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각의 늪
너무 소중하게 간직하느라 허둥대다가 오히려 망가지는 때가 있다. 지하철 객석이나 버스 혹은 택시의 좌석에서 꼭 안고 있다가 긴장이 풀려 놓고 내리는 때가 있다. 아주 중요한 서류 봉투에 귀중품 보따리도 있다.
처음에는 철저하게 잔뜩 끌어안고 있어도 시간이 흐르면서 마음이 풀어지고 슬그머니 자리에 놓고 내릴 때는 아무런 생각 없다. 뒤늦게 아차! ‘내 보따리’ 정신이 번쩍 든다. 있을 수 없는 일이 종종 벌어지고 있다.
자꾸자꾸 잊어버린다. 정신이 혼란스럽고 깜빡거린다고 한다. 건망증이 생겼다고 한다. 너무 급하면 손에 들고도 찾는가 하면, 잠깐 여기에 두었다가 챙기면 되겠지 하다가 잊고 급하게 찾느라 부산을 떨며 당황한다.
그런가 하면 시간이 흘러 자연스럽게 잊었을 텐데. 상대방은 뚜렷이 가슴에 담고 있다. 정면으로 부딪쳐 들이대도 긴가민가하며 기억에 없고, 먼발치서 살짝 비쳤는데도 오랜 준비라도 한 양 훤하게 떠오르기도 한다.
잠시 기억의 저 밑으로 가라앉아 잠복하고 있다가 적당한 시기에 다시 수면 위로 서서히 떠 오른 것 같다. 소소한 일은 그럴 리 없어도 워낙 큰 상처라도 입었으면 그렇게 쉽사리 지워지지 않고 남아있을 수가 있다.
이처럼 잊는다고 아주 잊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 잊을 수 없는 일이 있을 수 있다. 그렇지만 갈 길이 바쁜데 언제까지 휘말려서 있을 수는 없다. 하루라도 빨리 마음 정리하고 다독이며 다시 새로운 출발을 해야 한다.
때로는 일부러 어깃장 부리는 것 같다. 무슨 억하심정인지 좀 더 오래 간직하거나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곧잘 잊어버리고 빨리 잊어 치유 받고 싶은 일은 좀처럼 떨어지지 않고 남아서 닦달하듯 괴롭힘을 주기도 한다.
우리 두뇌가 생각했거나 일어났던 일들을 하나도 잊지를 않고 고스란히 기억한다면 어떨까? 어쩌면 그것은 좋은 일도 있겠지만 그에 못지않게 불편하고 괴로운 점도 많아지고 오히려 삶은 더 힘들어지게 할 것이다.
때로는 적당한 때에 잊을 수 있는 것이 신상에 큰 도움이 되기도 한다. 한없이 잊지를 못해 혼자 가슴에 끌어안고 괴로움에 속을 달달 볶이며 안달하면서 병을 얻기도 한다. 툭툭 털면서 잊을 일은 잊는 것도 복이다.
잊어버리는 것이 아름다우며
잊어버릴 수 있어 행복하다니
그냥 확
확 그냥
잊어보려 머리 꽁꽁 싸매면
기다렸다는 듯 되살아 나는
왜 언제
언제 왜
깨끗이 지워지고 잊으려는지
아름답게 할 수 있으려는지
그냥 확
확 그냥
너무 어려워서 갸우뚱갸우뚱
새로운 고민을 안고 고민하네
- 그냥 확
괴로움이 너무 크고 상처가 너무 깊으면 차라리 잊자고 한다. 잊으라고 한다. 그러나 그게 어디 마음대로 되든가. 오히려 뻔뻔스럽다고 할 만큼 멀쩡하게 도사리고 있다가 보란 듯이 나타나지 않는가. 참, 야박스럽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잊어야 할 일은 잊지를 못하고 무슨 일이 있어도 잊지 말아야지 하는 것은 야속하리만치 더 쉽게 잊어버리는 것 같은 안타까움도 있다. 꼭 해야 할 일을 자꾸 잊는 현상이 생기면서 고민한다.
중요한 약속을 하고 잊는가 하면 아침에 오늘은 무슨 일을 해야지 해놓고 깜빡한다. 그래서 메모장을 이용하는 사람도 있다. 그런가 하면 잊혔던 지난날 상처가 돋아난 듯 뜬금없이 떠오르면서 곤혹스럽게 하기도 한다.
잊으려고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못 잊겠다고 하는데 그래도 잊어보라고 한다. 이처럼 죽어도 못 잊는다는 말처럼 몇 개쯤은 못 잊을 일을 지니고 있다고 하는데 그마저도 시간 앞에 오락가락하다 희미해져 잠잠해진다.
이별의 아픔, 배신의 아픔, 실연의 아픔, 실패의 아픔, 낙방의 아픔, 도난의 아픔 등등 상처를 못 잊어 마냥 붙잡고 있다면 어떨까. 그렇다고 너무 쉽게 아무렇지 않은 듯 망각하는 건 도리가 아닌 것 같아 머뭇거린다.
시간이 약이라고 한다. 시간 앞에 장사 없다고도 한다. 적당한 시기에 잊을 수 있다는 것이 때로는 행복에 큰 보탬이 될 수도 있다. 아쉬움이 남아도 잊는다는 것이 한 편 너무나 소중하면서 감사하게 여겨지기도 한다.
귀는 항상 열려 있다. 하지만 너무 소리가 크면 커서, 너무 작으면 작아서 못 듣는다고 한다. 그래도 느낌이라는 감각과 눈치라는 감이 있는데 답답한 핑계만 같다. 귀 막고 눈 막고 아예 보고 듣지도 않는 무관심 같다.
이해관계에 따라서 기억도 달라질 수밖에 없다. 그러나 열성적으로 활동할 시기에 그런 상식적인 과정을 무시하고 신체나 정신적으로 장애가 오게 되는 것이다. 산업재해이고 정신질환이고 노쇠화에 따른 기관 장애다.
나이가 들면서 기억은 점점 쇠퇴하여 자연스럽게 망각의 늪 속으로 빠져든다. 그래도 기억해둘 것과 잊을 것이 뒤바뀌면 곤혹스럽다. 그런데 바짝 서두르듯이 이것저것 가리지 않고 망각의 쓰나미에 휩쓸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