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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3년 다해 7월20일 연중 제15주간 토요일
[수원] ‘관심’과 ‘사랑’의 차이 -
수원 교구 오산 성당 전 삼용 요셉 신부
† 제1독서 : 탈출 12, 37 - 42
† 복음 : 마태 12, 14 - 21
★ 이스라엘 백성은 이집트에서 종살이하다가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많은 이국인과 함께 가축 떼 등을 챙겨 벗어날
수 있었다. 주님께서는 이들의 탈출을 위하여 몸소 밤을
새우신다(제1독서).
★ 바리사이들은 예수님을 없애 버리려 하고, 군중은 예수님을
따르며 받든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들의 위협에도,
군중의 추종에도 초연한 모습을 보이시며 예언서의 말씀을
실현하신다(복음).
◈ 오늘의 묵상
오늘 복음에서는 세 가지 눈길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첫 번째는 바리사이들의 눈길입니다. 이들은 예수님을 죽이려고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바로 살인의 눈길입니다. 그러한 눈길을
갖게 된 이유가 무엇입니까? 예수님의 행동이 자신들의 종교적인
기준에 맞지 않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는 예수님을 따르는 많은 군중의 눈길입니다. 부러진
갈대처럼, 연기 나는 심지처럼 아파하는 눈길이며, 그래서 치유를
바라는 절실한 눈길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면 병이 낫게 되리라는
믿음의 눈길입니다. 그러나 병만 나으면 그만이라는 자기중심적인
눈길이기도 합니다.
세 번째는 바로 예수님의 눈길입니다. 바리사이들의 온갖 위협에도
아랑곳하지 않으시는 용기와 신념의 눈길입니다. 또한 병든
사람들을 모두 고쳐 주시는 동정과 연민의 눈길입니다. 그러나
당신께서 다른 이들에게 영웅으로 대접받으시기를 바라지
않으시기 때문에 당신을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지 말라고
이르십니다. 곧 오로지 하느님의 뜻만을 생각하시는 눈길입니다.
그렇습니다. 바리사이들과 군중은 자신들의 종교적인 기준과
상황에만 매달리는 눈길이지만,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뜻만을
바라보시며 아픈 이들에 대한 동정과 사랑의 눈길을 지니고
계십니다. 우리는 어떤 눈길을 가지고 있습니까?
- 매일 미사 -
◈ [청주] 시기질투는 어디에나 /
반영억라파엘 감곡매괴 성모성당
2013년 다해 7월20일 연중 제15주간 토요일
<예수님께서는 예언을 이루시려고,
당신을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지 말라고 엄중히 이르셨다.>
+ 마태오 12,14-21
시기질투는 어디에나
세상을 살아가면서 좋은 일을 하는 사람은 하느님의 복을
받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복을 받기 때문에 좋은 일을
끊임없이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좋은 일을 한다고 해서
반드시 환영을 받는 것은 아닙니다. 시기와 질투의 대상이
되고 미움을 사기도 합니다. 아무리 어진 사람도 미워하는
무리가 있는 법입니다. 선한 일을 하는데도 선망의 대상이
되기보다는 견제의 대상이 된다는 것이 안타까운 현실입니다.
“봄비가 기름 같지만 행인은 그 진창길을 싫어하고 가을 달은
밝고 아름답지만 도둑은 그 밝게 비추는 것을 싫어합니다.”
자기에게 득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되면 싫어하고 시기질투하며
심지어 미워합니다. 봄비처럼 꼭 필요한 것일지라도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사람은 언제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고통 받는 사람들의 마음을 헤아리시고 병을
고쳐주시며 당신의 소명에 충실 하셨습니다. 그런데 바리사이들은
예수님을 어떻게 없앨까를 모의 하였습니다. 지금 있는 그대로를
봐 주면 좋으련마는 눈엣가시로 보았습니다. 그들은 기득권을
잃을까 두려워하는 사람, 사촌이 땅을 사면 배를 앓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반대에 대응하지
않으시고 한 발 물러서는 지혜와 인내를 보여주셨습니다.
