾은 것은 아니다. 그는 어릴 때의 성실하게 보낸 생활 태도는 변하지 아니하며, 어찌 같지 않다 하겠는가 하였다. ‘정 우량’이 승지로 있을 때, 좀 많은 이가 있는 자리에서 만나게 되었는데, 어떤 일을 하여보자 말하기를 우리가 먼 일가 친족인데 근친없이 혼자 힘쓸 것 없이, 우리 치세하는 길을 같이 나가보자 하였다. 부군이 말하기를 사군자가 어려운 세상에 살아갈망정 남의 그늘 아래 살지는 않습니다. 라고 하니, ‘정우량’은 기쁘지 않은 듯 가버렸다. 오천 이종성이 후일, 부군이 대답해 준 소문을 듣고, 둘이 한 말에 탄복하여 말하기를, 사군자 마음이 의당 이런 것이다 하였다.
겨울 어느 날 전시 문신 강의 춘추에 대하여, 임금이 친히 질문함에 잘 응답하여, 말을 하사받고 입당 벼슬하게 되었다. 후에 기린찰방이 비어있어 그리 부임하게 되었다.‘조풍원’이 정권을 잡고 있을 때, 부군의 편지를 받게 되었는데, 하급 문관들이 책읽기를 좋아하는 자 누군가 하니, 아무도 이와 같은 질문에 답장이 없었다. 그러나 부군이 기린에 부임 시, 백하 ‘윤공순’이 소문을 듣고, ‘풍원’이 이것은 부군을 낚시로 잡았네 하였다. 모두 일시에 여러 생각이 깥은 주책이라 했다. 풍원은 이런 질문에 기막힌 대답이라 했다. 기린찰방 주재시, 부군에 녹봉을 배송하는 우졸이, 퇴근하지 않고 관아에서 열심히 일하는 소문과, 어사 ‘홍창한’이 우졸이 종일 부군이 책읽는 모습에 칭송하는 것에 대한 소문을 더하여, 나라에 알리게 되니 포상을 받기도 했다. 1739 영조 15년 기미, 전적으로 중앙에 들어와, 예조, 병조좌랑을 역임하게 되었다. 다음해 1740 영조 16 경신년에 정언을, 1741년 영조 17년 신유년에 경상도사가 되었다. 이때 영남지방에서 시험을 관장하고 재난에 대비하게 되었을 때, 선비의 시험장에 책임자가 가시로 막고 호위하며 사람의 출입을 제지하는 것이 강한 적군을 대하는듯하니, 공이 나서서 못마땅하므로, 선비를 박대함을 격문을 부쳐 정리하였다. 이 방을 많은 선비들이 말을 타고 우러러보며 감히 소란 없이 지나가기도 하였다.
격문의 방을 공명토록하니 이에 선비들이 복종하며 칭송이 있었다. 후에 관반의 사마 합격자가 나오게 되므로, 이런 방문에 관하여 40년이 지난 지금까지 정시관을 칭송하여 오고 있다 소문이 났다. 또 재난에 대비할 때는, 영남의 목화 농사가 엉망이어서 나라에 공물을 하지 못하니, 이재민이 매우 마음 아파하고 난처해하므로 이런 도의 재앙을 소상히 밝혀 임공 상원을 만나 재앙에 관하여 알리고, 청하여 죄를 면하게 하며 의무이행을 없게 하여 백성을 기쁘게 하였다. 독운어사를 겸하였는데, 영남의 양곡 십만석을 북도지역에 배로 적절이 보내게 되어, 북쪽 사람들이 힘입어 살 수 있도록 하고, 남쪽 사람들로 하여금 원망이 없도록 하였다. 1744년 영조 20년 갑자년에도 호서지역에 나가 고을 읍민을 위해, 관장할 때도 위 영남지방과 같게 잘 처리했다.
