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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홍익대총동문산악회 원문보기 글쓴이: 선경나라
우리나라 시인들이 가장 좋아하고,
가장 큰 영향을 받은 시집은 무엇일까?
2012년 한 문학잡지에서 시인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 결과에 따르면, 1위는 백석의 시집 《사슴》.
25살때 백석은 1936년 1월 시집 《사슴》을 100부 발간
워낙 적은 한정판 부수라 당시에도 희귀본이었는데,
신경림 시인은 대학시절 청계천 고서점에서 발견했을 때
느낀 환희를 이렇게 고백했다. “나는 아직도 《사슴》을 처음
읽던 흥분을 잊지 못하고 있다. 실린 시는 40편이 못되었지만
그 감동은 열 권 장편소설을 읽은 것보다도 더 컸다는 느낌이다.
나는 읽고 또 읽었다.
저녁밥도 반 사발밖에 먹지
못했으며 밤도 꼬박 새웠다.
그 뒤 《사슴》을 가방에 넣고 다니며
틈나는 대로 꺼내 읽고는 했으니, 실상 그것은
내가 시를 공부하는 데 교과서가 되었던 셈이다.”
그런가 하면 끝내 백석의 시집을 구하지 못해
손수 필사본을 만들어 밑줄까지 그어가며 탐독했고
‘그림 같다’, ‘걸작이다’ 등의 메모를 남긴 대학생 윤동주.
백석과 윤동주, 이름만으로도 벅찬,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시인들이죠.
그런데
우연의 일치일까.
백석과 윤동주의 시에는
공통으로 등장하는.,인물.
- 백석, 〈흰 바람벽이 있어〉 중에서하늘이 이 세상을 내일 적에 그가 가장 귀해하고
사랑하는 것들을 모두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그리고 언제나 넘치는 사랑과 슬픔 속에 살도록 만드신 것이다.
초생달과 바구지 꽃과짝새와 당나귀가 그러하듯이
그리고 또 ‘프랑시스 쨈’과 ‘도연명’과
‘라이넬 마리아 릴케’가 그러하듯이
- 윤동주, 〈별 헤는 밤〉 중에서어머님, 나는 별 하나에 아름다운 말
한마디씩 불러봅니다.
소학교 때 책상을 같이했던
아이들의 이름과, 패, 경, 옥
이런 이국 소녀들의 이름과,
벌써 애기 어머니 된 계집애들의 이름과,
가난한 이웃 사람들의 이름과,
비둘기, 강아지, 토끼, 노새, 노루, 프랑시스 짬,
라이넬 마리아 릴케 이런 시인의 이름을
불러봅니다.
제가 가지고 있는 윤동주의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는
1982년도 출판본입니다.
그리고 1,800원이었네요.
인터넷에서 검색해도 될 일이지만
굳이 이 옛날 옛적의 시집을 찾아 꺼내든 까닭은
인터넷 구절이 어쩐지 원본과 다른 것 같아서였습니다.
그리고 역시나, 달랐습니다.
어느 부분이냐 하면, ‘프랑시스 짬’과
‘라이넬 마리아 릴케’입니다. 이 부분을
‘프랑시스 잠’, ‘라이너 마리아 릴케’로 바꾸었더군요.
누군가는 그냥 ‘이름’일 뿐이잖아, 할지 모르지만
개인적으로 획 하나도 손대지 않는 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설령 그것이 오타라고 할지라도 말이지요. 백석과 윤동주가
불렀던 이름 그대로 불러보고 싶고, 백석과 윤동주가 썼던
대로 읽고 싶어서입니다. 흥미롭게도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경우에는 두 시인 모두 ‘라이넬 마리아 릴케’라고 불렀으나
프랑시스 잠에 대해서는 각각 다르게 불렀습니다.
백석은 ‘쨈’으로,
윤동주는 ‘잼’으로 말이지요.
백석과 윤동주는 일본어로 번역된 릴케와
쨈, 혹은 잼의 시집을 곶감 빼먹듯 두고두고 아껴
읽으며 시를 향한 꿈과 사랑을 키웠을 것입니다.
백석과 윤동주에게
서울은 타향이었습니다.
백석은 평안북도 정주,
윤동주는 만주 간도가
태어나고 자란 고향이지요.
먼 북쪽에 고향을 둔 둘은
1930년대에 같은 서울 하늘 아래
살기도 했지만 교류를 나눴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윤동주보다 다섯 살 위인 백석은
이미 유명한 시인이었고, 윤동주는
백석의 열렬한 팬이었습니다. 그러나
백석이 1940년에 만주로 떠나면서 인연이
이어질 기회는 영영 사라졌습니다.
그 후 두 사람의 운명이 일제의 식민통치와
남북분단의 비극 속에서 어떻게 희생됐는지는
잘 알려진 대로입니다. 이 시대에 남은 독자로서
두 시인의 시에 프랑시스 잠과 마리아 라이너 릴케가
똑같이 등장하는 구절을 읽으며 이처럼 닮은 취향을 가진
둘이 만났더라면 서로 얼마나 좋아했을까, 하루가 멀다 하고
무릎을 맞대고 마주 앉아 하늘과 바람과 별과 꽃과 당나귀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었을 텐데, 하는 슬픔을 느낄 뿐입니다.
백석이 프랑시스 잠을
어떻게 생각했는지에 대해서는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오랫동안
‘북한의 시인’으로 억류됐던 영향이 크겠지요.
대신 윤동주가 잠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했는지는 잘 알려져 있습니다.
그의 북간도 친구였던 문익환
목사의 회고 덕분입니다. 문익환 목사는
윤동주가 연희전문대학 시절에 잠의 시집을
소중하게 간직하고 읽었노라 하면서 시집의 이름까지
정확하게 기억해냈는데 바로, 《밤의 노래》입니다.
이 시집은 나중에 《새벽의 삼종에서 저녁의 삼종까지》
라는 제목으로 재출간됐는데 서문에 이런 글이 있습니다.
나는 지금 장난꾸러기들의 조롱을 받으며 고개를 숙이는,
무거운 짐을 진 당나귀처럼 길을 가고 있습니다.
당신이 원하시는 때에, 당신이 원하시는 곳으로
나는 가겠나이다. 삼종(三鐘)의 종소리가 웁니다.
백석이 나타샤와 함께 그토록 사랑한
‘흰 당나귀’가 어떤 당나귀인지 투명하게
그려지지요. 프랑시스 잠의 삶이
그런 당나귀와 같았습니다.
그는 19세기 말에서 1918년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전까지 이어진 ‘벨 에포크
(belle époque)’의 시인입니다.
경제적으로 풍요로웠고 일상은 화려했으며
미술과 음악, 문학이 활짝 피어나 훗날의 사람들은
그 시절을 ‘아름다운 시절’이라고 불렀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오히려 공허하고 불안했습니다.