막무가내로 대드는 사람에게는 한 숨 쉬게 하는 것이 좋습니다.
우리도 인내를 가지고 기다리며 모두를 품을 수 있는 넉넉함을
키웠으면 좋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많은 사람들의 다양한 생각들을 품으셨습니다.
다투거나 큰 소리를 내지 않으시고 자비로운 손길로 버림 받은
사람들을 일으켜 세우셨습니다. 상처 받은 사람들을 치유 시켜
주시고 낙담한 사람들에게 용기를 주시며 구원해 주셨습니다.
병을 고쳐주면서도 스스로를 내세우지 않으시고 오히려 그
공을 감추시고 결코 기적을 위한 기적을 행하시는 것이 아님을
확인해 주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언제나 철저히 아버지 하느님의
뜻 안에서 구원사업을 이루셨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무슨 좋은 일을 해 놓고는 생색을 내다가 그
공을 다 잃고 맙니다. 선한 지향을 갖다가도 이내 시기와
질투심에 그 좋은 뜻을 놓치기도 합니다. 주님께서 “너희는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의로운 일을 하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그러지 않으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에게서
상을 받지 못한다.”(마태6,1) 고 하셨건만 그 말씀을 잊고
살아갈 때가 많습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숨은 일도 보시는
아버지께서 갚아주실 것을 믿고, 하늘을 바라보고 살아갈
수 있는 은총이 함께하기를 서로 기도해 주시길 희망합니다.
사랑합니다.
*** *** ***
“남이 어떤 이를 하는데 시간이 걸리면 게을러서이고, 내가
시간이 걸리면 철두철미하기 때문이다. 남이 일을 하지 않으면
게을러서이고, 나는 바뻐서이다. 누가 하라하지 않는데 하면
월권이고, 나는 진취의 기상이 있어서이다. 남이 강력한 주장을
하면 그 사람은 고집스러운 것이고, 나의 경우는 단호한
의견발표이다.”
- 청주 교구 감곡 매괴 성모 성당 반 영억 라파엘 신부 -
◈ [인천]
2013년 다해 7월20일 연중 제15주간 토요일
제가 처음에 ‘빠다킹’이라는 별명을 중학교 학생들에게 들었을
때 기분이 별로 좋지 않았습니다. 솔직히 여러분도 그렇지
않습니까? 누가 여러분에게 “왜 이렇게 목소리가 느끼해요?”
라고 말하면 기분이 좋겠습니까? 저 역시 그랬습니다. 목소리가
느끼하다고 ‘빠다킹’이라고 별명을 지어주니 좋게 받아들일
리가 없겠지요. 그래서 학생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얘들아! 신부님이 목소리가 조금 느끼할지는 몰라도 잘
생겼잖아. 뭐 ‘장동건 같다’ 식의 별명은 없니?”
그랬더니 어이없는 표정을 지으면서 그냥 ‘빠다킹’ 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 별명이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는 것이지요.
그러나 솔직히 저의 외모에 대해서 불만이 전혀 없습니다.
이 정도면 제게 과분하다는 생각과 함께 이렇게 만들어주신
부모님께 너무나 감사하고 있지요. 그런데 외모에 자신이
없는 사람들이 꽤 많은 것 같습니다. 심지어는 조각 미남이라는
소리를 듣고 있는 배우들도 스스로를 부정적으로 생각합니다.
미남배우의 선두주자 장동건 씨는 인터뷰 중에 “내가 잘
생겼다고 생각하지 않아요.”라고 말했고, 원빈 씨 역시 스스로의
얼굴을 가리키면서 “그다지 마음에 드는 얼굴이 아니다.”라고
말했습니다. 많은 여성 팬을 가지고 있는 강동원 씨는 “내
얼굴 너무 못생겼어.”라는 막말까지 하지요. 현빈 역시 인터뷰
중에 “연기를 하면서 하루에도 수백 번 씩 거울을 통해 내
얼굴을 보지만, 잘 생겼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다.”는 말을
했답니다.