같은 해 가을 속대전 찬집에 명을 받아, 대신 등 전원 10명과 부군이 더불어 찬집으로 일할 때, 각자 중의가 불일치하게 된 점을 부군이 나서 말하니, 대신이 명령하여 각자 기초한 것을 다듬어 가려서 사용하라 하였다. 이리하여 부군이 수일째 손수 쓴것 하나를 서공 종옥에게 제출하니, 소문을 듣고 아무개 모는 참으로 재주가 과연 좋구나 공이 말했다. 수상 ‘김재로’가 그 초본을 상에게 전하니, 상이 말하기를 이것이 낭청(부군)이 자필로 작성하였느냐 하고, 상을 주고 이어 명을 내리니, 어제 편제와 광범문 및 여러 문의 액을 쓰도록 하였다. 서공은 상에게 아뢰어 많은 인원이 편집 기초하는 이 일에 대하여 비록 책임자가 부족해도 후임자를 뽑지 않아도 좋겠다 상에게 아뢰니. 임금은 아무개 1인이면 좋겠다 말하고 이후 이 일에 관하여 인원 보충 없이 찬집하도록 하였다. 1년이 안되어 다른 이는 자리를 옮겼으나 부군이 홀로 남아 일하게 되었다. 타직 책임자와 검토 비교할 것도 없다 하시면서 문학사서 직책을 내렸다. 바로 명하여 입직 어사로서 추천되고 승지에 부름 받고 들어갔다. 찬집에 관하여 상이 5일마다 잠자러 가기 전 부군이 쓴 속전에 관한 초본을 가지고 경연장에 가면 잘 맞는지 살펴보며 혹시 새길 때 어필에 대하여 고친 곳이 있는지도 몸소 살피기도 하였다. 봄이 한창인 때 성균관 하숙생이 상궁전 예사에 관하여 투서의 상소가 있었다. 그 상소한 자의 우두머리와 그 아비를 처벌하는 친국문에서 신문을 하는 사헌부 대신이 나아가, 이것은 하늘을 거스르고 땅을 뒤흔드는 나쁜 투서로 보고 형벌을 가하려하니, 부군이 조정에 입시되고 특별한 상감의 배려로 장령이 되었을 때에 공교롭게도 나아가 하고픈 말인 즉, 비록 유생은 처벌이 만만번 마땅하지만, 아들의 죄로 그 아비를 처벌하는 것은 신의 생각으론 이 좋은 임금의 잘 다스리고 있는 태평성세에 자식의 죄로 그 아비를 죄로 묻는 것에 대하여 백성을 이런 죄로 연좌함이 부당하다고 본다. 친전에서 말하였다. 군이 상감에 대하여 지나친 거동을 위협적으로 무슨 말을 지껄이는 것으로 알고 마음에 꺼린지, 어찌 신하의 본분을 가히 잊고, 그러는가 하여 빨리 이 국문중인 것을 처리하라 명하고, 크게 노하여 이자도 이놈과 같구나 하곤, 삭직하여 멀리 귀향 보내라 상감이 명했다. 그러나 조금 있다가 명을 거두고 다시 조정으로 불러들였으나, 거절하고 책임지면서 군을 그만두었다. 관직에 물러나 오래 정사를 원망하며 가슴을 쓰다듬고 있을 때, 지방 외직 울산 현감으로 명을 받고 가던 중, 영상이 주상에게 속전이 아직 고칠 곳이 있어 완성되지 아니한 것을 아뢰니, 다시 조정에 머무르게 되었다. 속전을 잘 고쳐서 좋은 것으로 보내니 인쇄하도록 하였다. 왕이 인쇄한 것을 모아보고 검토하며 잘되었다 하시고, 정모에게 일계급 특진 후, 길든 좋은 말을 하사했다. 이런 명을 사람들은 왕이 노한 것이 그쳤는지 혹이나 의심했다. 영상은 자청하여 왕에 아뢰기를, 아무개(하언)는 시작과 맺음을 잘하여 사는 동안, 포상으로 반이나 많이도 집에 아름답게 얼룩지어 있나이다 했다. 왕이 말하기를 내 어찌 경솔하게 나서서 개천에 못난이를 가자 한 것이 아니니라 했다.
왕은 내 뜻은 홍문관, 성균관의 하급 관직을 아니 한 자지만 내 마음이 허락하여 가자 하였다 했다. 수일 후, 20일이 못 가서 청도군수가 비어있어 그리 후보로 적임자로 뽑히어 나갔다.