그러나 잠은 이 모든 것에 흔들림이 없었습니다.
파리의 풍요로움과 화려함으로부터는 물론,
공허와 불안으로부터도 등을 돌려 평생 피레네
산맥 근처에 은거하며 단순하고 현실적인 삶,
자연과 종교에 뿌리를 둔 시를 썼습니다.
그 덕에 잠의 시는 군더더기 없이 정갈하며 다정합니다.
무엇보다 우리에게는 서양의 시를 읽을 때면 쉬이 느끼는
난해함 없이 친숙하게 다가옵니다.
일상으로부터 소재를 끌어온 덕입니다.
특히 〈식당〉이라는 시는 그냥 우리 시라고 해도
믿길 정도로 친숙해서 윤동주가 왜 ‘짬’의 시는 구수해서
좋다고 했는지 알 수 있는데요. 어느 늦은 오후, 석양이
비쳐드는 방 안에서 아무 소리도 내지 않고 고즈넉하게
앉아 천천히, 아주 천천히 세월의 태엽을 뒤로 돌려봅니다.
새삼 오랜 세월 내 곁에 말없이 있어준 사물들이 눈에 들어옵니다.
우리 집 식당에는 윤이 날 듯 말 듯한 장롱이 하나 있는데,
그건 우리 대고모들의 목소리도 들었고, 우리 할아버지의
목소리도 들었고 우리 아버지의 목소리도 들은 것이다
그들의 추억을 언제나 간직하고 있는 장롱
그게 암 말도 안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잘못이다
그건 나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으니까
거기엔 또 나무로 된뻐꾸기시계도 하나 있는데,
왜 그런지 소리가 나지 않는다난 그것에 그 까닭을 물으려 하지 않는다
아마 부서져버린 거겠지
태엽 속의 그 소리도
그냥 우리 돌아가신어르신네들의 목소리처럼
또 거기엔 밀랍 냄새와잼 냄새, 고기 냄새와 빵 냄새
그리고 다 익은 배 냄새가 나는
오래된 찬장도 하나 있는데, 그건
우리한테 아무것도 훔치지 말아야 한다는것을 알고 있는 충직한 하인이다
우리 집에 많은 남자들이, 여자들이
왔지만, 아무도 이 조그만 영혼들이 있음을 믿는 사람은
없었다. 그래 나는 빙그레 웃는 것이다
방문객이 우리 집에 들어오며, 거기에 살고 있는 것이
나 혼자인 듯 이렇게 말할 때에는
— 안녕하신지요, 잠 씨?
이 시를 처음 읽었을 때 떠오른 것은
어머니 방에 있는 30여 년 된 장롱처럼
오래된 사물이 아니라 역설적이게도 어느 날
잃어버린, 잃어버렸는지도 모르고
잃어버린 물건과 기억이었습니다.
가졌을 때는
이렇게 쉽게 잃어버릴 줄,
잊어버릴 줄 몰랐던 것들 말입니다.
그와 같은 사물,
그와 같은 기억이
우리에게 얼마나 많을까요.
잠은 놓치지 않았습니다.
이런 프랑시스 잠을,
백석과 윤동주가 좋아한 또 다른
시인 라이너 마리아 릴케도 좋아했습니다.
릴케의 유일한 장편 소설 《말테의 수기》에는
덴마크 귀족 출신의 젊은 무명 시인 말테가 파리의
국립도서관에서 한 행복한 시인의 생활을 접하고 그 시인처럼
글을 써봐야겠다고 다짐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 행복한 시인이 프랑시스 잠이었습니다.
그러나 말테의 생활은 파리라는 화려한
도시에서 불안과 소외로 비참하기만 했지요.
이런 말테를, 아니, 릴케를 일으켜 세운
또 한 명의 예술가가 있었습니다.
바로 오귀스트 로댕입니다.
둘의 인연은 1902년,
릴케가 출판사의 의뢰를 받아
로댕의 평전을 쓰면서 시작됐습니다.
1905년부터 이듬해까지는 로댕의 비서로 일했지요.
로댕은 릴케에게 사물과 새로운 관계를 만드는 데 있어
‘바라보기’가 얼마나 중요한지 일깨워줬는데, 그것은
시각적인 관찰뿐 아니라 미학적 성찰까지 아우른 것이었습니다.
릴케가 《말테의 수기》에 쓴 구절이 있습니다
- 릴케, 《말테의 수기》 중에서
시를 쓰기 위해서는 때가 오기까지 기다려야 하고
한평생, 되도록이면 오랫동안, 의미(意味)와
감미(甘味)를 모아야 한다. 그러면 아주 마지막에
열 줄의 성공한 시행을 쓸 수 있을 거다. 시란 사람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감정이 아니라 경험이기 때문이다.
릴케의 문학론이자 예술가의 기본 자세라고
할 수 있을 이런 깨우침은 로댕으로부터 온 것으로 보입니다.
그보다 전에 로댕에 대해 이런 글을 남겼기 때문입니다.
돈의 필요에 쫓겨 하찮은 일이라도
해야 했던 시절에도 로댕은 자신을
잃은 법이 없었다. 왜냐하면, 그가
체험한 일이 언제까지나 계획만으로
머무는 적은 없었으며, 낮에 하고 싶다고
생각한 것은 그날 밤 안에 곧장 실행으로
옮겼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서 모든 것은
끊임없이 실현되었던 것이다. 중요한 것은
언제까지나 꿈만 꾸거나 계획과 기분에 젖어
멈추어 있지 말고 항상 모든 것을 무리하게라도
‘물(物)’로 이입하는 일이다. 로댕이 그렇게 했듯이.
로댕과 릴케가 천재이기 전에
얼마나 대단한 노력가였는지
깨닫게 해주는 글이지요.
로댕은 릴케가 예술가로서
힘든 순간에는 어떻게 하는 것이
좋으냐고 조언을 구했을 때도 끊임없이
일을 해야 한다고 말했던 인물입니다. 그러나
제아무리 철인 로댕이라 해도 한 순간도 멈추지 않는
삶이 힘들지 않았을 리 없습니다. 로댕이 릴케를 만났을 때가
60대, 릴케에게 매일 해준 말이 있다고 합니다.
바로 “힘내라고!”였습니다.
‘힘내라고!’ 밤에 헤어질 때,
아주 좋은 이야기를 나누었을 때에도
아무 관련 없이, 로댕은 곧잘 내게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알고 있었던 겁니다.
젊었을 때, 얼마나 이 말이 매일처럼 필요한 것인가를.
두 사람의 그 장면을
상상할 때마다 가슴이 뭉클합니다.
젊은 시절에 로댕이 얼마나 힘들었는지,
그러나 곁에 그렇게 말해주는 사람이
없었던 것 같아서입니다. 그래서 젊은 날의
자신에게 필요했던 것을 젊은 시인 릴케에게
주었을 것입니다. “힘내라고!”는 격려의 말이지요.