저는 제 얼굴이 이 정도면 아주 만족하고 있는데, 제가 봐도
너무나도 멋지고 잘 생긴 사람들이 오히려 스스로 만족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자기 스스로 만족하는 삶이 아닐까요? 자신감을
갖고 살아가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의 차이가 매우 크다는
것을 우리는 겉모습만 봐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어떤
사람이 더 보기에도 좋을까요? 당연히 자신감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이렇게 자신감을 가지고 이 세상을 살아가기를 원하시는
주님이십니다. 당신이 창조하신 그 모습에 만족하지 못하면서
불평불만을 갖는 것이 아니라, 지금으로도 충분히 감사하면서
전지전능하신 주님께서 나를 지으셨으니 귀한 나라는 자신감을
갖는다면 우리들은 더 큰 기쁨 속에서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오늘 복음에도 나오듯이, 모든 민족들이 희망을
거는 이름입니다. 우리를 더욱 더 큰 기쁨과 행복 속에서
자신감을 가지고 살아가도록 만들어주는 이름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왜 주님을 바라보지 않고 부정적인 생각과 세상의
기준만을 내세우면서 힘들게 사십니까?
주님과 함께 라면 어떠한 상황에서도 기쁨 속에 살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질 수 있어야 합니다. 그때 주님의 이름이 바로
우리에게 커다란 희망의 이름이 될 것입니다.
현명함은 경험에 비례하는 것이 아니라 경험을 받아들이는
능력에 비례한다(버나드 쇼).
CBCK 성당입니다.
미인이란?
2,000년 전에 만들어진 부조가 발굴되었는데, 이 부조에는
당시의 미인 얼굴이 새겨 있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묘사된
얼굴은 현재의 미인과 너무 다른 것입니다.
이중 턱이고, 목에 살이 많은 것을 볼 때 분명히 체중이
엄청나게 나갈 것이라고 예상할 수 있습니다. 또 남자인지
여자인지 분간이 가지 않을 정도의 모습입니다. 이 모습이
어떻게 미인일까 싶지만, 2,000년 당시에는 가장 아름다운
여인의 모습이라고 하네요.
당시에는 통통한 얼굴과 몸매가 다산성과 모성을 상징했다고
하지요. 그래서 오히려 과체중인 여인이 아름다운 여인의
평을 받았던 것입니다.
이렇게 미인의 기준은 시대에 따라 바뀝니다. 지금 현재는
마르고 호리호리한 사람이 멋있고 아름답다는 평을 받고
있지만, 조금의 시간이 흐른 뒤에는 과거 뚱뚱한 사람들이
인정받던 시대처럼 될 수도 있다는 것이지요.
변하는 이러한 흐름에 우리가 굳이 따라갈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의 겉모습은 지금의 모습이면 충분하다는 자신감을
가지십시오. 그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해야 할 것은 우리의
내면입니다. 세상의 기준이 아닌 하느님 나라의 기준을 따르는
우리들의 마음이 될 때, 가장 올바르고 기쁠 수 있는 선택을
하게 될 것입니다.
- 인천 교구 성소 국장 조명연 마테오 신부 -
◈ [기타] 연중 제15주간 토요일
2013년 다해 7월20일
어제부터 여름캠프를 위한 ‘보조교사 연수’를 시작했습니다.
앞으로 4번에 걸쳐서 1000여명의 어린이들이 수련장을 찾을
것입니다. 이 어린이들과 함께 할 교사가 필요했습니다.
