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승원 에세이】
구멍가게에서 뜨개질하던 ‘경찰관 아내’의 어제와 오늘
- 경찰관 아내로 살아온 ‘내 누님 이야기’ -
윤승원 수필문학인, 전 대전수필문학회장
‘한번 경찰은 영원한 경찰’이라는 말이 있다. 그런 표현이 맞는 말이라면 ‘한번 경찰 아내는 영원한 경찰 아내’라는 말도 성립한다. 바로 내 누님을 두고 하는 말이다.
내 누님은 남편이 말단 경찰공무원 시절 구멍가게를 하면서 억척스럽게 살아온 경찰관 아내였다. 지금은 ‘전직 경찰관 아내’로 살아간다. 칠십 대 후반 연세이니, ‘경찰관 아내’로 살아온 지도 반세기가 넘었다.
과거 초임 시절 파출소에서 근무할 때였다. 직원들 잔심부름도 해주고, 본서 문서수발도 하는 여학생이 있었다. 집안이 가난하여 야간학교에 다니면서 파출소 아르바이트를 하는 여고생이었다. 이 여학생이 파출소에서 3년 넘게 지내자, ‘신임 순경보다 낫다’는 말이 나왔다.
눈치도 빨랐다. 경찰관들이 정신없이 바쁠 땐 경비 전화도 받아주고, 민원인 응대도 제법 경찰관처럼 친절하게 잘 했다. 서당 개 삼 년이면 풍월을 읊는다던가. 앳된 여학생이 ‘파출소 알바’ 삼 년이 넘으니까, 단순한 민원서류 처리는 물론, 신고 사건 처리 요령까지 터득하게 됐다. 명석한 두뇌에다가 재기 발랄한 여학생이었다.
가정에서 ‘경찰관 아내’도 마찬가지이다. 어디서 전화가 걸려오면 10중 8~9는 민원성이 내포된 전화다. 남편이 경찰관이면 경찰관 아내도 본서 민원실장(?) 정도의 ‘어깨너머 법률 상식’을 가진다.
집으로 걸려오는 전화 중 걸핏하면 지인들이 교통사고를 당했다거나 어쩌다 경찰관서 찾을 일이 생기더라도 ‘경찰관 아내’로부터 예비지식을 얻으려고 한다. 하지만 현명한 경찰관 아내는 ‘해결사’가 아님을 잘 안다. 일가친척이나 지인들이 사건 사고를 당하면 우선 ‘순사네 집’이라고 해서 ‘어떻게 하면 좋으냐?’고 물어온다.
이때 경찰관 아내는 상대가 서운하지 않게 원만하면서도 슬기로운 답을 내놔야 한다. 가장 무난한 답은 (내 일처럼 걱정하고 위로해 주면서) “제가 뭐, 법을 아나요. ○○아빠에게 물어봐야죠.”이다. ‘파출소 알바 여고생’처럼 친절하고 상냥하게, 그러나 남편 역할을 ‘월권’하지는 않는다.
경찰관 아내로 살아온 세월의 무게는 가볍지 않다. 값진 인생철학과 노하우가 담긴 경험법칙도 몸에 뱄다. 경찰관 아내는 동네 골목에 나가서도 ‘입조심’한다. 이웃 아주머니들과 대화할 때도 끼어들어도 좋을지, 슬쩍 자리를 피해야 할 자리인지 옥석을 가릴 줄 안다.
경찰관 아내가 한마디라도 거들면 남들은 “경찰관 부인이 이런 말을 했어.”라고 옮긴다. 마치 경찰관 아내가 한 말은 경찰관이 직무상 책임성 있게 한 말처럼 ‘정보력을 신뢰’하는 주민도 있기 마련이다.
‘경찰관 아내의 생활덕목’이란 무슨 윤리 교과서에 나와 있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곁에서 지켜본 내 누님은 몇 가지 기본적인 ‘덕목’을 지켜왔다.