그리고 그 기운이 릴케에게로,
또 릴케에서 백석과 윤동주에게로
전해졌을 것입니다. 로댕의 묵직하고
따뜻한 두 손이 어깨를 쓰다듬는 것 같은
이 말을 당신에게도 전합니다. “힘내라고!”
백석
자야
백석!
그대를
사랑할
수 있어
행복했습니다.
- 자야 -
밤이 깊었습니다.
병실의 밤이 고즈넉합니다.
백석! 그대 이름을 또다시 불러봅니다.
세상은 저를 ‘백석의 애인 자야’라고 부릅니다.
제 나이 어느덧 여든셋,
이번에는 걸어서 퇴원하지 못할 것 같습니다.
깊어가는 이 밤에 그대와의 추억을 더듬어봅니다.
제가 그대를
처음 만난 것은
1936년 가을,
함흥에서였지요.
저는 그때 스물두 살 꽃다운 나이였고
그대는 스물여섯 한창 나이였습니다.
그대는 시집 「사슴」을 낸 그해,
조선일보사 기자직을 그만두고
함경남도 함흥시의 영생고보
영어교사로 와 있었습니다.
그대는
평북 정주군 갈산면
익성동에서 난 촌사람인데
2년여의 서울생활에 지쳐
있었던 것 같습니다.
영생고보에 있던 문학평론가
백철 씨가 같이 있자며 불렀고,
그대는 머리나 식힐 생각으로
함흥으로 왔던 것이지요.
일본 청산학원 영문과를
우등으로 졸업한 실력에
서울서 시집을 낸 유명한
시인이라 영생고보에서 아주
인기 있는 선생님이었습니다.
저는 서울 관철동에서 태어나
일찍 부친을 여의고 할머니와
홀어머니 슬하에서 자랐습니다.
금광을 한다는 친척에서 속아 집안이 망하자
1932년 조선 권번에 들어가 기생이 되었습니다.
한국 정악계의 대부였던
금하 하규일 선생의 지도를 받아
여창가곡과 궁중무 등 가무의 명인으로 성장했지요.
1935년 조선어학회 회원이던
신윤국 선생의 후원으로 일본에
가서 공부를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신선생이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함흥형무소에 투옥되자 면회 차 귀국하여
함흥에 잠시 머물러 있었습니다.
처음 만난 자리에서
저를 옆에 와서 앉으라고 한 그대는
술잔을 꼭 제게만 권하면서 관심을 보이셨습니다.
자리가 파해 헤어지면서 그대는
제게 오늘부터 당신은 내 마누라요“
라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그 말이
진심이라고 어찌 생각했겠습니까.
그날 이후 그대는
제가 사는 하숙집에
수시로 찾아오셨습니다.
그때마다
만주에 가서 함께
살자고 하셨지요.
그 말씀 또한
진심임을 그때는
알 도리가 없었습니다.
제 손목을 들여다보며
“어이구, 요런 손목을 하고
그 바람 찬 만주 땅에
어찌 가서 살겠나”하셨지요.
저는 기생이었기에
그대의 숨겨놓은 애인은
될 수 있을지언정 부인은
될 수 없었습니다. 우리의 운명은
여기서 이미 결정이 나 있었던 게지요.
그대는 제가 선물한
「당시선집」에 나오는
이백의 「자야오가(子夜吳歌)를
읽고 저를 ‘자야’라고 부르셨지요.
그때부터 저의 본명 김영한은 사라지고
그대의 자야로 다시 태어나게 되었습니다.
서울에 사시던
그대의 부모님께서는
장가를 가라고 성화셨습니다.
쉰이 넘은 어머니는 손자를 보고 싶다고 조바심을 내셨고,
친척들도 한 집안의 장남이 객지를 떠도는 모습이
보기 안 좋다며 번갈아가며 충고하셨지요.
저 역시도 속마음은 그렇지 않았지만,
좋은 배필을 만나야지 기생 치마폭을 잡고
있으면 되겠느냐고 성혼을 부추기곤 했습니다.
그 다음해 그대는 집에 다녀오셨지요.
혼례를 치르러 가신 것입니다.
혼례를 치른 뒤 사흘 만에 달아나듯이
집을 나와 함흥으로 오셨지만 저는 물러날 때가
되었음을 알고 보따리를 싸서 서울로 왔습니다.
1938년 봄이었습니다.
청진동에 작은 집을 구해
기예를 닦고 있었는데 하루는
웬 아이가 쪽지를 들고 찾아왔습니다.
몇 달 만에 이렇게 찾아온 사람을
허물하지 마시고 나 있는 데로 속히 와주시오.
그대가 전한 쪽지였습니다. 그대를 향한 애타는 마음과
서운함 사이에서 고민을 하다 속마음을 따르기로 하고
한걸음에 달려갔지요. 그대를 보는 순간,
모든 원망은 눈 녹듯이 사라졌습니다.
그때 저는 평생 그대를 사랑하며
살아갈 운명임을 깨달았습니다.
밤차로 함흥으로 떠나는 그대를 배웅하면서
저는 어떠한 상황이 닥칠지라도 그대를
평생 사랑하리라 굳게 결심했습니다.
얼마 뒤 영생고보 축구부 지도교사였던 그대는
전선(全鮮)고보 축구대회에 참가하러 선수들을
인솔해 다시 서울로 왔습니다. 선수들을 돌보지 않고
일주일 내내 저한테만 와 있던 것이 문제가 되어
영생여고보로 전보발령이 났지요.
선수들이 유흥장에 간 것이
합동단속 교사에 적발이 된 것입니다.
몇 달 뒤 그대는 사표를 써 우편으로
부치고는 다시 서울생활을 시작하셨습니다.
그대는 저와 청진동에다 아예 살림을 차리셨습니다.
마당 한 뼘 없는 작은 한옥이었지만 안방과 건넌방,
그리고 쪽마루가 딸린 작은 방이 있는
우리의 단란한 보금자리였습니다.
그대의 시 「남신의주유동박씨봉방」에 나오는
‘아내와 같이 살던 집’은 바로 이 집을 가리키는 것이지요.
그대에게 넥타이를 선물했더니
보는 사람마다 좋다고 하더라며
저녁 때 들어와서 몇 번이고 넥타이
잘 고른 제 안목을 칭찬해 주던 그대의
자상함이 잊혀지지 않습니다. 그대는
고기보다는 나물반찬을 좋아하셨지요.
그런 우리의 사이를
또 한 번 흔들어놓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대의 첫 부인은
아마도 크게 낙심한 채
친정으로 돌아갔을 것입니다.
저와의 살림살이를 알고 있던
그대 부모님께서 아들의 마음을
바로잡고자 새장가를 들이기로 하셨습니다.