수련장의 연구원이 백방으로 노력해서 보조교사들을
모셨습니다. 함께하는 생활성가 팀에서 도움을 주러
오셨습니다. 서울대교구 대학생 연합회에서 도움을 주러
오셨습니다. 평소에 잘 알고 지내던 분들이 도움을 주러
오셨습니다. 이곳에 오신 이유와 목적은 다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오늘부터 어린이들과 함께 하는 시간 동안은 한
가지만 생각했으면 좋겠습니다. 한 가지만 실천했으면
좋겠습니다. 아이들을 사랑해 주시고, 아이들의 눈높이에서
행동했으면 좋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 것은 우리들을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아픈 사람들은 치유해 주시고, 굶주린 사람들은 배불리 먹이시고,
외로운 이들에게는 친구가 되어주시고, 죄인들의 죄를 사해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의 눈높이에 맞추어서
말씀하셨습니다. 벗을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사랑이 진정한
사랑이라고 하셨습니다. 새로운 계명은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아픈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하듯이
주님께서는 그렇게 아픈 사람을 위해서 오셨다고 하셨습니다.
앞으로 어린이들과 함께 하는 시간들이 결코 쉽지는 않을
것입니다. 아이들은 들에 핀 꽃처럼 아름답게만 피어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아이들은 끊임없이 움직일 것입니다. 생각하고
행동하기보다는 먼저 행동하고 생각할 것입니다. 부모님들이
아이들을 최고의 공주님과 왕자님으로 키우셨기 때문에 때로
아이들이 친구들을 배려하기 보다는 대접을 받기를 더 바랄
것입니다. 저도 함께 하겠습니다. 사랑하는 마음으로 아이들의
친구가 되어주시기 바랍니다.
하느님께서는 이집트에서 고생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친구가
되어 주셨습니다. 친구인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해서 밤을
새우셨습니다. 우리들도 아이들 때문에 잠을 거의 못 잘
것입니다. 우리의 몸도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야 할 정도로
지치고 힘들 것입니다. 그러기에 선생님들께서는 먼저 본인의
몸을 잘 챙기셔야 합니다. 피곤해도, 입맛이 없어도 꼭 식사를
챙겨 드시기 바랍니다.
웃으면 웃을 일이 생깁니다. 감사를 드리면 감사할 일들이
생깁니다. 화를 내면 화낼 일들이 따라옵니다. 원망하면
원망할 일들이 쫓아옵니다. 함께 있는 시간들 속에 늘
감사드리며, 환하게 웃으며 아이들에게 사랑을 주시기
바랍니다.
‘파스카’라는 건너간다는 뜻입니다. 절망, 고통, 좌절,
슬픔에서 기쁨, 희망, 행복, 위로로 건너간다는 뜻입니다.
이와 같은 ‘파스카’는 우리의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니고,
하느님의 크신 자비와 사랑이 있을 때 가능한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파스카의 신비를 세상에 드러내는 표징이 되어야
합니다. 오늘 성서말씀은 우리가 바라보아야 할 곳을 말해
줍니다. 우리가 함께 해야 할 사람들이 누구인가를 말해
줍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느 편에 계셨습니까? 낮아지지
않는 영광은 없습니다. 십자가 없는 부활도 없습니다.
-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 [수원]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관심’과 ‘사랑’의 차이
2013년 다해 7월20일 연중 제15주간 토요일
< 예수님께서는 예언을 이루시려고, 당신을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지 말라고 엄중히 이르셨다. >
복음 : 마태오 12,14-21
< ‘관심’과 ‘사랑’의 차이 >
한 남자 청년이 고민이 있다며 저를 찾아왔습니다. 지금
사귀고 있는 여자 친구와 헤어질 처지에 놓였다는 것입니다.
자신은 지금 대기업에 취직하였지만 하고 싶은 일이 있어서
자격증 공부를 하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직장도 다니랴
시험공부도 동시에 하다보니까 자연적으로 만나는 시간이
줄어들어 조금씩 소원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것도
포기할 수 없고, 저것도 포기할 수 없어서 고민이라는 것입니다.