첫째, 경제적인 자립이다. 생활 형편이 넉넉지 않은 박봉의 경찰공무원 아내로서 여러 시동생까지 보살피려면 알뜰하고 검소해야 한다. 사치 부리지 않고 근검절약해야 한다.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박봉의 경찰관 남편 봉급봉투만 바라볼 수는 없었다. 일거리를 찾아야 했다. 누님은 채소 팔고, 생선 팔고, 곡식도 파는 구멍가게를 운영했다. 집안 살림에 한 푼이라도 보태려고 안간힘을 썼다.
둘째, 매사 조바심치지 말아야 한다. 마음의 여유를 가져야 한다. 특히 경찰관 아내는 비상출동이 잦은 경찰관 남편의 특성을 잘 이해해야 한다. 긴장과 초조와 걱정에서 벗어나려면 ‘뜨개질’이 최고의 방법이다.
[삽화] 경찰관 아내(일러스트 이정운)
남편은 더구나 언제 귀가할지 모르는 수사과 형사다. 틈만 나면 뜨개질을 했다. 방안 선반에 온갖 색상의 털실을 쌓아놓고, 뜨개바늘로 ‘남편의 기다림’을 한 코, 두 코 작품처럼 승화시켰다.
내 누님뿐만이 아니다. 일선 경찰관 아내들이 유독 뜨개질을 잘하는 이유가 있다. 최루탄과 돌멩이가 난무하는 직무현장에서 집에 일찍 들어오지 못하는 경찰관 남편을 기다리며 스웨터며, 털장갑을 밤새워 뜬 것이다. 이렇게 검소하고 심성 착한 경찰관 아내의 따뜻한 정과 사랑을 가슴으로 느끼는 경찰관들은 밖에서 아내 모르게 실망스러운 일을 하지 못한다.
경찰관 아내로 살아간다는 것, 남모르는 인내와 눈물이 배어 있다. 삶의 바탕에는 엄격한 인격 수양도 깔려있다.
몇 해 전에 <지기추상 대인춘풍(持己秋霜 待人春風)>이란 칼럼을 쓴 적이 있다. 법을 다루거나 국정을 운영하는 고위 공직자들이 즐겨 쓰는 좌우명이다. 채근담에 나오는 문구로,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는 가을 서릿발같이 엄격해야 하지만 남들을 대함에는 봄바람같이 따뜻하고 부드럽게 하라’는 뜻이다.
좌우명이란 ‘자기관리 철학’이다. 평소 가슴 속에 모시고 살아가는 ‘스승’이다. 어디 반듯한 처신이 요구되는 현직 경찰관뿐이랴. 이제는 전직 경찰관 아내인 내 누님도 이런 좌우명 하나 가슴에 품고 살아왔다.
남편도 경찰관, 동생도 경찰관이었고, 딸도 현직 경찰관이다. 사위 역시 경찰대 출신으로 경찰서장까지 지냈다. 그야말로 ‘경찰가족’으로서 온갖 세상 풍파 다 겪은 내 누님은 경찰관이었던 남편이나 동생보다도 더 엄격한 <지기추상 대인춘풍>을 ‘내조의 생활 철학’으로 삼았다.
경찰관 아내로서의 ‘내조’는 거창한 데 있지 않다. 남편이 공직 수행하면서 집안 걱정하지 않게 자녀 잘 키우고 살림 잘하는 게 최상의 내조다. 또 어려운 살림살이에 시동생까지 보살피며 억척스럽게 살아오지 않았으면 오늘의 행복이 어찌 가능하겠는가. 팔순을 바라보는 내 누님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이유이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 내 누님은 언제나 밝은 표정으로 젊게 살고자 노력한다. 그런 편안한 성품과 ‘어머니 닮은 미모(?)’ 덕일까. 최근에는 유명 백화점에서 선발한 ‘시니어 패션모델’로 뽑혔다.
▲ [사진] 어머니(좌측) 닮은 누님(우측)
▲ [사진] 유명 백화점에서 <시니어 패션모델>로 뽑힌 누님
뜻하지 않게 ‘패션모델’로 선발돼 고급 옷 한 벌 상품으로 얻어 입었다고 좋아하는 알뜰 주부 할머니!