1939년 6월이었지요.
그대는 충청도 진천으로
출장을 다녀오겠다고 했습니다.
‘아, 그쪽 사람과 혼인을 하러 가는구나.’
저는 짐작했습니다. 부모님 말씀에 절대적으로
복종해 온 그대인지라 부모님의 간청을 뿌리칠 수 없었을 테지요.
보름이 넘게 그대에게서 아무런 소식이 없었습니다.
저는 마음을 독하게 먹고는 짐을 싸 명륜동으로 이사를 했습니다.
두 달이 지난 어느 날이었습니다. 해가 뉘엿뉘엿 서산으로 넘어가는데,
집 뒤로 난 골목길에서 “자야”하고 부르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그대의 목소리임을 단번에 알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마음을 독하게 먹었건만 그대의 목소리에
제 마음은 ‘쿵’하고 내려앉는 듯했습니다.
한참을 망설이다가 얼굴이나 한번 뵙고,
그런 연후에 헤어지자는 말을 해야겠다는
생각에 황급히 나갔습니다. 그대는
석양을 등지고 서 계셨습니다.
그대의 퀭한 얼굴을 보는 순간
저의 마음은 또다시 그대를 향한
간절함으로 물들었습니다.
그대는 새색시를 버려두고
또다시 저한테 달려온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남의 눈을 의식해야 하는 이런
사랑이 오래 지속될 수는 없었습니다.
그대는 모든 것 다 버리고
만주로 가서 같이 살자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저는 차마 그렇게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해 말, 그대는 만주 신경(지금의 장춘)으로 가셨습니다.
그대를 붙잡지 못한 것이 천추의 한이 됩니다.
토마스 하디의 소설 「테스」를 번역하여
출간하고자 서울에 잠시 다녀간 것이 1940년이었고,
그 이후 그대는 남쪽으로 발걸음을 하지 않았습니다.
만주 안동으로 옮겨 세관업무를 보기도 했다지만,
함흥고보 제자가 찾아가보니 중년의 초라한 모습이었고
생활도 궁핍하게 보였다고 합니다.
38선에 철조망이 놓이고 전쟁이 일어나고,
그대의 소식은 더 이상 들려오지 않았습니다.
저는 해방 후 요정 대원각을 인수했습니다.
장안 최고 요정의 명성을 이어갔지만,
허전한 마음은 금할 길이 없었습니다.
그대는 월북시인이 아니었음에도
월북시인으로 간주되어 그대의 시가
읽히지 못한 세월이 참으로 길었지요.
이동순 시인의 노력으로
그대의 첫 전집이 나온 것이 1987년,
이때부터 저도 할 일이 생겼습니다.
시인 백석의 명예를 회복시키는 일에
이제는 제가 나서야겠다고 결심을 했습니다.
요정은 불교계에 기증하고
재산을 정리하여 2억원을
만들었습니다.
그 돈을 백석문학상 제정에 써달라고 기탁했습니다.
그래서 백석문학기념사업 운영위원회가 만들어졌고,
백석문학상이 제정되었습니다.
1990년에는 스승 하규일 선생의 일대기와
가곡악보를 채록한 「선가 하규일 선생 약전」을
제 힘으로 출간했습니다.
한낱 기생에 지나지 않는 저에게
남편으로서의 넘치는 사랑을 베풀어 주신 그대…….
그 은혜에 조금 보답했을 따름입니다.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습니다.
제 숨결 가운데 늘 함께하는 그대를 그리며,
제게 친필로 써주고 가신 그대의 시를 읊어봅니다.
자야 김영한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밤은 푹푹 눈이 내린다
나타샤를 사랑은 하고
눈은 푹푹 날리고
나는 혼자 쓸쓸히 앉아 소주를 마신다
소주를 마시며 생각한다
나타샤와 나는
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 당나귀를 타고
산골로 가자 출출이 우는 깊은 산골로 가 마가리에 살자
눈은 푹푹 나리고
나는 나타샤를 생각하고
나타샤가 아니 올 리 없다
언제 벌써 내속에 고조곤히 와 이야기한다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
눈은 푹푹 나리고
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
어데서 흰 당나귀도 오늘밤이 놓아서 응앙응앙 울을 것이다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백석 & 자야(김영한)
故 김영한 보살 공덕비
백석의 첫사랑.,란(박경련).
백석이 짝사랑 흠모했던.,연상의 유부녀 최정희.
백석에게 애정 어린 시를 선사한., 노천명. 모윤숙.
당대 여류시인들한테도 꽤나 인기 있었던.,시인 백석.
백석은 우리나라 최고의 ‘모던보이’로도 알려져 있는 시인.
조선일보에서 일하다 1935년 시집 ‘사슴’을 발간하며 등단.
방언을 사용하면서 향토적인 맛을 시에 잘 살린 것으로 유명.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
<통영(統營)>, <고향>
<북방(北方)에서>
<적막강산>
등.
.
누리꾼들은 백석의 젊은 시절 사진을 보고
“백석이 요즘 태어났다면 문단 '아이돌'이 되었을듯”,
“연예인을 해도 괜찮을 비주얼,,”,“와 진짜 잘생겼다” 반응들.
............백석(白石 :1912.7.1~1963(?).............
평북 정주 출생 시인이며 향토적인 서정의 세계를
사투리로 형상화한 시를 썼다. 대표작 <고향>, <사슴> 등.
어린시절 이야기를 북방 정서를 통해 시화(詩化). 본명 기행(夔行).
아버지의 영향으로 일찍부터 신식교육을 받았다.
1918년 오산소학교를 거쳐 오산중학교를 마치고
조선일보사 후원 장학생으로 일본 아오야마 학원
(靑山學院) 영문학 공부. 귀국하여 조선일보사 입사,
<여성>에서 편집 업무, 1935년 8월 조선일보에
<정주성 定州城>을 발표하면서 작품활동을 시작.
1936년 조선일보사를 그만두고
함흥 영생여자고등보통학교 교사.
만주 신징[新京]에 잠시 머물다가
만주 안둥[安東]으로 옮겨 세관 근무.
해방 후 고향 정주에 머물면서 글을 썼고,
6·25전쟁 이후에는 북한에 그대로 남았다.
민족주의 지도자 고당 조만식 비서를 지내며
솔료호프의 〈고요한 돈 강〉 등을 번역했다.
김일성종합대학에서 국문학을 강의했으며
6.25전쟁 중 중국에 머물다가 휴전 후 귀국하여
협동농장 현지파견 작가로 활동했다고 알려져 있다.
1936년에 펴낸 시집 〈사슴〉에 그의 시 대부분이 실려 있으며,
시 여승(女僧)에서 보이듯 외로움과 서러움의 정조를 바탕으로 했다.