김창옥 교수의 강의에서 들은 것인데, ‘좋아하는 것’과 ‘관심
있는 것’의 차이를 이렇게 정의했습니다. 좋아한다는 것은
그것을 얻기 위해 내가 ‘지불(pay)’할 수 있는 것이고,
무언가를 지불하기를 원치 않는다면 그냥 ‘관심만 있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정말 좋아한다면 그것 때문에
포기해야 하는 것은 가차 없이 포기할 수 있어야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그냥 관심만 있는 것입니다.
루치아노 파바로티는 교육학을 전공하였습니다. 그러나
졸업 때 성악을 해 볼까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 아버지는
의자 두 개를 서로 떨어뜨려 놓은 다음 말하였습니다.
“사람은 두 의자에 동시에 앉을 수 없다. 한 의자에만 앉을
수 있고 한 의자에 앉으면 다른 의자는 비워놓아야 한다.
두 의자를 놓고 갈등하지 말고, 네가 다른 의자를 버려도
될 만큼 가치 있는 것을 선택하려무나.”
파바로티는 교육을 내려놓고 성악을 잡았습니다. 교육을
버렸으니 이젠 성악을 사랑하게 된 것입니다.
저도 그 청년에게 ‘너는 꿈이 더 소중하냐, 아니면 여자가 더
소중하느냐’고 물었습니다. 둘 다 포기할 수 없다면, 어쩌면
그 어떤 것도 ‘사랑’하지 않는 것일 수 있습니다. 두 마리
토끼를 잡으려다 다 놓치는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도 당신에게
오는 사람에게도 이런 어정쩡한 모습의 사람을 별로 좋아하시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인기가 날로 높아지자 바리사이들은 그 두려움과
질투의 대상을 없앨 궁리를 합니다. 예수님은 이것을 알아
차리시고 한적한 곳으로 숨어드셨습니다. 그래도 사람들이
어떻게 알았는지 예수님을 찾아왔고, 예수님은 당신이 있는
곳을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지 말라고 엄중히 이르셨습니다.
알리지 않았는데 어떻게 찾아올 수 있었겠습니까? 알지 못해서
찾아오지 못한 사람도 분명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래도
찾아오는 사람도 있습니다. 예수님이 기다리는 사람은 당신을
찾아오기 위해 다른 것을 포기할 줄 아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은 당신께 ‘관심’있는 미지근한 사람들을 싫어하십니다.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 후에 당신을 쫓아온 사람들에게
성체성사의 신비를 설명해 주십니다. 결국 그 사람들은 말씀이
어렵다고 다 예수님을 버리고 자기 집으로 돌아갑니다. 그저
예수님께 관심만 가졌던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이해가 안 돼도
믿을 마음이 있는 사도들만이 그분과 함께 남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당신께 관심만 있는 사람이 아니라 당신을 뜨겁게
사랑하는 사람을 기다리십니다.
모바일에서 작성된 글인데 소개하겠습니다.
경남 함양에 성수스님이 계셨습니다. 그 분은 토굴을 지어서
도를 닦고 계셨습니다. 그런데 수행자와 지인들이 너무 자주
찾아 와서, 그 분은 더 깊은 산속으로 들어가 혼자 조용히
공부하기로 결심했습니다.
제일 높은 산골짜기에 칩거해 좌선을 하니 너무나 좋았습니다.
그런데 며칠 후 어떤 여자가 나물을 캐러 왔다가 스님에게
물었습니다.
“이 깊은 산중에 왜 혼자 와서 사십니까?”
스님이 답했습니다.
“조용한 곳에서 공부 좀 실컷 하려고 왔습니다.”
그러자 여자가 되물었습니다.
“물소리는 안 시끄럽습니까?”
스님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습니다.
그 여자가 가고 나서도 한참을 멍하니 앉아 있었습니다.
‘물소리, 새소리는 안 시끄러운가? 이 세상 어딘들 시끄럽지
않는 곳이 있겠는가?’