조정에서 ‘정우량’이 정승을 할 때인데, 부군이 이렇게 되는 것을 막는 등 싫어했다. 1747년 정묘, 영조 23년, 의주부윤으로 나갔다. 1749년 기사년 임기가 다 될 무렵, 창고에 남은 양곡과 돈을 충분히 잘 저장하여 부군이 떠날 땐, 그 둥근 창고가 만이나 되었다. 이 해에 돌아와 학문을 연구하는 서적의 책 서사 승지, 형조, 병조참의를 거쳐, 다음해 1750년(경오년) 삼척부사가 되었다. 임기가 다 되어 1753년 계유년 돌아올 때 홍주목사로 발령받아 가는 길에, 광동어사 이현중이라는 작자가 삼척 근무 시 검옥에 잘못을 지적하여 조정에 알려 논하게 되므로, 원주로 귀양을 가게 되는데, 부군이 부임 길에 가던 중 도착하자마자, 왕이 용서하니 곧, 1754년(갑술년) 여주목사로 부임했다. 임금이 여주가 상류 벼슬아치들이 환곡에 관하여 집행이 어지럽다하여 어사를 보내 조사를 명하니, 어사는 상가집에 2석의 쌀을 (대여)팔았을 뿐이라 하니, 임금이 듣고, 2석은 일반인의 범행 1천석이나 같고, 속전을 편찬하여 본 이런 자가 법을 잘 알면서 어긴 것이니 하고 파직을 명했다. 부군은 나라의 보답하는 길, 공무원 생활이 의지가 꺽이게 되어서 서울 동쪽의 그리 좋지도 않은 곳에 작은 정자를 성과같이 막히고 한적한 곳 (1차)명덕동이라 이름하여 그 곳에 들어가 정자 여막을 짓고 홀가분하게 낙향 생활하였다. 그러던 사이 어느덧 돌고 돌아 직책을 받고 나왔다. 3년이 지나 1757년 정축년, 승지입시, 그 때 다시 경성에 천거할 시, 도신(감사)이 임금에게 그곳은 기아선상에서 허덕이는 지역이므로 사람을 가려서 보내야 한다고 아뢰니, 임금이 한 조정의 처사는 내 승지(하언)를 택하여 가도록 허락, 임명한 것이라 하여 부군이 명을 받아 경성에 부임했다. 경성에 부임하여 목민할 때 편의시설을 읍민에 베푸니 재난을 잊고 안도했다. 함경지방은 예로부터 황폐하고 서울에서 먼 곳이고 가르침이 없는 곳이었으나, 선비를 뽑아 돌보아주고, 가르치어 인도하니 명년이 되어 진사가 두명이나 나온 것은 함경지방에서 부군이 다스릴 때이다. 1758년(무인년)에 경성부가 강등되어 판관이 갈리니 물러나고, 1759년(기묘년)에 대사간으로 이어서 원주목사가 되었으나 1761년(신사년)에 원주직원으로 강등되어 판관이 다스리니 또 갈리어서 물러났다. 다음해 1762년(임오년) 다사간 유선양이 지나간 일로 부군이 승지할 때 조종부 상소에 관하여 동궁 왕자의 소조의 일로 잘못한 것을 고백하지 아니했다는 점을 들고 나와 틈을 타 오래전 없는 일을 대조, 임금에 간하여 부군이 삭탈관직 되었다. 1764년(갑신년)에 판결사, 병조참의, 능주목사를 거쳐, 1765년(을유) 아버지 목사공 가신지 회갑 60년 되던 해, 어려서 3년 상복을 입지 못한 아픔이 계속 몸에 남아있던 차, 벼슬을 그만두고 공주 국사동의 아버지 목사공 묘아래 근처에 여막을 짓고 상제하며 더우나 추우나 한결같이 여묘살이를 시작하였다. 이 때 자리는 누추하며 먹는 것은 성글어서, 젊은 장정이라도 그 고통을 이기지 못할 것이거늘, 하물며 7순을 바라보는 노인이 어떻게 흔들림없이 지냈는가 의아스럽다. 1767년(정해) 공조참의로 조정에 들어와 있을 때, 임금이 3차례나 시제 하문이 있어, 이에 논하여 우수하게 부군이 지어올렸다. 이를 보고 상왈 나이 들어서도 글쓰는 기교가 더욱 대단하다 하셨다. 1768년(무지) 여주에 재임 중 이듬해 1769 기축 5월 7일 미시(낮 12~2시) 병들어 죽었다. 장례는 관에서 하여 국사동 임좌(23시 방향) 언덕에, 유언에 따라 목사공 서편에 안장했다. 남긴 유집 약간있다. 부군은 종신토록 독서를 게을리 아니했다. 