〈여우 난 곬족〉(조광, 1935. 12)·〈고야 古夜〉(조광, 1936. 1)에서처럼
고향인 평안도의 지명이나 이웃의 이름, 그리고 무술(巫術)의 소재가 자주 등장.
정주 사투리를 그대로 썼는데, 이것은
이용악 시의 북방 정서에 나타나는 것처럼
일제강점기 모국어를 지키려는 의지를 보여준다.
〈사슴〉 이후에는 시집을 펴내지 못했으며 그뒤 발표한 시로는
〈통영 統營〉(조광, 1935. 12)·〈고향〉(삼천리문학, 1938. 4)·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 南新義州柳洞朴時逢方〉
(학풍, 1948. 10) 등 50여 편이 있다.
이후 남한에서 시집 〈백석 시전집〉(1987)과
〈흰 바람벽이 있어〉(1989) 등이 출간되었다.
...............................................................
국토 분단은 우리에게서 많은 것을 앗아간다.
한국 현대사에서 분단이야말로 한반도 사람들의
피할 수 없는 상처이며, 비극의 원체험인 것이다.
분단은 온갖 상실과 망각, 이산의 고통으로 덧나고,
다시 아물고, 덧난 상처의 자리이며 남북 분단으로 인해
대륙으로 나아가는 길을 끊어놓고, 그 결과 한반도에서의
삶을 고립 무원의 협소하고 남루한 것으로 만들어 버렸던 것.
대륙과 단절된 반도는 말 그대로
밖으로 열린 길이 끊겨버린 섬이다.
그 섬에서 잊혀진 시인이., 백석(白石)
백석은 1912년 7월 1일 평안북도 정주군 갈산면 익성동
수원 백씨 시박(時璞)과 단양 이씨 봉우(鳳宇) 사이의 장남.
그의 아버지 백시박은 당시로서는 드물게 사진 기술이 있던 이.
본명이 기행(夔行)인 백석은 오산고보를 다니는데,
학과목 중에서 문학과 영어에 관심과 소질을 보인다.
그는 오산고보를 나온 뒤
집안 사정으로 진학 못하고,
고향에서 책이나 읽으며 소일.
1929년 조선일보사 후원 장학생 선발
시험에 붙어 일본 아오야마학원 전문부
영어사범학과에 들어갔고 1930년 19 나이로
『조선일보』 신춘 문예에 응모해 당선되는데,
등단작은 시가 아닌 '그 모(母)와 아들' 단편소설.
1934년 아오야마학원 졸업과 함께
교원 검정시험에 합격한 백석은 귀국해
조선일보사 계열잡지 '여성' 편집을 맡는다.
그해 조선일보에 산문 '이설(耳說) 귀ㅅ소리'를 비롯
번역산문 '임종 체홉의 6월'· '죠이쓰와 애란(愛蘭) 문학',
1935년 조선일보에 단편 '마을의 유화(遺話)' 등을 발표한다.
초기 단편은 노쇠한 부부, 죽음, 삶의 어두운 일면.
그와 연관된 황량한 분위기로 채색된 것들이 많았다.
그런데 시 부문에서는 이러한 분위기가 거의 사라진다.
백석이 구체성을 특징으로 하는 소설보다
감정을 은폐할 수 있는 시(詩)로 전향한 것.
그가 시를 쓰게 된 동기나 이유는
창작 외 문단 활동을 꺼렸던 폐쇄성과,
집에 돌아와 늘 손과 얼굴을 씻은 결벽증.
그는 1935년 '조광'에
시 '정주성(定州城). 산지.
주막. 나와 지렝이. 비. 여우
난 곬족. 흰 밤. 등을 발표했다.
1936년 조광인쇄주식회사를 통해
펴낸 첫 시집 '사슴'은 우리 문학사에서
백석은 그의 독특한 시의 영역을 구축한다
백석이 신문사 번역일을 하는 틈틈이
준비한 초기작 33편을 담은 시집으로,
발간 뒤에 문단으로부터 호평을 받는다.
1937년 겨울, 백석은 2년간 근무했던
신문사 교정직을 버리고, 본격적으로
시를 쓰려고 산간마을 많은 함경도로 간다.
그는 이때의 전후 상황을
같은 해 9월 『조선일보』에
실린 산문 「가재미 · 나귀」
라는 글을 통해서 밝힌다.
여행을 즐기던 그는 이 무렵 여러 고장을 돌아다니며
고유의 민속, 명절, 향토 음식 같은 갖가지 풍물과 방언
등을 취재해 시에 담아낸다. 이러한 풍물과 방언들은 특히
「남행 시초(南行詩抄)」를 기점으로 이후 해마다 나오는
백석의 기행시 형식의 연작시에서 잘 표현된다.
이 밖에도 같은 해 백석은 『조선일보』와
『조광』과 『시와 소설』에 「통영(統營)」
「오리」 탕약(湯藥) 「연자ㅅ간」황일(黃日)
등을, 1937년 『조광』에 「함주 시초(咸州詩抄)」
연작시를, '여성'에 산문 '가을의 표정 ― 단풍'을 발표.
백석은 눈 덮인 함경도 산간 지방의
고적한 여인숙에서 '함주 시초'를 비롯한
여러 시편을 쓰면서도 가슴 한구석에 구멍이
난 것처럼., 자꾸 무엇인가 허전한 느낌이 든다.
두 해 전에 친구 허준의
결혼식 피로연에서 잠깐 본
이화여고 학생이었던., ‘란(蘭)’,
지난 가을 영생고보
선생들과의 회식 자리에서
곁에 앉았던.,기생 ‘자야(子夜)’,
영생고보 학내 분규로
퇴학당한 애제자 고순덕의
얼굴이 착잡하게 스쳐 지나간다.
...................
...................
1938년 백석은 영생고보 교사직을 사임하고
서울로 와서 다시 『여성』의 편집을 맡는다.
같은 해 <조광>에
연작시를 발표한다.
'산중음(山中吟)'
'물닭의 소리'
<삼천리문학>에
'석양' '고향' '절망'
<여성>에
'설문답' ·
'내가 생각하는 것은' ·
'가무래기의 약(藥)'·
'멧새 소리'
등을 발표.
<현대 문학 전집>에
'외가집'
'개'
<조선 문학 독본>에
'고성 가도(固城街道)'
'박각시 오는 저녁'
등을 수록한다.
이 무렵 백석은
동료기자 신현중에게
이끌려 란의 집을 찾는다.
란을 보는 순간 백석의 심장은 터질 듯 쿵쾅거리고, 혈관은 펄떡거린다.
백석은 자신의 마음을 사로잡은 란에게 끝내 좋아한다는 말을 하지 못한다.
그리고, 조선일보사에 재입사한 지 열 달 만에 그만두고 만주로 떠나버린다.
그는 떠나면서 소설가인 친구 허준과 화가 정현웅에게
“만주 넓은 벌판에서 시 1백 편을 건져오리라.”고 말한다.