그러고 보면 근검절약하면서 알뜰하게 살아온 내 누님으로부터 한평생 따뜻한 내조를 받고 살아온 ‘경찰관 남편’만큼 복 받은 분도 없다는 생각이 든다. ♥
2021.08.03.
동생 윤승원 記
첫댓글 ※ 페이스북 댓글
◆ 조용연(작가, 전 충남경찰청장) 2021.08.03. 19:50
이쯤 되어야 진정한 ‘경찰가족’이라 할 수 있겠지요.
아니 장천 윤승원 작가님의 누님처럼 살아온 역정이 있어야
경찰 가족의 자격을 갖춘 것이겠지요.
그것도 지사적인 가풍과 헌신의 대물림 속에서 맺은
경찰인의 성공사례라 칭찬받아 마땅합니다.
그럼요. 이 시대에 가장 비싼 것은 진실이며, 진실만이 감동을 주는 것이지요.
아무리 AI가 발달해도 결국은 사람입니다.
'진실한 사람'의 그 무엇, 목젖까지 떨게 하는 그 무엇!
▲ 답글 / 윤승원 2021.08.03. 20:00
동생이 누님 자랑하는 것은 조금 과해도 흉이 아니겠지요? 이런 글을 쓰면서 죄송스러운 것은 누님의 헌신적인 삶을 언급하면서 필력이 부족하여 만분의 일도 표현하지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구멍가게 채소 장사하시던 누님이 팔순을 바라보는 연세에 유명백화점 시니어 팻션 모델에 선발되다니 동생이 아무리 숨기고 싶어도 도저히 숨기기 어려운 <사건>이었습니다. 조용연 작가님이 제 심정을 그리 따뜻하게 이해해 주시니 감동의 물결이 파도처럼 밀려옵니다.
◆ MyoungSun Kim(시인, ‘한국문학시대’ 발행인) 2021.08.03.
경찰 가족의 시원이시군요.
경찰보다 순사라는 말이 친근감 있어 좋아요.
巡査 돌아다니며 민중의 삶을 보살피는 사람.
그야말로 민중의 지팡이지요.
저의 숙부께서도 순경이셨어요.
사람 잡아가는 사람이 아닌 사람을 지켜주는 사람.
참 어렵고 힘든 일을 하는 봉사자입니다.
이제 아들 같은 젊은 경찰들 불편하지 않게
살려고 합니다.
모든 경찰 가족 여러분에게 평화와 행복을 빕니다.
▲답글 / 윤승원 2021.08.03.
김 회장님께서도 그러고 보면 ‘순사가족’이시군요. 순사라는 말이 본래 좋은 뜻인데 일제 치하의 순사 악명 때문에 자유민주주의 선량한 대한민국 경찰이 억울하게 이미지 손상을 입은 측면이 있습니다. 국민의 생명과 재산 보호를 위해 지금 이 시간에도 불철주야 고생하는 경찰관들에게 김 시인님의 따뜻한 격려는 큰 위로와 힘이 될 것입니다. 고맙습니다.
※ 대전수필문학회 댓글
◆ 이남천(교육자, 수필가) 2021.08.03 22:21
윤승원 선생님!
우리 사회의 전통적이며 전형적인 모범 가정담,
밝고 가벼운 마음으로 잘 읽었습니다.
연세보다 한창 젊어 보이시는 누님!
외모는 곧 내면의 표상.
곱고 아름다운 그 마음이 오늘의 아름다운 가정을 가꾸셨겠습니다
고생으로 초대해 온 행복, 오래도록 누리시길 기원합니다.