산꼭대기에 숨는다고 시끄러움을 벗을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아무리 시끄러운 곳이더라도 내가 정하면 고요한 것이고,
아무리 조용한 곳이더라도 마음이 번잡하면 시끄러운 것입니다.
모든 것이 마음에 달려있는 것입니다.
스님은 다시 하산하여 누가 뭐라 하건 자신의 일에 정진하여
큰 스님이 되셨다고 합니다. 그리고 한 여인의 ‘물소리, 새소리는
안 시끄럽습니까?’라는 말은 평생의 스승이 되었다 고 합니다.
이런 저런 핑계를 대며 더 좋은 조건이 만들어지면 더 잘할
수 있다고 믿지만 환경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우리 의지가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기도할 시간이 없다거나, 일 때문에
바빠서 미사에 빠졌다거나, 같은 신자나 성직자 수도자에게
상처 받아서 성당에 못 나오겠다고 하지는 않습니까? 시골에
들어가서도 당신을 알리지 말라고 하신 그리스도의 의도를
잘 묵상해보도록 합시다. 결국 그분은 당신께 흔한 관심만
두는 사람이 아니라 모든 것을 포기할 수 있는 사랑을 지닌
사람을 기다리시는 것입니다.
- 수원 교구 오산 성당 전 삼용 요셉 신부 -
◈ [기타] 희망이 복음입니다.
소나무 신부와 함께 하는 마음의 산책
'변하지 않는 희망 그것이 진짜 희망입니다.
그 희망이 복음입니다.'
2013년 다해 7월20일 연중 제15주간 토요일 복음묵상
“보아라, 내가 선택한 나의 종, 내가 사랑하는 이, 내 마음에
드는 이다. 내가 그에게 내 영을 주리니, 그는 민족들에게
올바름을 선포하리라. 그는 다투지도 않고 소리치지도
않으리니, 거리에서 아무도 그의 소리를 듣지 못하리라.
그는 올바름을 승리로 이끌 때까지, 부러진 갈대를 꺾지
않고, 연기 나는 심지를 끄지 않으리니, 민족들이 그의
이름에 희망을 걸리라.” (마태오12,1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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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구절은 마태오 복음사가가 이사야 42장 1절부터 4절까지의
내용을 나름대로 단어를 바꾸어가면서 인용한 구절이다.
이사야가 예언하고 있는 ‘주님의 종’이 예수님이라는 것을
밝히려 함이었다.
이사야 예언자가 예언하며 희망했던 주님의 종, 즉 구세주의
이미지를 다시 한 번 생각해본다.
하느님께서 사랑하시고 영을 내려주신 분.
올바름을 선포하는 분.
부러진 갈대를 꺾지 않고, 연기 나는 심지를 끄지 않는 분.
민족들이 희망을 거는 분.
이사야 예언자는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시기 약 800년 전의
인물이었다. 그러기에 예언을 받고도 그의 표현에는 한계가
있었으리라. 하지만, 그가 표현한 주님의 종의 모습은 예수님의
삶과 너무 일치했다. 옳음, 즉 성부의 뜻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친 분이었고, 삶이 가져다 주는 어려움과 죄로 인해 지친
이들에 희망을 주시며 끝까지 일어서기를 기다려주셨고,
비참한 죽음의 길을 걸으신 후에도, 그분의 말씀은 시대를
넘어 세상 방방곡곡에 울려 퍼지고 있다.
부러진 갈대, 연기 나는 심지가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가?
갖가지 실망과 절망을 체험하고 있는 우리의 뭉그러진 마음이
아닐까? 상처투성이로 세상의 허망함에 냉소적이 되고만
우리의 찢긴 마음이 아닐까? 알면서도 저지르고 마는 죄로
괴로워하며 어쩔 줄 모르고 있는 우리의 답답한 마음이 아닐까?
늘 사랑을 원하지만 사랑이 무엇인지조차 몰라 쩔쩔매고 있는
우리의 안타까운 마음이 아닐까?