1940년 1월 만주 신징(新京)에 도착한 백석은
먼저 시영 주택 황씨방(黃氏方)에 방을 얻는다.
곧 이어 친구들의 도움으로
만주국 경제부에 자리를 얻고
나중에 일본인들의 횡포에 못 이겨
그만둘 때까지 시작(詩作), 직장에 충실.
당시 친구와 함께 살던 황씨방은 토굴이나 마찬가지.
주말마다 근교 러시아인 마을로 방을 얻으러 다닌다.
이런 일로 북만주 오지 원시부족인들과 얼굴을 익히고,
밤이면 ‘시 백편’을 건지기 위해 시작(詩作)에 몰입한다.
1939년 조선일보에
산문 「입춘」과
연작시 「서행 시초(西行詩抄)」
시 「안동」을,
<문장>에
「함남도안(咸南道安)」 ·
「동뇨부(童尿腑)」
「넘언집 범 같은 노큰마니」
등을 내놓는다.
1940년
<문장>에
'목구(木具)'
'북방에서'
'허준(許俊)'
등을 발표.
백석은 서른 살도 되기 전에 한반도에서
가장 뛰어난 서정 시인으로 입지를 굳힌다.
그의 시는 발표될 때마다
화제를 낳고, 시가 실린 잡지는
책방에 나오기 무섭게 팔려나간다.
뒷날
백석의 명편
남신의주(南新義州)
유동(柳洞)
박시봉방(朴時逢方
등을 실은 잡지
<학풍(學風)>은
백석을 극찬한다.
“밤하늘의 별처럼
많은 시인들은 과연
얼마나 이 고고한 시인에
육박할 수 있으며, 또
능가할 수 있었더냐.".
백석은
같은 해
<인문평론>에
'수박씨 호박씨' 발표.
<조광사>에서
토머스 하디 원작
'테스'를 번역해 발간.
,
이듬해에는 생계를 위해 만주에서
측량 보조원과 측량 서기로 일한다.
그는
1941년
<문장>에
詩 「국수」
「흰 바람벽이 있어」 ·
「촌에서 온 아이」,
<인문평론>에
「사포나 이백(李白)같이」,
<조광>에
「귀농(歸農)」
등을 발표한다.
일제의 식민지 지배 정책이 강화되면서
그는 한곳에 머물지 못하고 떠돌며 산다.
“어느 사이에
나는 아내도 없고, 또,
아내와 같이
살던 집도 없어지고
그리고
살뜰한 부모며
동생들과도 멀리 떨어져서,
그 어느 바람 세인 쓸쓸한
거리 끝에 헤매이었다.
"이미 해는
늙고 달은 파리하고
바람은 미치고
보래구름만 혼자
넋없이 떠도는
것이다."
1942년 만주 안둥(安東)의 세관으로
직장을 옮긴 그는 '엔 패아코프' 원작
소설 「밀림 유정」을 번역한다.
한편, 그가 만주에 있는 동안
그의 동료 김소운은 백석의 시
'산우(山雨)' '미명계(未明界)'
등 7편 작품을 일본어로 옮겨
<조선 시집>에 싣는다.
1945년 해방 뒤 귀국한 백석은
신의주에서 얼마동안 머물다가
고향 정주로 간다.
1947년
<신천지>에
'적막 강산',
<신한민보>에
'산'을 발표하고,
1948년
<신세대>에
'마을은 맨천 구신이 돼서'
<학풍>에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
<문장>에
'칠월 백중'
등을 발표한다.
고향 정주에서 남북 분단을 맞게된 후
소련 시인 '이사고프스키' 서정시를 번역.
김일성 환영회에서
'장군 돌아오시다'라는
즉흥시를 낭송했다는 후문.
그 밖의 행적은
알려진 바 없다.
아무튼
시대의 격랑이 시인을 가만둘 리 없었을 터.
북한의 어느 문학 단체에도 가입하지 않은
그는 연금과 집필 금지 등 수난을 겪은 듯.
결국
북한문인
인명록에서
이름 삭제.
,
1963년 52세에 숨졌다는
소식이 일본에 알려질 뿐.
이렇게 1930년대
뛰어난 서정 시인은
남녘에서는 기피되고,
북녘에서는 금지된 채로
세인들로부터 잊혀져 간 것.
이 시기 ‘구인회’를 비롯한
모더니스트들의 서구적 취향과
달리 백석은 영문학을 전공한 시인.
또 다른 향토시인
김소월이 무색할 만큼
작품 속에 북녘 지방의
토속 방언들을 채워넣는다.
마가리, 개니빠디, 잠풍,
몽둥발이, 벌배, 열배, 매감탕,
토방돌, 아릇간, 홍게등, 텅납새,
무이징게국, 가즈랑집, 깽제미,
물구지우림, 둥글레우림, 광살구,
모랭이, 노나리꾼, 청밀, 냅일눈,
곱새담, 앙궁, 고뿔, 갑피기, 게사니,
울파주, 나주볕, 땃불, 밭최뚝, 마티,
양지귀·····고조곤히,
지중지중, 쇠리쇠리하야,
씨굴씨굴, 째듯하니, 자즈러붙어,
벅작궁, 고아내고,
너들씨는데, 오구작작,
살틀하던, 임내내는,
이즈막하야,
깨웃듬이,
홰즛하니······.
이처럼 이제는
거의 들을 수 없는,
들어도 무슨 말인지
가늠하기 힘든 북방 언어들.
백석의 현저한 토속어 지향의 시 세계는
얼과 넋을 황홀할 정도로 빼어나게 담아낸다.
백석은 표준어가 정착한 시기에 창작활동 문학인.
신문사 편집 일을 맡았던 그는
표준어와 방언의 차이를 알았을 것
따라서 그가 굳이 방언을 고집한 것은
작품 세계의 심화를 위한 것이라 보인다.
그가 구사한 방언은 용례가 매우 구체적이고
세밀해서 한국어의 질량을 한껏 느끼게 해준다.
아울러
백석 시의 방언 구사는
아이의 시각과 목소리로
이루어지는 특징을 지닌다.