▲ 윤승원 2021.08.04. 02:44
누님의 고생스럽고 힘들었던 세월의 한 단면을 동생인 제가 글로 써서 이남천 작가님으로부터 넘치는 찬사를 듣습니다. 이 세상에 단 한 분뿐인 저의 누님은 제게 어머니 같으신 분입니다. 노년에 가장 가까이에서 허물없이 살아가는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유일한 동기간입니다. 이남천 선생님 귀한 댓글을 누님께도 전하면 부끄러워하면서도 감사의 눈물 흘리실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장천 선생! 누님의 오늘의 영광은 '노익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말은 일반적으로는 신체의 건강에 쓰입니다. 그러나 정신과 활동이
지난 날의 생을 바탕으로 더욱 성숙할 때에도 쓸 수는 있는 말은 아닐까요? 누님의 일생을 요약해서 짚어 주신 점 많은 사람에게 귀감이 될 것입니다.
경찰들에게는 명예로운 일화로 읽힐 것이고 직업의 자긍심을 갖기에 아주 값진 글입니다.
누님과 어머님의 사진에서 얼굴에 띤 미소는 마치 서산마애불을 백제인의 미소라고 칭하는 데 이와 비슷한 감을 느꼈고, 서양의 모나리자의
미소와도 같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앞으로 더욱 즐거운 일이 있을 것이라는 예감을 가집니다.
감사합니다. 경찰가족 파이팅! 전국의 경찰 파이팅을 외치며 응원하고 싶습니다.
<서산 마애불의 백제의 미소>라는 표현이라든가 <서양의 모나리자 미소>라는 표현은 어디서 쉽게 들을 수 없는 과분한 찬사입니다. 한평생 동서양의 역사를 연구하시고 가르쳐 오신 정 박사님만이 들려주실 수 있는 최상 최고 칭찬의 말씀입니다.
젊어서 고생 많이 한 사람이 몸도 쉽게 늙는다고 하는데 저의 누님은 힘든 일도 많이 겪으시면서 정신력으로 잘 이겨내셔서 그런지 표정이 늘 밝습니다. 온화한 성품이나 자애로운 얼굴 표정이 어머니를 꼭 닮아 그렇다고 제가 말씀드렸더니, 누님은 눈물을 흘리시면서 "어머님 감사합니다. 너무 보고 싶어요. 요즘 부쩍 어머니 그리움에 눈물 흘리는 날이 많아요." 하시더군요.
정 박사님 따뜻한 격려 말씀 누님께도 전해 드리면 또 한번 크게 감사와 기쁨의 눈물 흘리실 것만 같습니다. 고맙습니다.
아름다운 이야기와 아름다운 영상들입니다.
어찌 그 아름다움을 필설로 다할 수가 있겠습니까.
아름다움은 그 자체로 아름다운 것이니 문자그대로 언어도단의 경지라고나 할까요?
'書不盡言 言不盡意'라고한 성인의 말씀이 떠오릅니다. --분당에서 청계산
전국 150만 전 현직 경찰인과 경찰가족들이 애독하는 <警友新聞>청탁으로 칼럼과 에세이를 쓰고 있습니다. 이 신문에 매달 글을 쓰려니, 힘들고 고생스러웠던 과거 일들이 수없이 떠올라 어느 것은 한숨짓게 하고 어느 것은 눈물짓게 합니다. 이번 달엔 경찰관 아내였던 저의 누님을 주인공으로 글을 쓰자니 존경하는 지교헌 박사님 귀한 말씀처럼 필설로 다 형언하기 어렵습니다. '젊어서 고생해 봐야 노년에 얘깃거리가 풍부하다'는 말을 <동서양의 명언집>에서 본 적이 있습니다. 요즘 누님과 전화 통화로 지난 세월을 추억하면서 울고 웃는 일이 많습니다. 지교헌 박사님, 사랑이 넘치는 과분한 격려 말씀 감사합니다.
"누님과 함께 지난 세월을 추억하면서 울고 웃는다"는 글이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자당님과 누님의 아름다운 자태처럼 장천선생의 글도 아름답기만 합니다.
아름다움은 곧 진실이며 행복이며 삶의 보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교헌)
지 박사님 따뜻한 격려 말씀에 감동합니다.
누님께서도 지 박사님 댓글을 보고 계시니
감동하시리라 믿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