무엇이 옳은 길임을 알면서도 자신 있게 따르지 못하는 우리의
비겁한 마음이 아닐까?
이러한 우리를 위해서 그분께서 오셨다.
우리의 모든 실존적 아픔을 넘어서는 희망으로 오신 것이다.
그렇다. 그분은 우리의 희망이어야 한다.
다른 이유가 허락되어서는 안 된다.
희망을 잃은 이들이 비로소 참 된 희망을 만날 수 있는
이유로써 오신 분이다.
이사야 예언자를 통해서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오너라, 우리 시비를 가려보자.
너희 죄가 진홍빛 같아도 눈같이 희어지고,
다홍같이 붉어도 양털같이 되리라.” (이사야1,18-19)
우리가 그분을 따라야 하는 이유는 그분은 가장 완벽한
희망이기 때문이다.
- 사이타마 교구 오타(太田)본당 주임
김 대열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신부 -
https://www.facebook.com/WithfatherPinetree
소나무 신부와 함께 하는 마음의 산책
◈ [수도회] 존재 자체로 선물이요 희망
2013년 다해 7월20일 연중 제15주간 토요일
마태12.14-21
“그는 올바름을 승리로 이끌 때까지 부러진 갈대를 꺾지 않고
연기 나는 심지를 끄지 않으리니 민족들이 그의 이름에 희망을
걸리라.”
<존재 자체로 선물이요 희망>
요즘 세상 돌아가는 것을 보면 자주 우울해집니다. 다른 무엇에
앞서 미래에 대한 희망으로 가득 차 있어야 할 젊은이들의
어깨가 무겁습니다. 축 쳐져 있습니다. 뭐라고 위로의 말을
건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어디 젊은이들만 그런가요? 연세
드신 분들도 상황은 마찬가지입니다. 너무 비관적이고 염세적인
사고인지 모르지만 우리의 이 시대 절망과 좌절과 환멸의
시대입니다.
그렇다고 마냥 주저앉아 있어서야 되겠습니까? 이럴 때일수록,
특히 희망의 종교를 살아가는 우리 그리스도교 신자들일수록
희망의 전도사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절망이 깊어갈수록 더
추구해야 할 것은 다름 아닌 희망입니다.
그런데 그 희망은 어디서 찾아야 할까요? 비행기 타고
10시간은 족히 걸리는 희망의 땅 미국일까요? 지구 반대편인
남아프리카공화국 케이프타운에 위치한 희망봉에서일까요?
그리고 그 희망은 언제 찾아야 할까요? 세월이 흐르고 흐른
먼 훗날 백년 뒤, 천년 뒤에? 우리의 젊음이 완전히 사라지고
호호백발이 다 되어 죽음을 앞두고서?
절대 아니겠지요. 희망은 멀리서, 어느 다른 하늘 아래서
찾을 일이 절대 아닙니다. 가까운 곳에서, 내가 몸담고
살아가는 내 가족들 안에서, 내 직장 안에서, 내가 소속된
공동체 안에서 찾을 일입니다. 그 희망은 먼 훗날이 아니라
바로 지금 이 순간, 내 눈 앞에서 추구해야 할 것입니다.
사람들 만나다보면 참으로 다양한 유형의 사람들을 만납니다.
어떤 사람은 그야말로 고통덩어리입니다. 스트레스의 근원이
되는 사람이 있습니다. ‘타인이 지옥’이라는 사르트르의 말을
실감케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놀라지 마십시오. 우리 모두가 존경하는 아베 피에르
신부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타인 없는 나야말로
지옥입니다.”
보기만 해도 가슴 설레게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만날 때 마다
힘차게 살아갈 강력한 에너지를 공급해주는 사람, 비록 이
시대가 아무리 암울하다할지라도 아직까지 이 세상은
살아볼만한 세상임을 알려주는 사람, 존재 자체로 선물인
사람이 있습니다.