'명절날
나는 엄매 아베 따라
우리집 개는 나를 따라
진할머니 진할아버지가
있는 큰집으로 가면
얼굴에 별자국이 솜솜난 말수와 같이 눈도 껌벅거리는
하루에 베 한필을 짠다는 벌하나 건너집엔 복숭아나무가
많은 신리(新里)고모 고모의 딸 이녀(李女) 작은 이녀(李女) /
열여섯에 사십(四十)이 넘은
홀아비의 후처가 된 포족족하니
성이 잘 나는 살빛이며 감탕 같은
입술과 젖꼭지는 더 까만
예수쟁이마을 가까이 사는
토산(土山)고모의 딸
승녀(承女)
아들 승(承)동이
육십리(六十里)라고 해서 파랗게 뵈이는
산(山)을 넘어 있다는 해변에서 과부가 된 코끝이 빨간
언제나 흰옷이 정하던 말 끝에 섧게 눈물을 짤 때가 많은
큰곬고모 고모의 딸 홍녀(洪女) 아들 홍(洪)동이 작은 홍(洪)동이/
배나무접을 잘 하는 주정을 하면
토방돌을 뽑는 오리치를 잘 놓는
먼 섬에 반디젓 담으러 가기를 좋아하는
삼촌 삼촌엄매 사촌누이 사촌동생들 //
이그득히들
할머니 할아버지가 있는
안간에들 모여서 방안에서는
새옷의 내음새가 나고 /
또 인절미 송구떡 콩가루차떡의
내음새도 나고 끼때의 두부와 콩나물과
뽁운 잔디와 고사리와 도야지비계는
모두 선득선득하니 찬것들이다. //
저녁술을 놓은 아이들은 외양간섶 밭마당에 달린 배나무 동산에서
쥐잡이를 하고 숨굴막질을 하고 꼬리잡이를 하고 가마타고 시집가는 놀음
말타고 장가가는 놀음을 하고 이렇게 밤이 어둡도록 북적하니 논다. /
밤이 깊어가는 집안엔
엄매는 엄매들끼리
아래간에서들 웃고 이야기하고
아이들은 아이들끼리
웃간 한방을 잡고 조아질하고
쌈방이 굴리고 바리깨돌림하고
호박떼기하고 제비손이구손이하고 이렇게
화디의 사기방등에 심지를 몇 번이나 돋구고
홍게닭이 몇 번이나 울어서 졸음이 오면
아랫목싸움 자리싸움을 하며
히드득거리다 잠이 든다.
그래서는 문창에 텅납새의 그림자가 치는 아침
시누이 동서들이 욱적하니 흥성거리는 부엌으론
샛문틈으로 장지문틈으로 무이징게국을 끓이는 맛있는
내음새가 올라오도록 잔다. 백석, 「여우 난 곬족」 전문,
<조광>
(1935. 12.) ―
시집 『사슴』
(1936)에 재수록
이 시의 화자는 명절날 어머니 아버지를 따라
할머니집에 가서 지낸 경험 세계를 그리고 있다.
또래의 아이들과 놀다가 잠이 드는 광경,
명절날의 분위기와 풍속 등에서 유년의 태도와
시각과 목소리가 뚜렷하게 드러나는 것이다.
방언은 고향의 언어이고 유년 시절에 습득한 언어다.
따라서 방언으로 표출되는 고향 마을의 풍물과 정취는
생생함을 불러일으키며, 유년의 목소리에 실린 방언은
한결 자연스럽고 친근감을 준다.
백석의 시 속에
나오는 평안도 방언을 비롯한
여러 가지 언어는 분명히 우리 나라의
어느 한구석에서 쓰이던 토속어가 틀림없다.
그럼에도 꿈결인듯
이와 같은 소리를 읊조리는
시인의 노래는 때로 영어나 불어
또는 이 세상 어떤 언어보다 귀에
익지 않고 낯설게 느껴지기도 한다.
한편, 그는 몇작품을 제외한 많은 작품에서
자신의 주관적 감정을 억누르는 절제를 발휘.
바로 이런 것이
백석을 모더니즘적
시인으로 불리게 하는,
그러면서도 다른 모더니즘
시인들과 구별하게 만드는 원인.
반도시(反都市) 산촌(山村) 성격은
백석의 시를 더욱 독특하게 보이도록 한다.
시집 <사슴>
총 33편 작품이
수록되어 있는데,
이 중에서 도시 문명
또는 도시 감각에 바탕을
둔 시는 한 편도 없다.
흔히 백석의 시에 나오는 시골은
비참하고 고통스러운 공간이 아니라
안온하고 풍요로운 전원으로 비친다.
이로 말미암아 그의 시는 현실과
동떨어진 것으로 비판되기도 한다.
그러나 가만히 들여다보면
이면에는 잃어버린 고향에 대한
슬픔과 그리움을 삭이려는 시인의
힘겨운 얼굴이 숨었음을 느끼게 된다.
즉, 백석 시의 시적 공간은
현실에서 유년 시절 시골의
농가나 토방으로, 그리고 할머니와
무당의 옛날 이야기에 실려 동화나
전설, 때로는 이승과 저승을 넘나드는
주술적 공간으로 다양하게 변화한다.
그런데 과거에 대한 동경이나 몽상
또는 신비 세계에 대한 집착은 현실에
강한 거부감을 느낄 때 일어나곤 하는 현상.
백석의 시 또한 이런
맥락에서 나온 것으로 생각되지만,
현실의 고통과 번민을 초월하려는
시인 나름의 진지한 모색이라는
점에서 생명력을 지닌다.
이처럼 절제된 감정으로
토속성과 개성 있는 모더니티를
추구한 백석은 1940년 만주에 있을 때
이역에서 사는 비겁함과 부끄러움
그리고
고독감이 너무도 절실해 감정을
더 감출 수 없는 지경에 이른다.
따라서
이 무렵에 씌어진 백석의 시에서
우리는 바로 얼마 전까지 토방에 앉아
신화를 꿈꾸던 아이 대신 갑작스레
늙어버린 시인과 마주치게 된다.
아득한 옛날에 나는 떠났다 /
부여를 숙신(肅愼)을 발해를
여진을 요(遙)를 금(金)을, /
흥안령(興安嶺)을 음산(陰山)을
아무우르를 숭가리를. /
범과 사슴과 너구리를 배반하고 /
송어와 메기와 개구리를
속이고 나는 떠났다.
/ ······ // 나는 그때 /
아무 이기지 못할 슬픔도 시름도 없이 /
다만 게을리 먼 앞대로 떠나 나왔다. /
그리하여 따사한 햇귀에서 하이얀 옷을 입고
매끄러운 밥을 먹고 단샘을 마시고 낮잠을 잤다 //
밤에는 먼 개소리에 놀라나고 /
아침에는 지나가는 사람마다에게 절을 하면서도 /
나는 나의 부끄러움을 알지 못했다. //
그동안 돌비는 깨어지고
많은 은금 보화는 땅에 묻히고
가마귀도 긴 족보를 이루었는데 /
이리하여 또 한 아득한 새 옛날이 비롯하는 때 /
이제는 참으로 이기지 못할 슬픔과 시름에 쫓겨 /
나는 나의 옛 한울로 땅으로―나의 태반(胎盤)으로 돌아왔으나
// 이미 해는 늙고
달은 파리하고 바람은 미치고
보래구름만 혼자 넋없이 떠도는데 //
아, 나의 조상은 형제는 일가 친척은
정다운 이웃은 그리운 것은 사랑하는 것은
우러르는 것은 나의 자랑은 나의 힘은 없다
바람과 물과 세월과 같이 지나가고 없다.