만년에 아들과 사위가 등을 돌리고 책을 보지 아니하고 외우는 서경 공부에서 제대로 외우지 못하니, 내 이 책을 10세에 3~4편을 외웠느니라 말하기도 하였다. 부군은 밤마다 책보기를 촛불을 밝혀 새벽이 다 되도록 손이 가는대로 책을 뽑아서 처음부터 끝까지 속독하여 읽었다 했다. 이러니 부군의 시문을 짓는 솜씨가 폭포 쏟아지듯이 시제는 적중하고 글은 줄기차 있으며 고풍에 구애받지도 아니하였다. 이 시문을 감상하는 사람들이 이리 칭찬이 많다고 말하곤 했다. 시문의 품은 뜻과 글귀 가사는 전에 다른 사람들이 지은 시문을 바탕으로 아니했고 자연스러웠으니, 즉 받아들이지 아니하고 버렸다. 말하자면 시가 품은 뜻은 유유자적하며 이미 시를 쓰는 것이 쉽게 하였다. 시를 쓴 행적과 남긴 시집은 겨우 10중 2~3이다. 백하가 부군의 필체를 비교하여 말하기를 그 작은 용필력으로 나를 견주지 말아라 하니, 부군이 기교가 작다 하였다. 이 말은 많은 무리를 부리기는 늦고, 바랄 것도 없고, 말대꾸할 것도 없다하였다. 과거시험 때, 매번 감독시 장원에 낙방 한자를 가려서 적어 놓았다가, 시험볼 때 문명이 높은 자 옆에 끼지 못하게 하는 감독이라 사적인 말이 돌기도 했다. 과거 응시자는 아무개와 응시할 때, 아예 처음부터 낄 생각은 말아야했다. 재화는 똥 묻은 흙과 같이 멀리하고, 배고파도 불평을 말하지 아니했다. 아름답지 아니한 물건은 집에 두지 아니하고 학문을 닦는데 정격한 물건만 들여놓았으니, 오직 여럿책과 글쓰는 벼루와 분판만 있고, 쓸데없는 물건은 갖추지 아니했다. 집에서 8월 초하룻날, 처음 햇곡식을 거두는 이 날 월급 및 대서료를 받아 이공성중과 유공안국이랑 둘이 숙직을 전후에 술을 마실 때 그것을 불문함에 관리의 종, 노예가 이에 관하여 미담을 하는가 하면, 부군이 과거에 떨어진 자의 시험지 답안지를 횡령함에 부군이 알고 본 향시관을 따라가 그것을 잘 대처하고 돌아오기도 했다. 의주 부윤으로 있을 때 3년은 통관 화물을 검열하는 자는 욕심을 내어 슬그머니 취하거나, 탐을 내서도 안 되는바, 전임자 부윤이 무관심하였는데 부군도 한 가지 탐내지 아니하고 지나치며 취함이 없었으니, 의주의 백성이 말하기를 부윤 중에 청백리는 전임자 한윤과 후임자 정공이라 하니 한공은 한지이다. 여러 고을의 소임 중에, 집에 쌀이나 벼 등 곡식을 갈무리하는 큰 독이 없으니 이를 많게 하여, 가난한 자의 근심을 덜고 아픈 사람마다 인정을 다 줄 수 없고 부족하지만 부자에게는 그 부족한 것이 하나뿐이니 그 독을 주지 아니하여도 괜찮다 했다. 논밭 한떼기도 안되는 분의 자녀지만 여기 의주의 사람들은 복을 얻었으니 상대방을 해하려 함을 잘 참고 견디어 내는 것이라는 점을 내 말하니, 우환이 있어 마음을 잘 움직일 수 없어도 웃음으로 보내므로 기쁘다. 말들 하기를 만약에 당신이 힘들고 근심이 있을 때, 매번 너그럽고 관대하게 한다면, 나와 같이 불가하지 않을 것이라 했다.
부군은 홀로 된 누이도 잘 봉양했다. 집에 맛좋은 것이 들면 먼저 입에 넣지 않았고 같이 부인과 30년을 사는 동안 나쁜 말이 없이 동거 동락하였다. 부군은 누이의 자손이 죽었을 때도 아비가 돌아가신 것과 같이 예를 다하므로 외삼촌이 말하기를 우리 모친에게 한 것은 사마공이 그 형을 모신 것과 같았으며 서형에게도 그리하였다 했다. 부군은 평생 사랑과 공경으로 해태 아니하며 환심을 사려고 들지도 아니하고 어려서 의식주에도 끝내 차별을 두지 아니했다. 고을에 나아가서는 자녀들을 고을에 데려다 공부와 의식주에 관하여 많은 관심을 주었고 고을 사람들의 상례를 물적으로 도와주었다. 부군은 북방의 오랑캐라도 치세를 탄탄히 하여 감복하게 하였다.