결국 미우나 고우나 사람이 희망입니다. 비록 가까이 몸 붙여
살아가다 보니 갖은 상처를 주고받지만, 매일 티격태격 매순간
좌충우돌하는 피붙이들이지만 어쩔 수 없이 그들에게서 희망을
찾아야 합니다. 그들 안에서 구원의 길을 찾아야 합니다. 그들과
함께 구원의 길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하느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바라시는 간절한 바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하든 가난하고 고통 받는 인간들의 마지막
희망, 최후의 보루로 남고자 노력하셨습니다. 당신 친히 가장
밑바닥으로 내려오셔서 그들의 고통과 절망, 시름과 한숨을
몸소 경험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가장 밑바닥에서 아무런
희망도 없이 죽음만 기다리며 살아가는 사람들의 희망이
되셨습니다. 그래서 세상 모든 민족들이 ‘그의 이름에 희망을
걸리라’는 예언을 당신 생애 전체를 통해서 실현시키셨습니다.
오늘 희망 자체이신 하느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또 다시 선물로
베푸시는 희망의 이 하루, 어떻게 하면 우리가 가난하고 고통
받는 이웃들의 희망이 될 수 있는지, 어떻게 하면 우리 존재
자체로 그들의 입가에 환한 미소를 짓게 할 선물이 되게 할 수
있는지 고민하고 투신하는 하루가 되면 좋겠습니다.
- 살레시오회 한국 관구 부 관구장 양승국 스테파노신부 -
◈ [광주] 측은지심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회당에서 한쪽 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고쳐주시자 바리사이들은 예수님이 안식일에 일을 했다고 하여
시비를 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에 선행을 해도 된다는
설명을 하시며 안식일에 대한 그릇된 인식을 바로잡아 주신다.
이와 같은 내용 다음에 오늘 복음이 위치하고 있다. 바리사이들은
예수님이 안식일에 사람들을 고쳐주시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기고
예수님을 없앨 모의를 한다. 그래서 그들을 피해 다른 곳으로
가셨지만 많은 병자들이 예수님을 따라오자 예수님은 그들을
모두 고쳐주셨다. “부러진 갈대를 꺾지 않고, 연기 나는 심지를
끄지 않으리니”라고 말한 이사야 예언처럼, 사람들을 섬기러
오신 예수님은 버림받은 이들을 안아주시고, 죄인들을 용서해
주시고 사랑으로 감싸주셨으며 치유가 필요한 이들을 모두
고쳐주셨다.
바리사이들에게 반대를 받으면서도 그리고 심지어 바리사이들
에게서 살해 위협을 받으면서도 이를 무릅쓰고 사람들을 모두
고쳐주시는 예수님 모습을 통해 측은지심을 생각해 본다.
인간에게는 누구나 자기 보존성의 욕구가 있다. 이 욕구에 비추어
볼 때 인간은 누구나 이기적이다. 배고프면 내가 먼저 허기진
배를 채우고 싶어하고, 추우면 내가 먼저 몸을 따뜻이 하고 싶은
것이 인간의 자연스런 모습이다. 하지만 인간에게는 자기
보존성의 욕구 외에도 타인의 고통이나 어려움을 받아들일 수
있는 측은지심이 있다. 측은지심이 있기에 인간은 자기 보존성의
욕구를 지녔음에도 동물들과는 달리 자신의 자연적 욕구를
넘어설 수 있는 위대함을 지닌다. 타인에 대한 측은지심의
발휘는 인간으로 하여금 동물성에서 벗어나게 해준다. 자기
보존성의 욕구에 눈이 가려 자기만의 만족에 함닉된 삶을 살
것인가? 아니면 자신 안에 있는 측은지심을 무한히 발휘하여
예수님께서 초대하시는 자비와 사랑의 삶을 살아갈 것인가?
- 김권일 신부(광주대교구 월곡동천주교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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