이처럼 ‘북방에서’ 나라를 버린 수치심과 고독에 떨던 시인은
모든 절망스럽고 슬픈 현실을 거부하기보다 차츰 하늘이 정한
숙명으로 받아들이고 껴안는 자기 긍정에 도달하게 된다.
.
하늘이 이 세상을 내일 적에 그가 가장 귀해 하고 사랑하는 것들은 모두 /
가난하고 외롭게 높고 쓸쓸하니 그리고 언제나 넘치는 사랑과 슬픔 속에 살도록 만드신 것이다 /
초생달과 바구지꽃과 짝새와 당나귀가 그러하듯이 /
그리고 또 ‘프랑시스 쨈’과 도연명과 ‘라이너 마리아 릴케’가 그러하듯이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
나타샤를 사랑은 하고
눈은 푹푹 날리고
나는 혼자 쓸쓸히 앉어 소주(燒酒)를 마신다
소주(燒酒)를 마시며 생각한다
나타샤와 나는
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 당나귀 타고
산골로가자 출출이 우는 깊은 산골로 가 마가리에 살자
눈은 푹푹 나리고
나는 나타샤를 생각하고
나타샤가 아니올 리 없다
언제 벌써 내 속에 고조곤히 와 이야기한다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
눈은 푹푹 나리고
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
어데서 흰 당나귀도 오늘밤이 좋아서 응앙응앙 울을 것이다
내가 생각하는 것은
밖음 봄철날 따디기의 누굿하니 푹석한 밤이다
거리에는 사람두 많이 나서 흥성흥성 할 것이다
어쩐지 이 사람들과 친하니 싸다니고 싶은 밤이다
그렇것만 나는 하이얀 자리 위에서 마른 팔뚝의
샛파란 핏대를 바라보며 나는 가난한 아버지를 가진 것과
내가 오래 그려오든 처녀가 시집을 간 것과
그렇게도 살틀하든 동무가 나를 버린 일을 생각한다
또 내가 아는 그 몸이 성하고 돈도 있는 사람들이
즐거이 술을 먹으려 다닐 것과
내 손에는 신간서 하나도 없는 것과
그리고 그 '아서라 세상사'라도 들을
유성기도 없는 것을 생각한다
그리고 이러한 생각이 내 눈가를 내 가슴사를
뜨겁게 하는 것도 생각한다
흰 바람벽이 있어
오늘 저녁
이 좁다란 방의
흰 바람벽에 어쩐지
쓸쓸한 것만이 오고 간다.
.
이 흰 바람벽에
희미한 십오촉 전등이
지치운 불빛은 내어던지고
때글은 다 낡은 무명샤쯔가
어두운 그림자를 쉬이고
그리고 또 달디단
따끈한 감주나 한잔
먹고 싶다고
생각하는 내 가지가지
외로운 생각이 헤매인다
.
그런데
이것은 또
어언 일인가
.
이 흰 바람벽에
내 가난한 늙은
어머니가 있다
.
내 가난한
늙은 어머니가
이렇게 시퍼러둥둥하니
추운 날인데 차디찬 물에 손은
담그고 무이며 배추를 씻고 있다
.
내 사랑하는
어여쁜 사람이
어늬 먼 앞대
조용한 개포가의
나즈막한 집에서
그의 지아비와
마조 앉어
대구국을
끓여 놓고
저녁을 먹는다
.
벌써 어린 것도 생겨서
옆에 끼고 저녁을 먹는다
.
그런데 또
이즈막하야
어늬 사이엔가
이 흰 바람벽엔
내 쓸쓸한 얼굴을 쳐다보며
이러한 글자들이 지나간다
.
- 나는 이 세상에서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살아가도록
태어났다
그리고
이 세상을 살어가는데
내 가슴은 너무도 많이
뜨거운 것으로 호젓한 것으로
사랑으로 슬픔으로 가득 찬다
그리고
이번에는
나를 위로하는듯이
나를 울력하는 듯이
눈질을 하며 주먹질을 하며
이런 글자들이 지나간다
- 하늘이 이 세상을 내일 적에
그가 가장 귀해하고 사랑하는 것들은
모두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한 그리고
언제나 넘치는 사랑과 슬픔 속에
살도록 만드신 것이다
초생달과
바구지꽃과 짝새와
당나귀가 그러하듯이
그리고 또
프랑시쓰 잼과 도연명과
라이넬 마리아 릴케가
그러하듯이
국수
눈이 많이 와서
산엣새가 벌로 나려 멕이고
눈구덩이에 토끼가 더러 빠지기도하면
마을에는 그 무슨 반가운 것이 오는가보다.
.
한가한 애동들은 어둡도록 꿩사냥을 하고
가난한 엄매는 밤중에 김치가재미로 가고
마을을 구수한 즐거움에서 사서 은근하니
흥성흥성 들뜨게 하며 이것은 오는 것이다.
.
이것은
어느 양지귀
혹은 능달 쪽
외따른 산 옆
은댕이 예데가리 밭에서
하로밤 뽀오얀 흰김 속에
접시귀 소기름불이 뿌우현 부엌에
산멍에 같은 분틀을 타고 오는 것이다
이것이 아득한 녯날
한가하고 즐겁든 세월로부터
실 같은 봄비 속을 타는 듯한
녀름 속을 지나서
들쿠레한 구시월 갈바람 속을 지나서
대대로 나며 죽으며 죽으며 나며 하는
이 마을 사람들의 의젓한 마음을 지나서
텁텁한 꿈을 지나서
지붕에 마당에 우물 둔덩에 함박눈이
푹푹 쌓이는 여늬 하로밤 아베 앞에
그 어린 아들 앞에 아베 앞에는
왕사발에 아들 앞에는
새기사발에 그득히
사리워오는 것이다.
이것은
그 곰의 잔등에 업혀서
길러났다는 먼 녜적 큰마니가
또 그 집등색이에 서서
재채기를 하면 산넘엣 마을까지
들렸다는 먼 옛적 큰아바지가
오는 것 같이 오는 것이다
아, 이 반가운 것은 무엇인가
이 히수무레하고 부드럽고
수수하고 슴슴한 것은 무엇인가
겨울밤 찡하니
닉은 동티미국을 좋아하고
얼얼한 댕추가루를 좋아하고
싱싱한 산꿩의 고기를 좋아하고
그리고
담배 내음새 탄수 태음새
또 수육을 삶은 육수국 내음새
자욱한 더북한 삿방 쩔쩔 끓는
아루구를 좋아하는 이것은 무엇인가
이 조용한 마을과
이 마을의 으젓한 사람들과
살틀하니 친한 것은 무엇인가
이 그지없이 고담하고
소박한 것은 무엇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