삼척 재임시 한가롭게 좋은 어느 날, 간단히 차린 술자리에서 시를 읊고 쉬고 있는 죽서루 아래, 배를 타고 오던 두 사람이 친구로서 고을 노비의 종속에 관하여 송사를 일으켰다. 부군이 말하기를 내 이런 한가한 자들을 보았나 하곤 고을의 나쁜 습속을 순화했다. 너희가 가까운 친구로 이런 송사를 벌여서 무슨 이득이 있느냐 이런 나쁜 짓거리를 깨끗이 청산하라면서 술잔을 나누어 주고 서로 다투는 마음을 지워주었다. 두 사람 다 공손이 땅에 닿도록 머리 숙여 받아 마시면서 서로 양보하기로 대답하고 전과 똑같이 나누기로 하며 나갔다.
여주에 부임시 어느 유명한 문벌 선비집안 한 가족이 환곡에 손을 대 30석을 포탈하여 잡혀 들어왔다. 부군이 그 자는 어리고 예쁘고 고상하게 생겨 물어보니 그 유명한 집 8대 후손이라 한다. 또 물어보길, 왜 그리 많은 확곡을 축내었느냐 그러니, 말하기를 부모는 늙고 가난하여 내가 봉양할 것이 없으며, 여기 여주에는 아무도 돌보아 주는 이 없어 이렇게 되었다 했다. 부군 왈, 내가 전체의 십일을 감하여 갚도록 너에게 최고한다 하였다. 백성을 징집함에 관아는 가난함과 늙은 어버이가 있는지 구휼할 것인지 가부를 결정하고 다음 날은 다른 족친이 연대하여 수일 내 부담을 할 수 있는지도 보아야한다. 또한 본 받을 모범적인 가풍이 있는지 아름다운 일들이 있는지 등 알아보고 형벌에 처할 것인지, 교화할 것인지, 여러 가지 사정 등, 핵심적인 나타나지 않은 것들도 밝히어 행하여야 한다고 부군이 이리 말했다. 나의 견해를 말하고자 한다. 영남지방에서 독운어사를 할 시 여기 관찰사가 양곡에 관한 장부를 검열, 한 가지 이득을 취한 것이 있다하여 조사하게 된 바, 부군이 농간한 흔적으로 배 수척의 분량을 기록하지 않은 것이 있다하나 착오로 된 1~2가지로 밝혀졌다. 관찰사가 놀라서 소위 말하기를 내가 보니 참으로 총명하다 하였다. 청도 부임 시, 옥중에 음살 사건에 관하여 여러 핵심적인 것이 없어 미결 상태였으나 부군이 한번에 이유를 알아내 안건으로 지적해내니, 안찰사 권혁이 그 안건의 처리 등본을 표본으로 삼아 잘 두었다가 사람들이 날로 읽어보도록 하여 해결 수단으로 삼으니, 여기 영남 사람들에게 많은 칭송을 받았다. 삼척 재임시 강릉에 십 년 의옥사건에 조사관원으로 나가 추국 검진하여 안건을 만들어, 범인이 사기로 이득 한 체납한 모든 것을 내놓게 하니, 안찰사 윤득화가 이런 조사안을 두고 신원인의 누명을 쓴 원통함을 밝힌바 귀신도 놀랄 정도요, 나도 다행이요 하면서 부단 신원인 에게만 다행한 것이 있겠느냐 했다. 세상을 사는 동안 부군은 지조가 굳고 결백 고결하며, 더하여 군자의 난관을 이기는데 힘쓰고, 오직 출세하여 나가고자 하는 것이 아니었다. 부군이 품은 뜻은 방정하다. 과거에 올라 벼슬하는 초기 조풍원 형제와 정우량 종중가족으로 함께 방안을 모색하여 잘 나가보자 하나, 사양을 하며 높은 벼슬에 오르려고 하지 아니했다. 부군은 영화로움과 아픔과 벼슬이 오르거나 낮아지거나 하여도, 초심을 잃지 아니하였다. 조풍은 재호는 젊어서부터 친구다. 풍은이 부숙과 같이 정권을 장악할 때, 풍은이 교제를 끊고 매우 노하게 된 적이 있었다. 필운대 간화회에 만났을 때이다. 서로 기뻐하며 악수를 할 정도의 좋은 사이였으나, 시짓는 불편한 일이 있었다. 얼굴보기가 힘들다는 내용으로, 말을 하니 조풍은의 얼굴을 붉히게 하고 비꼬았다는 것이다.
시간이 지나, 1755년(영조 31년 을해)에 실세하여 나란히 둘 다 귀양가므로 떨어져 나갔다. 돌이나 던지고 정적을 기피하며 관을 벗어던지고 불편해 할 때, 부군이 술병을 들고 오두막 농막같은 그곳을 찾아가서 만나 서운함을 푸니, 이후 평생을 좋아하며 한 말이, 이때의 만남을 두고 탄복하였다. 가족이 말하기를 아무개를 나쁘게 보았는데, 어진이로서 아깝도다 하였다. 귀양살이로 어리석어 부군을 송별하지 못할 때, 풍은이 아 슬프구나 하면서, 명철한 군자는 대부 늙은이(하언)를 가르키는 것이라 하면서, 강과 호수에 떠 있는 기러기가 가고자 하나 끝내 어떤 이유가 있으니 쫓지 못한 것이 아니겠나 하였다. 부군은 앞을 내다보는 지혜가 있고, 집안에서는 말을 함부로 아니하는 이가 아무개라 하였다. 아무개는 패자요, 재앙을 입은 자요, 하지만 또 세상을 다스리는 이치가 변하고 환상적이고 길하고 흉하고 하는 것이나, 서로 인연으로 생기는 것으로 수가 하나도 맞는 것이 없다 했다. 나는 영화로운 길을 피했다. 사람들이 말하는 지조를 지키고 내 마음을 진실히 하여 내 몸(자기, 하언)을 해치는 것을 멀리하여 후일 당신과 같이 조정에 나가는 이런 생각도 하며 중얼거려 본다. 모두 당연한 것이다. 부군은 조정의 처세함에 당파와는 떨어지려 하였고, 30년간 영욕화복을 멀리 대하고 이렇게 하여, 반드시 나갈 자리에 나가 근무하며, 벼슬길로 나아감에 패를 짓지 아니하고 중립을 지켰다. 기대지 아니하고 조정정치의 나쁜 기류에 화합하지 아니하고 각 부처의 이해관계에 있어서는, 여러번 당당하게 나갔고, 정치회동을 보고 멀리하고 정적이 혹한 말을 하면 피하여, 내 이미 이를 실행하였으니 오직 있는 것은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없다 하였다. 부딪히지도 아니하고 천지 운행에 따르고 권력을 장악한 자에게 귀 기울이지도 아니하였다. 홀로 노하기도 하고 기뻐하기도 하고 이미 노하는 것을 아니 따르니 기쁘게 되고, 저 편의 기쁜 것을 따르지 아니하니 마침내 갈라서지 아니하니, 싫고 좋은 것은 연관성이 깊지 아니하고, 선후에 영향을 아니미침을 받는 자는 파놓은 함정에 밀어넣지 아니하려 드는 마음이 있는 것이다. 권세가 다가고 빛이 바래어 경애하는 것을 꺼리는 자는 홀로 사람을 존경 아니하며 거만하고 세를 잃고 남을 물어뜯는 것은 모든 친척과 단절된다. 홀로 사람을 멀리 아니하면 상호 부딪혀 위험하여 자연히 얻지 못하고 그 밖에 것을 구할 수 없다. 비록 풍파가 나 엎어져도 일어났고, 행적은 넘치고 넘치니, 부군은 오래도록 탄탄하였다. 오천(이상국)은 평하기를 부군은 나라 다스리는 재주를 갖추고, 나라를 빛나게 하는 문장 실력을 갖추었지만, 능력을 치세에 제대로 쓰지 못하였다 했다. 나(오천 이상국)는 군이 이를 하지 못하여 애석하고, 군이 영화를 누리지 아니하였으니, 마음이 슬프다. 부군의 행적을 단 1세 자손으로 보고들은 바가 없고, 부군을 아는 사람도 없는 지금, 두려운 마음으로 내(아들 간)가 오래오래 남기고자 선친의 흩어진 행적을 찾아서 바로잡아 스는 것을 마치고자 한다. 삼가 남아있는 것과 집안에 모아 군 것과 전하여 내려오는 칭송과 사모하는 여러 사람의 풍문과 혹시나 있는 교훈이 되는 것들을 후세에 알리고자 쓴 것이다.
불초 혼자씀 간 경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